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함의 종류 | 전함 수 | 운항 속도 (노트) | 함포(문) | 좌,우현의 장갑면적(%) | ||
장갑의 두께 | 비장갑 부분 | |||||
152㎜ 이상 | 152㎜ 이하 | |||||
러시아측 전함 로제스트벤스키 해군중장의 지휘하의 제1전함편대 | ||||||
보로디노식 전함 | 4 | 17.8 | 305㎜(4) 152㎜(12) 75㎜(20) | 17 | 31 | 52 |
펠케르잠 해군소장 지휘하의 제2전함편대 | ||||||
전함 오슬랴바 호 | 1 | 18 | 254㎜(4) 152㎜(9) 75㎜(20) | 15 20 | 29 26 | 56 54 |
전함 시소이벨리키 호 | 1 | 16 | 305㎜(4) 152㎜(6) |
|
|
|
전함 나바린 호 | 1 | 15.8 | 305㎜(4) 152㎜(8) | 42 | 20 | 38 |
전함 나히모프 제독 호 | 1 | 17 | 203㎜(8) 152㎜(10) | 16 | 9 | 75 |
네보가토프 해군소장 지휘하의 제3전함편대 | ||||||
전함 니콜라이 1세 호 | 1 | 15.5 | 305㎜(2) 229㎜(4) 152㎜(8) | 8 | 23 | 69 |
세냐빈 제독식 연안방어전함 | 3 | 16 | 254㎜(4) 120㎜(4) | 13 | 16 | 71 |
일본의 전함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해군중장 지휘하의 제1전투편대 | ||||||
전함 후지(富士) 호 | 1 | 18 | 305㎜(4) 152㎜(10 | 40 | 18 | 42 |
전함 미카사(三笠) 호 | 3 | 18 | 305㎜(4) 152㎜(14) 75㎜(20) | 29 | 40 | 31 |
장갑순양함 닛신(日進) 호 | 1 | 20 | 203㎜(4) 152㎜(14) 75㎜(10) | 31 | 34 | 35 |
장갑순양함 가스가(春日) 호 | 1 | 20 | 254㎜(1) 203㎜(2) 152㎜(14) 75㎜(10) | 31 | 34 | 35 |
가미무라 히코노죠(上村彦之丞) 해군소장 지휘하의 제2전투편대 | ||||||
장갑순양함 아사마(棧間) 호 | 6 | 20 | 203㎜(4) 152㎜(12) 75㎜(12) | 19 | 40 | 41 |
대한해협은 수킬로미터에 걸려 전개하고 있었던 러시아 함대를 차가운 바람으로 맞이했다. 북쪽으로부터 커다란 파도가 일었다. 전투에 대비히기 위하여 승조원에게 담요를 지급하지 않았다. 포술장은 함포 근처에서 숙직했다. 적과의 교전을 기다렸지만 그날 밤에는 특별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았다. 08시 모든 러시아 군함은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경의를 표하는 중간 돛대기를 게양했다. 그와 동시에 병원선 오렐 호에서 일본 순양함이 출현했음을 알려왔다.
약 09시경 러시아 함대는 대열을 단종진(單縱陣)으로 재편성하여 전투태세를 취했다. 로제스트벤스키가 승선하고 있었던 기함 수보로프 대공 호를 선두로 하는 제1전함편대가 전열을 인도했다. 제2전함편대가 전함 오슬랴바 호를 선두로 하여 항해했으며, 니콜라이 1세 호를 선두로 하는 제3전함편대가 그 뒤를 이었다. 11시 10분 러시아 함대는 데바 중장의 순양함을 목격했다. 5분 후 전함 오렐 호가 포문을 열었으며, 뒤이어 다른 전함 역시 포격을 가했다.
일본 함대는 8개의 편대로 세분되었다. 전함이 소속된 제1, 제2편대가 일본 함대의 주력이었다. 일본의 작전은 러시아 함대의 선두를 포위하여 기함을 집중 포격함으로써 지휘권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일본 함대가 러시아 함대보다 훨씬 강력하다고 믿었던 로제스트벤스키는 전투에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하여 전투계획을 미리 세우지 않은 채 일본 함대의 행동에 따라 적절하게 대응할 생각이었는데, 적극성으로 포기한 그런 식의 행동은 전투의 주도권을 전적으로 일본 함대에게 양보하는 셈이 되었다.
1904년 7월 15일과 같은 비참한 광경이 재현되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상황을 기대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비트게프트 해군소장과 로제스트벤스키 해군중장은 마카로프 같은 유능한 함대지휘관은 예외로 여겨지던 학교의 동창생이었다.
로제스트벤스키는 12시 이후 안개 속에서 함대를 횡대로 재편성하려 했다. 그러나 안개가 곧 사라지면서 명령이 취소되었으며, 일본 함대의 주력과 만날 때까지 다시 2개의 단종진으로 운항했다.
13시 15분에 대한해협을 항해하던 러시아 함대는 우측 전방에 일본 함대의 주력이 나타난 것을 발견했다. 일본 전함은 러시아 전함의 항로를 차단하면서 접근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 함대는 러시아 기함을 포위하려 했다. 그러나 도고 제독은 사전계획과는 달리 적 함대의 선두에서 7해리의 거리를 두고 지나쳐 갔다.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일본이 구식 전함으로 구성된 좌측 종대를 공격하려는 것으로 판단하고 함대를 1개 단종진으로 재편성하기 시작했다.
13시 49분 일본 전함은 적의 선두를 포위하기 위해 순서대로 이전의 항로를 향해 회전하기 시작했다. 10~15분간에 걸친 이런 모험적 행동은 매우 위험한 것이었다. 러시아 함대는 회전할 때 한 곳으로 집중되는 상대를 포격하여, 일본 함대 주력에 큰 타격을 줄 수 있었지만, 아쉽게도 포격이 지체되었다.
로제스트벤스키는 선두 전함이 포위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우측으로 회전함으로써 일본 함대와 평행한 항로를 유지했다. 이때 일본의 2개 전투편대는 2척의 기함 수보로프 대공 호(로제스트벤스키가 승선)와 오슬랴바 호(펠케르잠이 승선)를 집중 포격했다. 전함 5척이 수보로프 대공 호를 포격했으며, 오슬랴바 호는 7척의 공격을 받았다.
로제스트벤스키도 화력을 일본 기함 미카사 호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러시아 포병은 하나의 목표를 집중 포격하는 것에 익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산개포격으로 전환했다. 전투는 2.8~3.4해리의 거리를 두고 이루어졌는데, 기동 미숙과 일본 전함과의 넓은 간격으로 인해 선두 전함이 포격에 장애물로 작용했다. 결국 대열의 뒤쪽에 위치하고 있었던 제2, 제3편대는 포격에 가담할 수 없었다.
전투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집중포격의 대상이 되어 힘든 상황에 빠진 기함 2척의 포병술장은 뛰어난 포격술을 보여주었다. 수보로프 대공 호는 도고의 사령관기를 게양하고 있었던 전함 미카사 호를 포격했다. 이에 대해 일본측은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도고 장군의 기함 미카사 호에 30발 이상의 포탄이 명중되었다. 전위 전투 갑판실의 내부와 전위 및 후위 사령선교가 파괴되었으며, 1개 사격조원 모두가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연돌이 관통되었고 포의 몸통 여러 개가 파열되었으며, 포곽이 깨지고 갑판이 관통되었다.
같은 자료에 따르면 5월 14일의 해전으로 미카사 호의 승조원 중에서 1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 함포의 파괴력 비교
지 표 | 함 대 | 힘의 관계 | |
일 본 | 러 시 아 | ||
구경 305~203㎜ | |||
총 보유수 | 60 | 42 | 1.43 |
포 1문의 분당 발사속도 | 1 | 0.33 | 3 |
분당 총 발사 수 | 60 | 14 | 4.29 |
분당 금속 방출량(㎏) | 9,500 | 3,686 | 2.51 |
분당 화약 방출량(㎏) | 1,330 | 92 | 14.45 |
구경 152~120㎜ | |||
총 보유수 | 150 | 83 | 1.8 |
포 1문의 분당 발사속도 | 2 | 1.5 | 1.33 |
분당 총 발사 수 | 300 | 125 | 2.4 |
분당 금속 방출량(㎏) | 12,499 | 4,504 | 2.76 |
분당 화약 방출량(㎏) | 1,740 | 113 | 15.37 |
총 계 | |||
총 보유수 | 210 | 125 | 1.7 |
분당 발사속도 | 210 | 125 | 2.68 |
금속량(㎏) | 21,949 | 8,190 | 2.68 |
화약량(㎏) | 3,070 | 205 | 1.96 |
※ 러,일 함포의 관통능력 비교
함대 | 포탄의 무게(㎏) | 포탄의 최초 비행속도(m/sec) | 거리(해리)에 따른 장갑 관통 능력(㎜) | ||||||
0 | 1 | 2 | 3 | 4 | 5 | 6 | |||
구경 305㎜ | |||||||||
러시아 | 331.7 | 792.5 | 381 | 311 | 251 | 201 | 259 | 131 | 92 |
일본 | 385.4 | 762 | 369 | 306 | 254 | 218 | 170 | 140 | 104 |
구경 203㎜ | |||||||||
러시아 | 87.9 | 899.1 | 252 | 182 | 126 | 88 | 64 | 50 | 46 |
일본 | 113.4 | 756 | 206 | 176 | 131 | 97 | 71 | 56 | 56 |
일본 전함이 보유한 함포의 우월성과 러시아 전함의 미약한 장갑능력이 위력을 발휘했다. 일본 전함의 집중포격을 받은 러시아의 기함은 심각하게 파손되었다.
14시 20분 일본 함대의 첫 포격대상이 되었던 기함 오슬랴바 호에서 고장이 발생했다. 일본의 첫 포탄이 선수에 명중되면서 물 속의 선체 하부가 관통되었으며, 전투 갑판실이 파괴되었다. 포탄으로 선수와 우현에 생긴 큰 구멍 때문에 선체가 기울었다. 승조원은 맹렬한 불길과 맞서 5시간 동안 영웅적으로 싸웠으며, 유일하게 작동되던 75㎜ 포로 일본 수뢰정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더 이상의 포격이 불가능해지자 포병장교 중 한 명이 생존한 포격조를 해산시킨 뒤, 본인은 전함의 상태가 절망적이라고 판단하여 권총으로 자살했다.
여러 발의 대형 포탄이 중심에 명중되자 오슬랴바 호는 빠르게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머리에 부상을 입은 함장 베르 해군대령은 최후의 순간까지 용감하게 지휘하여 승조원을 구조한 후, 전함과 함께 자신의 운명을 같이했다. 약 15시경 오슬랴바 호가 침몰했는데, 본 전투에 참전한 사람 중 하나였던 어떤 이는 그 모습을 이렇게 기록했다.
거대한 전함이 전복되는 모습은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사람들이 갑판으로부터 뱃전으로 기어오르는 모습, 매달려 있는 모습, 미끄러져 내리는 모습…… 일본군의 포화에 의해 승조원이 전사하는 모습 등이 다른 전함에서도 명백하게 목격되었다.
78. 쓰시마 해전(4)
오슬랴바 호를 집중 포격한 것이 일본의 장갑순양함이었다면, 수보로프 대공 호를 공격한 것은 4척의 신형 전함과 1척의 순양함으로서 이들의 포격으로 305㎜ 포탄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물 속의 선체 하부가 관통되면서 전함이 기울어졌다. 목재로 만들어진 일부 선체에서 화재가 자주 발생함에 따라 상대방 전함을 관측하기가 곤란했으며, 포격에도 장애를 주었다.
수보로프 대공 호의 병사들은 모든 장교의 지휘하에 밀려들어오는 바닷물과 화염에 맞써 용감하게 싸웠다. 그러나 45분이 경과한 후, 돛대가 부러지고 선미의 망루는 파손되었으며, 조타키가 작동되지 않으면서 화염에 휩싸인 수보로프 대공 호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포탄 중 1발이 전투 갑판실에 명중되면서 로제스트벤스키와 함장이 부상을 입었다.
러시아 함대는 지휘관을 잃어버린 상태가 되었다. 적 함대의 기함을 우선적으로 격파한다는 전술을 충실하게 수행한 일본 전함은 빠른 운항속도를 이용하여 다음의 목표가 된 전함 알렉산더 3세 호에 접근한 뒤, 집중포격을 가했다.
한편 파괴된 채, 연기에 휩싸인 수보로프 대공 호는 일본군에게 매력적인 전리품이었다. 전함을 완전히 노획하기 위해 수뢰정이 파견되었다. 일본 수뢰정은 파도에 흔들리고 있는 거함에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전함은 죽은 듯 조용했다. 그러나 선미의 장교 회의실 뒤편의 함포 중에 75㎜ 대포가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의용군 막시모프는 포술장과 함께 접근해 오는 일본 수뢰정을 향해 포탄을 발사했다. 포격은 매우 정확했으며, 4척의 수뢰정은 보다 적절한 공격시기를 기다리기 위해 회항했다.
수보로프 대공 호의 주위를 러시아 수뢰정 부이늬 호가 선회했다. 함장 콜로메이체프 해군중령의 표현을 빌면 전함의 “돛대는 부러졌고 연돌도 파손되었으며, 선현 전체에 포탄의 흔적과 구멍이 생겼다. 선현의 페인트는 모두 불에 탔으나, 내부로부터 기다란 불길이 피어올랐다…… 그 광경은 마치 석탄난로와 같았다.”
참모장교 중 한 명은 수뢰정에게 “제독을 모셔 오라”는 수기신호를 보냈다. 수뢰정은 물론 전함에도 구명정이 없었기 때문에 콜로메이체프는 선현에 접근하기로 결정했다. 수뢰정의 약한 선현이 전함의 선현과 충돌할 경우 손쉽게 구멍이 생길 수 있음을 고려하면, 파도가 일고 있는 상황에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은 큰 모험이었다. 더구나 일본 전함은 계속해서 포격하고 있었다. 수뢰정의 함장은 담요를 완충재로 삼아 전함의 선현과 평행하게 정선했다. 부상당한 로제스트벤스키와 그의 참모부원 일부가 어렵게 부이늬 호로 옮겨졌다. 제독을 옮기는 데에 도움을 준 수보로프 대공 호의 장교 쿠르셸 해군소위보와 븨루보프, 보그다노프 해군중위에게 수뢰정으로 환승할 것을 권유했으나, 자신의 전함에서 최후까지 남기로 결심한 그들은 제의를 거절했다.
일본인들은 수보로프 대공 호의 최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모든 것이 불에 탄 그리고 현재도 불타고 있는, 그렇게 많은 포격을 입은, (말 그대로) 총살형에 처해진, 우연히 선미 부분에 온전한 대포 1문을 보유한 전함 수보로프 대공 호는 자신이 존재하는 최후의 순간까지 방어하겠다는 결의를 나타내면서 아직도 포격을 가하고 있다…… 마침내 19시 20분 두 차례에 걸친 아군의 공격 끝에 기함은 침몰했다…… 우리 벙사들은 그들의 영웅적 저항을 공정하게 평가한다.
알렉산더 3세 호는 수보로프 대공 호가 고장을 일으킨 후, 로제스트벤스키의 명령에 따라 함대를 지휘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돌파하려 했다. 이번에는 일본 군함 12척이 새로운 사령선을 집중공격했으며, 결과적으로 새로운 사령선 역시 완전히 파괴되어 화염에 휩싸이고 도처에서 분수처럼 작렬하는 불길과 함께 심하게 경사진 상태로 대열에서 이탈했다. 그러나 자신의 지휘권을 단종진의 선두에 위치한 동급 전함 보로디노 호에 이양한 알렉산더 3세 호는 화재를 진압한 후, 일본 전함을 향해 포격을 가하면서 재차 전투대열에 가담했다.
안개로 인해 전투가 잠시 중단되기도 했지만 일본 전함은 집요하게 추적하여 매번 러시아 함대를 찾아냈으며, 월등한 운항속도를 이용하여 러시아 함대의 길게 늘어진 단종진을 추월한 후, 대부분의 화력을 선두에 집중함으로써 치명타를 가했다. 반면 일본 전함은 러시아 함포의 사정거리 밖에 있었기 때문에 그 손실이 경미했다.
5월 14일 낮의 전투로 제1편대 소속의 신형 전함 4척 중 3척(수보로프 대공 호, 알렉산더 3세 호, 보로디노 호) 그리고 제2편대의 기함인 오슬랴바 호가 침몰되었으며, 보조선 우랄 호와 정비선 캄차트카 호도 침몰되었다. 이와 같이 제2태평양분함대의 핵심 전투력이 이 날의 전투에서 모두 파괴되었다.
패배의 결정적 이유는 지휘부재였다. 사령관은 14시 30분부터 함대를 지휘하지 못했는데, 지휘권이 이양된 것은 5시간이나 지난 후였다. 참모부도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해서 전투 상황과 그것의 변화를 분석하지 않았으며, 일본 함대 지휘부의 실수 등을 고려하지도 않았다. 만일 정확한 참모역할이 이루어졌다면 함대사령관은 그 자료를 이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러시아 함대는 블라디보스토크로 돌파한다는 오직 한 가지의 목적만을 가지고 맹목적으로 기함만을 따랐다. 결과적으로 적극적인 공격은 하지 않고 방어에만 급급함으로써 일본군이 자신의 계획을 실행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 되었다.
19시 12분 도고 장군은 포격전을 중단했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서 제2태평양분함대의 흩어진 군함을 공격하기 위하여 60척의 수뢰정이 파견되었다. 이들의 임무는 어뢰공격으로 낮의 전투에서 이룩한 성과를 확실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공격은 약 21시경 시작되었다. 수뢰정은 동,남,북쪽 방면에서 러시아 군함을 포위해 들어갔는데, 러시아 함대가 위치한 곳과 이동방향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격은 당위적 형태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부분의 수뢰정은 러시아 군함을 발견하지 못했으며, 심야에는 수뢰정끼리 충돌하는 사건도 발생해서 수뢰정 1척이 침몰했으며, 6척은 심하게 파손되었다. 야간공격에서는 전투중에 탐조등을 켰던 군함 중에 전함 나바린 호가 침몰했으며, 전함 시소이 벨리키 호, 순양함 블라디미르 모노마흐 호와 나이모프 제독 호가 어뢰공격으로 파손되었다.
79. 쓰시마 해전(5)
5월 15일 아침 무렵 전투함대로서의 제2태평양분함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몇 척 혹은 각 개별 군함이 대한해협의 도처에 분산된 채 상호 연락이 두절되었다. 5월 15일 낮 전투에서 러시아 군함의 승조원은 상당한 용기를 보여주었다. 스베틀라나 호와 알마스 호는 요트였으며, 우랄 호는 기선이었으나 몇 문의 소구경 대포를 탑재한 후 제2태평양분함대의 순양함으로 취급되었다. 이 군함들은 고속으로 운행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정찰선으로 활용될 계획이었으나 돌파작전에 대한 성공을 확신하지 못했던 로제스트벤스키는 정찰을 가볍게 여겼다.
쓰시마 해전에서 이들 순양함에 부여된 임무는 수송선을 엄호하는 것이었으나, 일본 제2편대의 순양함과 포격전을 가졌다. 일본 측의 화력이 월등했지만 전직 선원이었던 수병들은 포로가 되기를 거부했다. 순양함 스베틀라나 호는 일본과의 힘겨운 전투를 수행하는 도중 최악의 상황에 다다랐다고 판단되었을 때, 자폭을 준비했다. 그러나 사태가 그 정도까지 악화되지는 않았다. 엔크비스트 해군소장의 편대에 소속된 순양함 4척이 지원해 준 덕택에 위기에서 구출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낮 전투의 결과 일본의 순양함 타카치(高千橞) 호가 심각하게 파손되었으며, 순양함 스베틀라나 호의 선수가 관통되었다.
스베틀라나 호는 밤에 다른 군함과 헤어졌는데 선수를 통해 밀려드는 바닷물 때문에 생긴 커다란 흘수차로 인하여 선수부분이 물에 잠기는 상황에서도 블라디보스토크로 돌파하겠다는 일념하에 항해를 강행했다. 그러나 새벽에 일본 군함에게 발각되었는데, 옴바(音羽), 니이다카(新高) 그리고 일본의 수뢰정 1척이 추적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전투가 벌어졌으며, 그 결과는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호의 함장 셰인 해군대령은 군사위원회의를 소집했다. 본 회의에서는 잔여 탄약을 모두 발사한 후, 일본군이 인양할 수 없을 정도의 수심에서 함선을 침몰시키자는 의견이 참석 장교 전원의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그러나 어뢰저장고가 침수되면서 함선을 폭파할 수 없게 되자 울릉도로 항로를 잡았다. 승조원을 상륙시킨 후, 배수용 판을 열어서 함선을 침몰시키려는 의도였다.
일본 군함이 접근하자 스베틀라나 호가 먼저 포격을 가했다. 그러나 일본 군함은 적이 항복해 오기를 기다릴면서 오랜 시간 동안 침묵을 지켰다. 마침내 일본 군함이 응사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당직사관 아르치바셰프 해군중위의 지휘에 따라 정확한 포격이 이루어지면서 일본 순양함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그러나 일본 측의 포격에 아르치바셰프가 전사하고 카르타프체프 해군중위가 그의 뒤를 이었다. 일본 군함의 포격에 의해 선현이 파손되고 엔진 1개가 고장났다. 포탄이 고갈되자 조준수 미야코트니코프는 공포탄을 발사하여 일본 군함을 기만했다.
두 번째 엔진이 고장나자 배수용 판을 개방하라는 함장의 명령이 내려졌다. 전투중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던 담당선임의사 카를로프는 침몰 준비를 확인한 후, 환자들을 침대에 결박하여 바다에 수장시켰으며, 본인 스스로도 천천히 침몰하는 순양함에서 바다에 투신한 최후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일본 군함은 항복하지 않은 러시아 군함을 향해 격렬한 포격을 가했다. 셰인 해군대령과 선임장교 주보프 해군중령은 스베틀라나 호에서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다가함선이 침몰되기 직전 적의 포탄에 의해 전사했다.
네보가토프 편대의 소속으로 미클루흐-마클라이 해군대령(블라디미르 니콜라예비츠 미클루흐-마클라이는 청년시기에 불법 정치단체로서 1871년 해군중등학교 내에 결성된 ‘포경업자회’의 일원이었다. 본회의 참석자 약 25명은 외국에서 러시아로 반입된 금서(禁書)를 윤독했으며, 다른 군사학교의 유사한 단체와 관계를 형성했다. 이후 인민주의파 집단과 관계를 맺었다. 미클루흐-마클라이는 위 학교 졸업 후에도 혁명가와의 관계를 유지했다. 극동의 해양과 흑해에서의 풍부한 항해경험을 소유한, 뛰어난 해군이었던 그는 흑해 연안의 방어를 위해 배정된 대형 전함 포포프 제독 호의 첫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대 터키전쟁 당시 용감한 장교의 역량을 발휘했다)의 지휘를 받고 있었던 근해방어용 전함 우샤코프 제독 호의 승조원들은 과감하게 행동했다. 유명한 학자와 형제지간이었던 미클루흐-마클라이는 일본 함대와의 전투가 임박하자 노후한 근해방어용 전함을 지휘하기 위해 면밀하게 준비했다.
우샤코프 제독 호가 적극적으로 전투에 참가한 것이 5월 14일이었다. 수발의 포탄이 명중되면서 최고 운항속도가 10노트로 줄어들자 함대로부터 뒤처지기 시작했다. 이에 미클루흐-마클라이는 단독으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항해하기로 결정했다. 낮에 수평선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눈에 띄었다. 대령은 러시아 군함이 접근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그 쪽으로 선수를 돌렸으나 일본 순양함이었다.
노후하고 파손된 군함으로는 승리를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일본의 순양함이 함선을 접수하기 위하여 접근하는 순간 우샤코프 제독 호가 포문을 열었다. 포격은 정확했다. 1차로 발사된 몇 발의 포탄이 명중되었다. 연기가 나기 시작하면서 순양함 이와테 호가 퇴각했다. 그러나 기뻐하기에는 일렀다. 일본의 순양함 두 척은 장거리포를 이용하여 러시아 함포의 사정거리 밖에서 포격하기 시작했으며, 러시아 군함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우샤코프 제독 호의 수병들은 그야말로 영웅적으로 저항했다. 담당의사 보잔스키의 회고록에 보면 침몰중인 우샤코프 제독 호는 용감한 디틀로븨 해군소위의 지휘에 따라 재차 접근하는 적함을 향해 127㎜ 대포를 발사했다고 한다. 40분간의 전투 끝에 우샤코프 제독 호는 기를 게양한 상태로 침몰되었다. 함장 미클루흐-마클라이 또한 함선과 운명을 같이했다.
구축함 그롬키 호는 부함대장 엔크비스트 해군소장이 승선한 순양함 올레그 호를 수행했다. 노련한 해군장교 케른 해군중령이 함장이었던 그롬키 호는 5월 14일의 전투에서 전혀 파손되지 않았다. 일본 수뢰정의 야간공격 당시 그롬키 호는 순양함 블라디미르 모노마흐 호를 보호하기 위해 일본 군함이 발사한 어뢰가 진행되는 방향과 자신의 선현이 교차되게 항해했다. 그러나 상당히 깊은 곳에서 순항중이었던 어뢰는 그롬키 호의 밑을 그냥 지나쳐서 블라디미르 모노마흐 호에 명중했다.
야간해전중에 대열에서 그롬키 호는 독자적으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돌파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아침에 3척의 일본 군함에게 발각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으나, 2척의 일본 수뢰정은 곧 후퇴했으며, 세 번째 일본 수뢰정 역시 포격전으로 화염에 휩싸인 채, 추격을 포기하고 도피했다. 그롬키 호는 단 한발의 포탄 피해도 받지 않았다.
곧이어 2척의 일본 군함이 그롬키 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 중 1척은 그롬키 호와 평행하는 항로를 따라 운항했으며, 나머지 1척은 횡단하는 항로를 택하여 접근했다. 이에 일본 군함을 한척씩 격파하기로 결정한 케른 해군중령은 어뢰를 이용하기 위하여 회전하여 일본 군함에 접근할 수 있었다. 두 발의 어뢰를 발사했으나 첫 발은 침몰해 버렸으며, 두 번째 어뢰는 일본 수뢰정의 스크루에서 발생한 여울에 의해 진행방향이 틀어졌다.
그롬키 호의 상황이 순식간에 나빠졌다. 2척의 일본 군함과 포격전이 벌어졌다. 일본 군함이 발사한 포탄이 기관에 명중되면서 그롬키 호의 속도가 급속하게 떨어졌다. 관통된 부분으로 들어오는 바닷물에 포탄저장고가 침수되었으나 표도르프, 모로코프 그리고 기타의 병사들이 수영을 해서 포탄을 공급한 덕에 포격이 계속되었다.
전투 중 러시아 함선에 게양되어 있던 깃발이 훼손되었다. 함장의 명령에따라 신호수 스코르두모프는 적의 포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중간 돛대기를 앞 돛대에 게양한 후 못으로 고정시켰다.
일본의 총참모부는 “적군은 용감하게 투쟁했다. 그들은 우리의 포탄에 의해 함대기가 부러졌을 때, 지체 없이 그것을 다시 게양했으며, 교묘하게 어뢰를 발사했기 때문에 시라누히(不知火) 호는 간신히 피할 수 있었다. 적이 발사한 포탄 역시 명중률이 높아서 시라누히 호에 20발 이상이 명중했다……”고 본 전투를 평가했다.
구축함 그롬키 호의 장교 중 한 명은 보고서에서 수병들이 이틀 동안 적의 포화 속에서 수면과 식사를 걸렀음에도 강력한 적에 맞서 용감하게 투쟁했다고 서술했다. 참전자들의 공식문서와 회고록에는 그롬키 호의 수병들이 보여준 헌신적인 영웅정신에 관한 많은 예가 기록되어 있다.
80. 쓰시마 해전(6)
가장 노후한 러시아 순양함 중의 하나인 드미트리 돈스코이 호는 울릉도 근처에서 일본의 최신 순양함 6척과 장시간에 걸쳐 격전을 치렀다. 순양함 드미트리 돈스코이 호가 함포 10문을 보유한 반면, 일본군은 총 40문을 보유했다. 어둠이 내리고 일본의 순양함이 회항하면서 전투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일본은 수뢰정만으로도 드미트리 돈스코이 호를 쉽게 격파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러시아의 드미트리 돈스코이 호는 세 차례에 걸친 일본군의 야간공격을 성공적으로 물리쳤다.
이 해전으로 심각하게 파손된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블라디보스토크까지 항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울릉도로 접근했다. 심각한 부상으로 생명이 위독했던 레베제프 해군대령을 대신하여 함선을 지휘한 선임장교 블로힌 해군중령의 명령에 따라 모든 승조원이 섬에 상륙한 후 드미트리 돈스코이 호의 배수용 판을 열었다. 5월 16일 약 06시 30분에 드미트리 돈스코이 호는 침몰했다.
앞에서 여러 차례 언급한 바와 같이 러시아 수병은 심각한 부상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위치를 떠나지 않았으며, 몇몇은 1차 치료만을 받은 후 자신의 위치로 복귀했다. 전함 오렐 호의 조타수 코필로프는 전투중 파편으로 손가락을 잃자, 천으로 손을 감싼 뒤 다시 타륜을 잡았다. 그롬키 호의 포템킨 해군소위는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일본군을 향해 기관총 사격을 가했으며, 잠시 후 치명상을 입은 케른 해군중령으로부터 지휘권을 물려받았다. 구축함 블레쉬차쉬 호의 신호수 비줄리는 포탄의 파편에 의해 한쪽 다리를 다치고 한손의 손가락을 잃었으며 다른 손의 손바닥이 파열되었다. 이때 함장 사모프 해군중령이 전사한 사실을 엔크비스트 장군에게 보고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신호를 보낼 수 있는 사람이 본인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그는 피로 밧줄을 적시면서 신호기를 게양한 후에야 붕대를 감았다.
파손된 전함 오렐 호가 합류한 네보가토프 해군소장의 편대는 약 10시경 일본의 전함에 의해 포위된 상태로 울릉도의 북쪽에 위치해 있었다. 오렐 호는 일본 전함을 향해 포격을 가했다. 그러나 느닷없이 기함에서 “포위되었다”, “항복한다”는 신호가 게양되었으며, 이후 “적군의 우월한 군사력에 포위되어 항복할 수밖에 없음”을 주변의 군함에게 수기로 전달하라는 편대장의 명령이 하달되었다. 후일 네보가토프는 무익한 희생을 회피하고 5천 명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그러한 결정을 내렸다고 해명했다. 한편 이줌루트 호는 네보가토프의 명령에 불복하고 최대속도로 도주했다. 일본 전함이 14시까지 그 뒤를 추적했으나 추월하지는 못했다.
쓰시마 해전에 참가한 일본 함대의 전투중비상태는 러시아에 비해 월등했다. 일본 함대는 기술적으로 잘 정비되고 보다 신형의 고속전함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병사들도 잘 훈련된 상태였다. 그러나 도고 장군은 일련의 실수를 연발했는데, 우선 교전중에 정찰을 하지 않았으며, 순양함이 러시아 수송선과의 전투에 지나치게 몰두하면서 러시아의 순양함대를 놓치고, 여러 번에 걸쳐 적함의 위치를 찾지 못했다.
수뢰정의 운용도 결코 효과적이지 못했다. 일본 수뢰정은 수는 많았지만 어뢰공격은 비효과적이어서, 발사된 전체 어뢰 중에서 러시아 군함에 명중한 것은 단 6발에 불과했는데, 그나마 3발은 한 척의 전함에 집중되었다. 여러 척의 일본 군함이 전투 중에 파손되었으며, 3척의 수뢰정은 침몰되었다.
러시아 함대의 30척이 넘는 함선 중 3척(순양함 오로라 호, 순양함 젬추그 호, 순양함 올레그 호)은 중립국 항구(필리핀의 마닐라 항)에 억류되었으며, 블라디보스토크로 돌파한 군함은 3척에 불과했다(차친 해군중령의 순양함 알마스 호, 두르보노 해군중위의 구축함 브라븨 호, 안드르제예프스키 해군중령의 그로즈니 호였다).
※ 쓰시마 해전과 제2태평양분함대의 운명
원 인 | 전 함 | 근해방어용 전함 | 장갑순양함 | 순양함 | 보조순양함 | 구축함 |
침몰의 원인 1)함포사격 2)어뢰 3)사고 | 5 1 - | - 1 - | - - - | 2 - 1 | 1 - - | 3 - - |
승조원에 의한 침몰 | - | - | 1 | 2 | - | 2 |
중립국 억류 | - | - | - | 3 | - | - |
항 복 | 2 | 2 | - | - | - | 1 |
총 계 | 8 | 3 | 1 | 8 | 1 | 6 |
쓰시마 해전에서의 전사자는 5,045명이었는데 그 중 장교가 209명이었다. 부상을 입은 인원은 800명이 넘었다. 비록 쓰시마 해전이 짜르정권에게는 불우한 역사로 기록되었지만 러시아 수병들의 용기와 공적은 위대한 것이었다. 즉 그들은 220일간에 걸친 항해 끝에 3개 대양을 거치는 항해를 완수했으며, 대부분의 군함이 구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폭발물의 무게로 볼 때 일본 군함에 더 많은 포탄을 명중시켰고, 군함의 장갑이 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월등한 전력의 일본 함대를 맞아 불리한 전투를 영웅적으로 수행했다.
쓰시마 해전에서는 함대 최고지휘부가 무능력했다는 사실이 확연히 판명되었다. 로제스트벤스키는 본인 역시 전투의 불가피성을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제1태평양함대의 경험을 고려하지 않았으며, 전투준비에도 소홀했다. 또한 전투계획조차 마련하지 않은 상태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파하라는 단순한 명령으로 편대의 지휘관과 각 함선의 함장을 지휘했다. 위장(러시아 군함의 선체는 흑색이었는데 연돌은 밝은 황색이었다)과 정찰도 무시했다. 특히 정찰을 경시함에 따라 러시아 함대가 전투대형을 형성하지 못한 상황에서 일본 함대가 출현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함대의 제독은 전투를 주관할 수 있는 기구를 구성하지 않았으며, 지휘권의 이양 문제도 규정하지 않았다. 또한 함대는 선두의 군함만이 포격할 수 있는 불리한 위치에서 전투에 임했다.
러시아 함대의 괴멸은 일본군의 월등한 군사력과 비교했을 때 러시아 군함의 기술적 불완전성, 각개 병사의 부족한 훈련, 지휘부의 무능 등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요컨대 러시아의 패배는 짜르정권의 부패, 경제적 후진성, 엽기주의적 성향의 대외정책 등에 의해 이미 예정된 것이었다.
쓰시마 해전은 러일전쟁을 결론짓는 사건으로서, 러시아 수병의 영웅적 투쟁에도 불구하고 불명예스럽게 종결되었다. 쓰시마 해전에서의 패배 이후 짜르 정권이 할 수 있는 것은 일본과의 강화조약 체결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