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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니, 삼성전자, 그리고 애플" 1990년대 홍콩에 부임하면 장만해야 할 가전제품 목록이
있는데
교민들은 이를 족보(族譜)라고 불렀다. 족보를 보면 TV는 소니 트리니트론,
VTR은 내쇼날(파나소닉), 캠코더는 소니, 카메라는 니콘, 냉장고는 월풀 등이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그중에서도 소니 TV의 위상은 독보적이었다.
좀 먹고 살 만한 집이라면 거실에 소니 TV가
있었다.
반면에 삼성·LG TV는 홍콩 상점에서 잘 보이지 않는
구석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디지털 TV에는 삼성과 LG가 1·2등을 차지하고,
휴대폰에 에니콜 등 한국 상품이 대거 들어갔다. 기술과 혁신의 상징이었던 소니 왕국이
한국 제품에 밀려난 것은 상당한 충격이었다. 일본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2차 대전이 끝난 후인 1946년(당시 도쿄통신공업) 출발한
소니는
일본 최초로 테이프 리코더와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개발했다.
1979년에는 혁명적인 제품으로 꼽히는 워크맨을 세상에
선보였다.
또 세계 최초로 CD플레이어를 만들었으며,
1994년에는 새로운 개념의 가정용 게임기인
플레이스테이션(PS)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2008 회계연도에는 2900억엔(약 4조원)에 달하는 적자를 기록했고, 그 다음해 초 약 1만6000명을 감원하는
혹독한 구조조정을 벌이는 신세로 전락했다. 반면 소니가 경쟁자로 끼워주지 않았던 삼성은
그해 2분기에만 2조5000억원 영업이익에, 32조원 매출이라는 놀랄 만한 성과를 기록하고 있다.
소니가 이렇게 추락한 원인은 한마디로 '자만하다가 망한 것'이다. 소니는 기술이라면 누구보다도 자신 있었다.
그리고 소비자들은 가장 앞선 소니 기술로 만든 제품을
구매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대표적인 예가 VTR 시장에서 베타 방식을 고집하다가,
시장에서 완전히 소외된 것이다. 소니 경쟁사들은 하나로 똘똘 뭉쳐
소니 베타 방식을 외면하고, VHS 방식을 택했다. 소비자들도 콘텐츠가 많은 VHS를 선택하면서
소니는 VTR 시장에서 눈물을 머금고 철수했다. 카세트테이프와 CD 플레이어를 거쳐,
소니는 MD(미니디스크) 플레이어를 차세대 기기로 정했다. '광디스크' 기술 세계 1위인 소니는 미니디스크가
세계를 지배할 것으로 보고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소니만 빼고 나머지 모든 업체는
반도체에 음악을 저장하는 MP3를 택했다. 결국 휴대용 음악기기 시장은
미국 애플이 내놓은 아이팟이 워크맨을 대체했다. 소니는 기술의 우수성을 강조해서 광디스크에
수십만 곡을 저장할 수 있다고 선전한 반면, 애플은 인터넷상에 떠 있는 음악을 아이팟이
쉽게 다운을 받을 수 있게 하는 콘텐츠의 호환성을 강조했다. 또 애플은 아이팟이나 아이폰을 직접 만드는 대신
대만 업체에 위탁 생산하는
방식을 택했다. 소니만 만들 수 있는 제품은 사라졌고,
누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냈을 때
이를 복제하는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진 것이다. 혼자서 모든 것을 다 개발하려는 폐쇄적 사고방식도 무너지고
있다.
최근에 삼성전자가 전 세계 불황 속에도 최고의 성적을 거두고 있다는 기쁜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갤럭시노트7의 성공으로 애플을 넘는 것 아니냐는 전망도 나오고.... 기쁠 때 더 잘해서 한 단계 더 나가야 한다. 1위를 탈환하는 데 수십년이었다면 3~4위 추락은 순식간이다.
"모두가 이기는 게임"
팀 조직력 강화 실험에 참여한 적이 있다. 조직 구성원들을 무작위로 뽑아 여섯 명씩 팀을 나눈 뒤, 각 팀에게 날달걀 하나와 플라스틱 빨대
몇 개, 보호 테이프를 주었다.
그 물건들로 달걀을 약 5미터 높이에서 떨어뜨렸을 때 깨지지 않도록 하는 장치를 만드는 게 과제였다.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는
바람에 제시간에 과제를
끝내지 못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크게 웃으며 박수를
쳤다. 우리에게 흥미로운 질문을
던졌다. 실패하기를 원하는지 헤아려
보세요. 왜 그런지 잠깐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팀이 실패하기를 바랐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털어놨다. 무의식적인 가정 하에서 작업을 했던
것이다. 그것은 누구는 승리하고 누구는 패하는 일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열어줄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우리 팀이나 부서만을 생각하지 말고 그보다 더 큰 팀인 조직 전체의 일원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생 역시 이기거나 자는 게임이 아니다. 우리가 이기기 위해 다른 누군가가 질 팰요는 없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단지 우리 가족의 일원이 아니라 그보다 더 큰 팀의 일원이다. 깊고 심오한 결속을 느낄 수
있다.
"1년 중 한여름에는 게으름 즐긴 박지원"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의 건강법에 관심을 가져보면 어떨까. 연암은 <양반전>, <허생전> 등의 소설을 지은 문장가로 유명하지만 과거를 포기해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조용히 지내다가 사은사(謝恩使)로 가는 삼종형(三從兄)을 따라 청나라에 다녀와서 쓴 <열하일기(熱河日記)>로 인해 일약 사회 명사로 떠올랐다. 가난한 살림에다 지인들의 배신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69세까지 살아서 당시로서는 비교적 장수했던 편이다.
평소엔 동 트기 전 일어나 일해 연암은 여름이면 연암골의 더위를 피해 서울 집에서 혼자 지냈다. 그때의 생활을 묘사한 <수소완정하야방우기(酬素玩亭夏夜訪友記)>에 “경조(慶弔)의 인사치레도 전폐하는가 하면 며칠씩 세수도 안 하고, 열흘 동안이나 망건도 안 쓴다. 졸다가 책 보고, 책 보다가는 졸고 해도 아무도 깨우는 사람이 없다. 진종일 자기만 하는 날도 있었다. 더러는 글도 쓰고 혹은 새로 배운 철금(鐵琴)을 뜯기도 한다”고 했다. 과연 이렇게 생활하는 것이 건강법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시기의 연암은 옛 선비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데, 스스로 일탈해 평소와는 달리 느긋하게 살기로 작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몸이 비대하고 더위를 잘 타는 편인데다 평소 연암골에서 워낙 힘들게 살았기에 한 철은 느긋하게 지냈던 것이다. 늘 바쁘게 살던 사람은 가끔 긴장을 풀고 게으름을 부릴 필요가 있다. 독일의 페트 악스트 교수는 마라톤이나 스쿼시 같은 운동 대신 게으름을 피우거나 낮잠을 자는 사람이 더 오래 살 수 있다고 했다. 직업적 긴장을 해소하는 방법과 장수의 비결로 목표 없는 게으름을 꼽았다.
연암이 그렇게 게으름뱅이로 지냈던 것은 여름한 철뿐이었고 평소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늘 자정이 지나 닭 우는 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취침했으며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났다고 한다. 특히 40대 초반에 가족을 이끌고 연암골로 피신해 은거할 때는 엄청 부지런하게 일했다. 그의 수기를 보면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칠팔리를 걷지 않으면 닭 우는 소리가 들리는 마을에 당도하지 못할 만큼 인적이 드물었으며 호랑이와 이리가 어슬렁거리고 다람쥐와 어울려 사는 곳”이었다고 한다. 그런 곳에서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치고 밤과 배 등 여러 과실수를 키우고 벌을 쳐 꿀을 채취하는 등 다각적인 영농법을 실천했다. 반남 박씨 가문은 왕비와 부마를 여러명 배출하고 숱한 정승과 판서가 나온 대단한 명문집안이다. 그럼에도 대대로 부귀와 안일을 추구하지 않았고 기름진 음식도 별로 먹지 않았으며 심지어 ‘탈속반(脫粟飯·첫 번 찧은 쌀로 지은 밥)’을 먹었다고 한다. 도정하지 않은 곡물로 지은 밥은 대사증후군이 올 위험을 크게 줄이는 건강식이다. 연암의 조부인 박필균(朴弼均)은 경기도 관찰사를 지냈지만, 청렴결백하고 근검절약을 실천했다. 자손들에게 가르치기를 “너희들이 장차벼슬하여 녹봉을 받는다 할지라도 넉넉하게 살 생각은 하지 말아라. 우리 집안은 대대로 청빈(淸貧)하였으니, 청빈이 곧 본분이니라”고 했다. 실제로 연암 부친의 여러 형제들이 사랑방의 좌우에서 조부를 모셨으므로 연암 형제가 책을 펴놓고 공부할 공간조차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연암이 16세에 혼인했는데, 집이 너무좁아 그 부인은 거처할 곳이 없어 친정에서 지낼 때가 많을 정도였다. 연암은 금강산, 묘향산, 속리산, 가야산, 평양, 화양동, 단양 등 여러 명승을 유람했다. 만약 과거공부에 매달리거나 벼슬길에 올라 업무와 당파싸움에 지쳤다면 건강이 온전하게 지켜지지 못했을 가능성이 컸다고 봐야겠다. 젊었을 때는 술을 마시지 않았으나 산수를 유람할 때부터 술을 즐겼다.
유람과 적당한 음주·음악 즐겨 그렇지만 연암골에서나 가끔 취했을 뿐 평소에는 취하도록 많이 마시지는 않았다. 집에는 생황, 거문고 등의 여러 악기가 있어 손님이 오면 연주하게 했다고 한다. 뒤에 경상도 안의(安義·함양) 현감이 된 뒤에는 연못을 파서 고기를 기르고 연꽃을 심은 뒤 사람들을 초대해 술자리를 마련했다.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시를 읊었고 때때로 기악을 베풀기도 했다. 그림도 그렸는데, 국죽도(菊竹圖)가 전해온다. 그럼에도 연암이 훨씬 더 장수하지 못한 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마음의 병이 왔던 것이다. 중년 이래 험난한 일들을 겪으며 울적한 마음을 펴지 못해 늘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병이 있었다. 특히 66세에 조부님의 묘를 포천으로 이장한 뒤 조상의 묘소가 파헤쳐지거나 훼손당하는 산변(山變)을 당했다. 그로 인해 더욱 애통해하고 상심하는 바람에 68세 때의 여름 이후 병세가 극도로 심해졌으나 약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둘째, 친한 벗들이 일찍 세상을 떠났다. 과거를 단념하자 그의 집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어졌고 절친했던 벗과 제자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나마 두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당시로서는 보편적인 50대 나이로 사망했다.
호주 연구팀이 70세 이상 노인 1477명을 10년간 추적 조사한 결과, 교우관계가 가장 좋은 492명은 하위 492명에 비해 22% 더 오래 살았다고 한다. 셋째, 부인을 일찍 사별하고 홀로 지낸 것이다. 51세에 부인이 세상을 떠났지만 재혼하지 않았고, 기생도 가까이하지 않았다. 음양으로 보면 남자는 양(陽)이고 여자는 음(陰)인데, 연암은 순양(純陽) 체질인데다 여인 없이 홀로 지냈으니 음양의 균형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 미국 시카고대학 노화센터에서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심장병을 앓고 있는 기혼 남성이 건강한 심장을 가진 독신 남성보다 4년 정도 더 오래 사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1년 중 한여름에는 게으름 즐긴 박지원"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의 건강법에 관심을 가져보면 어떨까. 연암은 <양반전>, <허생전> 등의 소설을 지은 문장가로 유명하지만 과거를 포기해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조용히 지내다가 사은사(謝恩使)로 가는 삼종형(三從兄)을 따라 청나라에 다녀와서 쓴 <열하일기(熱河日記)>로 인해 일약 사회 명사로 떠올랐다. 가난한 살림에다 지인들의 배신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69세까지 살아서 당시로서는 비교적 장수했던 편이다.
평소엔 동 트기 전 일어나 일해 연암은 여름이면 연암골의 더위를 피해 서울 집에서 혼자 지냈다. 그때의 생활을 묘사한 <수소완정하야방우기(酬素玩亭夏夜訪友記)>에 “경조(慶弔)의 인사치레도 전폐하는가 하면 며칠씩 세수도 안 하고, 열흘 동안이나 망건도 안 쓴다. 졸다가 책 보고, 책 보다가는 졸고 해도 아무도 깨우는 사람이 없다. 진종일 자기만 하는 날도 있었다. 더러는 글도 쓰고 혹은 새로 배운 철금(鐵琴)을 뜯기도 한다”고 했다. 과연 이렇게 생활하는 것이 건강법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시기의 연암은 옛 선비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데, 스스로 일탈해 평소와는 달리 느긋하게 살기로 작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몸이 비대하고 더위를 잘 타는 편인데다 평소 연암골에서 워낙 힘들게 살았기에 한 철은 느긋하게 지냈던 것이다. 늘 바쁘게 살던 사람은 가끔 긴장을 풀고 게으름을 부릴 필요가 있다. 독일의 페트 악스트 교수는 마라톤이나 스쿼시 같은 운동 대신 게으름을 피우거나 낮잠을 자는 사람이 더 오래 살 수 있다고 했다. 직업적 긴장을 해소하는 방법과 장수의 비결로 목표 없는 게으름을 꼽았다.
연암이 그렇게 게으름뱅이로 지냈던 것은 여름한 철뿐이었고 평소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늘 자정이 지나 닭 우는 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취침했으며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났다고 한다. 특히 40대 초반에 가족을 이끌고 연암골로 피신해 은거할 때는 엄청 부지런하게 일했다. 그의 수기를 보면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칠팔리를 걷지 않으면 닭 우는 소리가 들리는 마을에 당도하지 못할 만큼 인적이 드물었으며 호랑이와 이리가 어슬렁거리고 다람쥐와 어울려 사는 곳”이었다고 한다. 그런 곳에서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치고 밤과 배 등 여러 과실수를 키우고 벌을 쳐 꿀을 채취하는 등 다각적인 영농법을 실천했다. 반남 박씨 가문은 왕비와 부마를 여러명 배출하고 숱한 정승과 판서가 나온 대단한 명문집안이다. 그럼에도 대대로 부귀와 안일을 추구하지 않았고 기름진 음식도 별로 먹지 않았으며 심지어 ‘탈속반(脫粟飯·첫 번 찧은 쌀로 지은 밥)’을 먹었다고 한다. 도정하지 않은 곡물로 지은 밥은 대사증후군이 올 위험을 크게 줄이는 건강식이다. 연암의 조부인 박필균(朴弼均)은 경기도 관찰사를 지냈지만, 청렴결백하고 근검절약을 실천했다. 자손들에게 가르치기를 “너희들이 장차벼슬하여 녹봉을 받는다 할지라도 넉넉하게 살 생각은 하지 말아라. 우리 집안은 대대로 청빈(淸貧)하였으니, 청빈이 곧 본분이니라”고 했다. 실제로 연암 부친의 여러 형제들이 사랑방의 좌우에서 조부를 모셨으므로 연암 형제가 책을 펴놓고 공부할 공간조차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연암이 16세에 혼인했는데, 집이 너무좁아 그 부인은 거처할 곳이 없어 친정에서 지낼 때가 많을 정도였다. 연암은 금강산, 묘향산, 속리산, 가야산, 평양, 화양동, 단양 등 여러 명승을 유람했다. 만약 과거공부에 매달리거나 벼슬길에 올라 업무와 당파싸움에 지쳤다면 건강이 온전하게 지켜지지 못했을 가능성이 컸다고 봐야겠다. 젊었을 때는 술을 마시지 않았으나 산수를 유람할 때부터 술을 즐겼다.
유람과 적당한 음주·음악 즐겨 그렇지만 연암골에서나 가끔 취했을 뿐 평소에는 취하도록 많이 마시지는 않았다. 집에는 생황, 거문고 등의 여러 악기가 있어 손님이 오면 연주하게 했다고 한다. 뒤에 경상도 안의(安義·함양) 현감이 된 뒤에는 연못을 파서 고기를 기르고 연꽃을 심은 뒤 사람들을 초대해 술자리를 마련했다.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시를 읊었고 때때로 기악을 베풀기도 했다. 그림도 그렸는데, 국죽도(菊竹圖)가 전해온다. 그럼에도 연암이 훨씬 더 장수하지 못한 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마음의 병이 왔던 것이다. 중년 이래 험난한 일들을 겪으며 울적한 마음을 펴지 못해 늘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병이 있었다. 특히 66세에 조부님의 묘를 포천으로 이장한 뒤 조상의 묘소가 파헤쳐지거나 훼손당하는 산변(山變)을 당했다. 그로 인해 더욱 애통해하고 상심하는 바람에 68세 때의 여름 이후 병세가 극도로 심해졌으나 약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둘째, 친한 벗들이 일찍 세상을 떠났다. 과거를 단념하자 그의 집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어졌고 절친했던 벗과 제자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나마 두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당시로서는 보편적인 50대 나이로 사망했다.
호주 연구팀이 70세 이상 노인 1477명을 10년간 추적 조사한 결과, 교우관계가 가장 좋은 492명은 하위 492명에 비해 22% 더 오래 살았다고 한다. 셋째, 부인을 일찍 사별하고 홀로 지낸 것이다. 51세에 부인이 세상을 떠났지만 재혼하지 않았고, 기생도 가까이하지 않았다. 음양으로 보면 남자는 양(陽)이고 여자는 음(陰)인데, 연암은 순양(純陽) 체질인데다 여인 없이 홀로 지냈으니 음양의 균형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 미국 시카고대학 노화센터에서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심장병을 앓고 있는 기혼 남성이 건강한 심장을 가진 독신 남성보다 4년 정도 더 오래 사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피렌체의 르네상스와 메디치 효과" 이탈리아 중부에 위치한 피렌체는 도시 전체가 회화·조각·건축 등 르네상스 예술품으로 가득 차 있다. ‘꽃의 도시’라는 이름에 걸맞게 매우 아름답다. 14~16세기에 걸쳐 일어난 세계 최고의 문예부흥 운동, ‘르네상스’. 그런데 왜 하필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들을 제치고 피렌체에서 가장 먼저 발생했을까. 1200년대 후반 이탈리아 반도는 밀라노, 베네치아, 나폴리, 로마 그리고 피렌체를 중심으로 도시국가가 형성되고 있었다. 나폴리 왕국과 밀라노 공국은 신성로마제국의 영향 아래 있었고 피렌체는 신성로마제국과 교황 사이에서 갈등을 겪고 있었다. 반면 베네치아는 이 둘 다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다. 다시 말해 밀라노나 베네치아에서는 총독이나 황제가 주교를 임명해 종교와 세속 정치가 한 몸으로 통일됐었지만 피렌체에서는 그러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대신 성직자와 상인(나라를 통치하는 새로운 세력) 간에 국가의 지배권을 놓고 갈등을 겪는 과정에서 피렌체는 르네상스 예술을 다른 도시보다 경쟁적으로 먼저 발전시킬 수 있었다. 물론 르네상스는 나중에 베네치아와 로마에서 전성기를 맞이하지만 말이다.
과정을 좀 더 살펴보자. 고대 로마시대에 모든 길이 로마로 통했다면 르네상스 시대의 모든 길은 피렌체로 통했다. 전 유럽에 흩어져 있던 황금이 피렌체로 들어오면서 1300년 초반부터 피렌체에서는 상업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양모무역과 고리대금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피렌체 상인들은 오래전에 지어져 낡은 수도원 내부를 장식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아낌없이 돈을 쓰기 시작했다.
왜 그랬을까. 이들의 관심사는 바로 사후 세계에 있었다. 현세에서 모든 걸 이룬 부자 상인들은 죽을때 수도원 지하에 묻혀있는 수호성인들의 유골과 가장 가까운 곳에 안장되기를 바랐는데 이 성인들이 최후의 심판장에서 자신들을 변호해주리라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다빈치·마키아벨리 지원한 메디치家
한편 재정적인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도원이나 성당에서도 당시 성직자에게만 허용했던 묘지를 평신도인 부자 상인에게 돈을 받고 팔기 시작했고 그 보답으로 상인들에게 묘지 안쪽 기도실 내부를 아름답게 장식할 의무를 부여했다. 이렇게 해서 수도원과 성당 벽면은 하나씩 아름다운 그림으로 채워질 수 있었다. 이를 위해 메디치 가문을 비롯한 피렌체의 많은 부자 상인들은 예술가들을 고용하기 시작했다. 또 수도원은 예술품들로 채워지면서 변화된 이 공간을 시민들에게 널리 알리고 신앙심을 견고히 다질 절호의 찬스를 얻었다. 상인과 성직자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르네상스 예술은 봄을 맞아 활짝 피어올랐다. 더욱이 주문이 몰리는 화가들은 공방을 운영하는 등 예술분야에서도 경쟁이 시작되는 계기가 마련됐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모든 분야에서 발전을 위해 필요한 것은 경쟁이다. 베네치아가 정치와 종교가 한 몸인 탓에 갈등도, 경쟁도 없이 신을 향한 예술품을 계속 만들면서 아직 중세시대의 잠에 취해 깨어나지 못하는 동안 피렌체에서는 종교와 정치의 갈등을 해결해 나가면서 경쟁을 통해 예술의 발전을 이뤄냈다. 한편 수도원의 돈줄을 쥐고 있던 상인들의 욕망은 점점 커져만 갔다. 초기에만 해도 기도실에 장식할 그림의 주제는 교회가 정했는데 시간이 지나자 작품 제작비용을 대는 상인 스스로 작품의 주제를 정하고 간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를 르네상스의 기본 개념인 신 중심에서 인간중심, 즉 나에게로 중심이 옮겨가는 일련의 과정으로 생각한다면 대단히 중요한 변화와 혁신이 일어나는 대목임을 알 수 있다. 조토의 작품을 예로 들어보자.
‘프란체스코의 생애’연작 28점 중‘재물의 포기’라는 작품이다. 아시시에서는 왼쪽처럼 그려졌던 작품이 피렌체의 산타 크로체 성당 바르디 기도실에서는 오른쪽처럼 변했다. 조토가 1290~95년에 걸쳐 아시시의 프란체스코 성당에 남긴 ‘프란체스코의 생애’ 연작 28점 중에서 ‘재물의 포기’라는 작품이다. 아시시에서는 그림 왼쪽처럼 그려졌던 작품이 피렌체의 산타 크로체 성당 바르디 기도실에서는 그림 오른쪽처럼 변했다. 그림 주문자인 바르디 가문 사람들의 모습이 작품 안에 자리 잡고 있는데 교회도 신에서 개인으로 변하는 관점을 어쩔 도리 없이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바르디 가문을 예로 들었지만 피렌체 르네상스 예술에서 메디치 가문을 빼 놓고는 도저히 이야기가 안 된다. 메디치 가문이 바르디 가문보다 좀 더 깊숙이 예술 분야에 파고들어 예술을 정치적으로 잘 활용했기 때문이다.
전혀 다른 분야 인물들 교류 도운 메디치家 메디치 가문은 ‘조반니 디 비치(최대의 상인이자 노련한 정치가)’ 때부터 4명의 교황과 2명의 프랑스 왕비를 배출했고 300년 동안 피렌체를 지배하면서 이탈리아 아니 세계적으로 명망있는 가문으로 성장했다. 나아가 상업·정치·종교 전반에 걸쳐 피렌체를 장악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뛰어난 안목을 바탕으로 수많은 예술가와 문인, 과학자들을 후원했기 때문이다. 메디치 가문이 후원한 인물은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보티첼리, 갈릴레이, 마키아벨리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특히 메디치 가문은 인문주의자, 음악가, 화가 등 전혀 분야가 다른 예술가와 학자들을 교류하게 해 그들의 젊은 감각에서 나오는 신선한 아이디어를 조합, 결국에는 새로움을 창출해냈다. 예를 들면 태양의 움직임을 관측해 선박의 위치를 파악하는 천문항법을 발견한 후, 이 방법을 응용해 콜럼버스가 서인도제도를 발견한 것과 같은 창조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예기치 못한 ‘대박의 효과’를 오늘날 기업 경영에서 ‘메디치 효과’라고 부르며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기업들이 이를 창출하려고 부단히 노력 중이다. 르네상스뿐 아니라 18세기 산업혁명, 20세기에는 정보화 혁명으로 거듭난 메디치 효과를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첫째로 창의적인 인재가 있어야 하고 둘째로 이 인재들을 후원하는 그룹이 필요하다. 산업혁명 때에는 시민이라는 창의적인 인물들이 있었고 기술, 과학이라는 후원그룹이 있었기에 증기기관이 발명되는 메디치 효과가 나타났다. 20세기 실리콘 밸리에서도 창의적인 인재와 자본의 후원그룹이 만나서 이룩한 업적은 어마어마하다.
우리 개인의 삶 안에서도 이러한 메디치 효과는 반드시 필요하지 않을까? 특히 요즘은 일생에 직업을 3번쯤은 바꿔야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다고 한다. 너무 지나치게 많이 생각하고 고민하면 오히려 손해를 볼 수 있다. 인생의 목표가 정해지면 그 순간부터 욕망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는 대신, 그 욕망을 쟁취하기 위해 냉정을 유지해야 인생의 ‘메디치 효과’를 이룩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우리 인생의 르네상스는 언제쯤 다시 오게 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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