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수경 42
신구의 삼문을 활용하여 신구의 삼문의 악업을 참회하는 사참의 구조가 바로 천수행자의 참회법 중 전반부임을 살펴봤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참을 바탕으로 행해지는 번뇌의 참회인 이참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우치참회
12연기는 괴로움의 생성과 소멸 구조를 논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혹업고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이 12연기를 통해 번뇌의 소멸까지도 엿 볼 수 있는 것이죠. 12연기의 구조 속에서 번뇌의 불이 완전히 꺼지기 위해서는 고통의 시작인 무명(無明)이 소멸해야 합니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이 첫 무명을 근본무명(根本無明)이라고 하고, 이로 인해 생겨난 번뇌들을 지말무명(枝末無明)이라고 합니다. 우치참회는 이 무명에 초점을 맞춥니다. 지말무명을 참회하다보면 결국 근본무명에 가 닿는 것이죠. 이 이참을 천수경 본문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백겁적집죄(百劫積集罪) 일념돈탕진(一念頓蕩盡) 여화분고초(如火焚枯草) 멸진무유여(滅盡無有餘)”
“백겁 동안 쌓인 죄도 한 찰나에 사라지니 마른 풀이 불에 타듯 죄의 자취 사라지리.”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심약멸시죄역망(心若滅時罪亦亡) 죄망심멸양구공(罪亡心滅兩俱空) 시즉명위진참회(是卽名爲眞懺悔)”
“본래의 실체 없이 그저 마음 따라 일어난 죄는, 그 마음이 사라지면 죄도 사라집니다. 죄와 마음 모두 다 공해진다면 이를 이름하여 진참회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이 부분을 이참이라고 부릅니다. 문제는 “이름하여 진참회라고 합니다.” 이 부분입니다. 이참으로 생각되는 이 부분이 진참회라면? 앞의 사참은 진참회가 아니라고 받아 들여지는 것이죠. 이는 불교에서 죄(罪)를 바라보는 관점이 어떠한지를 잘 모르기에 생기는 착각입니다.
죄무자성
불교에서는 다른 모든 개념과 마찬가지로 죄라는 개념 역시 무자성입니다. 무자성이라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존재한다.’는 말에 숨겨진 두 가지 뜻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존재한다는 것은 첫째, 독립적이라는 뜻이고, 둘째, 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불교의 무자성이라는 말은 이와는 정반대입니다. 첫째, 상호관계적이라는 것, 둘째, 끝없이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연기라고 하는데, 우리가 자신과 외부의 존재를 바라볼 때 떠올리는 개념과는 정반대인 것이죠.
모든 존재는 연기적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중생의 관념은 실체가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렇듯 인식방식 자체가 진실을 볼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고, 이로 인해 오류로 가득한 것이 바로 존재의 삶이고, 그렇기에 고통이 많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죄라는 개념이 사실상 없습니다. 죄라는 개념은 서양의 개념으로써 죄에는 그것을 벌하는 절대자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절대자로 인해 죄를 따라오는 벌이 있죠. 그렇기에 불교적 입장에서 엄밀히 말하면 죄가 아니라 허물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또한 죄의 원인인 악(惡) 역시 불교적으로는 불선(不善)이라고 표현합니다. 착하지 않은 행위와 악한 행위는 정말 그 뉘앙스가 다릅니다. 버스에서 할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행위는 불선이니만 악행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악이나 죄라는 개념을 일반적으로 많이 활용하기에 불교에서도 그 단어를 빌려서 쓰기도 하는데, 이를 보완하기 위해 죄무자성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참회를 하는 것은 불선의 결과인 허물을 벗어내는 것입니다. 허물이 생긴다는 것은 스스로의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양심이 살아있을 때 불선을 행하면 죄책감, 수치심, 두려움 등의 번뇌로 몸과 마음이 무거워지는데, 이 때 올바른 방법으로 참회를 하면 그 무거운 허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죠.
허물을 근거로써 중생을 벌하는 절대자는 없습니다. 불선업을 짓는 그 순간, 이미 고통의 씨앗은 심어진 것이고, 이것이 꽃을 피울 수 있는 인연이 도래하면 고통의 열매가 열릴 뿐입니다. 그렇기에 그 불선업이라는 씨앗을 바탕으로 한 허물을 벗겨내면, 이 씨앗은 힘을 잃어버리게 되고 그럼 그 씨앗에 해당되는 고통을 경험하지 않게 되는 것이죠.
지범개차(持犯開遮)
한국 불교의 사부대중에게는 이상한 유행어가 하나 있습니다. “개차법으로 하면 되지 뭐!” 이 말은 보통 스스로 계율을 어길 때 이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쓰이는 황당한 표현입니다. 이 개차법이 이렇게 유명한 이유는 <초발심자경문>의 서두에 등장하는 구절이기 때문입니다. 보조국사 지눌 스님은 “지범개차를 잘 알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강조하셨는데, 이 구절을 멋대로 해석하는 바람에 막행막식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지(持)를 올바로 안다는 것은 사부대중 각자의 격에 따라 지녀야 하는 계율을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범(犯)을 올바로 알아야 한다는 것은 지니고 있는 계율을 어겼을 경우 첫째, 어겼다는 것을 자각해야 하고, 둘째, 그것을 참회하는 방법을 잘 알아야만 모든 허물을 벗고 청정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개(開)를 올바로 안다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상황따라 계율을 범하는 것을 합리화하라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합리적 근거가 있는 상황에서 계율의 일부를 열어 주시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것을 명확히 파악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본래 비구는 술을 단 한잔도 마시면 안되지만 의사가 병을 고치는 약으로 술을 처방한 경우, 함께 하는 대중들에게 허락 받은 후 격식에 맞게 술을 약으로 쓸 수 있도록 허락하신 경우가 있습니다. 이를 잘 모르면 술을 먹어도 된다고 여기게 되어 자신도 모르게 계율을 범하게 되기에, 개(開)를 잘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차(遮)를 잘 안 다는 것도 비슷한데, 사회적 요구나 상황에 따라 부처님께서 열려 있는 계율을 닫으신 경우도 있는데, 이를 잘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라훌라가 출가하자 부처님의 부친인 숫도다나 대왕이 “부모의 허락을 받지 않은 미성년자는 출가를 허락해주시지 말아달라.”는 요구를 하자 부처님은 이를 수용하여 미성년자의 경우 자유로운 출가를 막으셨는데, 이러한 차법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이죠.
이 지범개차는 모두 사실 계율을 더 자세하고 명확하게 알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한국불교에서는 이를 잘 못 해석하여 계율을 어기는데 활용하고 있으니 한탄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 지범개차가 가능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계율을 어기는 불선 즉, 악업의 죄가 무자성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고정불변한 죄라는 것이 있다면 과연 개와 차가 가능할까요? 불가능합니다! 또한 고정불변한 죄를 어떻게 참회로써 씻어낼 수 있을까요? 천수경 속 죄 즉, 허물은 그저 인연의 소산으로 허물을 짓도록 만든 불선의 마음을 자각하고 후회하여 결단을 내린 후 허물을 정화하면 청정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 이참만 있고, 사참은 없나요?
“백겁 동안 쌓인 죄도 한 찰나에 사라지니 마른 풀이 불에 타듯 죄의 자취 사라지리.”
죄가 한 찰나에 사라지는 원동력은 다름 아니라 앞서 행했던 의참과 신참 그리고 구참의 힘 때문입니다. 대비주 수행을 바탕으로 보리도량을 세워 그 힘을 의지해 신구의 삼문으로 참회를 행했는데, 사라지지 못하게 만들 죄가 어디 있을까요?
“본래의 실체 없이 그저 마음 따라 일어난 죄는, 그 마음이 사라지면 죄도 사라집니다. 죄와 마음 모두 다 공해진다면 이를 이름하여 진참회라고 합니다.”
마음 따라 일어난 죄, 이 부분에서 마음은 불선업이고 죄는 허물입니다. 그러니 불선업이 사라지면 자연히 허물도 함께 청정해지는 것이죠. 그런데 이 방법론이 달라집니다. 몸과 입과 뜻을 참회하는 것에서 그 업과 허물의 본성을 바라보는 힘으로써 참회하는 것이죠.
이처럼 사참에서 이참으로 도약하는 것은 바로 “죄무자성종심기”입니다. 불선업이 무자성이라는 반야바라밀의 힘으로 참회를 하는 것이죠. 반야로써 바라보니 사실 불선업과 허물은 모두 실체 없는 연기적 존재일 뿐입니다.
앞서 사참이 없는 이참은 허망하다고 했습니다. 왜일까요? 어차피 꿈과 같은 세상에서 못 할 일이 없어져 막행막식을 일삼게 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이참 없는 사참은 근본에 이르지 못함을 말했습니다. 반야수(般若水)의 힘 없이는 번뇌의 불을 온전히 끄지 못하기에, 반복되는 허물로 사참이 계속 이어지게 될테니까요. 사참과 이참의 힘이 합일될 때 천수행자의 참회 수행은 번뇌장과 소지장을 녹여내는 극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현교와 밀교의 합일
보리심을 지니는 것, 대비주를 수행하는 것, 보리도량을 단장하는 것, 이에 의지해 신구의 사참을 하는 것, 반야이참을 하는 것, 이 모든 것은 현교(顯敎)에서 활용되는 참회 방법입니다. 하지만 천수경은 밀교적 성격이 강하기에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밀교(密敎)적 참회를 더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참회진언(懺悔眞言)입니다. <일체여래대비밀왕미증만나라경>에는 이 진언의 효용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만약 범부의 지위에 머물러 능히 모든 미세한 (죄를) 관찰하지 못하는 허물이 있게 되어, 죄를 불러 물리치지 못함을 두려워한다면, 마땅히 지극하고 오롯한 주의를 기울여 일심으로 참회진언을 외우라.”
참회의 기본요소는 분명 각회단정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범부의 인식에서 참회의 대상을 자각하는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앞의 참회들을 통해 개략적인 악업과 죄를 언급했지만 그럼에도 무량한 윤회 동안 저지른 미세한 악업들을 모두 포함시킬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부족한 부분을 채울 필요가 있을 때 이 참회진언을 외운다고 하는데, 그 뜻을 살펴보겠습니다.
“옴 살바 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살바는 일체, 못자는 붓다, 모지 사다야는 보살, 사바하는 성취입니다. 그렇기에 “아! 일체의 부처님과 보살님들이시여 성취시켜주시길!”의 해석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성취시켜달라는 것일까요?
앞의 참회진언 효용에서 언급되었듯, 범부의 지혜로는 참회해야 할 악업을 모두 인지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불보살의 지혜를 빌어 세세한 악업까지도 참회할 수 있다면 완전한 참회가 되지 않을까요?
진언의 뜻을 좀 더 확장해서 생각해보면, 앞에서 현교적 참회수행의 요소는 모두 갖춰졌습니다. 하지만 부족한 것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를 불보살의 위신력을 빌어 부족한 점은 보충하는 것은 물론이고, 원하는대로 참회가 이루어져 번뇌장과 소지장을 뛰어넘어 일체지의 증득을 이룰 수 있도록 만드는 위력의 진동이 바로 이 참회진언인 것이죠. 그렇기에 진언은 현교적 참회의 모든 요소를 보완하는 동시에 섭수하고 있는 현밀이 합일된 참회의 방편인 것입니다.
천수행자의 참회는 매일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참회방법은 사참과 이참이 합일되었고, 현교와 밀교가 함께 하는 최상의 방법입니다. 앞서 수행한 수승한 공덕을 바탕으로 관찰문 내에서 회향문의 부분으로 자리잡은 이 참회행을 통해 장애 없는 천수천안의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