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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지상에 남은 술잔☆]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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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 남은 술잔◎]
김익두 시집 / 시작시인선 0297 / 도서출판 천년의 시작(2019.07.12) / 값 1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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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 남은 술잔
-첫눈
첫눈이 올 거라 전화를 했드니
그대는 일이 있어 먼저
제주로 간다고
혼자, 빈 연구소 문을 나올 때
첫눈이 나렸다
공중전화로 가 “첫눈이 온다!”하니
쓸데없는 소리 허지 말구
지갑이나 잘
챙기라 한다
하염없이 나리는 눈발 어쩌지 못해
따개 성님 함께 아침 막걸리
저 덧없는 함박눈 눈발로 하여
밥은 한 술도 뜨질 못허구
연해연신 들리우는
지상에 남은
술잔
저승 바닥을 마지막 ‘쨍그렁’울리기 전
내가 다 비우고
떠나야 할
지상에 아직 남은
이 쓸쓸헌
사랑들
막국수
-11월
절골 외딴집
마지막 생일잔치가 끝난 뒤
내가 사랑했던 그 한 사람마저
앞개울 건너
저 외진 굴참나무 서낭당
굽잇길을 돌아 나간
뒤
텅 비인 시간
텅 비인
마음
아직 버들채반에 조금 남은 막국수를
남은 동치미 국물에 말아
혼자서 비우는
이 쓸쓸하고 담담한 눈발 속
고향 막국수
한
그릇
풀칠
-고향 집 문을 바르며
한 해 남은 퇴직 연습으로
낡은 시골집에 돌아와
문을 바른다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
세상에 내던졌던 이 몸뚱이
아이들은
이런 아버지들이 퇴직허자마자
죽길 원한다고
취직 안 되는 애들이 그 퇴직금 물려받아
살기 위해서라고
입에 풀칠이 뭔지도 모르는
저 애들을 생각허며
낡을 대오 낡은 고향 집 문에
혼자
풀칠을 헌다
살기 위해 미련 없이 버리고 떠났던
가난의 때가 아직도 까맣게 찌든
이 다 낡아빠진
안방
문에
쓸쓸히 떠나던 그 마음 그대로
이젠, 다시 돌아와 살어보자고
내 어린 시절 코 때가 까아맣게 찌든
고향 집 안방 문을 바르며
이제는 아무도 기억허지 않을
옛 ‘새마을운동 노래’를
혼자 흥얼거리며
비 오는 숲을 보며
창틀에 턱을 괴고 오늘은 혼자, 비 오는 숲을 바라봅니다. 저 숲은 무얼 기다릴까. 무얼 기다리며 저렇게 한마디 말두 없이 우두커니들 마냥 서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갑자기 서늘한 바람 한 줄기 내게로 다가와,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음, 전 아무것도 더 바라진 않어요. 그냥, 이렇게 가끔 촉촉이 내리는 비와 때때로 불어오는 바람과 늘 변치 않허구 있는 푸른 하늘의 햇볕뿐, 더는 아무것도 바라진 않어요.”
말까지 잊어버린 저 숲의 나무들을 대신해서, 지나가던 바람이 전해 주고 갔습니다.
쓸쓸한 편지
-안부
오늘도
하늘은 아득히 감은빛이고
빨간 꽃잎들이 대지 위에 마냥 듣고
푸른 잎들이 수없이 하늘로 피어오르고
까치가 분주히
집을 짓는다
난,
혼자 묵정밭 밭둑가에 우두머니 앉아
하염없이 당신을 기다리다가
묵방산에 노을이
지길래
집으로 돌아와 아쉰 대로 rid
라면에 식은 밤
말아
배불리 먹었습니다
어둠 속 물 고인 둠벙 속으서
봄 개구리들이
재잘거리며
우네요
잘
기시지요
문상
-거시기 혹은 거세기
죽음 앞에, 자주 못 보던 지인들이 오랜만에들 겁나게 거시기허게 모였습니다. 제아무리 잘나도 거시만큼은 슬그머니 다 같이 인정하는 분위기입니다.
허나, 허는 소리를 듣고 모여 앉은 대형을 본다 치면, 여전히 끼리끼리만 모여 여전히 거시기허게 답갑한 패거리 소리들만을 수군거리구 있습니다. 어차피 거시기허면 다 거시기허는 줄은 눈앞에서 번연히 다 거시기허면서두, 언제 갈지도 번연히 다 거시허는 마당에서두 허는 짓은 그저 여전히 다 거시기헙니다.
그저, 분명헌 것은, 그들도 그렇게 거시기헌 집에서 만나면 만날수록 점점 더 거시기헌 사람에게 더 가까이 간다는 것뿐이지요. 그렁개 사람은 참 다 거시기허다 그런 말이 되는 거구요.
그 중 한사람, 덩치가 예전 동지중추부사 상장군 겉은 박화백은 꼭 고창식으루 ‘거세기’라고 발음을 허구는, 왜 ‘거세기’라고 발음을 하느냐고 물으면, “야, 내가 언지 ‘거세기’라고 혔냐?” 허구 시침이를 뚝 뗌서, 얼른 표준말로 ‘거시기’라고 바꾸곤 하십니다.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20년 이상을 사셨으니께, 그것은 뭐 그다지 거시기허진 않습지요.
허나,
‘거시기’든 ‘거세기’든 간에
사람이 ‘거시기/거세기’ 허면 안 되는 것이 아닌가. 허는 생각이 쪼께 든다 그 말입지요
더질더질.
어느 날
-밥집
산목련 새로
화사히 피었고
황사 갠 하늘엔
낮달도 고이 걸리었다
헤매이던 발길도
잠시 쉬이고
혼자
주인 홀로 조으는
늦은
밥집에 든다
해는 뉘엿뉘엿
-주막행
해지람판, 서늘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 길, 서녘에 지는 해은 뉘엿뉘엿, 반 남아 늙은 전주의 오륙십 년 지기 한 사내, 저 혼자 주고받은 낮술로 기우는 어깨가 흔들거리며, 마침 기여눈 원고 하나 끝냈다 전화 온 따개 성을 보러, 중앙시장 좁다란 뒷골목 허름한 막걸릿집 호성집 근처로 접어들고 있다.
남은 기쁨, 남은 반가움이라두
나누기
위해
겨울 햇빛
-옛 나를 보다
사람들 다 돌아간 대한大寒 날
토요일
오후
홀로 비인 방 비쳐드는
겨울 햇볕
본다
오래도록 먼지 앉은 부끄러운 첫사랑
하늘-초록색 낡은 표지
낡을 대로 낡은
내 쓸쓸한 첫 시집 표지 위에 비쳐 든
가만한 겨울 햇볕
혼자
본다
초겨울
-한거
초겨울
해거름
맑은
하늘
소나무는 꼿꼿이
짙푸르고
산마루엔 남은 햇빛
걸리었다
아무것도 더는
바랄 것이
없어
오늘은 머엉하니
큰 하늘
본다
모란을 보며
그대 농익은 입술처럼
검붉은
황홀
그 노오란 절망의
꽃심
한
가운데
날, 마지막 부활로
인도하는
깊은
어둠
그 수많은 황홀들이 만개한
당신 앞에서
나는
잠시
기인 한숨을 내쉬인다
비
-진동규
울리는 전화벨
야,
잘 있냐
비 올라고 헌다
뚝
만추
마지막 남어 있는
가을
햇살 받으며
바알간 감잎이
투욱
허구 떨어진다
나두 이젠
저 감나무 붉은 이파리처럼
투욱
허구 떨어지구 싶다
이파리보다 더 바알간
까치밥
하나
푸른 하늘에
냉기구
그리운 편지
당신이 보고픈데 어찌해야 할지 몰라
걍
여기
이렇게 있어요
싸한 가슴
가끔 갑자기 앞가슴이 싸아할 때가
있어요. 무어라 말로는
형언할 수가
없어요
그냥. 싸아해요
밤 떨어지는 날
한량없이 쓸쓸한
가을날
할 일도 잡히는 일도
딱히 없어
오랫동안
저 혼자 먼지 앉은
내 쓸쓸한 시집을 읽는다
마당가에
툭
하고
밤 한 송이가
떨어진다
자작나무 숲
-기러기 편지
강원도 내 아버님 고향 월정리역 녹슬은 기찻길
비무장지대 자작나무 숲에
가면
거기
당신과 헤어진 기나긴 세월이
온몸으로 하얗게
꽃 피어 있습니다
그 오래전
당신이 내게로 흔드시던 이별의
손수건들이
이젠
기나긴 기다림의 세월이 되어
하얗게 빛바랜 세월의
호호백발이 되어
그대로
거기, 있습니다
이제
증조할아버님 고향 땅 평양 대동강가 푸른 언덕
을밀대 옆 당신과 헤어지던
그 돌계단 밑에서
당신이 내게로 흔드시는
아직도 흰 입성 입은 조선 여인의
‘보고 싶어서리 내레 죽갔습내다. 래 어서 오시라요!’
써 붙인, 당신의
희디흰 자작나뭇빛 손짓이
보입니다
안녕
후회
-모기
모기 팔자 기박허여 늘 내 피를 빨고 살려구 내 빈틈만 노리는 것을, 내 익히 알고 그 틈을 아니 주기 위해 여름만 오면 잔뜩 긴장을 허고 지냈으나, 결국 나두 사람인지라 그 틈틈마다 모기에게 여러 방울의 피를 헌납혀야 혔던 지난 날들이 있었습니다. 모기두 목숨인지라, 다 살려구 그러는 것이었습지요
단지 후회가 되는 것은, 피를 빨리기 전에 모기를 쫓거나 이미 피를 다 빨 만큼 빨고 난 모기는 걍 보내 주었어야 혔는디, 그렇게 못헌 것입니다.
이미 내 피를 빨릴 만큼 다 빨린 다음에, 그걸 도루 가져올 수도 없는 판에, 왜 그걸 기양 보재 주질 않구 문을 닫구서 그걸 기연시 손바닥으로 쳐서 짓이겨, 바람벽이나 천장이 다 시뻘건허게 내 피 칠을 허였는지, 그것이 후회가 될 뿐입니다.
그것두 목숨이라, 다 먹구살려구 그런 것인디
길
-이순을 지나
군자는 대로행이라
어려서 조부님 서당 글 읽을 때부터
큰길로 신기독慎其獨하며 사람들과
같이 걸으라 하시던 때가
있었네
그러나 이젠 큰길보단 작은 길
작은 길보단 아무도 없는
숲속 오솔길
홀로만
걷네
그것도 좀 걷다간
길가 풀숲 아무 데나 펄썩 주저앉아
우두커니
머엉하니
먼 하늘
보네
가을 뚱딴지꽃
-산책길에서
뚱딴지같이, 가을날 강가 언덕에 뚱딴지꽃이 피었습니다. 이렇게 서늘바람 불어오는데, 어쩌자구, 씨방이 여물기두 전에 된서리가 내릴 텐데.
아아, 그래, 결실이 아니라 사랑. 아직도 이렇게 혼자 강가를 서성이는 쓸쓸한 사람의 뚱딴지 같은 사랑을 위해.
사랑의 꽃은 한겨울
눈꽃으로도
피나니
명년 봄엔 또다기
뚱딴지 같은 뚱딴지 새싹
싹트리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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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이번에 다섯 번째 시집을 낸다. 남모를 감회가 있다.
시집을 정리하다 문득, ‘세상에 남은 인연’이란 제목이 떠올랐다.
왜 이런 생각이 났을까. 세상의 인연으로부터 그만큼 더 벗어나 세상을 보게 된 것은 아닐까.
보통 길이의 서정시 외에, 짤막한 단시, 그리고 긴 산문시가 많이 늘어났다. 그만큼 세상을 다양하게 볼 수 있게 된 것인가. 우리의 소중한 아픔들도 이젠 꽤 잘 보인다
이제, 이런 시들을 통해서 늘상 일상처럼 세상을 느끼고 표현하고, 보잘것없는 내 작은 삶이나마 스스로 시라는 장으로 갈무리하는 나날들에, 나름대로 행복한 보람을 느낀다. 남들이 보아주지 않는다 해도.
또한, 이번 시집에서는 골수에 사무친 체험들이 제 말길을 따라 자연스럽게 시의 장으로 나오도록, 몸에 배인 체험의 몸말들들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러다 보니 온갖 방언들도 자연스레 밀물져 나오게 되었다.
시집을 정리하고 난 뒤, 지난 여름 비 오는 여름날 구시포 바닷가에서 만난 김대곤 시인이 ‘세상에 남은 인연’보다는 ‘지상에 남은 술잔’이 더 낫겠다 해서, 시집 제목을 그렇게 하기로 했다. 이것도 내게 이 세상에 남은 소중한 인연이 아닌가 한다.
표사를 얹어주신 이병천 선배님, 윤효영, 서홍관 형, 그리고 해설을 써주신 호병탁 형님께, 오랜 인연의 부끄러운 감사를 올린다.
단기 4352s년/2019년 칠월
김익두 삼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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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억두 詩集 [※지상에 남은 술잔※]
[ 해설 ] -
우리 것을 우리 식으로 읽으라는「‘구시포맛집’여주인 왈」
호병탁. 문학평론가, 시인
1
나 원 참 무슨 조화인지 모르겄다. 시집 발문을 쓰기로 했으면 즘잖허고 유식헌 말로 노가리나 까면 될 틴디 냅새 초장부터 판소리 사설조로 빠지고 있으니 허는 말이다. 그런디 요새는 내가 아는 체 잘난 체 글을 갈겨대다 보니 진짜 체할 것만 같기도 허구. 가뜩이나 짧은 밑천이 딸려 까딱허다가는 솟곳까지 뒤집어져 진짜 밑천까지 보일 판이라. 노심초사 끝에 에라, 가을바람에 노루목 구름 걷히듯 시원헌 문장으로다 확 바꿔보자 맘먹게 되었던 것이렷다. 더군다나 시방 내가 쓰는 게 다른 사람두 아닌 김익두 글에 대한 평이것다. 그 냥반이 누구냐. 이론과 실제 양쪽으로다가 최고로 알어주는 판소리 대가가 아닌가. 설사 나서 뒷간 드나들듯 자주 만나는 사이이고, 그렇게 서로 오래 지내다 보면 문체 같은 것도 비스름허게 닮아갈 수도 있지 않겄는가.
원래 이 냥반 글은 곰삭은 조개젓처럼 짭짤하고 쫄깃쫄깃헌 맛이 있다. 이번 시집에서도 더러 산문시들이 눈에 띄는디 그 곰삭은 맛이 꼭 판소리 한 자락 듣는 것 같다. 어차피 글에서 노래하는 ‘창’은 들을 수 없고 몸짓인 ‘발림’은 볼 수가 없다. 허여 사설에 눈길을 모으는 것은 절대 별쭝맞은 일이 아니렷다. 우선 작품 하나를 보자.
모기 팔자 기박허여 늘 내 피를 빨고 살려구 내 빈틈만 노리는 것을, 내 익히 알고 그 틈을 아니 주기 위해 여름만 오면 잔뜩 긴장을 허고 지냈으나, 결국 나두 사람인지라 그 틈틈마다 모기에게 여러 방울의 피를 헌납혀야 혔던 지난 날들이 있었습니다. 모기두 목숨인지라, 다 살려구 그러는 것이었습지요
단지 후회가 되는 것은, 피를 빨리기 전에 모기를 쫓거나 이미 피를 다 빨 만큼 빨고 난 모기는 걍 보내 주었어야 혔는디, 그렇게 못헌 것입니다.
이미 내 피를 빨릴 만큼 다 빨린 다음에, 그걸 도루 가져올 수도 없는 판에, 왜 그걸 기양 보재 주질 않구 문을 닫구서 그걸 기연시 손바닥으로 쳐서 짓이겨, 바람벽이나 천장이 다 시뻘건허게 내 피 칠을 허였는지, 그것이 후회가 될 뿐입니다.
그것두 목숨이라, 다 먹구살려구 그런 것인디
-「후회」 전문
땀때기까지 따끔거리는 푹푹 찌는 여름밤. 싹바가지 읎시 앵앵대는 모기 소리는 사람 참 심란허게 만드는 뱁이다. 이놈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를 빨아먹고 살어야 한다. 저보다 몇천 배 큰 남으 살 속에 침을 박고 피를 빨아대는 일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닐 거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지만 이걸 보면 이놈도 드럽게 운수 사납고 복 없이 태어난 놈이다. 기박헌 팔자란 말이렷다.
작품은 “모기 팔자 기박허여”로 시작한다. 단박에 우리는 이 대목이 판소리 사설의 첫 부분이나 도긴개긴임을 알아챈다. ‘흥보 팔자 기박허여’라고 창을 뽑기 시작하면 앞으로 전개될 지지리도 복 없는 흥보가 당할 여러 일들을 넌지시 일러주는 역할을 한다. 모기도 “내 피를 빨고 살려구 내 빈틈만”노리고 있지만 인간이 몸땡이를 그냥 헤벌레 내주지는 않는다. “틈을 아니 주기 위해” 사람도 “잔뜩 긴장을 허고” 모기와 쌈을 벌이게 마련인 것이다.
어쩌다 귓가에 모기 소리가 앵 들리면 비호같이 귀싸대기를 철썩 후려 갈긴다. 허나 먹구살려고 달라드는 놈이 만만할 리가 없다. 모기는 날아가고 지가 때린 지 뺨만 얼얼할 뿐이다. 잠자리 잡는 걸음으로다가 바람벽에 다가가 쳐보아도 모기는 없고 손바닥만 아프다. 모기 잡는다고 뜬금없이 휘둘레 휘둘레 미친놈 춤추듯 공중에 손을 휘둘러 쌌지만 이는 애초부터 가망 없는 멍청한 짓거리일 뿐이다. 그때마다 모기는 가볍게 아래로 쳐백히기도 하지만 어느 틈에 마냥 위로 솟구치기도 한다. “결국”은 시인도 “여름만 오면” 틈틈이 “모기에게 여러 방울의 피를 헌납혀야”만 하는 것이었다.
여기까지가 작품 첫째 연의 사설이다. 한마디로 모기에게 피 빨리고 말았다는 얘기다. 모기 뜯겼으면 상황은 끝이다. 그런데 시인은 이어지는 연에서 “임 피를 다 빨 만큼 빨고 난 모기는 걍 보내 주었어야 혔는디, 그렇게 못헌 것”을 후회하고 있다. 사연인즉 기어이 그것을 뒷북치며 잡아 죽였다는 거다. “다 빨린”피는 죽었다 깨나두 “그걸 도루 가져올 수도 없는 판”인데도 기연시 문을 닫구서 “기연시 손바닥으로 쳐서 짓이”기고, “바람벽이나 천장이 다 시뻘건허게” 피칠을 허구 말았다는 거다. 괜스레 왜 그렸는지 “그것이 후회가 될 뿐”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허기사 바람벽에 떡칠한 피는 누구 것인가. 모기 거? 천만에, 본인 자신 거다.
글 처음대로 “팔자 기박”헌 놈이다. 살려고 피를 빨았지만 쳐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산다는 짓이 죽을 짓이 되고 만 이 기맥힌 일이 있기 전, 그놈이 사는 모냥은 어쩠을가. 모기레 대한 생태를 들먹거리고 싶지는 않다. 당장 그날 비가 쏟아졌다 치자. 그려두 모기는 용케 빗속을 뚫고 피 빨러 방에 들어온다. 미친 짓 같지만 모기는 빗방울을 피하지 않고 부딪혀 버린다. 그 충격은 사람으로 치면 트럭에 정면으로 헤딩하는 것과 같다. 그려서 모기는 빗방울에 붙어 함께 떨어진다. 땅바닥에 가까워지면 그때사 빗방울에서 떨어져 낙하산 원리로다가 날개와 다리를 넓게 펴 속도를 줄이고 다시 날기 시작헌다. 동양 무술의 ‘태극’ 철학과 진배없다. 공격에 저항하지 않으면 상대의 타격을 그대로 흘려버릴 수 있다. 모기는 고단수 전략으로 이 무술 철학을 구현하며 빗속을 뚫고 온 것이다.
마침내 방에 날아오고 피까지 빨았다. 그러나 ‘쏟아지는 직선’으로 내지르다가도 끝에 가서는 ‘산뜻하고 부드러운 곡선’으로 돌아 비행하던 모기는 자기가 빤 사람 피의 무게로 동작이 둔해졌을 것이다. 자기 몸무게의 최대 6배까지 피를 빠는 모기는 결국 바람벽에 “시뻘건허게” 피 칠갑을 허구 생을 끝냈다. 기박헌 팔자라는 말이 맞다.
작품은 두 연으로 구성되어 있것다. 시인은 둘째 연이자 마지막 전체 연을 할애하여 모기를 향한 한마디 연민의 조사로 글을 마감한다. “그것두 목숨이라, 다 먹구살려구 그런 것인디”. 이 짧은 발화 역시 판소리 창법 그대로렷다. 그런디 이 마지막 한마디 말에는 긴 여운이 있다.
산 것들이 안달하고 바지런 떠는 것은 다 지 목숨 부지헐라구 하는 짓거리다. 모기 같은 곤충은 머리, 가슴, 배로 몸땡이가 나뉘어 있고 다리 6개 달린 동물이다. 이것들은 전체 동물의 4분의 3이나 차지할 만큼 그 수도 많고 종류도 많다. 또한 인간이 생기기 전부터 지구 위에 살았고 장담컨대 틀림없이 인간이 멸절한 후에도 살 것이다. 미물이지만 46억 년 연세가 된 하나뿐인 어머니 지구가 오랫동안 품어 살리신 것들이다.
어머니 지구는 모든 생명들이 녹색식물을 통해 햇볕을 서로 나눠 먹으며 살라고 말없이 가르쳤다. 송사리, 피라미, 파리, 잠자리, 오리, 닭, 소,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든 동물은 소비자다. 식물을 먹고 사는 초식동물도, 그걸 잡아먹는 육식동물도, 또 그걸 잡아먹는 사나운 육식동물도 결국은 모두가 광합성을 통해 양분을 공급하는 녹색식물에 의존하고 있는 셈이다. 서로 공생하는 것이다. 물론 모기도 그중 하나다.
어린 우리덜이 씨잘디읎이 작은 것들을 죽이려 들 때 ‘내비 둬라, 그것덜도 다 살자구 하는 짓인디“ 허시던 옛 어르신들의 말씀이 예사로운 게 아니었음을 이 글을 읽으며 새삼 머리를 친다.
2
앞에서 나는 판소리를 들먹거려 가며, 평의 문체까지도 판소리 창법 비스무리하게 써가며 작품을 읽어내고자 했다. 나는 많은 평을 쓰며 문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문학적 영감과 어휘의 원천으로 판소리와 잦은 교감과 접촉을 갖고 있음을 주시하게 된다. 실제로 시와 산문에서 얼마나 많은 판소리 용어들이 비유, 수식, 형용 등의 다양한 형태로 눈에 띄고 있는가. 자진모리니 휘모리, 계면조니 진양조, 혹은 추임새, 수리성과 같은 전문용어도 자주 인용되고 또한 이런 말들은 이제 우리 귀에도 매우 익숙하다.
민족예술의 정화라고 부를 수 있는 판소리는 다른 어떤 나라의 문학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특질이 있다.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본다면 우선 서양문학에서는 어디까지나 비극이면 비극이고 희극이면 희극이다. 그러나 한국의 판소리는 이 두 가지가 맞물려 되풀이되는 독특한 순한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원 대립의 갈등 구조가 아니다. 그것은 삭임의 과정을 거쳐 슬픔과 원망은 기쁨과 화해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반복된다. 이것은 건곤병진(乾坤竝進)이라는 주역의 해석과도 같아서 서구의 플롯 중심으로 규정하는 비극이나 희극이라는 개념으로는 논의되기가 힘든 것이다.
다음으로는 연행에서 비롯된 판소리는 강한 ‘구술적 전통’을 가진다. 연행 현장의 창자는 단 한 번의 구연으로 그 의미를 맞대면하고 있는 청중에게 전달해야 한다. 이를 위해 판소리는 풍부하고 다채로운 표현 기법을 구사하게 된다. 전아하고 고상한 상층의 언어든 난잡하고 비속한 하층의 언어든 가리지 않고 수용한다. 기본적으로 어떤 편향성도 없이 모든 이질적 언어 조직을 무차별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이처럼 다른 나라에서는 그 유례를 볼 수 없는 특질을 가진 판소리에는 우리 민족만의 특유의 정서 또한 녹아들어 있다. 예로 판소리에 나타나는 근원적 민족 미의식의 하나인 ‘한’도 서구의 사고와는 다르다. 우리에게 ‘한’은 슬픔, 원망, 분노의 감정뿐이 아니라 체념, 용서, 화해의 감정까지 포함된다. 그것은 갚고 풀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삭임’을 통해 멋과 여유로 승화되는 대상이 된다.
나는 이런 고유한 특질과 정서가 담긴 우리 작품에 상징주의니 구조주의니 심리주의 같은 서구 문학이론을 대입하여 해석하려는 것은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왔다. 특히 김익두의 사설조 산문시 같은 경우, 자기가 선호하는, 혹은 전공한 이론이라 해서 무데뽀로 그것을 도입해 작품을 읽어내려 한다면 자칫 양복 위에 갓을 씌우는 꼴이 되기 십상이라는 생각이다. 우리의 것을 우리 식으로 읽을 수는 없는가.
시인은 판소리 연구의 대가다. 그에게 나는 혹 ‘젓갈 가게를 기웃거리는 중’같이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이 기회를 통해 내 평소의 생각대로 판소리의 특질과 정서를 통한 작품 읽기를 써보고자 한다. 작품 하나 더 보며 논의를 계속하자.
유례가 없다는 무술년 폭염을 피해 따개 성님과 겐돈소바집 소바 한 그릇씩을 먹구 강바람이나 쐬자 허구 만경강 강둑길을 따라 차를 몰다가, 차가 가자는 대로 몸을 맡겼드니, 차는 고창군 상하면 ‘삼시세끼’ 촬영지 시인 진동규 선배님 댁에 도착을 허여버리고 말었습니다.
진 선배님 댁으서 정읍 송씨막걸리 두어 병 따구서, 선배님 세 번째 시집 제목 『구시포 노랑 모시조개』인가 하는 그 해변으로 나가, 바닷바람에 풍천 장어에 복분자술을 사모님께 거나허게 으더먹구서, 진 선배님 부부는 그 ‘삼시세끼’ 집으로 돌아가시구, 따개 성님과 난 주먹구이집으로 가설랑 소주 병 반을 더 따 마시구, 반명은 들구서 사만 원짜리 여인숙으로 들어가 즘잔헌 말루 ‘여장’을 풀었습니다.
헌데, 저는 아침둥이라서 아침 다섯 시에 혼자 먼저 일어나 바닷가로 나가 ‘저 푸른 물결 왜에치이는-’ 유식헌 가곡 한 곡조를 용필이 성님 조로 피 나게 목구성을 꽈악 쪼여가며 한바탕 뽑구서, 밀물 지어 들어오는 바닷물 귀경을 좀 허다가, 여인숙으로 들어와 곯아떨어진 성님을 깨워 해장을 허러 들른 곳은 예의 ‘구시포맛집’이었습니다.
육천 원짜리 아침 해장국용 백반을 시켜 먹구 있는디, 이 집 여주인이 우리 있는 데루 다가와설랑 시키지두 않헌 말씀을 시작허여 왈, “전에 할머니 세 분이 먹을 것도 쬐끔씩 싸서들 들구 이곳으로 놀러 와 왈, ‘새끼들도 다 키우구 이제 떠날 때가 되닝개루, 세상 너무 거시기혀서 셋이 이리루 놀러 왔다’며, 싸 가지고 온 것들 다 풀어놓구 밤새워 얘길들을 허머 지내다 가셨는디, 가신 뒤에 생각해 보닝개루 맴이 짜안 허더라고요”
이 말씀이 끝난 뒤에 잠시 저만큼 왔다 갔다 허다가, 이 여주인 다시 우리 앉은 데루 가가와 또 한 사례를 더 첨언허여 왈 “한번은 또 꽤나 성공들을 혀서 잘들 사신다는 남자분 셋이 오셨는디, ‘갑자기 친구들이 자꾸 죽어서 이러다 우리 못 보겠다 싶어 되는 대로 연락을 해서 되는 대로 훌쩍 떠나왔다’며 ‘이게 우리 마지막 여행일지도 모른다’고 허더먼유. 가시고 난 뒤에 또 생각해 보닝개루, 맴이 또 짜안허더라고요.”
우리 왈 “우리도 어제 점심 먹구 나서 갑째기 강바렘이나 좀 쐬자 허다가 걍, 여그꺼정 왔어라우.”
따개 성님이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아끼던 그 맛깔스런 원고료 세종대왕님 종이돈을 끄내서 아침값을 주는 동안, 나는 예의 그 구시포맛집 여주인 아줌마가 뽑아다 준 양촌커피를 짜안해진 맴으루다가 홀짝홀짝 마시구 있었습니다.
등 뒤에선, 몰래 집 안으로 스며들어 온 여름 베짱이 한 마리가 ‘삐이-ㅅ 쩍, 삐이-ㅅ 쩌억’허구 울고 있었습니다. 입추가 오기 이틀 전날 여름, 평균 온도가 39도를 밀고 있던 어제, 그래도 조금은 씨원헌 구시포 바닷바람서껀 물김 냉국서껀 고창 복분자에 풍천 장어구이에 정읍 송가네 막걸리를 첨음헌 다음 날 아침 오늘, 구시포맛집 여주인 그 말씀.
우리가 떠나면 저 구시포맛집 여주인 아줌마 맴이 또 더 짜안헐랑가
그 뒤야 뉘가 알리, 더질 더어지일
-「‘구시포맛집’여주인 왈」 전문
위 작품은 어느 무더운 여름날 시원한 냉소바로 점심이나 하자고 만난 두 사람이 어쩌다 구시포까지 가서 아예 하룻밤을 자고 온다는 게 얘기의 골격이다.
점심 후 화자는 “강바람이나 쐬자 허구” “만경강 강둑길을 따라”차를 몬다. 그러다 결국 하는 “고창군 상하면” “진동규 선배님 댁에 도착”하고 만다. 시의 첫행이다.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두 사람을 선배는 우선 “막걸리 두어 병”으로 맞이하고 “구시포” 해변까지 끌고 나가 뱀장어 안주로 “거나허게” 대접을 한다. 취한 두 사람은 돌아오는 걸 포기하고 그곳에서 아예 한잔 더 하고 “사만 원짜리 여인숙”에서 하룻밤 묵고 만다. 시의 둘째 행이다.
두 행을 통해 등장하는 세 사람은 좋게 말하자면 참 무던한 사람들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소갈머리 없는 사람들이다. 화자는 점심 끝냈으면 헤어질 일이지 무슨 강바람 쐰다고 강둑길을 달리는가. 또 바람을 쐬더라도 만경강 끝 김제청하쯤에서는 차를 돌릴 일이지 “차가 가자는 대로”를 핑계대고 마냥 남쪽으로 달려간단 말인가. 소갈머리 없기로는 조수석의 “따개 성님”도 마찬가지다. 시원한 소바 한 그릇 얻어먹었으면 됐지 타가 수백 리 길을 남으로 꺾어 달려도 소가지 부리기는커녕 돌아가자는 말 한마디 없이 헬렐레하고 있단 말인가. ‘삼시세끼’ 동규 성님은 한 수 위다. 느닷없이 쳐들어온 아우들에게 “막걸리 두어 병” 안겼으면 끝낼 일이지 어찌 해변까지 데리고 나가 “풍천 장어에 복분자술”로 칙사 대접을 한단 말인가. 화자나 따개 성님이나 사양을 할 인간들이 절대 아니다. “거나허게” 취할 때까지 “으더먹구”만다. 음주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건 뻔하다. ‘멕이는 사람’이나 그걸 덥석덥석 ‘받아먹는 사람’이나 소갈머리 없기는 매한가지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 세 사람의 품성이 매우 따뜻하고 수더분하다는 것을 짐작한다. 또한 이들의 소갈머리 없는 행동도 눈을 찌푸리게 하는 게 아니라 저절로 웃음을 베어 물게 한다
화자는 “차가 가자는 대로 몸을 맡겼드니” 고창까지 가게 되었다고 말한다.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다는 소리다. 그러나 차는 무조건 운전대 잡은 사람이 “가자는 대로” 가는 법이다. 해학이다.
또한 화자는 결국 취하고 만 둘이 소주 “병 반을 더 따 마시구, 반병은 들구서” 여인숙에 들어가 ‘여장’을 풀었다고 말한다. 개뿔이나 여장은 무슨 여장? 이 말은 길 떠나기 위한 특별한 차림이나 준비물 등을 말할 것이다. 옷차림도 소지품도 점심 먹던 때의 것 그대로다. 화자도 면괴스러운지 “즘잔헌 말루 ‘여장’을 풀었”다고 말한다. 굳이 여장을 풀었다고 해야 한다면 그것은 마시다 남은 ‘소주 반병’뿐이 아닌가, 웃음이 터져 나온다.
3
셋째 행부터는 이튿날 아침에 벌어진 얘기다. 화자는 습관대로 “아침 다섯 시에” 일찍 일어난다. 바닷가로 나가 밀물을 구경하고 노래까지 한 곡조 뽑는다 물론 따개 성님은 아직 “곯아떨어”져 있다. 한 사람은 밖에 나가 노래를 뽑고 한 사람은 안에 퍼져 누워있는 정황이 우스꽝스럽다. 확실히 둘 다 까탈스럽지 않고 무던한 사람들임에는 틀림없다. 화자는 돌아와 “성님을 깨워 해장을 허러” 여인숙 옆 “구시포맛집”으로 간다.
넷째 행에서는 육천 원짜리 해장국을 먹고 있는 두 사람에게 여인숙 겸 식당 주인이기도 한 아줌마가 다가와 “시키지두 않헌 말씀을 시작”한다. “전에 할머니 세 분이 먹을 것도 쬐끔씩 싸서들 들구 이곳으로 놀러 와” “밤새워 얘기들을 허며 지내다 가셨는디, 가신 뒤에 생각해 보닝개루 맴이 짜안 허더라”는 얘기다. 그분들은 이제 정말 이승을 “떠날 때가” 가까워진 것이다.
다섯째 행에서 여주인은 또 한마디 덧붙인다 한 번은 성공해서 잘들 산다는 남자 셋이 왔는데 해마다 “친구들이 자꾸 죽어서 이러다 우리 못 보겠다 싶어 되는 대로 연락을 해서 되는 대로 훌쩍 떠나왔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이게 우리 마지막 여행일지도 모른다”며 떠난 그 손님들을 생각하니 “맴이 또 짜안 허더라”는 얘기다. 손님의 뒷모습에서 짠한 마음을 느끼는 여주인도 참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다.
여주인 말씀에 두 사람이 무슨 특별난 대답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도 어제 점심 먹구 나서 갑째기 강바렘이나 좀 쐬자 허다가 걍, 여그꺼정 왔어라우”가 고작이다. 이 대답이 여섯째 행이다. “되는 대로 훌쩍 떠나” 온 남자 손님들의 정화오가도 흡사하다. 이어지는 행에서 성님은 원고료로 받은 “꼬깃꼬깃 아끼던” 돈을 꺼내 밥값을 내고 화자는 양촌 커피를 “짜안해진 맴으루” 홀짝거리고 있을 뿐이다. 모두가 말이 없다. 심각해진 분위기다.
폭염이었지만 어제는 그래도 “조금은 씨원헌”“바닷바람”을 쐬며 장어구이에 복분자술로 즐겁게 취했다. 허나 오늘 아침 “구시포맛집 여주인 그 말씀”을 듣고 나니 ‘덧없기만 한 인생’을 느끼게 되고 짠한 마음만 가득하다. 첫 연의 여덟 번째 행이자 마지막 행이다.
둘째 연은 아주 짧다. “우리가 떠나면 저 구시포맛집 여주인 아줌마 맴이 또 더 짜안헐랑가”라고 스스로에게 묻고 있지만 “그 뒤야 뉘가 알리. 더질 더어지일”로 작품은 끝이나고 만다. 긴 사설의 첫째 연에 비해 싱거울 정도의 짧으 발화다. 그러나 이 발화는 긴 여운을 남긴다.
실상 여주인은 늦은 아침을 먹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에서 “떠날 때가” 다 되었다는 할머니 손님과 “마지막 여행”이 될지도 모른다는 남자 손님들을 떠올린 것이다. 간밤에는 조금 시끄러웠겠지만 그래도 ‘살아서’ 함께 놀고 마시는 두 사람이 보기 좋았을 것이다. 지난번에 찾아온 남자 손님은 세 명이었지만 그들도 그 전에는 다섯쯤 되었을 것이다. 오지 못한 두 친구는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이다.
‘생자필멸’이다. 인간을 포함한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반드시 죽고 만다. 친구든 가족이든 애인이든 언젠가는 결국 헤어져야만 한다. 위 얘기는 사건이랄 것도 없다. 그러나 함께 오던 친구의 숫자가 해마다 줄어들어 마음이 짠했다는 여관집 안주인의 말은 우리의 마음도 짠하게 한다. 가깝던 친구 먼저 보내고 뒤에 남은 사람의 그 허전한 심사가 새삼 아프게 다가온다. 우리도 친구의 숫자는 자꾸 줄어들 것이다. 당장 아침을 함께 먹은 두 사람도 언젠가 한 명은 허전한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결국은 둘 다 사라지고 말겠지만.
우리 두 사람의 뒷모습에서 여주인의 마음은 또 짠해질지도 모른다. 아마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 어떻고 안 그러면 어떠랴. 안주인은 ‘회자정리’라는 너무나 당연한 이치를 말해 준 것뿐이다. 생각해 보면 안주인의 ‘평범한’말은 어떤 철학자의 말씀 못지않은 ‘비범한’ 말이기도 하다. 언젠가 헤어질 상대지만 그래도 ‘만날 수 있을 때’ 자주 만나 재미있게 지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갑고 즐거운 상대가 되어야 한다. 하기야 서로 좋으니까 점심 자리에서 느닷없이 여기까지 온 게 아닌가. 이게 어거지로 될 일인가. 같은 돌이지만 길바닥의 돌은 걸림돌이 되고 냇물에 놓인 돌은 디딤돌이 된다. 그러면 됐다. 하찮은 돌이지만 서로에게 디딤돌이 되어 살면 그뿐이다. “그 뒤야 뉘가 알리, 더질 더어지일”
4
“더질 더어지일”은 판소리에서 창자가 ‘내 소리는 끝났다’는 의미로 붙이는 종지형 어구다. 뒷얘기는 청자들이 알아서 생각하라는 말이 된다. 이로서 이 작품 읽기는 대충 완료된 것 같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판소리의 특질과 정서를 통한 작품 읽기는 이제 시작이다.
긴 편의 산문이지만 작품은 단 두 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덟 개의 행으로 이루어진 첫 연은 그야말로 사설조로 작품을 길게 만들고 있다. 예정 없이 구시포까지 가서 하룻밤 자고 왔다는 게 사건의 전모지만 첫 연의 둘째 행까지는 여인숙 ‘들어가기 전’까지의 얘기고 이어지는 행들은 그 이튿날 아침 ‘나온 후’에 벌어지는 얘기다. 한 연 속에 두 상황이 뭉뚱그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국면은 매우 다르다.
세 사람의 이런저런 소갈머리 없는 행동거지를 통해 첫째 국면은 웃음이 질펀하다. 그러나 마음 짠한 여주인의 말을 통해 둘째 국면에서는 덧없는 생의 비애가 가슴을 적시게 한다. 이미 그들의 여러 행동과 대화는 상술했으므로 생략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판이한 두 가지 국면에서 희극이 비극과 그대로 맞물리는 판소리의 순환구조를 즉각 알아차리게 된다.
시인은 이 작품에서 동일한 시공에서 맞대면하고 있는 창자와 청자 사이의 간격을 최소화하기 위한 판소리 특유의 구술 장치를 다방면으로 채택하고 있다. 물론 이를 위해 직정적인 토속 어휘와 질박한 남도 사투리도 다채롭게 동원한다. 마치 바로 앞에 앉아있는 독자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듯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장성과 구체성이 될 것이다. 작품은 ‘어느 무더운 여름날 성님과 점심을 하고 바람이나 쐬자고 나선 것이 어쩌다 고창 시인 선배 집까지 가게 되었다’는 얘기로 시작된다. 작품 초입의 서사는 이게 전부다.
그러나 ‘무더운 여름날’은 “무술년 폭염”의 날로 구체화되고, 이는 다시 작품 뒤에서 “입추가 오기 이틀 전날 여름, 평균 온도가 39고를 밀고 있던” 날이라고 한층 더 구체화된다. 함께 점심을 한 성님은 얼마나 술병을 잘 따는지 “따개”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다. 식당 이름은 “겐돈소바집”이고 먹은 음식은 “소바 한 그릇”이다. 그럼 “한 그릇씩” 먹지 두 그릇씩 먹나? ‘성님과 점심’을 했다는 한마디가 이렇게 구체화되고 있다.
바람이나 쐬자고 차를 달린 길은 “만경강 강둑길”이다. 그리고 “차가 가자는 대로 몸을 맡겼드니” 차는 “고창군 상하면 ‘삼시세끼’ 촬영지 시인 진동규 선배님 댁에 도착”해 버리고 만다. 차가 달린 길과 그 방법이 구체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또한 시인의 실명, 집 소재지는 물론 그곳에서 일어났던 얘기까지 진술되며 “선배님 댁”을 수식하고 있다.
당연히 점심 먹은 식당 이름, 그 음식, 또한 차가 달린 길 그리고 선배 집에 대한 설명은 사건의 구체화뿐 아니라 우리가 바로 그곳에 있는 것 같은 강한 현장감을 발생시킨다. 이는 고창 도착 이후에도 계속된다. 선배가 내놓은 막걸리는 그냥 막걸 리가 아니다. “정읍 송씨막걸리”다. 함께 나간 구시포 해변은 그냥 해변이 아니다. 시인의 “시집 제목『구시포 노랑 모시조개』인가 허는” 해변이다. 게다가 그 시집은 “세 번째”다. 술 마실 게 뻔한 양반을 위해 사모님이 운전하고 나오신 모양이다. 그분께 “풍천 장어에 복분자술”까지 얻어먹는다. 부부가 집에 돌아간 후 두 사람은 한잔 더 한다. 술집 이름은 “주먹구이집”이고 마신 양은 “소주 병 반”이다. 남은 “반병은” 여인숙으로 가지고 들어온다. 여인숙 요금은 하룻밤 “사만 원짜리”다.
막걸리 상표 이름이 나오고 시집 이름이 나온다. 해변에서 마신 향토 술과 안주 이름이 나온다. 이 차의 술집 이름도 나오고 마신 소주의 양과 남아 들고 들어온 양도 나온다. 여인숙 요금까지 정확하게 나온다. 구체성과 사실성이 최대한 확장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판소리에서 인물이 등장하면 으레 그 인물의 복식치례나 인물치례가 장황하게 펼쳐지게 마련인데 바로 위의 구체적인 여러 수식어들은 이런 경우와 매우 흡사하다. 서사의 핍진성이나 유기성의 시각에서 본다 해도 좀 지나치다 할 정도이지만 판소리 미학에서 이런 수식들은 필요불가결한 요소다. 판소리에서 공연 현장의 창자는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위해 서술 대상에 대해 온갖 정보를 진술해야 하고 평가적 발화도 수행해야 한다. 이때 창자는 단 한 번의 발화로 그 말의 의미를 청중에게 전달해야만 한다. 이를 위해 위와 같은 판소리 특유의 구술 장치가 채택되는 것이다. 한 예로, 춘향전의 기명․ 기효 사설에서 육해공의 모든 요리와 그것을 담은 온갖 그릇이 상세하게 망라된다. 청자들은 이런 갖가지 기명과 음식 이름을 듣는 중에 월매의 손님 대접이 얼마나 융숭한디, 딸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극진한지 저절로 아라차리게 된다. 즉 월매의 지극한 마음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중요한 것은 이런 장치를 통해 청자들이 커다란 ‘정서적 감흥’을 느끼게 된다는 점이다.
5
지금까지 현장성과 구체성이 어떻게 글에서 전개되고 있는지 여인숙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상황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런 글쓰기 방식은 여인숙에서 ‘나온 후’의 상황에서도 그대로 계속된다. 지면 관계상 이런 ‘구체화’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마치기로 하고 대신 두 번째 상황에서 나타나는 판소리 특유의 또 다른 구술 장치를 본다.
창자는 작품 속의 인물들이 처한 정황을 최대한 생생하게 묘사하려고 한다. 따라서 그 인물의 심리 속에까지 빠져 들어가 발화하려 노력한다. 이를 위해 직정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언어를 동원하는 것은 당연하다. 즉 토속어, 방언, 시늉말들이 종횡무진 사용되는 것이다. 물론 점잖은 말도 상스런 말도 무차별적으로 수용된다.
화자는 아침 일찍 일어나 바닷가로 나가 “푸른 물결 왜에치이는”으로 시작되는 “유식헌” 노래를 “피나게” 목구성을 “꽈악 쪼여가며” “한 곡조” 빼고서 바닷물 “귀경을 좀 허다가” 여인숙으로 들어와 “곯아떨어진” 성님을 깨워 해장을 “허러”간다. 이 짤막한 상황 묘사에서도 토속어, 사투리, 시늉말이 다 들어있다.
‘마음’은 ‘맴’으로, ‘강바람’은 ‘강바렘’으로, ‘와서는’은 ‘와설랑’으로, ‘조금씩’은 ‘쬐끔씩’으로, ‘되니까, 보니까’는 ‘도닝개루, 보닝개루’로, ‘가셨는데, 오셨는데’는 ‘가셨는디, 오셨는디’로, ‘여기까지’는 ‘여그꺼정’으로, ‘갑자기’는 ‘갑째기’로, ‘그냥’은 ‘걍’으로, ‘시원한’은 ‘씨원헌’으로, ‘섞은’은 ‘서껀’으로 모든 품사를 가리지 않고 토속어와 사투리가 그대로 동원되고 있다. 물론 ‘하더구먼요’를 말하는 ‘허더먼유’, ‘할까’를 말하는 ‘헐랑가’ 같은 종지형도 마찬가지다.
“한 사례를 더 첨언허여 왈”은 매우 점잖고 유식한 말이다. ‘사례事例’는 어떤 일의 전례나 실례를 뜻하고, ‘첨언添言’은 말을 보탠다는 뜻이고, 불완전자동사 ‘왈曰’은 ‘가로되’‘가라사대’를 뜻하는 말로 상당히 전아한 언어라고 할 수 있다. “막걸리를 첨음헌 다음 날”에서 ‘첨음添飮’도 엄청 유식한 말이다. 한자로 풀이하자면 ‘또 다른 술을 마셨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점잖은 말도 등장하지만 “새끼들”과 같은 상소리도 나타난다. 이 말은 ‘자식들’을 지칭하는 비어卑語에 다름 아니다. 원래 ‘새끼’는 난 지 얼마 안 되는 동물의 어린 것을 말하지만 일상에서는 흔히 ‘-하는 새끼’ 식으로 욕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음은 주지하는 바다. 또한 오만 원권을 의미하는 ‘세종대왕님 종이돈’이나, 종이컵으로 뽑아 먹는 달고 고소한 커피를 일컫는 ‘양촌 커피’ 또한 일상의 속어로 유식하고 점잖은 말과는 거리가 멀다.
「문상-거시기 혹은 거세기」에서의 ‘거시기’가 특별히 눈에 띈다. 이 말도 유식한 말은 절대 아니다. ‘거시기渠是基’는 ‘미정지사未定之辭’, 즉 ‘아직 무엇이라고 정해지지 않은 말’의 뜻으로 오백 년 훨씬 전부터 사용한 말이지만 서로 대척점에 위치한 뜻까지 싸잡아 표현하는 ‘속어’나 진배없다. ‘참 거시기하다’고 말한다면 ‘참 좋다’는 뜻도 되고 ‘참 나쁘다’는 뜻도 된다. 더 나아가 ‘많다’는 뜻도 ‘적다’는 뜻도, ‘높다’는 뜻도 ‘낮다’는 뜻도 된다. 아니, 형용과 수식어로 어떤 경우에도 사용될 수 있는 전 세계에 유일무이한 단 하나의 어휘다 시인은 아예 ‘거시기 타령’이란 부제가 붙은 작품을 보여 주고 있다.
“죽음 앞에, 자주 못 보던 지인들이 오랜만에들 겁나게 거시기허게 모였습니다. 제아무리 잘나도 거시기만큼은 슬그머니 다 같이 인정하는 분위기입니다./허나, 허는 소리를 듣고 모여 앉은 대형을 본다 치면, 여전히 끼리끼리만 모여 여전히 거시기허게 답갑한 패거리 소리들만을 수군거리구 있습니다. 어차피 거시기허면 다 거시기허는 줄은 눈앞에서 번연히 다 거시기허면서두, 허는 짓은 여전히 다들 거시기헙니다.”(「문상-거시기 혹은 거세기」)
“거시기허게” 모였다는 말은 ‘많이’ 모였다는 뜻에 틀림없다. “제 아무리 잘나도 거시기만큼은 슬그머니 다 같이 인정ㅎ하는 분위기”는 앞뒤 문맥으로 보아 ‘죽음 앞에서만큼’은 다같이 ‘엄숙해지는 분위기’로 읽혀지게 된다. 그러나 다른 뜻을 함축할 수도 있다. “거시기허게 답갑한 패거리 소리”는 “끼리끼리 모여 수군대는” 소리가 될 것이고, “어차피 거시기허면 다 거시기”한다는 말은 ‘죽으면 모두가 끝나버린다’라는 말이다. “눈앞에서 번연히 다 거시기허면서두”는 뻔히 ‘알면서도’를 의미하고 “허는 짓은 여전히 다들 거시기”하다는 것은 하는 짓거리가 ‘틀려먹었다’는 말이 될 것이다. 이처럼 ‘거시기’라는 말은 경우에 따라 종횡무진 그 뜻이 바뀌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어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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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실한 감정과 정서를 표출하기 위해 판소리에서는 시늉말이 빈번하게 사용된다. 이날 아침 화자는 바닷가에 나가 목구성을 “꽈악” 쪼여가며 한 곡조 뽑았다. 전에 놀러온 남자 손님들은 되는 대로 “훌쩍” 떠나왔다고 한다. 따개 성님은 “꼬깃꼬깃” 아끼던 지폐를 끄집어내고, 화자는 “홀짝홀짝” 양촌 커피를 마셨다. 이런 의성어, 의태어들은 율문의 정서 또한 강하게 환기시킨다.
‘이면’이라는 말이 있다. ‘이면 찾다가 소리 못한다’는 말도 있을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 판소리의 전문적 용어다. ‘사실성(reality)’을 의미하는 이 말은 주로 시늉말로 표현된다. 예로 춘향의 추천 장면에서도 ‘펄펄’ ‘실근실근’ ‘흔들흔들’ ‘어질어질’과 같은 말들이 동원되고 있다. 이때 창자는 사실성의 극대화를 위해 높은 음과 낮은 음을 섞기도 하고, 길게 늘여 빼는 식으로 발화하기도 한다.
위 글에서 베짱이 한 마리가 “삐이-ㅅ 쩍, 삐이-ㅅ 쩌억”하고 울고 있는데 이 생생한 울음소리는 높고 낮은 음계 차이로 더욱 실감나는 소리를 만드는 경우가 될 것이다. 즉 “삐이-ㅅ”은 높게 “쩍”은 낮게 음의 차이를 두는 것이다. 또한 ““삐이-ㅅ”은 늘어지는 소리고 “쩍”은 채는 소리다. 이에 더해 창자는 ‘속목(細聲)’ 즉 가성을 섞어서 이 소리를 흉내 냈을 것이다. 물론 베짱이 소리는 인간의 음성과는 다르다. 따라서 가능한 사실성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서 가성까지 섞어 발화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화자가 바닷가에 나가 한 곡조 뽑을 때도 “저 푸른 물결 왜에치이는-”이라고 소리를 늘여 빼고 있음을 본다.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판소리 창자라면 이 구절을 발화할 때 음정의 고저와 박자의 장단은 물론 음성까지 바꿔 정말 조용필이 노래하는 것처럼 뽑아댔을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은 ‘이면’, 즉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체험한 현실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재생하기 위한 장치다.
판소리에서는 기본적 발성을 바탕으로 음절 안에서 음정의 급격한 변화를 일으키는 드는 목, 찌르는 목, 채는 목, 휘는 목, 감는 목, 방울 목 등을 만들고, 다시 이런 기법을 배합하여 꺾은 목, 제친 목, 구르는 목, 던지는 목, 퍼버리는 목 등의 장식음을 만들어낸다. 이런 장치를 이 글에 적용한다면 아마도 베짱이 소리의 시늉말은 ‘찌르는 목’과 ‘채는 목’이 채택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세부적인 데 이르기까지 판소리 예술의 ‘이면’, 즉 사실성을 추구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우리는 그 철저한 미학적 추구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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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판소리의 두 가지 독특한 특질, 즉 웃음과 슬픔이 맞물리는 순환구조와 ‘구술 전통’에 의한 다양한 표현 기법을 중심으로 작품을 읽어보았다. 특히 후자에 있어서의 싱싱하고 다채로운 언어 수용은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여기서 시집 도처에서 나타나는, 절대로 그냥 지나칠 수만은 없는 어휘들이 있다. 우선 작가에 의해쌓인 먼지를 털고 반짝이고 있는 그 어휘들을 일부 소개한다.
‘개울물’은 ‘깨골창’으로(「동진강가, 어느 봄날」), ‘저것들’은 ‘쟈들’로, ‘놈’은 ‘뇜’으로(「봄날」), ‘그러니까’는 ‘그렁개’로(「문상」), ‘해 질 녘’은 ‘해지람판’으로(「해는 뉘엿뉘엿」), ‘부터’는 ‘버텀’으로(「달 드셔유」), ‘얼마나’는 ‘월매나’로(「치명적인 실수」) 표기되고 있다. 얼마나 우리의 정서를 때리는 정겨운 말들인가. 특히 ‘깨골창’이나 ‘해지람판’과 같은 말은 참으로 모처럼 만나 반갑기가 그지없다. 먼지 속에 묻혀 있던 이런 귀한 언어를 끄집어내어 구사하는 작가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한 가지 첨언하자면 “그것두 목숨이라, 다 먹구살려구 그런 것인디”(「후회」)와 같은 말은 전통적 언어 자원으로 공유되는 우리 귀에 익숙한 일종의 ‘선행담화’다. 이런 말은 속담, 격언처럼 독자들의 ‘재고반응’에 호소함으로써 발화되는 순간 즉각적 이해와 미학적 공감을 획득하게 된다. 판소리에서는 속담, 민요, 시조 같은 이런 선행담화들 역시 생동감 넘치는 수식구로 일부 또는 전부가 견인되고 있다.
산문시 두 편만을 읽은 셈이다. 그나마 판소리의 구술 전통과 그 장치를 제대로 읽어내려다 보니「‘구시포맛집’여주인 왈」한 작품에만 안광을 집중하고 만 셈이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이 한 편의 사설조 산문시를 통해서도 우리는 얼마나 다양한 언어들이-그것이 상층 언어든 하층 언어든, 토속어, 사투리든 시늉말이든-구체성과 사실성을 위해 복무하고 있는지 주지하게 된다. 한마디로 어떤 편향성도 없이 온갖 언어가 가리지 않고 수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 글 앞부분에서 판소리의 전문용어 자체까지도 무척이나 우리의 정서에 부합되고 있어 문학적 영감과 어휘의 원천으로 문인들도 즐겨 사용하고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휘모리’같은 말은 이미 어감에서 ‘휘몰아’가는 느낌을 주지 않는가.
소리의 운영은 음악적 율동의 완급을 나타내는 진양, 중머리, 중중머리, 엇중머리,엇머리, 잦은 모리, 휘모리 등 다양한 장단으로 진행된다. 게다가 같은 장단이라도 문학적 사설의 내용에 따라 평조, 우조, 계면조로 부르기도 하고,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더늠’이라 불리는 설렁제니 경두름이니 중고제니 하는 특수한 창법까지도 등장시킨다. 더구나 ‘단청丹靑’ 또는 ‘가꾸녁질’이라 부르는 장식음이 발성기법으로 더해진다. 앞서 음절 안에서 음정의 급격한 변화를 일으키는 찌르는 목, 채는 목 등과 이를 배합한 던지는 목, 퍼버리는 목 등을 잠깐 언급한 바 있다. 실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는 또다시 한 음절뿐 아니라 여러 음절에 걸쳐 장식음을 만들어내는 경우도 있는데, 기지개를 켜듯 소리 내는 ‘기지개 목’, 연鳶이 하늘에 나는 듯한 ‘소리개 목’, 들어서 휘는 ‘무지개 목’까지 만들어낸다. 단언컨대 세상의 어떤 규범적 예술 기법도 도저히 이런 판소리 미학을 따라갈 수는 없다.
김익두는 이런 갖가지 판소리 특유의 장치를 꿰뚫어 보고 있다. 그리고 이를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작품에 수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의 작품에 우리 미학을 적용시켜 읽어내야 한다. 내 집 노새가 옆집 말보다 낫다.
값진 시간이었다. 김 감사 덕에 호 비장이 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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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4의 글 ◆
녹초가 됐든 익초가 됐든 종류를 가리지 않고 백 가지 풀을 모아 술을 담그면 천하의 명약이 된다 한다. 익두의 이번 시편들을 읽다 보니, 그가 빚은 백초주 한 잔을 제대로 대접받아 얻어 마신 느낌이다. 젊은 날의 분노, 피울음, 좌절, 욕망, 환희, 방황 등이 모두 한데 버무러져, 곰삭은 시김새의 절창을 시방 내가 듣고 있는 것이다. 익두 시의 시김새가 이제는 마땅히 이런 경지에 이르러야 했단 말인가? 낭창낭창, 육자배기를 읊조리는 듯한 김익두의 시창에, 이제 독자들도 잠시 귀를 열어보시라.
- 이병천. 소설가
시인의 선대는 평양 근교 순안 땅에서 살다가, 동학교도이셨던 증조부께서 남쪽으로 가라고 하여, 시인은 전라도 정읍 땅에서 자란다. 집안의 새터전에서 가풍인 동학의 정신을 훈습으로 익힌 그는, 넉넉한 자연 속에서 “목숨 붙은 것들은 다아 불쌍헌 것이다”라는 어머님의 말씀을 새기며 성장한다. 훗날, 이 증손자는 ‘말을 줄임으로 해서, 말 속에 하늘․땅․우주가, 마침내 위대한 침묵까지 들어와 자리하는 ’자신의 시로써 증조부께 응답하고, 생명을 아끼라 하신 어머님께는 ‘모든 것들이 하나로 상생하고 조화하고 생명화되는’ 시로써 응답한다. 존재의 그늘에 어른대는 서늘한 결핍의 무늬들을 충일감으로 바꿔내는 익두 형의 시학은 4대에 걸친 정진이 이룩한 빛나는 열매임을 나는 안다.
-윤호. 시인
익두 형은 우리나라 민요․ 판소리․ 민속․ 연극․ 공연학․ 대중가요까지 꿰뚫어 수십 권의 귀한 저서들을 남긴 부지런하고 폭이 넓은 큰 학자이다. 이번 시집에서 그는 차츰 인생의 허무와 외로움과 죽음까지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가는 느낌을 받는다. 이제 내가 형과 하고 싶은 것은, 형 곁에서 같이 뭇국을 먹고 보꾹 토방에 앉아 따스한 겨울 햇볕을 쬐는 일이다. 바로 그때, 옆에서 참새 몇 마리가 신우대 숲에서 눈을 털며 감나무 가지로 날아가기라도 하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행복하다.
-서홍관. 시인, 국립암센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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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두 시인∥
∙ 정읍에서 성장.
∙ 전북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 1981년 『경향신문』신춘문예로 등단
∙시집『햇볕 쬐러 나오다가』『서릿길』『숲에서 사람을 보다』『녹양방초』
∙ 저서『한국 민족 공연학』『한국신화 이야기』『상아탑에서 본 국민가수 조용필의 음악 세계 – 민족의노래, 정한의 노래』『한국공연문화의 민족공연학적 지평』
∙ 역서 『페니미즘 이론』『민족연극학』『제의에서 연극으로』외 다수
∙ 제2회 예음문학상, 제1회 노정학술상, 제3회 판소리학술상 등을 수상
∙ 콜로라도대학교 해외파견교수, 옥스퍼드대학 초빙교수.
∙ 현재 전북대 인문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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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 남은 술잔-김익두 교수 다섯번째 시집
입력 : 2019-08-16 16:09 ㅣ 수정 : 2019-08-16 17:18
정년을 앞둔 노교수가 세상과 인연을 맺고 살아오며 느낀 체험들이 시어로 재탄생했다.
전북대 국문학과 김익두(64) 교수가 펴낸 ‘지상에 남은 술잔’은 시인의 감회를 몸에 배인 체험의 몸말로 풀어낸 96편의 시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햇볕 쬐러 나오다(1990)』『서릿길(1999)』『숲에서 사람을 본다(2015)』『녹양방초(2017)』에 이어 다섯번째 시집이다. 시인은 골수에 사무친 체험들을 자연스럽게 시라는 장으로 갈무리했다.
간결한 시어 속에는 인생의 희로애락과 삶에 대한 경건한 성찰이 깃들어 있다. 늘상 접하는 일상들을 꾸미지도, 탐색하지도 아니하면서 초연하고 심오한 문체로 풀어냈다. 마치 문장학의 본체를 보는 듯하다.
시의 구절을 읊조리다보면 한 폭의 풍경이 그려지며 절로 숙연해진다. 때로는 가슴이 아려오고 잔잔하면서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전라도 방언과 시늉말들은 생경스럽거나 난삽하지 않고 오히려 기미상합(氣味相合)의 극치를 보여준다.
김 교수는 시인의 말에서 “이제 세상의 인연으로부터 벗어나 세상을 보니 그만큼 더 벗어나 세상을 보게 됐다”며 “그만큼 세상을 다양하게 볼 수 있게 됐다. 우리의 소중한 아픔들도 이젠 꽤 잘 보인다”고 전했다.
호병탁 평론가는 “김익두의 시들은 그가 평생을 젖어 살아온 전라도 민요, 판소리 가락과 전라도 방언들이 한몸져서 시세계를 융숭깊고 훤출한 득음의 경지로 인도해간다”고 평가했다
이병천 소설가는 “젊은 날의 분노, 피울음, 좌절, 욕망, 환희, 방황 등이 모두 한 데 버무려져 곰삭은 시김개의 절창을 듣는듯 하다”고 평했다.
윤효 시인도 “그의 시는 존재의 그늘에 어른대는 서늘한 결핍의 무늬들을 충일감으로 바꿔내는 시학의 결정체”라고 표사했다.
정읍 출생인 김 시인은 전북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우리나라 민요, 판소리, 민속, 연극, 공연학, 대중가요를 꿰뚫는 다수의 저서를 펴냈다. 판소리와 민속문화 전문가로 폭이 넓은 학자로 유명하다.
제2회 예음문화상, 제3회 노정학술상, 제3회 판소리학술상 등을 수상했다. 콜로라도대 해외파견교수, 옥스포드대 초빙교수 등을 역임했고 현재 전북대 인문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전주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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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달빛자락 / 명상음악
*출처: 이동활의 음악정원(http://cafe.daum.net/musicgarden/5r73/44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