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34]시인 김남주金南柱가 ‘전사戰士’인 줄 몰랐으니…
아내가 ‘선물’이라며 갖다준 『김남주평전』(김형수 지음, 다산북스 2022년 12월 펴냄, 563쪽, 22000원)을 사흘 동안 내리 읽었다. 신간이다. 시인詩人으로만 알고 있었던 김남주가, 명실공히 이 땅의 당당한 ‘전사戰士(warrior)’였었다는 것을 처음 안 게, 너무나 부끄러웠다. 끝내 후반부 몇 곳에서는 차마 그 다음 대목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을 쏟았다. 그랬구나? 그랬었구나? 이 땅의 '자유自由와 평등平等'을 위하여 자신의 온몸을 불태우며, 이토록 치열熾烈하게 살다간 전사가 있었구나. 30여년의 독재시절 김지하의 시를 잇거나 그에 버금가는 저항시인으로만 알고 있었다. 물론 ‘남민전’의 실제 행동대로 검거된 것은 알았으나 ‘그놈의 언론’이 지금과 똑같이 그때에도 ‘북한 지령을 받은 지하조직’이라고 온 국민의 눈과 귀를 가렸다는 것은 세세히 몰랐었다. 이럴 수가!
새로이 알게 된 이재문 선생, 신향식 선생의 이름을 김시인의 평생 친구였던 이강 선생의 이름과 함께 조용히 불러본다. 이토록 한 인간의 평전評傳을 완벽하게 펴낸 문학평론가 김형수, 정말 장한 일을 해냈다. 서가를 급히 뒤졌다. 아뿔싸, 『조국은 하나다』(실천문학사 93년 펴냄) 『나의 칼 나의 피』라는 시집을 지난번 책정리할 때 헌책방에 넘긴 것을 알았다. 무척 속이 상했다. 다행인 것은 『김남주 농부의 밤』이라는, 연도나 펴낸 곳도 없는, 유인물같은 시집(72편 수록)이 서가에 끼어 있었다. 다시 읽어본다. 세상에 어느 시인이 이렇게 ‘살벌한’ 시를 지을 수 있을까? 솔직히 김지하도, 고은도 아니었다. 오직 <한국의 체바라>였던 김남주만이 쓸 수 있었던 시들이었다. 소름이 돋을만큼 무섭기까지 했다. 아아-, 시 구절이 바로 그의 칼이고 총이며 피였던 것을. 누가 그랬던가.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그렇다. 그의 시 구절구절이 바로 총이고 피이고 칼이었다.
시 <종과 주인> <자유> 두 편만 예로 들자.
<주인이 종에게 ㄱ자도 모른다고 깔보자/바로 그 낫으로 종이 주인의 목을/베어 버리더라>
<만인을 위해 내가 노력할 때/나는 자유이다/땀흘려 힘껏 일하지 않고서야/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이다/피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어띠 내가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후략)>.
섬뜩하고 무섭지 아니한가. '만인을 위해 일할 때' 만이 진정한 '자유'라 말하지 않는가. 세상에 어느 누가 이런 '어록'을 남길 수 있을까? 어찌 그런 일이? 단순하면 무식하다는 말이 있지만, 허나 그는 단순하지 않고 심오하기까지 했다. 알제리 해방운동의 기수, 폭력론자였던 프란츠 파농의 저서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을 『자기의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서 처음으로 옮긴 펴낸 번역가이기도 했다.
췌장암으로 고통받다 만48세 귀천歸天. 하늘은 왜 이렇게 고결한 영혼의 소유자들을 일찍 데려가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다. “하늘이시여!”라는 한탄이 절로 나온다. 참으로 야속한 일이다. 얼핏 생각만 해도 불러볼 수 있는 이름들이 어디 한둘이랴. 조영래 변호사, 빈민운동가 제정구, 신영복, 윤한봉 선생 등을 비롯한 숱한 민주화 운동가, 재야 인사들. 이름없이 스러져간 수백, 수천의 영혼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항일투쟁에 목숨을 건 순국선열들처럼 많은 애국자들. 타살된 장준하 선생이나 스스로 불꽃이 된 수많은 열사와 의사들은 차치하고, 그들의 몸에 왜 ‘몹쓸 병들’이 침투해 어찌할 수 없게 만드는 걸까? 살아만 있다면, 민족을 위해 그들의 할 일이 ‘태산같이’ 많은데도 말이다. 살아 있고,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은 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김남주와 동시대 친구, 선후배들은 그를 어떻게 보냈을까? 책 속에 나오는 사람들만 해도 족히 100명은 넘었다. 가슴이 너무 아팠다.
앞으로 ‘치열熾烈’이라는 단어를 쓸 때는 정말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불꽃 치’ ‘매울 열’은 아무에게나 붙이는 말이 아닌 것을. 이 평전의 부제 ‘그대는 타오르는 불길에 영혼을 던져보았는가’처럼 김남주의 치열은 치열의 극치였던 것을. 생각만 해도 끔찍한 그 지독한 고문拷問들을 인간의 ‘갸냘픈 신체’로 남주 시인은 어떻게 버티고 이겨냈을까? 인간정신의 한계치는 대체 어디까지일까? 그들이 있어 오늘이 있고 우리가 있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아닐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자유투혼’에 빚을 져도 단단히 졌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조작된 <민청학력>의 피해자들이 국가로부터 무죄를 받았듯, 간첩조직으로 몰아부친 <남민전>의 피해자들도 하루속히 복권, 복원되어야 할 것이다. “그까짓 임기 5년의 대통령이 뭐가 대단하다고 무서운 것이 없다”던 지금의 대통령, 그 권력의 끝은 어디까지인가? ‘할 일’은 태산같은데, 소 는 뒷걸음치다 쥐를 잡을 수 있는지 몰라도 ‘역사의 뒷걸음질’은 방법이 없다. 오직 퇴보退步만이 있을 뿐. 김남주 시인은 지하에서조차 쉬지 못하고 ‘전사로서의 역할’에 골몰하고 있을까?
후기 1: 책 말미 김남주 연보年譜에 따르면, 시인은 1994년 2월 13일 고려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2월 15일 서울 경기대 민주광장에서 고 김남주시인 추모의 밤 ‘만인을 위해 일할 때 나는 자유’를 개최했다. 16일 ‘민족시인 김남주선생 민주사회장’이 전남대 5월광장에서 열리고 5.18묘역에 안장됐다. 나는 당시 동아일보 충정로사옥에서 근무했는데, 추모의밤 행사가 열린다기에 동료 몇 명과 참석, 추모열기를 보며 가슴을 무척 아파했다. 안치환이 노래부르는 것도, 고은 시인도, 그때 처음 보았다.
후기 2: 이 평전을 선물로 사준 아내가 고맙다. ‘차도녀’ 비슷한 아내와 완전 촌놈인 나는 어느새 결혼생활 40년을 앞두고 있다. 성격이 워낙 달라 사사건건 말다툼이 잦았으나, 책을 좋아하는 것만큼은 일치한다. “제발 책 좀 고만 사라”는 지청구에 귀가 아프지만, 다행인 것은 진보성향의 책들은 아내가 다 사놓은 덕분에 늘 내가 먼저 읽는다. 읽지 않아도 사야한다는 책, 이를테면, 조국의 저서 3권을 비롯해 탁현민, 김어준의 책들은 나에겐 너무나 고마운 ‘보너스’다.
후기 3: 『김남주평전』을 쓴 김형수는 시인이자 소설가, 평론가로 저서가 많다고 하는데, 유독 내 눈에 띈 게 『문익환평전』이었다. 지은이가 김남주의 일생을 워낙 완벽하게 기술해놓은 것을 보고 감탄, 오늘 아침 막역한 전우에게 “『문익환평전』을 부탁한다”는 카톡을 보냈다. 즉시 답변이 왔다. “오케이. It’s my pleasure” 늦봄 문익환, 시인 윤동주의 친구. 당신이 돌아가실 줄은 꿈에도 모르고, 마지막 순간까지 김남주를 살리려 매일 병원을 찾았던 문익환 목사. 그분의 평전, 김형수의 필력과 내공, 기대 만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