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대 역에서 내려 출구를 향하는데 앞에서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잠시 생각하며 노려보니 그 쪽에서 먼저 인사를 한다. 아.. 지난 수업시간에 해금을 연주했던 조재현 학우이다. 엉뚱한 곳으로 향하던 그를 데리고 새천년관에 도착했다. 늦으면 입장하지 못할까봐 전공 수업도중 나왔는데 공연은 오히려 예정보다 늦게 시작되었다. 공연장에 입장하자 바로 눈에 띈 것은 은은한 조명을 받고 있는 무대. 공연 시작을 기다리는 동안 무대를 살펴보며 지루하지 않을 수 있었지만, 공연이 시작하고 커튼이 올라갔더라면 더 흡인력이 있었으리라는 아쉬움이 생겼다.
등장한 연주자들의 의상이 독특했다. 인도풍 디자인에 남미의 분위기가 살짝 가미된 듯 보이는 의상에서부터 이 공연은 흥미로울 거라는 예상을 했는데 오프닝이 유일하게 공연 중 지루한 부분이 되고 말았다. 음악이 아닌 행위로 이루어진, 꽃가루를 날리는.. 개인적으로 행위예술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첫 곡을 듣는 내내 생각한 것은 기타의 음량이 다른 악기들의 음량을 너무 압도한다는 것이었다. 불평하기를 좋아하는 나의 투덜거림은 세 번째 곡까지 계속되었다. 제례악에 맞춰 일무를 추는 듯한 느낌을 준 ‘데자뷰’는 ‘비쥬얼에 너무 신경썼어..’라고 투덜거리고(데자뷰 자체가 시각과 뇌의 작용인데도 말이다), 해금과 피아노 그리고 항아리(?)로 연주된 ‘비묻은 바람’은 Skit과 글로써 주요 메시지를 전달해 관객을 그 부분에 집중시킴으로써, 그저 분무음악이 되어버린 것 같아 아쉬웠다. 투덜거리던 나는 ‘호랑이 장가가던 날’부터 슬슬 즐거워지기 시작했으니, 이 연주는 음악과 연기가 잘 조화되어 유쾌했다. 역시 기타의 음량이 너무 커 귀에 거슬렸지만 거문고와 건반은 잘 어우러져 듣기 좋았다.
영롱한 챠임벨 소리를 들으며 나의 불평은 이제 완전히 사라졌다. 숲 속에서 울창한 나뭇잎 사이로 비춰 들어오는 아침햇살을 온 몸에 받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 상쾌한 기분에 관악기를 맡은 ‘김남희’연주자의 익살스런 제스쳐까지 금상첨화를 이루었다. 바로 이어진 ‘은하수를 보던 날’은 성악을 곁들임으로써 맑고 곱지만 건조한, 은하수의 느낌을 잘 표현해 주었다. 자리가 앞이라서 그랬는지 무대가 너무 넓어 산만하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역시 그들의 이름이 ‘그림’이라 무대의 구성 또한 지극히 그림적인 것이 당연하리라 생각하니 오히려 무대에 옹기종기 모여 연주하는 것보다 나았다. ‘도라지’는 악기들의 전체적인 조화가 잘 이루어졌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악기인 거문고가 비중이 작고 베이스적인 역할에만 한정돼 섭섭했다. 다음에 연주된 ‘산책’은 희노애락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는 정악의 느낌을 주었다.
‘아침풍경’이 시작되고 ‘김남희’연주자가 꽃가루를 뿌리려 할 때 왼쪽 편에서 어떤 아저씨가 “꽃가루 분다!”하고 크게 말했다. 순간 씩 웃으며, ‘그래 바로 이거야.’라고 중얼거리는데, 옆에 있던 여학생이 그 아저씨를 돌아보며 “뭐야~”하고 이상하단 듯 말했다. ‘The 林’이 제례악을 연주하고 있는 것도 아니니 우리가 쥐죽은 듯 음악만 감상하고 있을 필요는 없다. 감탄하면 박수도 치고 연주에 호응도 해주며, 연주자와 관객이 상호 교감을 유지하는 것이 훨씬 즐겁지 않겠는가? 소련의 심리학자 비고츠키의 도구적 방법론에 의하면 문화의 내면화는 유기체의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매개체와의 상호작용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리고 그 상호작용에는 상징이 (언어나 박수 모두 상징이다) 중요한 역할을 한다. 판소리 판에서처럼 끊임없이 추임새가 나올 필요는 없겠지만 ‘The 林’ 공연의 주제를 보면 관객이 조용히 감상만 하고 있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듯 하다. 이렇게 삼천포로 빠져들고 있는 내 사고를 다시 제자리로 잡아 끌어온 것은 단소와 해금이 만들어내는 悲感의 시너지였다. 두 가지 다 외로운 느낌을 증폭시키는 소리인데 서로 어우러지니 참아내기 어려웠다. 하지만 다행히도 마지막에 단소가 태평소로 바뀌며 대반전을 이루어, 외로움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나를 잡아 끌어올려주었다.
점점 고조되던 공연장의 분위기를 후끈 달아오르게 한 연주가 있었으니 바로 ‘날으는 밤나무’! 기억을 떠올리는 주문을 따라하며 모두 즐거워했다. 박수를 치다, 주문을 따라하다, 연주에 몰입된 내 입가에는 나도 모르게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연주 후반부에서는 위에서 떨어지는 꽃가루가 거문고와 해금위로 마구 쏟아져, 미소가 폭소로 바뀌어 버리기도 했다.
프로그램은 끝이 나고 관객들의 재청에 연주한 ‘길놀이’는 멤버들의 개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해주었다. 배두나를 닮은 건반의 신현정씨는 계속 뻘쭘하고 어정쩡한 포즈로 웃음을 선사해 주었으며, 아주 멀쩡하게 생긴 소금 사나이 김남희씨는 가끔씩 장난을 쳐 요리의 간을 맞춰주었다. 해금의 김주리씨는 너무나 귀여운 모습으로 공연의 중심이 되었고, 타악기의 황근하씨는 장난스러우면서도 정열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가야금의 정혜심씨는 노래도 잘하니 다음 공연엔 가야금 병창이라도 선보일 듯 하다. 내가 좋아하는 악기라서 그런지 거문고의 박찬윤씨는 그저 예뻐 보였다. 기타 연주자와 또 다른 타악기는 시종일관 무표정을 보여주었다. 마지막 타악기가 신창렬씨 인 듯 한데, 모든 곡을 작곡한 핵심 브레인답게 공연의 축이 되어주었다.
뜨거운 열기 속에 공연은 끝이 나고, 건물 밖으로 나가는데, 구석구석에서 휴대전화로 통화를 하고 있는 멤버들이 보였다. 이 공연이 'The 林‘의 첫 번째 그림이니 그 흥분과 감동을 누군가에게 전하고 있는 것이리라..
공연의 감흥을 애써 유지하며 집에 오면서 내 취미생활은 인라인, 아이스하키 등의 운동 쪽에만 치우쳐 있으니, 거문고를 배워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부족하고 음악에 재능도 없음을 한탄하다 해결책을 내었으니, 즉 거문고의 소리가 아닌 정취를 즐기는 방법이다.
거믄고 타쟈니 손이 알파 어렵거늘
북창송음의 줄을 언져 거러두고
람의 제 우 소래 이거시야 듯기 됴타
(거문고를 타려 하니 손이 아파 어렵거늘, 북쪽 창문에 드리운 소나무 그늘에 거문고 줄을 얹어 걸어두니, 바람이 줄을 건드려 타지 않는데도 스스로 우는 소리야말로 참으로 듣기 좋다) - 송계연월의 시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