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산이었으되 김종직 선생의 ‘유두류록(遊頭流錄)’에서 보았던 유산(遊山)은 애시당초 글렀다.
입산한 지 반세기가 넘었지만 이러한 산은 처음 보았으니 하는 말이다.
금수강산 우리나라가 어쩌다가 이모양이 되었을꼬?
대형 산불이 휩쓸고 간 지 1년 반이 지나면서 산의 식생(植生)이 변하고 있다.
쭉쭉빵빵 자라던 3~40년 생 소나무들은 새카맣게 불에 탄 모습으로 흉물스럽게 변해있고, 그 자리를 메우러 들어선 식물들은 산정에서는 볼 수 없는 수종(樹種)들.
커다란 가시를 곧추 세운 아카시나무에 그만 질리고 만다.
10km 남짓한 산길을 8시간 가까이 걸린 건 그저 고개를 쳐박고 지도 위만 걸었기 때문.
‘개실마을’은 ‘무오사화’ 때 화를 입은 영남사림학파의 종조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선생 후손의 세거지이자 집성촌.
그의 5대손이 1650년경 이 마을로 피신하여 은거하며 살 때, ‘꽃이 피고 골이 아름다워 가곡(佳谷)’ 또는 개화실(開花室)’이 ‘걔애실-개애실-개실’이 되었다.
이 마을의 대표적인 건축물은 그의 5대손 김수휘(金受徽)가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지은 ‘점필재종택(佔畢齋宗宅,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62호)’이다.
☞ 점필재 김종직의 유두류록(遊頭流錄),속두류록(김일손)
☞ 함양독바위,동부칠암자,유듀류록 답사
☞ 와불산,함양독바위,김종직의 폐칠암자
☞ 예림서원(김종직을 추모하기 위한 서원)
☞ 추원재(김종직 생가·묘)
들머리인 ‘지릿재(약 230m)’는 고령군 쌍림면과 합천군 율곡면을 이어주는 고개로서 ‘수도지맥’이 지난다.
‘수도지맥’은 백두대간 대덕산 남쪽에서 분기하여 수도산·단지봉·남산·우두산·비계산·오도산·만대산·노태산을 거쳐 낙동강에서 맥을 다하는 100m가 넘는 산줄기.
‘노태산(魯泰山 498.4m)’은 ‘국토지리정보원지도’에는 ‘노태산’이라고 표기되어 있으나, ‘고령군지’에는 ‘어태산’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는 ‘노(魯)’자와 ‘어(魚)’자의 혼돈인 듯.
뒷산은 꽃이 피는 ‘화개산(花開山 175m)’, 앞산은 나비가 춤춘다는 ‘접무봉(蝶舞峰 195m)’이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어 뵌다.
‘십자봉(十字峰 194m)’에 있는 김종직의 부인 ‘정경부인 하산 조씨 묘단소’ 안내판에는 무오사화때 부군과 함께 무덤이 훼손되었는지 1978년에 개실마을 뒷산 십자형터에 설단(設壇)하였다고 되어있다.
‘읍선대(揖仙臺 205m)’와 ‘강선대(降仙臺 266.1m)’는 지형도에 보이는 이름으로 선녀가 내려오면(降) 읍(揖)하며 예를 갖춘다는 이름.
‘어은산(魚隱山 411.5m)’은 ‘안림천(安林川)’변 ‘어은동(魚隱洞)’에서 따온 이름으로 ‘고기가 숨어사는 골짜기’라는 뜻이니 노태산이 어태산으로도 불려지는 이유다.
그밖에 ‘한지골봉(韓紙谷峰 209.8m)’은 ‘한지골’에서 따온 이름으로 한지(韓紙)를 생산한 곳인 듯.
이 모든 이름들은 정확한 출처를 확인하지 못하고 선답자들을 따랐다.
산행코스: 지릿재-<수도지맥>-307.6m-산불구간-노태산-지맥이탈-안부-(잡목지대)-어은산(411.5)-강선대(266.1)-가곡봉(264.3)-(아카시구간)-임도(30분걷기)-산길입구-화개산(177.5)-십자봉-정경부인묘·단-모졸재-김종직종택(11.2km,7시간 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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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km 조금 넘는 거리를 7시간 45분 걸림.
고도표.
burry님의 트랙을 편함.
선답자들을 따르다보니 8봉이 되었다. 이 중 2봉(읍선대,한지골봉)은 빼먹었다.
네비에 '고령군 쌍림면 합가리 산58'을 입력하여 경남·경북의 도계인 '지릿재'에 버스를 댔다.
307.6m봉을 오르지 않고 안부로 바로 붙을려고 하였으나 무성한 잡목으로 여의치 않아 수도지맥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초입은 칡넝쿨이 전봇대를 타고 트리가 되어있는 묘지로 통하는 길.
빗물 머금은 풀숲 선두서기를 망설였더니 용감한 사람들이 앞서 나간다.
빗물 털어낸 풀숲을 따라 △307.6m봉에 올라...
지워진 삼각점 안내판을 카메라에 담았다.
조금 되돌아선 뒤 서쪽 능선으로 꺾어 내려가다 우측 능선으로 갈아타며 '지릿재터널'위를 지나게 된다.
이후 창령조씨와 함안조씨의 쌍분을 지나...
산불구간에 들어선다. 이후 산불면적은 엄청나 축구장 950여곳과 맞먹는 면적이란다.
그래도 이 구간은 식생이 조금씩 바뀌고 있을 뿐...
산행하기엔 어려움은 없다.
바위도 불에 그을렸는데...
무엇이 견딜 수 있었을까. 능선 우측(고령군)은 숯검댕이, 좌측(합천군)은 피해를 덜 입었다.
그렇다면 고령군 쪽에서 불이 올라왔다는 반증.
그 새 '한입버섯'이 붙었다.
희미하게 우측으로 휘어지는 능선이 우리가 진행할 능선?
비가 왔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다면 콧구멍이 새까맣게 변했을 터.
노태산에선 지맥을 이탈 북북동으로 내려서야 한다. 산길은 급경사에다 빗물을 머금어 상당히 미끄럽다.
그렇게 내려선 안부.
이젠는 잡목과의 싸움이다.
어은산에 올라...
불에 그을려 이그러진 삼각점 안내판.
날이 맑았으면 주위 조망은 좋았을 것.
잡목과의 싸움이다.
지도 위의 미세한 등고선을 잡목을 헤치며 똑바로 간다는 건 그리 수월치 않아.
고재용 씨의 전지가위가 길을 만들어...
우리는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뒤를 따랐다.
산 전체가 거대한 전답(田畓).
이러한 산에 신선(仙)이 내려올 수 있을라꼬?
묵묵히 걸어...
골짜기 아름다운 이름-가곡봉(佳谷峰).
능선 좌측으로 범람한 안림천(安林川)이 내려다 보인다.
미국자리공·망초 등 산정에서는 볼 수 없는 식물들이 앞을 막고 있다.
거기다 날카로운 가시를 드러낸 아카시나무.
긁히고 할킨 뒤에야 내려선 임도.
이제 맞은편 읍선대로 오를 차례지만 지친 우리들은 임도를 따르기로 했다.
이 임도는 우리가 가진 지형도엔 나오지 않는 길. 어디로 이어져 있던 무조건 따르기로 했다.
절개지 우측에 읍선대지만...
눈길만 살짝 주고...
안부를 쳐다보며 잡목에 질려버렸다. 그래서 이 지점에...
준비해간 읍선대 표지기에다 화살표(→)를 그어 나무에 매달았다.
임도를 계속 따르면 '대창요양원'이 닿을 터이고, 거기서 우리 버스를 불러야만 할 것이다.
임도를 따라 30여분 걷다가 우측으로 제법 널따란 묵은 산길을 만났다.
지형도를 확인하니 '177.5m(화개산)'로 오르는 길. 지친 일행들의 의사를 타진했더니 'OK'사인이다.
그렇게 앞서 오르다 뒤돌아 보았다.
계단도 설치되어 다듬어진 산길.
우측으로 살짝 휘어지며...
다시 뒤돌아 보았다.
산길은 여기까지다. 비석이 없는 무덤. 그 바로 위가 산꼭대기(화개산)다.
무덤에서 5분 만에 177.5m(화개산).
이후 이정표를 지나자...
숲속에 사각정자.
돌탑을...
연거푸 지나자...
무덤이 있는 십자봉.
비석엔 '일선 김씨'. 일선(一善)김씨는 곧 선산(善山)김씨. 일선(一善)김씨가 조선 태종 때 선산으로 바뀌었다.
십자봉 표지기를 걸고...
널따란 산길을 내려오니...
'정경부인 하산조씨 묘단소'안내판이 있어...
들어가 보았더니 '정경부인하산조씨단(壇)' 비석이다.
'하산 조씨'는 점필재가 21세 되던 해(1451년)에 혼인한 첫 부인. 무오사회로 묘를 찾을 수 없어 1978년에 단(壇)을 세운 것.
다시 '정경부인 남평문씨묘' 이정표를 따랐더니...
'정경부인남평문씨지묘'다. 남평문씨는 점필재의 두번 째 부인.
비석의 뒷면.
정경부인 남평문씨묘 안내판.
연이은 묘를 내려와...
마을에 내려선다.
돌아본 산길 입구.
입구의 한옥은 모졸재(慕拙齋).
마을로 들어오면 돌담 너머로 기와집들이 늘어서 있다. 점필재 종택이다.
솟을 대문은 닫혀 있어...
안내판만 카메라에 담은 뒤 돌아서는데, 이 집에 기거하는 아가씨인 듯 문을 열고 들어간다.
"끼이익" 뒤따라 조심스레 문을 여는데, 무슨 소리가 그리 크게 나남.
대문을 들어서면 '문충세가(文忠世家)' 현판이 걸린 사랑채.
1812년에 건립한 것으로 추측되는 선산 김씨 문충공파(善山金氏 文忠公派)의 종가이다.
버스는 '점필재 종택' 입구에서 시동을 건 채 대기중이다.
"3시간을 기다려 보았느냐?"고 묻는다.
우리는 종택 입구의 화장실 옆 세면장에서 대강의 씻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많이 가지 않는 산을 찾다보니 이러한 산을 만났다.
이러면서 몸과 마음이 자꾸만 지쳐간다.
첫댓글 수고 많았 어요
함께해서 즐거웠습니다.
노고에 감사합니다.
행복한 토요일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