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드라마 <대풍수>에서 이성계와 이인임은 라이벌 관계로 묘사되고 있다.
드라마 속의 이인임은 이성계를 견제하고 그의 발목을 잡는다.
이인임은 공민왕의 의심을 부추겨 이성계가 체포되도록 하는 데도 일조했다.
실제로도 이성계와 이인임은 원수지간이나 마찬가지였다.
1388년 위화도회군(이성계 쿠데타) 얼마 전에 이성계는 최영을 도와 이인임·염흥방 세력을 실각시키는 데 가담했다. 이로 인해 이인임은 그 해에 유배지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런데 죽은 지 몇 년 뒤부터 이인임은 이성계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죽은 이인임은 산 이성계를 자기 아들로 둔갑시켰다. 이 때문에 이성계 본인은 물론이고 그 후손들까지도 두고두고 속병을 앓았다.
이 병은 근 200년 뒤에 가서야 비로소 사라졌다.
죽은 이인임이 이성계를 괴롭힌 사연은 이렇다.
이 사연을 이해하려면, 고려 멸망 2년 전인 1390년의 명나라 수도 남경(난징)으로 가야 한다.
나중에는 북경으로 바뀌었지만, 그때는 남경이 명나라의 도읍이었다. 당시의 고려 주상은 공양왕이고, 실권자는 이성계였다.
이때 남경에서 명나라 황제 주원장에게 고발장을 바친 두 고려인이 있었다.
윤이와 이초라는 인물이었다. <고려사> '공양왕 세가'에 따르면, 이들은 주원장에게 "이성계와 공양왕이 군대를 움직여 상국(上國, 명나라)을 범하려 하고 있으니, 군대를 동원해 고려를 침공해달라"고 건의했다.
이성계가 명나라를 침공하려 한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당시 이성계로서는 권력 장악이 시급했기 때문에 그럴 여력이 없었다.
고발이 허위라고 판단한 명나라 정부에서는 이들에게 유배 조치를 내렸다.
당시 고려 정계에서는 이성계와 이색·조민수가 대립하고 있었다.
이들은 위화도 회군과 함께 최영 정권에 도전할 때만 해도 뜻을 함께한 사이였다.
그러나 최영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뒤에는 상호 대립하는 관계로 바뀌었다.
이런 구도 속에서 윤이와 이초는 이색·조민수를 지지했다. 그래서 이성계 정권을 붕괴시켜달라고 주원장한테 간청한 것이다.
'윤이·이초 사건이 이인임과 무슨 관계가 있나?'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이 사건이 마무리된 지 4년 뒤인 1394년에 벌어진 상황을 보면 의문이 풀릴 것이다. 1394년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세워진 지 2년 후였다.
이때 명나라 사신 황영기가 조선을 방문했다. 그는 굳이 보여주지 않아도 될 문서를 태조 이성계 앞에 내놓았다.
그 문서는 명나라 황제가 산신령에게 제사 지낼 때 사용한 축문이었다. 축문의 내용은 조선이 명나라를 침공하려 하므로 명나라에서 정벌군을 편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연한 언급이 되겠지만, 명나라 사신이 축문을 보여준 것은 '조선이 까불면 군대를 동원하겠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무주공산이나 마찬가지인 요동(만주)을 놓고 양국이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던 시기였기 때문에,
이런 협박성 메시지가 나올 수 있었다. 물론 당시의 명나라는 전쟁을 벌일 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순전히 협박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축문의 한 대목이 이성계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조선을 정벌하겠다'는 대목도 기분 나빴지만, 그보다 더 불쾌한 것은 축문의 서두였다.
태조 3년 6월 16일자(1394년 7월 14일) <태조실록>에 따르면, 이 축문은 "옛날 고려 신하 이인임의 후사인 이성계"라는 구절로 시작했다.
이인임은 이성계의 정적이었다.
그 이인임을 죽이는 데 이성계도 가담했다. 그런데 그런 이인임을 이성계의 아버지로 둔갑시킨 것이다.
이성계로서는 다른 사람을 자기 아버지로 만든 것도 기분 나빴지만, 하필이면 이인임을 자기 아버지로 만들었다는 것이 더욱더 기분 나빴다.
알고 보니, 일의 발단은 윤이·이초에게 있었다.
그들이 명나라에 가서 이성계를 고발 할 때에 이성계를 이인임의 아들로 소개했던 것이다. 이것을 빌미로 명나라 정부에서는 '이인임의 후사인 이성계'를 운운했다.
명나라가 이성계의 진짜 아버지를 몰랐을 리 없다.
명나라는 이성계를 조선 국왕으로 승인한 나라였다.
이런 경우, 승인을 받는 외국 군주의 집안 가계를 확인하는 것이 상례였다.
명나라는 이성계를 자극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의 아버지를 바꿨던 것이다.
안 그래도 이성계는 자신을 여진족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따갑게 의식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번에는 명나라가 나서서 자신을 이인임의 아들로 만들어버렸으니, 이만저만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성계는 자신을 여진족으로 바라보는 시선과 이인임의 아들로 바라보는 시선을 동일선상의 문제라고 파악한 듯하다. 둘 다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흔들 만한 암초라고 이해한 것이다.
이 점은 그가 주원장에게 보낸 서신에서 잘 드러난다.
이 서신에서 이성계는 자신이 이인임의 아들이 아니라는 점을 해명하기에 앞서, 자신이 한민족 출신이라는 점부터 강조했다.
"저의 조상은 본래 조선의 후예“
라고 소개한 뒤 자신의 가문을 상세히 설명한 것이다. 그런 다음에
"저와 이인임은 같은 이씨가 아닙니다“
라고 강조했다.
자신과 이인임이 무관하다고 밝히면 될 일을, 자신이 한민족 출신이라는 점을 강조한 뒤에 이인임과의 관계를 해명한 것이다.
이성계가 두 문제를 동일선상에 놓고 파악했음을 반영하는 대목이다.
이성계는 열심히 해명했지만, 명나라는 이를 무시했다.
명나라는 '이인임의 후사인 이성계'라는 구절을 태조 주원장의 유훈이라는 명목으로 <대명회전>이란 법전에까지 기록해 놓았다.
이인임의 후예라는 말에 이성계가 발끈하는 것을 보고 이것을 조선을 압박하는 데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그런 사실을 법전에까지 기록해 둔 것이다.
그 뒤로 조선 정부는 기회 있을 때마다
"이성계는 이인임의 아들이 아니니, <대명회전>의 내용을 수정해달라“
고 요청했다.
하지만, 명나라는 번번이 외면했다. 이 문제를 역사학 용어로 종계변무(宗系辨誣)라고 한다.
'왕실(宗)의 계보(系)에 관한 허위의 무고(誣)를 바로잡는(辨) 문제'란 의미다.
명나라는 이 문제를 빌미로 조선 정부를 최대한 압박했다. 그리고 최대한의 것을 뽑아냈다.
당시 동아시아 '악의 축'인 여진족을 토벌하는 데에 조선 군대를 번번이 동원한 것이다.
조선은 명나라가 잘못된 정보를 수정하지 않는데도 계속해서 명나라에 부탁하는 한편, 명나라의 파병 요구를 거의 다 들어주었다.
혹시라도 명나라가 이성계의 혈통 문제를 확산시킬까봐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 때문에 애꿎은 조선 청년들만 명나라의 전쟁에 동원되곤 했다.
종계변무 문제는 1589년에 가서야 해결되었다.
1394년에 시작된 문제가 이때 해결된 것이다. 그 해에 명나라는 <대명회전>을 개정하는 기회에 '이인임의 후사인 이성계'라는 대목을 삭제했다.
근 200년간이나 시간을 끌면서, 조선을 이용할 대로 이용한 뒤에야 이 문제를 종결한 것이다.
죽은 이인임은 이성계는 물론이고 이성계의 후손들까지도 근 200년간이나 괴롭혔다.
드라마 속의 이인임이 이성계의 발목을 붙잡듯이, 실제의 이인임은 죽어서까지도 이성계의 발목을 붙잡았다. 이성계에 대한 이인임의 복수는 그처럼 집요하고 무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