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준 李泰俊(1883 ~ 1921)】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의관 감무(監務)」
1883년 11월 21일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 군북면(郡北面) 명관리(明館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인천(仁川)이며, 자는 원일(元一), 호는 대암(大岩)이다. 아버지는 이질(李瓚), 어머니는 박평암(朴平岩)이다. 부인은 안위지(安渭址)이며, 자녀는 이수남(李壽南)·이수용(李壽用)이다. 국외 망명 이전 부인 안위지와 사별하였다. 1918년 몽골에서 김규식(金奎植)의 사촌 동생 김은식(金恩植)과 결혼하였다. 어린 시절 고향에서 한학을 배웠으며, 1907년 10월 1일 세브란스병원의학교에 입학하여 1911년 6월 21일 졸업하였다. 졸업 후 세브란스병원에서 근무하였다.
세브란스병원의학교 재학 시절 안창호(安昌浩)와 만난 후 1910년 초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의 외곽단체인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에 참여하였다. 이른바 ‘105인 사건’ 이후 일제의 침략과 탄압에 분개하여 국외 망명을 결심하였다.
1911년 10월 중국에서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일어나자 혁명 운동에 위생대(衛生隊)로 참여하기 위해 김필순(金弼淳)과 함께 중국 망명을 계획하였다. 그해 12월 31일 서울역에서 김필순을 배웅하였다. 김필순 배웅 직후 세브란스병원에 중국 망명 소식이 알려지게 되었음을 인지하고, 같은 날 정오 평양행 열차에 탑승하여 중국 난징(南京)으로 이동하였다.
난징 기독마림의원(基督馬林醫院)에서 의사로 근무하였다. 1912년 중반 중국 정당 인물들과 중국 혁명 세력 학생군(學生軍)에 가담하였던 김규극(金奎極)·권탁(權鐸)·홍윤명(洪允明) 등 유학생들과 교류하며 독립운동 계획을 모색하였다. 그해 8월 10일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샌프란시스코 지방회 특별회에 입회하였다.
1913년 5~6월경 러시아 연해주(沿海州)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이인섭(李仁燮)과 만나 외몽골에 독립군 양성을 위한 사관학교를 설립하는 문제를 논의하였다. 1914년 김규식·서왈보(徐曰甫)와 함께 난징에서 출발하여 몽골 쿠룬(庫倫, 현 울란바토르)으로 이동하였다. 몽골에 군관학교를 설립하려 하였으나 자금 문제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쿠룬에서 동의의국(同義醫局)을 개업하였다. 동의의국은 “같은 뜻을 가진 동지들의 병원”이라는 의미이다. 몽골에서 의료활동으로 명성을 얻어 몽골 국왕 보그드 칸(Bogd Khan)의 어의(御醫)로 활동하였다.
1915년 9월경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졸업생들로 조직된 신흥학우단(新興學友團)을 후원하였다.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장자커우(張家口)에서 십전의원(十全醫院)을 운영하고 있던 세브란스 출신 김현국(金賢國)과 연락하면서 장자커우와 쿠룬 일대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였다.
1919년 1월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는 김규식에게 독립운동자금을 제공하였다. 그해 7월 의료활동의 공을 인정받아 몽골 국왕 보그드 칸으로부터 국가 훈장을 받았다. 국가 훈장은 “귀중한 금강석”이란 뜻을 가진 “에르데니-인 오치르”라는 명칭이었는데 제3등급 제1급으로 외국인에게 수여하는 최고 등급의 훈장이었다. 같은 해 9월 『독립신문』에 의연금을 납부하였다.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의관 감무(監務)에 임명되었다. 같은 시기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 연락 담당 당원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1월 22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한형권(韓馨權)·여운형(呂運亨)·안공근(安恭根)이 러시아 파견 외교원으로 선정되었다. 한인사회당 간부 한형권은 1920년 4월 말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출발하여 쿠룬에 도착하자, 한형권을 만나 여비를 지원하였다. 모스크바의 레닌 정부에서 한국 독립운동에 자금을 지원하자, 한인사회당 간부 김립(金立)과 함께 두 차례에 걸쳐 모스크바 레닌 정부가 조달한 독립운동자금을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운반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같은 해 가을 제1차로 조응순(趙應順) 등과 함께 독립운동자금을 상하이(上海)로 운반하였다.
독립운동자금을 운반한 이후 베이징에서 의열단(義烈團) 단장 김원봉(金元鳳)을 만난 후 의열단에 입단하였다. 김원봉과 협의하여 폭탄 제조 기술자로 헝가리인 마쟈르를 섭외하기로 하고 쿠룬으로 이동하였다. 쿠룬에서 중국군 사령관 가오 시린(Gao Si-lin)의 주치의로 활동하였다.
1921년 2월 3일 러시아 백위파 장군 운게른 스테른베르그(Ungern Sternberg) 부대가 쿠룬을 점령하였다. 철수하는 가오 시린의 동행 명령을 거부하고 제2차 독립운동자금 운반과 마쟈르 섭외를 위해 쿠룬에 잔류하였다. 마쟈르와 함께 독립운동자금을 베이징으로 운반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백위파 부대에 참모로 참가한 일제 장교들이 선동하여 운게른에게 체포되었고 독립운동자금을 압수당하였다. 가택 연금 중 공산주의 관련 혐의로 처형당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