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민속자료 101호
명 칭 순창충신리석장승 (淳昌忠信里石長생)
소재지 전북 순창군 순창읍 충신리 189
시 대 조선시대
충신리 대로변에 위치한 석장승이다. 순창읍에서 전주로 가는 길을 따라 북쪽으로 500m 정도 가면 길 오른쪽 논둑에 서 있다.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당산’혹은 ‘벅수’라고 불리기도 한다.
지상에 솟은 부분이 180㎝에 이르는 거대한 사각의 자연석인데, 그 한 면만을 다듬어 장승의 모습을 갖추었다. 머리는 왼쪽으로 경사지도록 깎여 있고, 일대의 다른 장승과는 달리 눈이 작게 조각되었다. 콧날은 세모난데 끝이 뭉툭하게 잘려져 있다. 장승의 코가 아들을 낳는데 효험이 있다는 민간신앙에 따라 아들 낳기를 원하는 마을 아낙들이 떼어간 듯하다. 이마와 양 볼에 혹이 불거져 나왔는데 이마에 새겨진 혹은 불상의 눈썹사이에 있는 백호(白毫)를 연상시킨다. 웃는 듯한 입 사이로 내민 혀의 모습이 소박하고 친근감을 느끼게 해준다. 대개의 석장승이 몸체에 이름을 새겨 성(性)을 드러내지만 충신리 장승에는 이런 내용이 새겨져 있지 않아 그 구분이 애매하지만 마을에서는 애교스런 생김새와는 달리 남 장승으로 전하고 있다.
마을 수호신인 장승에게 지내는 동제는 매년 음력 정월보름전에 당산제를 올린 후에 지냈으나, 지금은 행해지지 않아 아쉬움을 준다. 순창읍에서 동쪽의 남원으로 가는 길에 다른 석장승이 남아 있는 것으로 미루어 마을로 들어오는 각각의 길목에 석장승을 세웠던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이 장승은 마을을 수호하고 부정한 것의 침입을 막기 위한 주민들의 염원이 깃들어 있는 민속신앙의 한 본보기라 할 수 있다.
중요민속자료 102호
명 칭 순창남계리석장승 (淳昌南溪里石長생)
소재지 전북 순창군 순창읍 남계리 280-2
시 대 조선시대
순창읍 남계리에 홀로 서있는 돌장승이다. 원래는 한 쌍으로 세워졌던 듯 하나 지금은 하나만 남아 있다.
순창읍에서 남원으로 가는 길의 개울둑을 타고 200m쯤 가면 돌장승이 서 있으며 마을의 평화와 주민들의 건강을 비는 뜻으로 세운 것이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마을 북쪽의 기(氣)가 약해서 북풍을 막기 위한 숲을 만들고 근처에 마을을 지키기 위한 장승을 세운 것인데, 지금은 숲이 벌채되어 논으로 만들어진 상태라고 한다.
매우 큰 자연석을 사용하여 앞부분만 조각한 이 장승은 성인 남자의 키와 비슷하다. 전체적으로 살찌고 무거운 모습이며 옆으로 찢어진 가는 눈, 가늘고 손상된 코에 입은 작으면서 장난스럽게 혀를 조금 내민 모습이다. 이마와 양 볼에 둥근 점을 튀어나오게 조각하였는데 주민들은 이 장승을 남장승 이라고 하지만 볼의 혹이 연지 찍은 모습을 연상하게 해 여장승 으로도 보여진다. 제주도의 돌하루방처럼 양손이 표현되었는데 손가락까지 뚜렷하다. 보통 장승이 얼굴 부분만 표현한 것과는 달리 손가락 등을 조각해서 사실적으로 나타낸 것이 특이하다.
이 장승은 조선시대의 것으로 만들어진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토속적이고 민중적인 예술작품이라는 점에서 연구가치가 있는 민속자료이다.
시도유형문화재 26호
명 칭 순화리삼층석탑 (淳化里三層石塔)
소재지 전북 순창군 순창읍 순화리 514-2
순창여자고등학교 교정에 자리하고 있는 3층 석탑이다. 탑이 서 있던 터에서 백제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당시의 옛 절터로 추측된다. 원래 탑을 세울 당시에는 기단(基壇)이 2층이었을 것이나 지금은 아래층 기단이 땅속에 묻혀 위층 기단만 땅위로 드러나 있고, 그 위로 3층에 이르는 탑신(塔身)이 쌓여 있다.
기단의 네 모서리와 면의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새기고, 탑신부의 각 몸돌에는 모서리에만 기둥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얇고 넓다란 지붕돌은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느린 곡선을 그리고 있으며, 밑면에는 5단씩의 받침을 두었다. 각 지붕돌 윗면 꼭대기에는 윗돌을 괴기 위한 높은 단을 두고 있어 통일신라 후기의 양식이 보이고 있다.
옛 백제지역에 서 있는 고려 전기의 탑으로서, 백제 양식 특유의 우아한 곡선미가 느껴진다.
회문산 자연휴양림
위 치 :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 안정리
개 요
6·25 전후에 지리산과 더불어 빨치산의 근거지였던 구림면 안정리 뒷산인 장군봉 아래 87만 평에 조성된 자연 휴양림은 빼어난 절경과 역사의 현장으 로 주목되어 주말이면 전국적으로 관광객이 몰려오고 있다. 회문산 주봉으로 가장 오르기 쉬운 안정리로부터 3시간 걸리는 5.5km 의 험한 바위길과 울창 한 숲속을, 도로를 개설 휴양림으로 조성하였다. 그리고 경내 울창한 숲이 우 거진 6·25때 빨치산 간부 정치 훈련장이었던 '노령학원'이 있었던 중턱은 이 제는 최적의 삼림욕장으로 조성되어 지난 날의 흔적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이 휴양림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성벽처럼 쌓아올린 '노령문'옆에 폭포가 있고 그 위에는 길이 30여m의 구름다리가 가로 지르고 그 위에 6각 전망대가 있 어 여기 올라 바라보는 경치는 장관이다.
이 책에는 회문산 정상에 24명당(明堂)과 오선위기(五仙圍碁)가 있는데, 이 곳에 관(棺)을 보토(補土)하여 묘를 쓰고 나면, 당대부터 발복하여 59대까지 갈 것이라고 하였다. 이 설을 입증하듯 회문산 정상과 주변에는 많은 묘들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김대건 신부가 처형을 당할 때, 3족이 멸하는 화를 면하기 위하여, 동생 김란식과 조카 김현채가 영산인 회문산으로 찾아들어 기거하였고, 그들의 묘소가 현존하고 있다. 또 학문과 창의에 빛난 조평(趙平)선생이 죽자 생전에 이룩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천만평의 사패지(賜牌地)를 하사하였고, 사패지에 깃대를 꼽도록 하였다. 지금도 회문산 북동능 끝봉에 '조평선생사패지(趙平先生賜牌地)'라는 깃대를 꼽아 놓고, 이름을 '깃대봉'이라 부르고 있다.
2. 회문산과 동학 혁명
조선시대 말기 동학 혁명이 일어났을 때, 동학군은 이 산을 거점으로 하여 투쟁을 하였다.
3. 회문산과 항일운동
일제시대에 정읍 쪽의 최익현, 임실 쪽의 임병찬 선생이 회문산을 거점으로 항일 구국 투쟁을 벌였다.
4. 회문산과 6.25(역사)
회문산은 순창군 구림면 안정리에 위치하며, 노령산맥의 중간 위치의 여러 봉우리와 깊은 골짜기로 겹겹이 둘러 싸여 있다. 이러한 지리적 환경은 동학 혁명군의 투쟁 장소로서, 항일운동의 장소로서, 6.25 격전지로서 활용되었다. 1948년 여순 반란 사건에서 패퇴한 반란자 중 일부가 회문산에 들어오면서 비극의 역사가 시작된다. 1950년 6.25 전쟁이 벌어지고 유엔군의 인천상륙 작전과 북진으로 고립된 인민군과 공산당들이 여분산 가마골에 있던 전북도당을 회문산으로 옮기고 험한 산을 의지하여 빨치산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국군 11사단은 1951년 전투기까지 동원하여 빨치산을 토벌하였다. 지금도 회문산에는 전북도당 유격대 사령부 자리와 빨치산들의 교육 장소인 노령학원 자리가 남아 있다.
현재 자연휴양림내에 625전쟁기념비와 비목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빨치산사령부가 복원돼어 있다. 비운의 역사를 가장 현실감있게 접근한 책이 빨치산 출신 이태씨가 쓴 '남부군'이다. 당시 빨치산 활동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는 '남부군'의 무대는 전라북도 순창과 임실을 가르고 있는 회문산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회문산 하면 빨치산이 생각난다.
6·25전쟁이 끝나고 40년 가까이 회문산은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있었다. 그야말로 오지중의 오지로 누구 한 사람 찾는 이도 없었다. 덕분에 울창한 숲이 조성되고 수많은 새들의 서식처가 되었다.
잊혀져가던 회문산이 뭍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88년 '남부군'이 출간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부터다. 이러한 회문산에 1993년 자연휴양림이 조성되어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더욱 잦아졌다.
오늘도 회문산은 말없이 그 많은 사연들을 껴안고 그 웅장하고 후덕한 자태로 자리잡고 있다. 회문산은 전라도의 중간에 위치하고 명당이 많다하여 영산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오늘처럼 평온한 회문산으로 있기에는 너무나 많은 역사를 간직하고 있어 결코 그냥 지나 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