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뒤로한 후 많은 생각에 잠겼다.
"언제쯤이면 우리, 다시 볼 수 있을까?"
이것은 삼촌과 양어머니라는 존재와 나란 존재를 동시대에 붙여 단순하고 가볍게 던진 질문이 아니라, 부모 자식 간의 총책임적 연대의 매듭력이 깃든 관계에 대한 질문이다. 우리는 헤어진 뒤로 다시 못 볼 것이라 생각했다. 후에 바뀔 미래가 분명하게 알려줄 터였다. 미래라는 그 이름 참 이뻤다. 살아가는 오늘이, 희망 가득한 오늘이, 영화 같은 재회를 바라는 오늘이.본디 '밝은 미래'라고 눈치 있게 알려주었다.
5학년에 겪은 경험을 돌이켜보면 이리도 길어질 줄 몰랐다. 장지뱀, 이무기, 티타노 보아뱀 같았다. 아무래도 신은 시간을 이렇게 비유하는 것에 약간의 회의감이 든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문학은 허락했다. <진격에 거인>에 소개된 바와 같이 월 마리아, 월 시나, 월 로제 속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초대형 거인들이 주인공 엘런 예거의 '땅 구르기 발동'을 대기하듯, 우리 인간들도 박차고 나아갈 '때'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 적나라한 성정과정 그 자체로 설명되니 말이다.우리 인간은 <생상스 : 동물의 사육제>의 운율과 같이 서로 상생하고 발육을 돋워주며, 상호 보완하고 가르쳐 배운다. 하지만 그 당시 겪었던 일들은 가르침이라고 하기엔 어려웠고 오히려 어두운 내면이 들끓었다. 좋은 프로그램에 참여했지만 후에 시체 속 파리들이 들끓듯이 발각된 사고 사건들이 많아 살고 싶지 않다는 기분이 들 정도로 주변의 핍박을 받았다. 그때의 시간은 누리끼리한 참기름이 스며들고 노릇하게 잘 구워진 고등어 생선이자 하이퍼 리얼리즘을 초월한 초자연 선생이었던 것이다. 미래는 이를 두고 말했다. "꽤 그럴듯한 운명이었다"라고.
명동 성당에서 시행했던 미사에 참석하려던 중 괜히 화장실에 들렀다가 되려 길 잃고 헤매어 울다 운 좋게 경찰관을 만나 아이스크림과 지하철 비용을 얻어먹고 경찰서로 명동역에 내려 혼자 지하철을 타고 보육원으로 돌아왔다가 엄마 수녀님께 얻어맞은 것, 치킨 모양 과자로 시작해서 '네 거 내 거' 다툼에 뾰로통한 반발성 행동으로 평생 잡히지도 않을 것만 같았던 멱살을 누워서 떡먹기로 잡혀버린 것, 놀이공원에서 안경을 잃어버려 등짝 스매싱의 상위 호환인 '주먹 비'로 일시적 호흡이 불가하기까지 도마 위 생선처럼 가지런했지만 가지런하지 못하게 다져진 것, 지겹도록 자전거를 타봤어도 그것과 같은 방식으로 페달 달린 한강 오리배는 처음 타 본 것, 머리카락이 조금씩 뒤로 말리기 시작한 것, 곱슬곱슬한 개를 만져본 것, 로봇 청소기라는 파격적인 신문물을 접한 것, 대부모님 집에 초대받게 되어 친구들에게 "이 개는 물지 않아. 쓰다듬어볼래?"라고 안정시켰던 것.
여름방학 후 독서의 계절이 서슴없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가수 김흥국이 "흐아, 들이대"는 식으로 생각해보면 미세한 틈에 코스모스향 찬바람이 어느샌가 들어맞았다. 뻥 뚫려야 할 가슴이 울분에 막혀 고독하고 억울했다. 길을 잃었다는 이유로 목각과 죽도로 매 맞아야 했던 그때, 하필이면 저녁식사로 버섯 패밀리 계란찜이 나왔다. 나는 그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엉겨 붙은 양송이버섯이 남모르게 계란 바닥 밑에서 '황제 독살 계획'을 목적으로 잠입한 첩자로 숨었기 때문이다. 양송이버섯뿐만 아니라 새송이버섯까지 냄새라도 맡았다간 진절머리가 났었기에 빈지노의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그만큼 어지럼증이 재차 재채기로 쏟아졌던 상황이었다. 많이 맞고 자랐거나 편식이 심한 것이 '어지럼증 바이러스'의 원인이라면 그도 맞을 터였다. 애정결핍으로 딸려온 편식 선수! 맴매 잽은 정확했다.
저공비행으로 재빠르게 제 갈길 가는 비둘기 그림자에도 소스라치게 놀랐다. 예닐곱 먹은 시절엔 그랬다. 세상의 모든 공포가 작은 어린아이를 단숨에 집어삼키기라도 할 것처럼 두려웠다. 작은 동물의 실루엣이 두려웠다. 이것이 인간 본성에 깔린 '막연한 공포심'의 심해처럼 깊은 기저였다면, 인정하기 쉬웠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양치질을 제대로 하지 않아 충치가 생겨 학교를 쉬고 시설 내 병원을 가야 했던 때.혼자서 어딜 가는 게 두려워 열린 문 뒤에 남겨진 공간에 숨어 어서 시간이 가기만을 간절히 바랐던 때.
꼬꼬마 다음 열 살 배기 꼬마 시절.보육 선생님의 손에 들린 국자를 보고 두 번 피했다가 거대한 혹이 생기도록 정통으로 후려 맞은 그때.은색 파키케팔로 사우르스는 냉소하고도 지나치게 무결했다. 조종사의 의지에 움직인 것뿐이니 말이다. 그래서 눈 위를 스치는 모든 그림자가 무서웠다.치과에 가지 않은 죄를 깨닫고 죗값을 뉘우치라는 식의 박치기를 여러 번 시도했다. 가까스로 올린 두 가드가 복싱선수는 아니었지만 반사적으로 "그 비천한 몸뚱이를 보존해줄게."라고 하듯 자연스레 눈물 섞인 얼굴을 마주했다. 미들급에도 속하지 않았던 터라, 반에서 가장 작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가림막은 날 보호해 주지 못할 것이란 걸 알면서도 꾸준히 지속하는 거였다. 맞는 게 취미였고 말 안 듣는 게 일상이었다. 어찌 행동할 줄 몰랐던 게 아니라 그저 막연히 두려웠다. 홍길동의 대동여지도를 보고 영감 받은 '셀덤 오줌싸개'였다.턱선의 선을 넘어버린 눈물은 그칠 줄 몰랐으며 괴성과 "살려주세요."는 외마디 비명으로 맹신도처럼 뒤따랐다. 순수함을 애초에 거부하기라도 한 듯 상의는 그대로 모든 걸 안아주었고 적심 당하는 일 또한 상의와 하의의 일상이 되었다. 무척이나 아팠다. 무서웠다. 두려웠다.
보육 선생인 그녀의 얼굴을 함부로 쳐다보지 말 것. 다신 그녀를 미워하지도 말 것.
미물인 인간과 신의 관계란 두려웠고 공포스러웠다. 그런 날이 쌓일수록 "올바른 생각으로 살아야지."는 마음 뒷간에 들어올 틈조차 없었고, "전 당신 마음에 이미 들지 않았으니 더 삐뚤어질래요."가 위선적 이게도 우선이었다. 생각과는 늘 정반대였다.N극이 N극을 보지 않는 것처럼 우리 사인 철저하게 N극이었다. B급 감성의 비극이기도 했다. 그런 영화가 내 인생으로 되길 바라지 않았지만, 그리 하도록 내버려 둔 것이 체급 차이로 벌어진, 가르치는 자의 공포만을 배움 받을 자로 놓인, 공룡과 인간의 상대적 관계였다. 언제고 잡아먹히지 않을 생각으로 보다 개선된 전략을 펼쳐야 살아남을 터였다. 전략을 짤만한 공간은 없었지만, 학습지를 푸는 내내, 책 읽는 내내 궁리할 수밖에 없었다. S극으로 변할 생각은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그녀의 교육방식은 "N극일 수밖에 없습니다."라는 결론을 내놓았다. 폭력 좀비는 노익장 황건적처럼 죽지 않았고, 죽었어도 보이지 않는 트라우마로 극악무도하게 정신 세포의 차원 균열에 틀어박혔다. 두려움을 밀어 넣는 차원 균열을 지져버릴 무언가가 필요했다. 전기 파리채라던가 220V세탁기 옆구리에 손대는 걸로는 먹히지 않았다.
"중증 열성 혈소판 감소 증후군에 걸린 이상, 그 지겨운 진드기들을 짓이겨야 다신 그리하지 않겠지."
확인된 치료제가 없는 이 질병, 10~30%는 무조건 사망하는'미정 시한부 폭탄'이다. 보호 종료 아동 출신들은 대게 이 질병을 최소 하나쯤 갖고 있었다. 기계화되어가는 인간 가축. 트라우마라는 진드기. 불치병이자 치료 및 개선이 일시적으로만 가능한 3차원적인 병. 이름하야 '아노미.'
'아노미'란 행위를 규제하는 공통 가치나 도덕 기준이 벗는 혼돈 상태를 말한다.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이 주장한 사회 병리학의 기본 계념이다. 스트레스에 과도하게 노출된 사람이 신경증과 비행, 범죄, 자살과 같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특수화된 사회 구조 속에서 고립감, 분리 감을 느끼는 일이 바로 '아노미'이며, 연가시 같은 사회심리적 공포가 이끄는 대로 황천행에 어렵사리 얻게 된 '인생' 티켓을 자진 납부하는 걸 두고 '아노미적 자살'이라고 한다. 이는 하버드 축사로 유명한 피트 데이비스의 <전념>에서도 소개됐듯이 생에 대한 갈망과 욕구를 영영 불태워주었던 훌륭한 도화선이 되었다. 교육학자와 심리학 교수, 박사님들을 포함한 많은 분들께서도 강연을 통해 수없이 강조해왔지만, 폭력의 방향은 곧 폭력으로 귀결된다. 화살표가 어디로 가느냐에 따라 우리의 최후는 불 보듯 뻔했다. 그렇게 떠나보낸 지인들이 벌써 5명이 넘었다. '서로를 얼마나 사랑했고 얼마나 멸시했던가'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긋남조차 받아줄 온정. 오직, 자기 존중과 믿음뿐이었다. 그것은 누군가 나를 사랑하길 바라는 것 이상으로 가치 있는 영적인 행위이자 자체적인 예술이었다. 그것이 자애로운 글쓰기였고 사랑이었다.
그냥 자석이 되었으면 간단했다. 아노미적 자살이 판치는 대한민국 속 보육원에 살면서도,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우리 사회에서도 아노미는 빈번하게 일어났다. 현재도 'ING'이다. 속 편히 잉잉 울고 싶어 잉잉 울면 넥스트 스테이지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아노미는 항상 말했다. "날 이겨 봐." 이 바이러스를 관리하는 자는 우리가 되어야만 했다. 그것이 '뜻있는 행'이었다. 영겁의 시간이 속절없이 속수무책으로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신은 어두운 나락 따위로 우리 인간들을 몰아간 것이 아니라, 단지 보여줬던 것이란 걸. 프랑스 철학자의 격언을 한 줌 지니고 '나는 고로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나는 오늘도 망할 울타리를 짚고 넘어간다.타락한 나락 속 향락적인 알파, 그 너머로. 순수한 포용과 용서의 품, 아빠 신부님의 은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