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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올라온 미국 원수 들중 제가 아는 유일한 10성 장군인 헨리 아놀드 공군원수 & 육군원수가 있길래
영문위키 번역질해서 올려봅니다 ^^ ㅋ (의역이나 오역 주의요 ㅋ)
-상당히 온화한 인상을 가진 헨리 아놀드 장군-
2차대전에서 유명한 장군들을 뽑는다면 대부분 기억하기로는 독일에는 롬멜장군 , 만슈타인원수를, 소련군에는 주코프,
영국에는 몽고메리, 미국에는 맥아더, 아이젠하워, 니미츠등을 들수 있겠습니다. 물론 우리가 잘 모르는 원수들도 많습니다.
예를 들면 위의 헨리 아놀드 원수 같은경우도 우리에겐 잘 안알려진 장군이겠지요. 하지만 이 분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무려 10성장군 +_+ 별이 10개 ㅋ 물론 육군원수 5개 + 공군원수 5개의 합쳐서 10성이지만 'ㅅ' ㅋ 얼마나 대단한 활약을 하신분이
길래 우리가 흔히아는 전쟁영웅인 맥아더나 아이젠하워등보다도 별이 5개나 많을까요 ㅋ그럼 이분의 일생을 따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헨리 H. 아놀드 장군은 1886년 6월 25일 미국 펜실베니아주 Gladwyne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의사였는데 아놀드
가 11살 때 미국-스페인전쟁(쿠바를 둘러싸고 벌어진)펜실베니아 주방위군에 군의관으로 임관해서 24년간 복무했다고 합니다.
헨리 아놀드 장군은 1903년 펜실베니아 Ardmore에 있는 Lower Merion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원래는 침례교 신학대학에
입학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그의 형이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딴 대학으로 가자, 형 대신 미국육사(웨스트포인트)에 시험을치게
되었고 2등으로 입학했다고 합니다. 4년뒤에 111명의 생도중 66등으로 졸업하고 1907년 소위로 임관하여 필리핀에 주둔하고 있던
29보병연대에 부임하게 됩니다. 그리고 2년뒤인 1909년 29연대는 뉴욕의 포트 제이로 재 배치되었고 새로운 임무인 프랑스 파리로
배치되기전에 처음으로 비행기가 나는 것을 보게됩니다. 그는 거기에 감명을 받았고, 중위가 되었을때 그는 군수성으로 가려했지
만 비행기에 매료되어 통신부서에 지원을했고, 그는 곧 오하이오주 데이튼에 위치한 15기병연대에 배속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라이트 형제가 세운 비행학교에 입학하게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교육을 이수해서 29번째로 비행면허를 가진 조종사가
되었고, 군용 비행면허를 No.2로 따게 됩니다.
-라이트 형제(우리가 익히 아는 그 형제가 맞습니다)의 비행학교서 젊은 날의 헨리 아놀드-
그리고 이렇게 비행사가 된 헨리아놀드의 주요 임무는 비행기를 이용한 우편배달 및 통신업무-헨리 아놀드 장군의 보직은
통신장교-였습니다. 여러번 사고를 겪기도 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고, 1913년 결혼도 하고 여러번의 보직 이동끝에
1916년에는 미국에서 비행학교 교관으로 지내기도 하다가 1917년 대위로 제 7 육군비행대의 지휘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917년 10월 소령이되었죠.
-소령 시절 헨리 아놀드 앞에 엔진은 처음 나온 신상 비행기 엔진(12기통)-
그리고 1918년 1차대전이 막바지에 다다랐을때 그는 비행대와 함게 퍼싱의 미국 유럽원정단에 파견되었고, 늦은 10월 프랑스에
도착했지만 그 당시 맹위를 떨치던 스페인독감에 감염되어 잉글랜드로 후송되었습니다. 그리고 독감이 완치되어 다시 최전방에
돌아온 1918년 11월 11일 1차대전이 종전되었죠.
미국으로 돌아온 비행대와 헨리 아놀드는 1918년 5월 20일 드디어 통신병과에서 분리되어 나온 육군항공대에서 새롭게 일을 시작
하게되었지만 이 항공대의 지휘관들은 전부 육군 장성들이었고, 그들은 항공대의 미래에대해 회의적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항공대의 첫 지휘관인 Charles T. Menoher소장은 원래 보직이 야전포병지휘관 이었고 "군사적인 목적에서 항공대는 육군에게
절대로 그 어떠한 도움도 주지 못할것이다"라고 말했을 정도였죠. (과연 그럴까? 육군 보고있나?)
한편 1차대전이 끝난후에 미국은 군대를 감축하기 시작했고, 헨리 아놀드는 1919년 8000명의 항공사와 장비를 퇴역시키는 일의
감독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920년대에는 여러 질병에 걸려 후송되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러번의 교육과정을
거치기도 하고 빌리미첼의 독립 공군 창설에 동참하여 같이 힘을 쓰기도 했습니다.
-군법회의에서 빌리 미첼(가운데 서 있는 사람)-
-빌리 미첼이 조종하는 항공기가 전함을 상대로 폭격 실험을 하고 있다-
여기서 빌리 미첼의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미국공군의 아버지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1921년 위의 실험등으로 공군력의 위력을
보여주었고, 공군의 미래를 내다보았던 선구자였지만 공군을 창설 시키기 위해서 해군을 지나치게 비방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불명예 제대라는 벌을 받게됩니다.
다시 아놀드 얘기로 돌아와서 1931년 그는 중령이 되었고 첫 폭격대의 지휘관이 되었죠. 그리고 그는 공군력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기위해 주로 사회 공헌이나 구호등에 자신의 비행대를 투입시켰습니다. 예를 들면 1932년말부터 1933년 눈 폭풍이
몰아칠때 고립된 마을에 폭격기를 이용 음식을 전달한다거나 1933년 3월달에 일어난 롱비치 대지진 사건때에도 구호활동을
하고 또 3000염명의 소년들을 부대로 초청하여 캠프를 열거나 하는 방식으로 다양하게 사람들의 관심도를 높였습니다.
그리고 1935년 3월 1일 육군항공대 사령부가 창설되었고 모든 전투 비행대와 폭격비행대가 그 사령부아래에 예속되었고
육군항공대 사령관 프랭크 안드류 소장은 아놀드를 제 1항공대의 지휘관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는 새로운 항공기나 폭격기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때부터 2차대전이 터지기 직전까지 그는 B-17 폭격기의 개발과 연구에
관여하며 지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41년 미국이 전쟁에 뛰어들었을때 그는 소장이 되었고 육군항공대의 지휘관으로 미 제 8공군을 구성하여
나치 독일의 주요도시를 폭격하는 작전을 새웠습니다.
-나치 독일의 군수시설을 박살낸 미공군의 B-17-
또한 그는 B-29의 개발에도 참여했고, B-29가 대량으로 생산되기 시작하자 미 제 20공군을 구성하여 일본본토를 공격하게
하였습니다.
-날아라 B-29-
그는 애초에 미 8공군의 전략과 성과를 바탕으로 제 20공군을 주로 일본 본토 폭격및 군수시설 파괴,
대도시 폭격등에 쓰려고 했지만 태평양쪽 지휘관 맥아더나 니미츠는 전략공군의 가치를 잘 몰랐고, 헨리 아놀드 장군의 전략과
정 반대되는 의견들로 -니미츠는 그걸로 공항이나 폭격하자고 했고, 맥아더는 태평양 남부 섬이나 먹자는 했다고 합니다 ㅋ-
인해서 대립하기도 했죠.
특히나 미 해군 작전부장인 어니스트 킹과는 말다툼을 벌였을 정도로 사이가 서먹서먹했다고 합니다.
-미해군 작전부장(현 참모총장) 어네스트 조셉 킹 대장-
잠시 일화를 소개하자면 제 20공군 지휘관 르메이 장군에게 니미츠제독이 "일본 카미카제 때문에 못살겠다 너네 B-29
가지고 일본 비행장 폭격ㄱㄱ싱"하자 르메이 장군이 자신의 상관인 헨리 아놀드 장군에게 찾아가서 -헨리 아놀드 장군은 1943년
대장 진급-"지금 도시랑 공장 날리기도 벅찬데 코딱지만한 비행장 폭격해야함?? 내가 독일서 한참 날릴때는-르메이 장군은 제
8공군 지휘관도 했었음-해군넘들 얼씬도 못했는데 해군한테 독일넘들 당한 이야기좀 잘 해주세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결국 헨리 아놀드 대장은 니미츠 제독 직속상관인 어네스트 조셉 킹 대장에게 찾아가서 "전략공군은 적의 군수시설이나
공장등등을 파괴하는 거임, 공항 같은 데는 너네 항공모함에 있는 것들 쓰쇼"라고 하자 킹 대장도 이에 질쎄라 "땅개 넘들
해군 안도와주겠다면 해군도 땅개 안도와줄꺼임, 미국 본토서 보급품 날라주는게 누구지?"라고 받아치는 바람에
찍소리도 못하고 걍 르메이 장군에게 "니미츠 제독 도와줘라"라고 했다죠 ㅋ 결국 르메이는 화를 삭이며 니미츠 제독을 도와줘야
했고 그 화풀이 대상은 고스란이 일본에게 -_-;;;;;
하여간 육군항공대 지휘관으로서 아놀드 장군은 상당히 혁혁한 공을 세웠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43년 5월 13일 대장으로 진급
했고, 1944년 12월 21일 육군에서 4번째로 Five Star 원수가 되었습니다. -1번 조지 마셜 2번 맥아더 3번 아이젠하워-종전 후에도
군에서 복무하다가 원래 좋지 않던 심장때문에 1946년 6월 30일 결국 제대를 하였습니다.
제대후에 그는 캘리포니아에 40에이커(160,000 m2)의 땅을 사들여서 농장을 지어서 생활하였고 그의 전기를 남겼습니다.
-'Global Mission'이라는 책입니다.- 그리고 1947년 9월 18일 미육군항공대서 독립한 미공군이 창설되자 헨리 아놀드 장군은
비록 제대했지만 첫 미공군참모총장에 임명되었고 1949년 5월 7일 첫 미공군원수로 임명되었습니다. 첫 공군원수이자 마지막
공군 원수라고 하네요. 헨리 아놀드 장군은 1950년 1월 15일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데요 오랜 지병이었던
심장병이 발병해서 비교적 이른 나이에 죽었다고 합니다. 그의 장례식은 수도 워싱턴에서 국장으로 치뤄졌고 알링턴 국립묘지에
그 유해가 안장되었다고 합니다.
헨리 아놀드 장군이 미공군에 남긴 유산은 상당해서, 테네시에는 아놀드 공군기지가 있고, 미공군사관학교에는 그를 기리는
아놀드 홀이 있다네요. 또 미공군전역자 협회에서 주는 아놀드 상이란것도 있다고 하네요.
미공군의 실질적인 창설자이면서 미 육군원수 및 공군원수라는 유일무이한 10성장군, 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였지만
묵묵히 제 할일을 해낸 미 육군항공대의 지휘관으로 적의 생산시설을 파괴하여 공군의 위력을 과시한 그는 현대 공군이
나아가야할 길을 제시한 선각자가 아니었을까요?
"전투기 조종사는 영화를 만들지만 폭격기 조종사는 역사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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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전투기 조종사는 영화를 만들지만 폭격기 조종사는 역사를 만든다!" 호쾌한 말이네요! 그러나 폭격기 조종사가 만드는 역사는 대개 살육이나 파괴의 역사로 분류되겠지요... 때때로 멋과 파괴가 함께 공생한다는 것은 씁쓸한 일입네다...ㅋ
폭격이란게 -_- 생각보다 무시무시하죠. 민간인 피해도 상당하고요, 특히 대도시 폭격을 주로 해대던 영국의 해리스경이나 위에글에도 잠깐 소개한 르메이 같은경우 지금은 까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죠. 흔히들 원폭으로 인해 사망자가 많이 발생했다고 하지만 -_-; 실제로는 르메이가 주도한 대규모 폭격이 더 많은 사상자를 냈죠. 그 글은 너무 끔찍해서 나중에 기회가 되면 따로 상세히 소개할까 합니다.
오옷 기대됩니다!!! ㅋ
하히해 // 한국전쟁때도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이 융단폭격에 제대로 시달렸죠; '낙동강 오리알'이 여기서 유래했다고 할 정도니....
커티스 르메이같은 사람은 정말 정신병자가 아닌가 의심해 볼 수 있을정도의 사상세계를 보여주는...전략폭격으로 일본을 석기시대로 되돌려버리겠다는 발상은;;;(아마 전쟁이 조금더 지속되었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네요)
발리안/ 르메이는 힘 중독자 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힘을 다루는 것과 중독되어 마구 휘두르는 것은 분명 다른 것이겠지요. 그런 면에서 르메이와 롬멜은 비교하는 것 자체가 롬멜에게는 결례일지도 모르겠군요.^^
커티스 르메이 똘끼가 장난아니었다죠 ㅋㅋㅋ
커티스 르메이가 이르기를 "ㅇㅇ를 석기시대로 돌려버리겠다!",
....여기서 ㅇㅇ에는 잽스, 한국(당시 부카니스탄), 북베트남 등이 대입 가능합니다. 이사람의 사상은 "There are no innocent civilians." 이 말 한마디로 요약가능.
르메이의 생각으로 일본에 뿌려진 소이탄과 재래식 폭탄을 생각하면 ㅎㄷㄷ;;; 원폭이 안떨어지고 이인간의 석기시대 독트린이 몇년만 더 현장에서 구현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호기심마저 생깁니다 ㅡㅡ
힘 없으면 나가 죽으라는 사고가 극단점을 찍은 인물 = 르메이.
Balian de Ibelin // 르메이 + 올림픽 작전이었다면 그 결과물은 "폴아웃 : 뉴 도쿄" 가 되었겠죠. 한국전쟁 후의 참상과는 비교도 안되는'ㅂ'
르메이가 주도한 폭격은 성서에 나오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수준이었음. --;;;;
ㅡ.ㅡ;;;;;;;;;;;;;;;
자세히 쓰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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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하고 갑니다..
오, 저런 분도 잇었군요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