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30
3월15일[사순 제3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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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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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aXUdI_cYK1Y (최광호 바실리오 신부님 집전)
**사순특강**
묵상글 맨 아래 동영상 주소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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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가 당신의 이름을 부를 때면 새벽 세 시에도 달려와 주시는 아버지!>
묵상할수록 감사의 정이 저절로 솟구치는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읽을수록 충만한 위로가 피부로 와닿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또한 내가 오늘 너희 앞에 내놓는 이 모든 율법처럼 올바른 규정과 법규들을 가진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신명기 4장 7~8절)
요즘 특별히 더 감사한 시절입니다. 여러 이단들과 사이비 종교들이 판을 치는 우리나라입니다. 꽃 같은 우리 청춘들을 현혹시켜 인생을 파탄시키는 사탄이요 괴물의 민낯을 보고 있자니, 분통이 터져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우리 가톨릭 신앙은 조금 밋밋한 감은 있지만, 얼마나 보편적이고 상식적인지, 얼마나 편안하고 안심이 되는지 모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생각만 해도 마음 든든한 하느님이 계십니다. 그분은 신명기 말씀처럼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아파 신음할 때면 새벽 세 시라도 달려와 주시는 아버지요 어머니 같은 분이십니다.
아동 생활 시설에서 사목할 때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는 말을 실감했습니다. 지도자의 눈길이 뜸해진 순간, 답답함에 온몸을 뒤척이던 아이들은 가출을 시도합니다.
맨몸으로 나가다 보니 오래 가지 않아 도벽으로 이어지고, 지역 파출소로부터 연락이 옵니다. 연락이 오면 새벽 두시건, 세시건 가리지 않고 기쁘게 출동합니다. 아이들에게 미리 한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가출하더라도,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언제든 연락하거라. 새벽 두시건 세시건 아무 때나 괜찮으니.”
우리의 하느님도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우리가 아파 신음할 때, 우리가 큰 곤경에 처해있을 때, 언제든 우리가 그분을 부르면, 지척에 계시다가 즉시 달려와 주시는 따뜻한 아버지 같은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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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7P0CwwNed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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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작은 계명’은 어떤 계명을 말하는 것일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은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우리는 작은 계명조차 어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작은 계명일까요? 우선 큰 계명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큰 계명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조금 더 작은 계명은 그것을 열 개로 나눈 십계명이고, 더 작은 계명은 그것을 더 세세하게 나눈 613개의 계명이며, 더 작은 계명은 관습법이나 전통입니다. 그러니 아주 세세한 사랑의 계명까지 다 지키라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율법의 가장 작은 계명까지 철저히 지키는지 모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 안식일 법을 만들어 놓고 철저히 주님을 생각하며 쉽니다. 이웃 사랑의 계명도 철저합니다. 그들만큼 작은 계명까지 철저히 지킨 사람들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보며 하느님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고 하시기는커녕 천국에 들어가지도 못한다고 하십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요? 우리가 과속하지 않고 신호등을 잘 지키는 것이 가장 작은 계명까지 지키는 일일까요? 아닙니다.
JTBC ‘신성한 이혼’에 나오는 첫 번째 에피소드입니다. 변호사 신성한은 ‘결혼은 신중하게, 이혼은 신속하게’란 모토를 걸고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 중입니다. 이때 유명한 라디오 DJ 이서진이 자녀의 양육권을 자신이 갖게 해 달라며 이혼 소송을 청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외도하여 그 동영상이 이미 인터넷에 유포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아이의 양육권을 주장하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그래서 처음엔 승리할 수 없다고 그녀에게 말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남편은 지독한 의처증 환자였습니다. 전화를 30분마다 하며 누구와 있느냐고 보고하게 하였고 속옷까지 사진을 다 찍어두었으며 포스트잇을 하루에도 수십 장씩 써서 모욕감을 주었습니다. 심지어 바람피운 엄마와 살겠다는 아들에게 엄마의 유포된 동영상을 보여주기까지 하였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이서진 씨가 가정에 충실하지 않은 파렴치한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가정에 충실하다고 여겼던, 그리고 겉으로는 그랬을지 모르는 남편이 사랑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랑을 행동으로 하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살인 하지 말라는 계명을 화를 내지 말라는 계명으로 만드십니다. 또한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음탕한 욕망을 지니지 말라는 계명으로 만드십니다. 어떤 이들은 생각이나 마음으로는 미워하면서 행동으로 사랑의 행위를 한다면 그것이 계명을 지키는 것인 줄 압니다. 행위가 크고 생각이나 마음은 작은 것이라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경계하라고 하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율법에 따른 행위에 의지하는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습니다.”(갈라 3,10)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작은 계명은 마음입니다. 마음에서부터 하느님을 사랑하고 마음에서부터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다음이 생각으로 짓는 죄이고 그다음이 행위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행위에 집중할 때 우리는 마음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마음까지도 계명을 어기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인간의 마음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죽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장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그래서 타인을 높게 봅니다. 믿기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작은 계명까지 지키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인간의 마음을 어떻게 가지게 되었을까요? 부모로부터 양식을 먹고 가르침을 받아 내가 부모처럼 인간이라 믿고 부모를 닮으려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그렇게 나의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체를 영하고 말씀을 배웁니다. 그리고 자신을 하느님이라 고백하며 하느님이신 그리스도를 닮아갑니다. 그러면 그분의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이것이 가장 작은 계명까지 어기지 않도록 사는 방식이고 그런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서 큰 사람이라 불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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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이번 LA 신문홍보를 하면서 마음이 따뜻한 교우 분들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제가 사제이기 때문에 기꺼이 머물 곳을 마련해 주셨고, 음식을 주셨고, 차량 봉사를 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우 분들은 불편했음에도 기쁜 마음으로 저를 받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분들의 따뜻한 마음을 보시고, 진실한 신앙을 보시고 축복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나라는 밭에 숨겨져 있는 보물과 같다.’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교우 분들의 가정에서 하느님께서 숨겨 놓으신 ‘보물’을 찾았습니다. 그 보물은 책 속에 있었습니다. 첫 번째 보물은 정의채 몬시뇰과 차동엽 신부님의 대담을 엮은 ‘모든 것은 은혜였습니다.’입니다. 저는 그 책속에서 정의채 몬시뇰의 깊은 지성과 미래에 대한 통찰을 보았습니다. 두 번째 보물은 류시화가 옮긴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입니다. 저는 그 책속에서 ‘세계는 원자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야기들로 이루어져있다.’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사순시기는 은혜로운 회개의 때입니다. 사순시기를 시작하면서 교구장님들은 ‘담화’를 발표하였습니다. 서울대교구 정순택 베드로 주교님은 사순시기를 시작하면서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에페 5,8)”라는 성서말씀으로 담화를 시작하였습니다. 주교님은 특별히 사순시기에 미사참례를 열심히 하기를 당부하였습니다. 미사는 말씀과 성체라는 보물이 묻혀있는 밭이기 때문입니다. 춘천교구 김주영 시몬 주교님은 사순시기를 시작하면서 “성령으로 굳건해진 신앙 감각은 교회의 구성원들이 개인과 공동체로서 주님께 충실하면서 살고 행동하고 말하는 방법을 지속적으로 식별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신앙 감각은 모든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와 함께 생각하며’ 하나의 신앙과 하나의 목표를 나누도록 해 주는 본능이다.( 「교회 생활에서의 신앙 감각」, 128항).”라는 신앙 감각을 강조하였습니다. 주교님은 특별히 사순시기에 말씀을 통하여 신앙 감각을 키워가기를 당부하였습니다. 인천교구 정신철 요한 세례자 주교님은 “숨겨진 잘못에서 저를 깨끗이 해 주소서.(시편 19,13)”라는 성서 말씀으로 담화를 시작하였습니다. 사순 시기를 보내면서 ‘숨겨진 잘못에서’ 우리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하느님께 다가서도록 당부하였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에 묻혀있는 보물은 ‘하느님의 계명과 율법’입니다. 오늘 독서는 율법과 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면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땅으로 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우리가 지켜야 할 계명을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섬기고, 우상을 섬기지 않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사람은 축복의 땅으로 갈 수 있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살인하지 않고, 거짓말 하지 않고, 남의 재물을 탐하지 않고, 남의 아내를 탐하지 않는 사람은 축복의 땅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엉뚱한 곳에서 보물을 찾으려고 합니다. ‘성공, 명예, 권력’입니다. 앞서가는 사람은 끌어내리고, 뒤에 오는 사람은 밀쳐내면서 성공이라는 바벨탑에 오르려 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이라는 바벨탑에 오르려 합니다. 위선과 가식으로 치장된 명예라는 바벨탑에 오르려 합니다. 그런 보물은 우리를 축복의 땅으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그런 보물은 우리를 무한경쟁의 싸움터로 내몰기 마련입니다. 그런 보물 때문에 아름다운 자연은 훼손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후손들이 살아가야 할 푸른 지구는 병들고 있습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오늘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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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5,17-19: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남에게도 지키도록 가르쳐라
예수님은 율법을 없애러 오지 아니하고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식사의 신비를 당신의 수난으로 완성하셨을 때 율법을 완성하셨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사람들이 건네준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 하심으로써 당신에 관해 쓰인 율법과 예언서의 말씀이 모두 이루어졌다고 분명히 보여주셨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의 파스카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기 때문입니다.”(1코린 5,7)라고 한다.
그러므로 거룩한 계명들은 어느 것 하나도 폐지해서도 고쳐서도 안 된다. 모든 것을 그대로 보존하며 잘 가르쳐 하늘나라의 영광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인간적으로 작고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하찮은 것이 아니라, 필요하게 여기신다. 주님께서는 그 계명들을 모두 가르치셨고 또 지키셨기 때문이다. 작은 것들도 하늘나라라는 위대한 미래를 가리킨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17절) 율법과 예언서는 둘 다 유효하다. 이 책들을 보면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들과 살아가는 일에 관한 법이 담겨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를 둘 다 완성하셨다.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 그 율법을 완성하게 될 것이다. 말씀을 실천하며 우리는 주님의 계명을 완성해 갈 것이다.
우리에게는 주 하느님께서 만드실 새 하늘과 새 땅이 약속되어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되면, 그에 따라 옛것은 사라질 것이다.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18절) 라는 말씀은 율법에서 가장 작다고 여겨지는 것조차도 영적 상징으로 가득 차 있으며, 이 모든 것이 복음서에 요약되어 있음을 알려 주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19절)는 곧바로 지옥과 벌을 떠 올려야 한다. 이 계명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마지막 날에 가장 작은 자, 내쳐진 자요, 말째가 되어 벌을 받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제쳐 놓는 이는 누구나 당신과 맞서는 자로 여겨 옆으로 제쳐 놓으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업신여김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지금 중요한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다. 부활을 향한 여정을 계속하고 있다. 이것이 단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행사로만 끝난다면, 우리가 맞는 부활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 부활은 우리 자신의 새로운 탄생을 촉구하고 있으며, 또한 영광스러운 나 자신의 하느님 안의 변화를 요청하고 있다. 여기에 우리가 부활을 축하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제 하느님 사랑의 계명을 통하여 우리 자신이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올바로 실천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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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과 율법>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율법이나 예언서들’이라는 말은 구약성경을 가리키는 말인데, 여기서는 구약성경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유대인들은, 특히 바리사이들은, “예수는 ‘하느님의 말씀’을 폐지하려고 하는 이단자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안식일에 병자들이나 장애자들을 고쳐 주신 일 때문에 예수님과 바리사이들이 부딪친 일이 많은데, 그럴 때마다 바리사이들은 죄인이라고(이단자라고)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요한 5,16) “그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므로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요한 9,16)
그래서 “나는 하느님의 말씀을 폐지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려고 왔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을 비난하는 자들을 향해서 반박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이 미완성 상태여서 당신이 그것을 완성해야 한다는 뜻도 아니고, 부족한 부분이 있어서 당신이 그 부분을 채우려고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여기서 ‘완성’은 ‘완전한 실천’을 뜻하는 말입니다.
인간들이 하느님의 뜻과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불완전하고 부족하기 때문에 완전하게 실천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인도하기 위해서 당신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뜻입니다.
어느 안식일에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었을 때(마태 12,1), 바리사이들은 그것을 보고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마태 12,2) 그때 예수님께서는 다윗이 배가 고팠을 때 한 일을 예로 들면서(마태 12,3) 제자들을 옹호하셨습니다.
이웃의 사정은 생각하지 않고 율법을 지키는 것만 생각하는 것은 ‘사랑 없이’ 법만 내세우는 것이고, 그것은 율법을(하느님의 뜻과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과 말씀은 ‘사랑으로 실천해야 하는 사랑’입니다. 따라서 사랑이 없으면 실천이 아닙니다. 실천이 아니면 그것은 무엇인가? 율법주의자들의 자기 만족감일 뿐입니다.
<정말로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고 있는 상황이어서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보았다면, 우선 그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면서 안식일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그것이 바로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의 완성’은 ‘사랑의 완성’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뜻과 말씀에서 사랑을 빼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지극 정성으로 계명들과 율법들을 지킨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그냥 위선일 뿐이고, 남들에게 지키라고 강요한다면 그것은 그냥 종교로 포장된 폭력일 뿐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마태 5,18)
이 말씀에서도 ‘율법’이라는 말은, 율법들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뜻과 말씀’을 뜻합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뜻과 말씀’의 ‘시간적인 영원성’을 강조하는 말씀이 아니라, 그 어떤 것도 침범할 수 없는 ‘절대성’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계시된 ‘하느님의 뜻과 말씀’은 누구도 변경하거나 축소하거나 변질시키거나 폐지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해석’의 경우는 어떤가? ‘하느님의 뜻과 말씀’을 정확하게 해석하고 실천할 수 있다면 참으로 좋은 일인데, 그게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성경을 정확하게 번역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고, 정확하게 해석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번역과 해석의 차이로 자꾸만 종파 분열이 일어납니다. 구약성경이든지 신약성경이든지 간에 성경을 해석할 때의 기본 원칙은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한다.”입니다.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표현만 보면, 마치 율법주의자들의 말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것은 아니고, 뜻은 “아무도 축소하거나 왜곡하거나 변질시킬 수 없다.”입니다.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러면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종말의 하느님 나라에서는 계명들과 율법들이 필요 없다는 뜻일까? 그 나라는 모든 것이 완성된 나라이고, 완전해진 사람들만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계명들과 율법들이 없어도 사람들이 모두 하느님의 뜻과 말씀대로 잘 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필요 없게 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9)
이 말씀은, 자기들 마음대로 ‘큰 것(중요한 것)’과 ‘작은 것(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계명들과 율법들을 분류한 다음에,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라고 분류한 것은 무시하고 안 지키는 자들을 꾸짖으신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계명들과 율법들은 큰 것과 작은 것이 따로 없다. 전부 다 똑같이 크고 중요하다.”가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자기 혼자서 죄를 짓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남을 죄짓게 하는 죄’를 짓는 자를 뜻합니다.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라는 말씀은, “하늘나라에 못 들어간다.”라는 뜻입니다. 반대로,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라는 말씀은,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라는 뜻입니다. <하늘나라에는 ‘큰사람’도 없고 ‘작은 사람’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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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신약 성경에서 ‘완성하다’는 의미가 있는 몇몇 단어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표현된 것은 ‘가득 채우다’는 의미에서 완성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이렇게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채우러 왔다.’ 말씀의 대상이 되는 것은 율법이나 예언서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도 율법을 중요하게 생각하셨다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조금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율법’으로 표현된 단어의 가장 기본적인 뜻은 ‘법’입니다. 법은 성경에서 ‘율법서’라고도 부르는 모세 오경을 가리킬 수 있고 구체적으로는 모세 법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완성하러 오신 것은 ‘율법서와 예언서들’이고 이는 구약 성경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의 말씀을 채우러 오신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율법이 아닌 성경의 말씀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완성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채우는 것은 그 의미를 새겨 하느님의 뜻에 맞게 실행하는 것입니다. 그 본보기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복음은 자주 성경 말씀이 예수님의 모든 활동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언급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침 안에서 그리고 활동 안에서 하느님 말씀을 이루신 분이시고 그 마지막은 십자가 죽음과 부활입니다. 지금 우리는 율법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 법을 따릅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하느님 말씀은 여전히 우리가 저마다 삶의 중심에 두어야 할 기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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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최호철 안토니오 신부님]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실천하면서 그분의 뜻을 찾고, 하느님과 만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기도도 있고, 묵상도 있고, 십자가의 길이나 성체조배 같은 여러 방법을 통해, 아니면 활동을 하면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고 하느님과 만날 수 있습니다. 특별한 시간을 내기 어렵다 하더라도 일상적인 생활 가운데서 충분히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묵상하고 성체조배를 하면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보다 귀담아들으려고 노력할 수 있으며, 하느님에 뜻을 찾고 실천하는 신앙인의 모습을 간직할 수 있다고 생각해 봅니다. 묵상이나 기도라 하면 너무 어렵다고 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냥 편하게‘하느님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살아가면서 하느님을 생각하는 것, 그게 기도이고 묵상이고 성체조배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잘 귀담아들어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계명을 어기지 말고, 또 가장 작은 계명이라 하더라도 무시하지 말고 존중하고 지켜야 함을 우리에게 당부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은 우리 구원의 유익을 위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야만 하고, 또 무엇보다도 존중해야 합니다.하느님의 계명을 우리를 억압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하느님의 말씀이나 계명을 존중하고 지킬 것을 남에게 강조하면서도 스스로는 실천하지 않고, 오히려 악한 표양을 주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의 계명은 우리를 살리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노력으로 묵상을 자주 하고 성체조배를 잘했으면 합니다. 기도와 묵상, 성체조배 등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 우리와 함께하고자 하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며, 하느님이 주신 사랑의 계명을 올바르게 실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하고자 하는 하느님을 찾아 만나는 그런 시간을 조금씩이나마 만들어 보았으면 합니다. 바쁘기에 정신없이 살아가는 우리지만 바쁨 가운데서도 기도와 묵상, 성체조배의 맛을 들이는 모습으로 이 사순시기를 잘 살아가 보았으면 어떨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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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회 故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완성하러 왔다.” (마태오 복음 5장 17절-20절)>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시다. 어떻게 감히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까지 말씀하실 수 있는가?
그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율법이나 예언서는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감히 누가 이렇다 저렇다 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지켜야 할 것이었다. 율법은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지켜야 하고 그것을 잘 지키는 것이 곧 하느님께 충성하는 것이요, 의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감히 율법에 대해서 폐지 운운한다거나 완성하러 왔다고 말하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 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일까? 그것은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내는 것이며 율법과 예언서에서 말했던 것들이 이제 이루어지게 되었음을 알리는 말씀이기도 하다.
그럼으로써 다시는 율법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게 하고자 하신 것이며 예언서에 기록되었던 것을 이제는 기다리지 말고 이제는 그것이 실현되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 되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 중에서 무엇을 완성하러 오셨다는 것인가?
율법은 지켜야 할 계명들이 많이 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등 사람들이 지켜야 할 여러 가지 계명들을 너무나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기 때문에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그러나 사람이 어디 계명이라고 해서 그것을 다 지킬 수 있는가?
예를 들어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계명이 있지만 그 계명을 지키고자 해도 상황이 여의치 못해서 일을 해야 하는 때도 있고, 또 인간이 나약하여서 남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고, 더러는 도둑질을 하거나 간음을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율법은 이런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죄라는 것을 가르쳐 주기는 하지만 죄를 지었을 때 어떻게 해야 용서를 받을 수 있는지 그런 것에 대해서는 어떤 해답이 없는 것이 율법의 한계이다.
또 동정녀에게서 아들을 낳으리라는 예언이 있는데 그 예언을 이루시는 분은 하느님뿐이시지 인간이 이룰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예언은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완성된 것이다. 이렇듯이 율법과 예언서를 완성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시고 이제 그것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 당신이 바로 하느님이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율법이나 예언서에서 이룰 수 없는 것을 이룰 수 있는 신약 시대 즉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 사는 우리는 정말 복이 많은 사람이다. 유럽에서 이룰 수 없는 것을 이제는 완성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마태오 복음 13장 16절-17절)라고 하셨다.
정말 우리는 은혜가 충만한 시대에 살고 있다.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느님의 나라를 직접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충만한 때에 사는 우리는 행복한 이들이다. 우리가 죄를 짓고 용서를 청하면 언제든지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율법으로는 어떻게 해볼 수 없지만 지금은 얼마든지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을 통해서 얼마든지 용서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묵상할 수 있는가? 이 말씀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개인적으로 또는 공동체적으로 지켜 오고 있는 율법이 있을 것이다. 즉 공동체는 공동체가 유지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규칙이나 틀이 있을 것이고, 개인은 개인적으로 자신을 지탱해오고 있는 생각이나 습관 또는 고정관념 등이 있을 것이다. 즉 자기 나름대로 자기 인생관이 있고 그것에 의해 말하고 행동하고 계획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나는 반드시 이런 저런 것을 해야한다. 또는 나는 이런 사람이니까 이것은 되고 저것은 안 된다. 우리 공동체는 이런 공동체이니까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한다." 등 여러 가지 지켜야할 율법들이 있을 것이고 계획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런 것들이 필요하고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규칙도 또는 생각도 완전한 것은 없다.
시대에 따라서 또는 환경의 변화에 따라서 항상 변화되어야 하고 새롭게 발전시켜야 한다. 그렇다면 그런 부족한 면을 채워주고 완성시켜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는 말씀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만든 규칙이나 개인적인 생각이나 계획들은 완전하지 못하다. 이런 부족한 면을 완성시켜 주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 뿐이시다.
“빛으로 빛을 보옵나이다."라는 말씀이 있듯이 말씀에서 빛을 받아야 올바른 계획을 세울 수 있고 올바른 생각이나 규칙을 만들 수 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완전하지 못하고 완전한 것은 오직 말씀뿐이다. 따라서 모든 것을 완성해주는 말씀을 통해서 재해석되어야 하고 재검토되어야 한다.
내 생각도, 계획도, 공동체의 규칙이나 전통, 관습 등 모든 것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완성돼야 한다. 완성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뿐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삶의 기준은 예수님이 완성하신 계명에 준해야 한다. 그것은 비록 작은 계명이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지켜야 할 계명이지만 아무리 내 생각과 계획이 그리고 공동체의 계획과 규칙이 좋은 것이고 위대한 것이라 하더라도 예수님이 제시한 계명을 어기는 것이라면 그것은 버려야 하고 지키도록 강요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완성해야 할 것들이다. 완성한다는 것은 새로운 계명 즉 말씀에 의해 재해석되고 재검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에 맞지 않는 것은 복음적으로 돌려놓아야 하고 복음적인 것이 아닌 것은 폐지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의 생활은 매일 매일 복음의 빛으로 재조명해보고 부족한 것은 채우고 완성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매일 복음을 묵상해야 한다. 나의 낡은 관습이나 고정관념 또는 나의 잘못된 생각들을 복음의 빛으로 완성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도 옛날이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한 것이 없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낡은 사고나 계획들 또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오늘도 완성하러 오시는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다.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매일 매일 완성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오 복음 5장 48절)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매일 매일 우리는 완전한 자 되어 가야 한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시간은 완성하라고 주신 시간이다. 오늘 나에게 주어진 일과 만나는 사람은 나를 완성하라고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다. 나의 부족함을 우리의 공동의 부족함을 완성하는 은혜로운 하루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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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원수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 현존 안에서 삶>
오늘 복음에서는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하십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느님께서 가르쳐 주신 규정과 법규를 잘 실천하고 완성하는 것인지 함께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법을 지켜야 하고,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도 교회가 가르치는 계명과 규칙을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법과 계명을 지켜야 합니까?
- 범칙금을 물지 않기 위해서 지킵니까?
- 주일미사에 빠지면, 고해성사를 보아야 하므로, 주일 미사에 빠지지 않으려 하는 것입니까?
어렸을 때, 저는 말썽을 피워 부모님의 속상하게 했던 기억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가끔씩, 어렸을 때의 저의 잘못된 행동들을 되돌아보며 ‘그 때, 왜 그랬을까?’라며 후회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부모님의 마음을 힘들게 하였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그 한 가지 예로, 초등학교 때 배가 고프기도 하고 친구들이 맛있는 과자 먹으면 저도 먹고 싶어서 부모님 지갑의 돈을 몰래 사용한 적이 있었습니다. 결국 저의 잘못이 발각된 후, 매로 무척 많이 맞았습니다. 그때 매를 맞으면서 ‘부모님 돈을 마음대로 쓰는 것이 잘못’이라는 생각은 하였습니다.
하지만, 나의 행동이 얼마나 부모님을 힘들게 하고,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 생각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매 맞지 않기 위해서 잘못을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저의 잘못된 행동들이 얼마나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는 부모님의 매와 꾸지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기보다도,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기 위해서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모세는 하느님께서 알려 주신 규정과 법규들을 잘 지킴으로써 하느님께 가까이 있을 수 있다고 이렇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실천하라고 가르쳐 주는 규정과 법규들을 잘 들어라. 그래야 너희가 살 수 있고, 주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 그곳을 차지할 것이다.”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의 사명은 율법이나 예언서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 저처럼 매를 맞지 않기 위해서 잘못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 규정과 계명을 어겨 받게 되는 불이익과 처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 주일 미사를 의무 때문에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 주일 미사를 고해성사를 보기 싫어 지키는 것이 아니라,
- 레지오 활동 보고를 위한 실적 위주가 아니라,
- 사랑과 나눔의 실천과는 상관없이 그저 밥 한 끼 굶고 고기 안 먹는 것으로 만족하는 단식재와 금육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행위에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담겨져 있을 때 비로소 우리의 행위가 빛을 발하고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율법을 완성하는 길이라 믿습니다.
은혜로운 사순절에 계명 지키기에만 급급한 소극적인 신앙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지향하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신앙인 가운데,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은총의 하루가 되시길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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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최종목적지는 사랑입니다
율법은 삶의 규범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공동체 생활을 위해서 하느님께서 주신 성스러운 법령입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의 율법은 613개 조항에 이릅니다. 그 가운데 248개 조항은 명령, 365개 조항은 금령이었습니다. 이것은 거슬러 올라가면 십계명이 되고, 더 줄이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됩니다. 한 마디로 줄이면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무시하거나 소용이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의미를 알고 지켜야 합니다. 정신을 알고 지키면 삶이 풍요로워집니다. 그러나 율법이라는 도구를 절대시하면 하느님과의 관계도 멀어지고 사람과의 관계도 형식화됩니다. 따라서 껍데기만을 지킬 것이 아니라 내용을 지켜야 합니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랑 자체이십니다. 우리가 가야 할 최종목적지도 사랑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근본정신을 사랑으로 요약하셨습니다. 율법의 완성은 계명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계명 준수만으로는 율법이 완성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교통법규를 지키는 것도 법이니까 지킨다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안전과 공공의 유익을 위해서 그리고 나의 생명을 지키는 차원에서 지킨다면 그것은 큰 사랑의 행위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에 더 신경을 쓰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지만 사소한 것이라고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예수님을 통하여 완성되지만 동시에 우리 안에서 완성되어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9)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말은 덧없이 지나가고 사라지지만 예수님을 통하여서 하신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이며 최종적인 하느님 뜻의 계시자이기에 우리의 길이요 진리이십니다.” 나는 과연 예수님 안에서 언행일치의 삶을 살고 있는가? 지금 마음을 어디에 두고 사는가를 점검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결정한 것은 미루지 말고 그분의 뜻대로 실천하시고 가장 사소한 것이 가장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큰사람은 행동으로 말합니다.
성경 말씀을 기억해 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십시오”(에페6,6). 여러분은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 1,22)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다.(마르 12,32-33) 는 것을 잊지 말고, 사랑을 실천하여 율법을 완성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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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역사 안에서 우리는 대단해 보이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예술, 과학, 정치, 문화 등, 역사 안에서 한 획을 그은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뛰어난 능력을 지닌 천재일까요? 타고난 능력이 그들을 거장으로 만든 것일까요?
저는 이들이 대단한 천재라고 생각했습니다. 저같이 평범한 사람은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미켈란젤로의 이야기를 듣고는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로마의 시스티나(Sistina Chapel) 성당 천장에 그린 ‘천지창조’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그림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안다면 나를 천재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다.”
뛰어난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노력하지 않으면 어떤 결과물도 만들 수 없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본인이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면 충분하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계속 노력했고, 비로소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역사 속의 위인은 자기가 원하는 결과에 도달할 때까지 이렇게 최선을 다했습니다.
본인의 능력 없음을 생각하기보다 조금 더 노력하지 않았음을 반성해야 합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것도 우리의 노력 없이는 도달할 수 없습니다. 아무렇게나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사는 사람이 과연 주님의 현존을 지금 삶에서 체험할 수 있을까요? 지금 어렵고 힘들어도 최선을 다해 주님의 뜻을 마음에 새기고, 또 그 뜻을 실천해나가는 사람만이 주님의 현존을 느끼며 지금을 잘 살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안식일에 사람을 고쳐 주시고, 죄인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완성하러 오셨다고 합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인 사랑을 완성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철저하게 사랑을 주십니다. 심지어 당신의 목숨까지도 내어놓으시는 사랑을 주시면서, 사랑을 완성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역시 가장 작은 사랑이라도 철저하게 실천할 때,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사람이라고 불리게 된다고 하십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안일한 마음이 아니라, 어떻게든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만이 큰사람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하늘나라에서 큰사람 대접을 받을 사랑 실천에 계속해서 노력하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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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예수님은 자유이십니다>
마태오 5,17-19 (예수님과 율법)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예수님은 자유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유이십니다.
아픈 이를 보듬기 위해
안식일을 깨신 자유이십니다.
의인과 죄인 갈라 세운
아무도 감히 넘지 않은
인습의 벽을 넘으신 자유이십니다.
하느님을 구실 삼아
가난한 순례자 먹이 삼는
사제, 율법학자, 환전상들을
채찍으로 내려치신
굴복하지 않는 자유이십니다.
성전 안에 감금당한
가진 자의 하느님을
하느님 닮은 사람 안에 다시 모시려
기꺼이 십자가 지신 자유이십니다.
살림과 섬김이라는
사랑의 정신은 희미해지고
생기 없는 죽은 문자만 남아
하느님과 사람을 갈라놓고
힘없는 선한 사람 죄인으로 낙인찍는
스스로 거룩한 이들에게 빼앗긴 법을
빼앗은 이들에게서 되찾아
하느님과 사람을 잇는 일치의 법으로
사람 살리는 생명의 법으로
서로를 섬기는 상생의 법으로 세우시려
스스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으신
예수님은 자유이십니다.
<하느님 법은
벗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봉헌하는
십자가에서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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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큰 사랑, 작은 사랑>
오늘 신명기에서 모세는 이스라엘만큼 주님께서 가까이 계신 민족이 있냐고 자기들이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시는 민족이 있냐고 백성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그런데 이것이 주님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만 가까이 계신다는 뜻이겠습니까? 우리에게는 가까이 계시는 분이 아니라는 뜻이겠습니까?
그럴 리 없고 그러실 분이 아니라면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신다고 느끼는 족속이 있고, 전혀 그렇게 느끼지 못하는 족속이 있을 뿐이고 뿐이겠습니다.
이것이 말하자면 하느님 현존 체험을 말하는 것이고, 신앙인이란 하느님 현존 체험 가운데 사는 사람들이지요.
저도 나이 먹어갈수록 더 하느님 현존 체험 가운데 살아갑니다. 아니 체험이라기보다는 늘 하느님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느낌도 하느님께서 내 옆에 계신다는 느낌보다는 내가 늘 하느님과 함께 살아간다는 또는 하느님 안에서 살아간다는 느낌입니다. 그게 그거 같지만 제게는 느낌이 좀 다릅니다.
하느님께서 손님처럼 와 옆에 계신다는 그런 느낌이 아니라 전에는 내가 다른 데 머물곤 했는데 이제는 어디 가지 않고 하느님 안에서 사는 느낌 그것도 늘 머무는 느낌입니다.
바다의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고 늘 물속에서 살듯이 저도 하느님이라는 바다 또는 하느님 사랑과 은총의 바다에서 뭔 짓을 하든 하면서 살아가는데
다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기도 딴짓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전엔 딴짓할 때는 하느님께서 감시하신다는 느낌 또는 하느님께 들켰다는 느낌 같은 것이 있었고
당연히 이때의 하느님은 두려움의 하느님이었는데
지금은 그런 느낌이 거의 없고 오히려 그래서 탈입니다.
아무리 딴짓해도 하느님 사랑을 벗어나지 않겠다는 의지가 있기 때문인지 하느님 사랑 안에 있다는 느낌이 언제나 있고 하느님이 편한데 그것이 문젭니다.
아직도 사랑 미성숙입니다. 아이가 부모의 사랑 안에 머물며 온갖 혜택을 누리지만 부모가 원하는 것은 하지 않고 제멋대로 하며 받기만 하고 드릴 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성숙하면 할수록 그리고 사랑하면 할수록
사랑받는 것도 잘하지만, 드릴 줄도 알게 되고, 사랑하는 분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실천하려고 하지요.
그렇습니다. 무엇이든 다 실천하려고 하는데 큰 것은 물론 작은 것도 다 실천하려고 합니다.
사실 큰 사랑은 상대가 원하는 작은 것까지 빠트리지 않고 실천하고, 작은 사랑은 다 실천할 수 없기에 생각나는 큰 것 한두 가지만 실천합니다.
그렇잖습니까? 사랑이 작은 자식은 부모가 좋아하는 것 한두 가지만 알고, 알더라도 그 좋아하는 것을 벼르고 별러서 해드리지만 사랑이 크신 부모는 자식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그것을 별러서 하지 않고 당연한 듯 일상으로 해주시지 않습니까?
오늘 주님께서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작은 자란 사랑이 작은 자를 말함이고,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은 사랑이 큰 사람이라는 것을 배운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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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은 율법의 완성>
-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 -
기상하여 카톡 메시지를 확인해 보니 방금 12:30분 따끈따끈한 소식이 도착해 있었습니다. 1어제 하루 100% 순수한 사랑을 실천한 형제의 소식이었습니다. 참으로 언제나 한결같이 하루하루 구도자처럼 충실히 살아가는 언젠가 소개했던 치과의사 형제입니다.
“오늘은 야간진료(매주 화요일) 날이라 좀 늦게까지 진료했네요. 멀리서 퇴근하고 와주시는 환자분들이 감사했고, 열심히 일해주는 직원들이 또 고마웠습니다. 오늘도 ‘자비의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한 하루였네요.ㅎ”
각자의 일터가 자비의 배움터, 자비의 학교입니다.
참 아름다운 삶입니다. 사랑의 아름다움입니다. 마음의 순수, 사랑의 마음입니다. 지금도 잊지 못하는 좋은 글귀입니다.
“비밀스런 능력에 관심을 갖는 인간은 신의 임재속에 살 수 없게 된다. 그런 현상들이 생겨나더라도 조금도 주의를 기울이지 마라. 비밀스런 능력을 획득하기는 쉽지만, 마음의 순수에 이르기는 몹시 힘들다. 순수함을 소유하는 자는 종교의 진정한 모습을 안다.”
어제는 코이노니아 자매회 모임이 있었습니다. 10명 참석으로 출석률 100%였습니다. 대부분 할머니 연세쯤 나이지만 고운 외모에 배우려는 열정이 참 대단한 분들입니다. ‘자비의 학교’ 수도원에 매달 1회 하루 피정겸 공부하러 오는 이분들에게 강론중 드린 말씀이 생각납니다.
“이제 저는 그리움도, 외로움도, 기다림도 없습니다.
이런 주제의 시詩도 짓지 않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과 함께, 주님 안에서 오늘 지금 여기서 천국의 충만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도 그렇고 일단 이렇게 고백하고 나면 그대로 된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잊지 못할 세 예화도 잠시 나누고 싶습니다. 매달 모임시 나눠드리는 강론집이 거의 18년만에 중단되었습니다. 매월 강론집을 편집 제본해 주셨던 분이 계속 병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즉시 해 준다는 고마운 분도 있었지만 당분간은 쉬고 싶습니다. 그동안 무려 25년 오랜동안 수시로 고백성사도 보며 수고해준 분에 대한 예의가 아닌 듯 싶었기 때문입니다.
문득 이런 경우가 생각났습니다. 오랜동안 충실히 내조해주던 부인이 세상을 떠났는데 즉시 재혼하는 분들이 있다면 이는 결코 죽은 이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아마도 제 경우라면 끝까지 혼자 살것이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비약적인 비교인지는 몰라도 저에겐 진실입니다. 당분간, 아니 더 이상 제본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오랜동안 수고해준 분에 대한 고마움을 담아두고 기억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채우지 않고 그냥 빈자리로 남겨 두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 또한 순수한 사랑의 발로입니다. 이런면에서 저는 철저한 정통 보수주의자요 진국(거짓이 없이 참된 사람)이란 말을 듣기도 합니다. 지난밤에도 불암사 선재善哉라는 군자같은 개가 수도원에서 노숙했고 사진을 찍어 수도형제들과 나눴습니다. 불교 사찰의 개가 천주교 수도원이 좋아 자주 찾다가 어제는 절에 가는 것도 잊고 주님의 집 수도원 뜨락에서 밤새 노숙했습니다. 저와 같은 열정으로 주님의 집을 사랑하는 수도자라면 정말 순수한 사랑의 절정이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선재로부터 배우는 주님의 집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입니다.
로마 유학중인 수도형제로부터 애로사항이 가득담긴 편지가 공동체에 도착했고 수도형제와 나눈 유머스런 대화가 생각납니다.
“학위 하든 못하든 겸손 공부 하나 잘하면 됩니다.
박사중의 박사가 겸손 박사입니다.”
“그래요. 겸손을 배우러 로마에 간 것 같습니다.”
겸손한 사랑, 순수한 마음, 순수한 사랑, 다 통합니다. 참으로 사랑이 순수하고 깊어질수록 사랑의 표현인 어느 율법이나 계명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악마는 디테일 안에 숨어 있다는 말도 있고, 훌륭한 지도자는 디테일이 강하다는 말도 있습니다. 좋은 지도자는 어느 작은 것 하나 소홀히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서두 말씀이 참 강렬한 느낌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율법에 대한 사랑은 그대로 주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듯 하느님 사랑의 표현인 율법을, 계명을 사랑한 예수님의 각오와 결의가 깊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결코 소홀히 취급할 율법이나 계명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작고 큰 것으로 나눌수 있는 율법이, 계명이 아니라 한결같이 소중히 여겨할 모든 율법이요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 하여 예수님이 결코 율법지상주의자는 아닙니다. 극진하고 순수한 사랑일 때는 저절로 어느 계명 하나 다치거나 소홀히 하지 않겠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 불릴 것이다.”
이런 작은 계명에 충실한 사람이 천국의 큰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불가의 삼학(三學), 계정혜(戒定慧)의 순서도 적절하고 유익합니다. 철저한 계율 준수의 수련이, 훈련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작은 계율을 사랑을 다해 훈련하고 준수할 때 큰사랑, 순수한 사랑에 도달하게 됩니다. 계율(戒律)준수의 바탕이 없으면 깊은 마음의 안정(安定)과 관상의 지혜(智慧)도 불가합니다. 우리의 수행생활에도 그대로 통하는 원리입니다.
결론하여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참으로 순수하고 깊은 사랑일 때 모든 율법을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애당초 모든 율법이나 계명이 우리 위한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러니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율법을, 계명을 사랑하고 지킵니다. 이때 살아계신 사랑의 주님도 만납니다. 신명기의 모세처럼 참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실로 모든 규정과 법규, 율법과 계명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며 마음을 다해 지킬 것입니다. 모세의 충고가 마음 깊이 와닿습니다.
“나는 주 나의 하느님께서 나에게 명령하신 대로 규정과 법규들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었다. 너희는 그것들을 잘 지키고 실천하여라. 그리하면 민족들이 너희의 지혜와 슬기를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위대한 민족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는 오로지 조심하고 단단히 정신을 차려, 너희가 두 눈으로 본 것들을 잊지 않도록 하여라. 그것들이 평생 너희 마음에서 떠나지 않게 하여라.”
흡사 예수님 말씀처럼, 구구절절 심금을 울립니다.
모든 계명들을 충실히 준수하는 훈련과 실천에 진인사대천명의 노력을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지칠줄 모르는 수련과 수행의 원천이 바로 한결같은 열렬한 주님 사랑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의 하늘 나라에서 참으로 큰사람으로 살게 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게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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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5,17)
<사랑을 완성하자!>
오늘 복음(마태5,17-19)은 '예수님과 율법'에 대한 말씀입니다. 율법이라는 틀 안에서 잘 살아가고 있다고 자부했던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에게 예수님의 존재는 '가시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의 질서를 파괴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끝까지 그 생각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율법의 파괴자가 아닌, '율법의 완성자'라고 소개하십니다. 율법의 본질인 사랑을 완성하러 왔고, 율법의 본질을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 불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안에서도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과 같은 모습은 계속 반복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직무대리자, 곧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하라고 기름부음을받고 파견된 사제들을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의 모습으로 대하는 신자들도 있어 보입니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틀 안에 사제가 들어오기를 바라면서, 그 틀 안에 갇혀있는 신자들도 있어 보입니다. 어떤 신자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틀 안에 있는 사제만 사제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느님도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틀 안에 가두어 놓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틀에 하느님이 맞지 않으면 하느님도 거부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자신들의 전통과 틀을 깨부수지 않고 끝까지 예수님을 거부하고 배척했던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일어지탁(一魚之濁)'
공동체와 세상을 흐트러뜨리고 힘들게 하는 '일어지탁과 같은 존재'가 되지 말고, '공동체와 세상을 살리고 기쁘게 하는 신자들, 율법의 본질인 사랑을 말과 행동으로 완성하는 그런 신자들'이 우리 안에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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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Ugec6g6yAW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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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 19)
언제나 바른 길을
일깨워 주시는
선하신
하느님의 길입니다.
하느님 앞에
온전한 마음이
바로 계명이
지닌 선(善)한
마음입니다.
착한 마음을
잘 유지하고
실천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의 본래
정신입니다.
악을 멈추고
선을 실천하는
것이 계명을
적극적으로
완성하는
삶입니다.
이렇듯
하느님의 진리는
실행을 통해서만
우리와
가까워집니다.
스스로 밝고
깨끗한 사람이
되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을 끝까지
잘 지니고
충실하게
실행하는
사람입니다.
계명은 올바른
생활의 길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과 용서의 길은
어느 누가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서로 용서할 때
이루어지는
완성의 길입니다.
생활의 중심에
계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얽매임이
아닌 자유와 해방의
길을 따르는
가장 큰
축복입니다.
해야할 일을
하는 것이
하늘 나라의
참기쁨입니다.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주고 받는 삶에서
중심이 되고
질서가 되는
하느님의
계명은 우리를
원만한 인격으로
이끕니다.
올바른 인격을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쳐야 할
우리는 하느님의
사람들입니다.
역사의 현장에서
생활의 현장에서
펼쳐지는
계명의 치열한
실행이 바로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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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특강]
(1)
https://youtu.be/wcYBHiuGYd4
- 주제 : 예수님의 수난 다시 보기
- 강사 : 춘천교구 권오명 사도요한 신부님
(2)
https://youtu.be/oo21DVXDvBI
- 주제 : 나는 왜 자꾸만 넘어질까?
- 강사 : 춘천교구 조철희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3)
https://youtu.be/3BEGg1o3Gp0
- 주제 : 인생 여정에서의 죄악과 구원
- 강사 : 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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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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