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무궁(永遠無窮)
세상에서 영원무궁한 존재는 없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 우르크의 길가메시 왕도 영생의 불사초를 구하는 일에 실패했으며 중국의 진시황도 구하지 못했다.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달았다. 신은 영원한 불멸의 존재이지만, 사람은 필멸의 존재임을 알고 죽음을 받아들였다.
한편으로 사람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지구는 수용 한계에 이르러 멸망을 초래할 수도 있지 않을까. 사람이 태어나고 사라짐이 평형을 이룸이 오히려 창조주의 오묘한 섭리라는 생각이 든다. 노아의 홍수 이전에는 구백 년 이상 살았는데 인간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수명이 줄었다고 한다. 지금은 과학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도 늘어나 백세 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인생이 길어야 100년인데 뭐 그리 아등바등하며 살아야 할까. 옛날에는 내세의 삶을 위하여 현세의 삶은 고통스러워도 인내하며 살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현세의 삶에 치중하여 살라고 한다. 차안(此岸)의 삶이 피안(彼岸)의 삶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 행복함이 죽어서도 행복하다는 것이다.
경전의 말씀에도 이스라엘 민족은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와 허망과 허탈의 삶이었다. 그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려고 묵시문학이 성행했다. 내세의 행복한 삶을 위해 지금의 어려움과 고통을 참고 견디라고 했다. 그러나 요한의 묵시록은 다르다. 그들이 로마항쟁에서 패하여 조국을 버리고 각지로 흩어져 사는 처지에 이르렀다. 요한은 그들에게 현실의 삶에 대항하여 싸워서 승리자가 되라고 격려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본다. 치열한 경쟁의 삶이다. 경쟁에서 밀리면 나락으로 떨어져 좌절하거나 좌초하고 만다. 경쟁 사회에서 승승장구한들 온전히 행복할까.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어 오르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그러나 그 끝은 허망이었다. 부귀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그의 저서 코헬렛에서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노래하고 있다. 미국의 거부 스티브 잡스는 마지막 가는 길에서 살아온 삶이 허무이며 보람된 추억만 간직하고 떠난다고 했다. 삼성의 창업자 이병철은 그런 삶의 회의(懷疑)와 갈등을 신부에게 고백하며 질문을 던지기도 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이 찾아온다. 이제 그 죽음도 준비하며 맞아야 하지 않을까. 마지막 순간에 죽지 않으려고 묘책이나 묘약이 있는 것처럼 행동한들 시간 낭비일 뿐이다. 인간은 신처럼 영원무궁한 존재가 될 수 없기에 마땅히 죽어야 하는 운명이다. 하여 죽음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며 존엄하게 떠나야 하지 않을까.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는 것도 자연스럽게 마중할 죽음에 대한 준비이다.
죽음 그것은 또 다른 삶으로 옮겨가는 통과의례로 마냥 슬퍼할 일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이별이 영영 그리워 그리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