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 당신도 메살라처럼 되고 있어요.’ 아마도 그 말에 대단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지요. 얼마 전 그의 죽음을 보고 왔지만 사실은 아주 오래 전 친구처럼 살았던 로마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철천지 원수가 되어 결국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죽음으로 끝냈습니다. 긴 시간 증오와 복수심으로 살아왔고 드디어 원수를 갚았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마음이 확 풀린 것도 아닙니다. 원망과 저주는 로마라는 나라 전체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메살라 한 사람으로 빚어진 고난이 아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영웅이 된 한 장군을 구해준 덕에 지금의 자리를 얻은 것도 있지만 가족이 당한 아픔을 모두 지울 수는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메살라’라는 인물은 전혀 닮고 싶은 사람이 아닙니다. 로마의 군인으로 꽤 성공한 사람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자신과 가족을 기막힌 저주와 고난의 구렁텅이로 몰아낸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그 죽기보다 더 힘든 노예생활을 견디며 악착같이 살아남으려 발버둥 친 것도 바로 그를 향한 중오의 힘이었습니다. 전차경기장에서까지 치사한 수법으로 자기를 이기려 했던 원수 같은 친구, 결국 자기 꾀에 빠져 죽음에 이르렀지만 그가 남긴 마지막 저주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자기 힘으로서는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없으니 그저 원망과 증오만 남아있습니다. 그렇게 된 모든 시초가 바로 메살라였지만 이제 그는 세상에 없는 준재입니다. 끝나지 않은 저주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에스더’는 유다가 혹 집에 돌아오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변한 것이 없습니다. 어쩌면 반대로 증오가 쌓여가고 있는 듯 느껴졌습니다. 복수는 복수를 부르고 피는 피를 부르고 탐욕은 탐욕을 부를 뿐이예요. 당신은 메살라와 똑같이 되고 있는 거예요. 멈칫했습니다. 잠시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런가? 내가? 나는 그 놈과는 전혀 다른 사람인데. 더구나 그 놈은 로마인, 나는 유대인이잖아. 그런데 왜 내가? 하지만 출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됨을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아무튼 어머니와 여동생을 어떻게든 구할 수만 있다면 뭐라도 하고 싶습니다. 일단 그곳으로 다시 갑니다. 무슨 방법이 있지 않을까 싶었겠지요.
나병환자들로 격리된 굴을 다시 찾아갑니다. 마침 어머니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유다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랍니다. 안 돼! 몇 번이고 외치며 손사래를 칩니다. 그 때 에스더가 찾아옵니다. 두 모녀를 모시고 예수님께 가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하시는 사역에서 그 분에게 가면 이 병도 낫겠다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굴에 와보니 이미 유다가 와 있습니다. 유다를 보고는 놀라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데 딸 ‘티르자’가 보이지 않습니다. 아파서 죽어가고 있답니다. 유다가 굴 안으로 찾으러 들어갑니다. 그렇게 하여 에스더와 함께 어머니와 여동생을 데리고 시내로 들어갑니다. 들어가며 예수가 재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많은 백성들 앞에서 재판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 현장까지 가보고 십자가 형이 언도되어 십자가를 지고 끌려가는 모습을 봅니다. 쫓아갑니다. 그리고 오래 전 노예로 끌려갈 때 자기에게 물을 건네주어 살게했던 사람인 것을 알게 됩니다. 어떻게 이런 선한 사람이? 유다는 놀라서 그 무리를 쫓아갑니다. 그리고 언덕 위에 십자가에 달리는 모습을 가까이서 다 봅니다. 한편 에스더는 두 사람을 모시고 사람들을 벗어나 한적한 곳으로 나옵니다. 갑자기 천둥 번개와 폭우가 쏟아집니다. 길 옆 조그만 굴에 비집고 들어가 비를 피합니다. 그래도 비가 들이닥칩니다. 빗물이 여기저기 몸을 적십니다. 얼굴을 닦아내던 티르자가 깜짝 놀랍니다.
전부터 유다를 인도하려던 노인이 십자가 밑에 유다와 함께 있습니다. 말씀을 피하던 유다가 그곳에 와있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유다는 이 분이 뭐를 잘못했다고 저런 형벌을 받아야 합니까? 묻습니다. 이것을 위해 세상에 오셨다고 답해줍니다. 이해가 안 되지요. 유다가 이렇게 죽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냐 하고 다시 묻자 그는 ‘이것이 시작이오.’ 하고 답해줍니다. 유다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최후를 지켜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보던 유다는 그 분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새로워집니다. 집으로 돌아오자 에스더가 반가이 맞습니다. 에스더의 표정은 큰 기쁨이 그려져 있습니다. 하기는 유다의 얼굴도 예전과 다른 모습입니다.
유다가 에스더에게 말합니다. 돌아가시기 전 그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소서. 사실 그들은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하옵니다." 놀란 듯, 새로운 세상을 만난 듯 말하고 있는 유다의 눈길이 달랐습니다. 그리고 이어 말합니다. ‘그 분의 말씀이 나의 손에서 칼을 거두어 가셨어.’ 에스더가 기쁨 가득한 표정으로 유다를 보고 있는 가운데 계단 위 2층에서 어머니와 여동생 티르자가 내려옵니다. 환한 표정으로. 유다가 눈을 돌려 그들을 보며 놀랍니다. 두 사람의 얼굴이 예전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쁨과 반가움으로 가득 차 모두가 껴안습니다. 그리고 에스더가 올라와 그들 가운데 함께 합니다.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아니 세상은 그대로였지요. 바뀐 것은 세상이 아니라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영화 ‘벤허’(BenHur - A tale of the Christ)를 보았습니다. 1959년 작품입니다. 반세기도 전 아마도 중학교 시절 본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때 70mm 대형화면으로 관람했습니다. 오늘로 이야기한다면 아마 아이맥스 수준일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약 15분 간의 전차경주는 언제 보아도 대단한 광경입니다. 그 후 다섯 번 이상은 보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만큼 TV에서 자주 방영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원하면 아무 때라도 시청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나이 들어 다시 보니 느낌과 감동이 여태와 또 다릅니다. CG도 없던 당시 이만한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에 다시 한 번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