삼합이라고 하면 으레 홍어 삼합을 지칭한다. 삭힌 홍어와 삶은 돼지고기, 묵은김치의 합체다. 그러나 같은 전라도라도 장흥에서 삼합은 완전히 다른 의미로 해석된다. 소고기와 표고버섯, 키조개구이를 쌈에 싸서 먹기 때문이다. 이들 3가지 재료는 모두 장흥 특산물이다.
그런 까닭일까. 장흥을 여행하다 보면 축사를 쉽게 발견한다. 하지만 묘하게도 고 이청준 선생이 먼저 떠올랐다. 그의 고향인 회진면 진목마을에도 축사가 많은데, 그는 사후 자신의 무덤 때문에 축사를 가진 이웃이 해를 입지 않을까 걱정했다고 한다. 그런 우려가 무덤 앞 문학자리 안내판에 오롯이 씌어 있다. "사람들이 먹고살라고 애 쓰는디, 나 때문에 폐가 될까 두렵네."
생가서 대덕시외버스정류장까지
소설 '눈길' 속 풍경 고스란히…
소등섬 아름다운 풍광에 넋 잃고
시시각각 변하는 갯벌에 반하고
소설가 한승원의 창작실 '해산토굴'
조정래의 태백산맥 문학관도 볼거리
그는 암 투병 끝에 숨졌고, 그의 유지를 받든 사람들은 묘 주변의 축사를 그대로 두었다. 이 때문에 여름이라면 문학자리 주변은 온통 쇠똥 냄새가 진동하지만 아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때마다 이청준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다. 한 지인은 그런 이청준을 두고 '결곡한' 사람이라 했다. 마음씨가 그냥 깨끗한 것이 아니고 여물어 빈틈이 없다는 뜻이다.
|
이청준 생가. |
그 결곡한 사람을 떠올리며 진목마을로 들어섰다. 마을은 조용했다. 이청준 생가는 마을회관 바로 뒤에 숨어 있었다. 골목을 조금 돌아 들어가니 금방이라도 누가 살았던 것처럼 묘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생가는 '이청준 소설 길'의 들머리다. 그가 고교 2학년 겨울방학 때 빚쟁이 손에 넘어갔는데, 그것은 이후 그의 대표 단편소설인 '눈길'의 중심 소재가 됐다. 그 집에서 질깔끄막을 지나 대덕시외버스정류장까지 이어지는 길이 소설의 주요 무대다. 이른 새벽 마을을 등진 채 눈길을 밟으며 아들을 배웅한 어머니의 길이기도 하다. 그 길을 사람들은 걷고 또 걸으며 이청준과 '눈길'의 서정을 거듭 떠올렸다.
|
사촌리 갯벌. |
생가에서 무덤이 있는 문학자리, 그리고 임권택 감독의 영화 '천년학' 원작인 소설 '선학동 나그네'의 배경 등은 이제 이청준의 궤적을 발밤발밤 밟아보는 소설 길로 조성돼 있다. 운이 좋다면 선학동에서 커다란 날개를 휘휘 저으며 하늘로 날아가는 흑두루미 무리를 볼 수 있다. 선학동이 그냥 선학동이 아닌 것이다.
문학평론가 우찬제는 이청준을 두고 "하늘과 땅이 아득하여 앞이 보이지 않을 때 제일 먼저 보고 싶은 것의 하나가 이청준 씨 소설"이라고 했다. 그는 '서편제', '당신들의 천국', '벌레 이야기'(이창동 감독 영화 '밀양'의 원작) 등 주옥같은 소설을 남기고 2008년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소등섬과 갯벌 소등섬(용산면 상발리)을 찾은 것은 순전히 이름이 특이해서였다. 하지만 작은 등, 즉 호롱불을 뜻하는 소등(小燈)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고기잡이를 나간 남편과 아들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등대처럼 소등섬에 호롱불을 달아둔 것이 유래라고 했다.
그럼에도 소등섬은 흥미로웠다.육지와 이어진 콘크리트 길을 100여m 걸어 섬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는데, 아뿔사 그 짧은 순간에 길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었다. 밀물이 길을 덮었던 것이다. 다행히 깊지 않아 신발과 양말을 벗은 채 맨발로 부랴부랴 섬을 빠져나왔다. 육지와의 인연을 한순간에 끊어버리는 섬의 결단력이 놀라웠다.
소등섬은 이청준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축제'가 촬영된 곳이기도 하다. 그만큼 풍광이 아름답고, 지금도 마을 입구에는 영화 촬영지임을 알리는 팻말이 크게 걸려 있다. 섬에서 나와 마을 왼쪽 끝으로 가면 한반도 남쪽 끝을 가리키는 정남진 표석도 찾을 수 있다. 표석은 1999년 세워졌다. 소등섬은 일출로도 유명하다. 해가 섬 뒤로 떠오른다.
|
한승원 작가의 작업실 '해산토굴'. |
남도 여행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갯벌이다. 장흥도 다르지 않다. 검고 넓은 갯벌은 생명력 그 자체이며, 수많은 문학작품이 잉태된 어머니의 자궁 같은 곳이기도 하다. 해가 질 무렵 갯벌은 조금씩 바닷물을 흡입하고 있었다. 그 물이 길을 만들고, 햇빛을 받아 윤슬처럼 이곳저곳에서 반짝거렸다. 때로는 금빛으로, 때로는 은빛 비늘로. 물길은 점점 굵어졌고, 마침내 그 검은 대륙이 푸른 바닷물에 완전히 뒤덮였다. 그 광경을 하염없이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장흥 여행은 가치가 있다. 물 위로 길고 날카로운 장대가 삐죽삐죽 솟아오르는 모양을 보면서 해안선을 따라 북쪽으로 더 올라갔다.
■천관문학관과 해산토굴 이청준이 대표 문인이지만, 장흥에는 그 외에도 전국구 문학인이 많다. 시쳇말로, 출세하려면 서울로, 글을 짓고 싶다면 장흥으로 가라는 말이 나돌 정도다. 천관산 기슭에 자리 잡은 천관문학관에서 장흥 글쟁이를 모두 확인할 수 있는데, 두 손으로 꼽기도 힘들다.
한승원은 그중 한 사람이다. 이청준과 동갑내기인 그는 소설 '아제아제바라아제'의 작가로, 지금 수문해수욕장과 그 너머의 수평선까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안양면의 한 언덕에 창작실 '해산토굴'을 지어 살고 있다. 그를 찾아가는 길이 '한승원 문학산책길'이다. 안양면 장재도 앞 해안선을 따라 해산토굴까지 이어진 산책로이기도 하다. 길 따라 종려가 줄지어 서 있고, 해안로에는 시비도 여럿 있다. 수문해수욕장 입구에서는 장흥 특산물인, 거대한 키조개 조형물도 볼 수 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혹시 그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저녁 식사 시간에 도착하는 바람에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웃에게 물어보니 자택이 가까이 있어 아마 그곳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여유가 있다면 이웃한 벌교에서 조정래의 태백산맥 문학관도 들러볼 일이다. 바야흐로 가을이 깃들고 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책 한두 권쯤 배낭에 넣어야 하지 않을까?
글·사진=백현충 선임기자 choong@busan.com
여행 팁
■먹거리
장흥읍 탐진강 유역의 토요시장에 30곳가량의 삼합(사진) 전문점이 포진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부산의 초장집처럼 소고기는 식육점에서, 나머지 재료는 인근 식당에서 구입한다. 한우 갈빗살(1+등급) 374g에 3만 1천 원. 이때 상차림 요금은 대인 기준으로 1인당 5천 원이고, 표고버섯(5천 원)과 키조개(1만 원) 값도 따로 계산해야 한다. 그럼에도 질과 양에 비해 값이 싸다. 후식으로 누룽지나 매생이 떡국, 가마솥밥을 각 2천∼5천 원에 먹을 수 있으나 삼합만으로도 배가 불러 주문하지 못했다.
■교통편 서부산나들목을 기점으로 이청준 생가(전남 장흥군 회진면 진목리)까지 승용차로 4시간 걸린다. 남해고속도로(장흥나들목)와 23번 국도를 이어가면 된다. 내비게이션은 '이청준 생가' 혹은 '진목마을회관(장흥)'을 친다.
대중교통은 부산∼장흥읍∼진목마을 순으로 이어가면 된다. 부산서부버스터미널(1577-8301)과 장흥시외버스터미널(061-863-9036)을 운행하는 시외버스는 오전 6시 30분 첫차로, 시간대별로 배차된다. 찻삯 2만 1천300원, 4시간 걸린다.
장흥읍에 도착하면 이청준 생가가 있는 진목마을까지 하루 6차례(06:00, 06:50, 09:30, 11:20, 13:50, 15:20) 운행하는 농어촌버스를 탄다. 출발 시각에 따라 걸리는 시간이 조금씩 다른데, 오전의 경우 1시간 남짓으로 보면 된다. 나오는 차는 낮 12시 55분, 오후 3시 15분과 5시 10분에 있다. 찻삯 4천900원. 장흥교통 061-863-0636. 장흥군청 교통행정담당 061-860-0365.
■숙박 숙박시설은 장흥읍에 집중돼 있다. 하지만 대부분이 무인텔이라 가족의 경우 불편할 수 있다. 그중 '진송관광호텔'(061-864-7775)은 부부가 운영하는 관광호텔로, 숙박비가 무인텔보다 약간 비싼 6만∼7만 원이지만, 침실과 집기가 깨끗해 쾌적한 느낌을 받는다. 특히 강변 침실은 실내 발코니가 있어 코앞의 탐진강 야경을 조망할 수 있다. 소등섬이 있는 남포마을, 갯벌을 체험할 수 있는 사촌, 수문해수욕장 주변에서도 펜션과 민박을 구할 수 있다.
백현충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