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그때 그는 왜?>
<13> 1076년 겨울 독일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는 왜 북이탈리아로 향했을까? (上)
황제권<하인리히 4세> vs
교황권<그레고리우스 7세>, 본격 힘겨루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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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 중심으로 ‘청빈’ 강조하는 교회 갱생 운동 시작, 큰 호응
개혁 과정에 왕권 협조 절실, 교회에 대한 세속 권력 영향력 커져
하인리히 4세 여섯살 때 황제 등극한 후 권력 약화, 귀족계급 입김 세져
11세기 중엽 개혁적 교황 등장, 황제 영향권 벗어나 교권 독립 꾀해

카노사 성의 현재 모습. 사진=필자제공 |
1077년 1월 28일, 이탈리아 북부의 카노사 성. 한겨울 날씨답게 눈보라를 동반한 차가운 바람이 스산하게 불고 있었다. 이때 고상하게 생긴 한 젊은 남자가 카노사의 성문 밖에 꿇어 엎드려 있었다. 그는 벌써 사흘째 이런 자세로 무언가 간절하게 호소하고 있었다. 그는 바로 얼마 전까지 알프스 이북 지방 거의 전체를 호령했던 독일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Heinrich Ⅳ·재위 1056~1105년)였다.
그가 성문 밖에서 외롭고 쓸쓸하게 엎드려 있는 동안 성안의 따스한 방 안에서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고 있던 이는 다름 아닌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였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런 일이 왜 벌어진 것일까? 다시 말해, 막강한 권력을 자랑하던 하인리히 황제는 왜 추운 겨울에 서둘러 이탈리아 반도로 남행(南行)을 결행해야만 했을까? 이러한 사태의 이면에는 서양 중세사회의 두 핵인 황제와 교황 간의 끈질긴 힘겨루기 주제였던 ‘성직 서임권’ 문제가 놓여 있었다. 이 글은 바로 이에 대한 답을 구하려는 한 시도다.
하인리히 4세와 그의 시대
476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로마교회는 서유럽의 새로운 주인공으로 등장한 게르만족을 그리스도교화하면서 교권을 유지해 왔다. 그러다가 9~10세기에 접어들어 서유럽 지역에 일대 지각변동이 일어나면서 위기를 맞게 됐다. 이때 잘나가던 프랑크 왕국이 샤를마뉴 사후 분열과 내전을 거듭하면서 쇠퇴하고, 사방으로부터 이민족들(바이킹·무슬림·마자르족)의 침략이 줄을 이었다. 이러한 외침을 막아줄 중앙권력이 부재한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지방의 유력 귀족 가문의 세력이 크게 신장했고, 이것이 유럽의 종교 지형도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교회 개혁가들이 장기간 기울여온 노고가 무색하게 혼란의 와중에 지방의 수많은 교회가 방치되거나 파괴됐다. 다행히 화(禍)를 면한 교회들은 지방 유력 가문의 수중에 떨어졌다. 심지어 교구 교회는 장원 내의 다른 시설들처럼 영주의 소유물로 간주될 지경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주교직마저 유력 가문의 사유물처럼 인식돼 친척을 주교로 임명하거나 심지어 주교직을 매매하는 사례도 있었다. 각지에 산재한 수도원의 상황은 더욱 엉망이었다. 수도(修道) 서약조차 하지 않은 귀족의 아들들이 득실거렸고, 평신도가 수도원장으로 있는 예도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이러한 상황을 개선할 책무를 지닌 로마교황청마저 추문과 부패에 찌들어 있었다.
이러한 타락과 혼돈의 와중에 교회 갱생을 추진할 유일한 희망은 개혁적 성향의 수도원들이었다. 일찍이 10세기에 개혁에 성공, 전 유럽에 명성을 떨친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의 클뤼니 수도원이 대표적이었다. 이는 수도사의 청빈·정결·복종을 강조하며 유럽 각지에 수도원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영향력을 미쳤다. 이러한 교회 갱생운동이 커다란 호응을 얻으면서 로마교황청에서도 개혁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성직 매매를 금지하고 사제의 청빈과 독신을 요구하는 선까지 나아갔다.
그런데 개혁 과정에서 왕권의 도움과 협조가 절실했기에 그 결과 교회에 대한 세속권력의 영향력이 더욱 커졌다는 점이 문제였다. 진정한 개혁을 위해서는 교회의 독립과 이에 합당한 교황권의 확립이 필요했는데, 이는 세속권력인 왕권과의 마찰을 초래할 소지가 다분했다. 그리고 이는 11세기 당시 영국과 프랑스에 비해 상대적으로 국왕의 권위가 강했던 독일 지역에서 벌어질 가능성이 컸다.
당시 독일 지방을 다스리고 있던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제국 영토가 반(半)자치적 성격의 수많은 공국으로 분열돼 있었으나, 이른바 카롤링거 왕조 이래의 전통―신성한 왕권의 전통, 교회와의 긴밀한 동맹관계 유지 등―에 힘입어 강력한 군주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저지대 지방으로부터 북부 이탈리아까지 포괄하는 광대한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 황제는 교회와의 제휴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만 했다. 이러한 전통으로 인해 카롤링거 왕조 이래 제국 정부의 주요 행정가들은 황실과 연줄이 있는 대주교나 주교인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황제로부터 임명장과 직책에 걸맞은 특권과 봉토를 하사받았다. 심지어 당시 교황 중에는 황제에 의해 임명된 자들도 있었다.
그런대로 현상을 유지해 오던 시스템은 11세기 중엽에 이르러 변화에 직면하게 됐다. 황제의 위상 약화와 이와 대조적으로 개혁적 성향이 강한 교황들의 등장이 시스템을 흔든 핵심 요인이었다. 그동안 교회의 개혁작업에 협조적이었던 황제 하인리히 3세가 1056년 6살에 불과한 하인리히 4세를 후계자로 남긴 채 서거했다. 겨우 철들 나이였던 하인리히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독일의 국왕 자리에 오른 것이었다.
어린 황제를 대신해 모후 아그네스가 섭정(攝政)했으나 점차 황제권이 약화되고 역으로 귀족계급인 제후들의 입김은 세졌다. 아니나 다를까 하인리히는 11살이 됐을 때, 당시 쾰른의 실권자였던 안노 대주교에게 거의 납치되다시피 해 그의 처소에서 장기간 머물러야만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각지의 제후들이 앞다퉈 권력욕을 드러내면서 정국은 더욱 어지러워졌다. 무엇보다도 로마교황청 역시 이런 기회를 이용해 황제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교권의 독립과 위상 강화를 꾀했다.
1065년 부활절에 어느덧 15세가 된 하인리히 4세가 엄숙한 의식을 통해 실질적인 권력을 가진 황제로 등극, 본격적으로 권한을 행사하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누적돼온 갈등이 표면화됐다.
특히 그가 궁정에 자질이 검증되지 않은 젊은 청년들을 대폭 기용하고 이들을 통해 기존 귀족세력을 견제하고자 했을 때 급기야 갈등은 무력 충돌로 번졌다. 우선, 1073년 황제와 독일 북부 작센의 귀족들 간에 전쟁이 벌어졌다. 내분을 힘겹게 해결하고 나자 이번에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와의 힘겨루기가 시작됐다. 주교 시절부터 교황청 내의 대표적 개혁인사로 명성을 떨쳐온 힐데브란트가 공교롭게도 1073년 알렉산더 2세 교황의 뒤를 이어서 그레고리우스 7세 교황(재위 1073~1085년)으로 선출된 것이다. 바야흐로 황제권과 교황권의 본격적인 대결 무대가 개막될 참이었다.
<이내주 전 육군사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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