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지 수요 시마당> 393
▢ 카프카즈 일기 40 / 나고르노 카라바흐Nagorno-Karabakh
삶 꽃잎도 오래 모시면 낙서가 된다 우상도 오래 섬기면 주인이 된다 |
40. 나고르노 카라바흐 Nagorno-Karabakh
나고르노 카라바흐Nagorno-Karabakh 분쟁은
지금도 모든 카프카즈 족속의 아킬레스 건
나고르노 카라바흐는
아제르바이잔 남서부 지역 내에 있는 아르메니아인의 거주지
아제르바이잔 국토 내에 있는
커다란 불씨와도 같은 불안한 지역
남의 땅에 살망정
그 영혼은 팔 수가 없어
몸은 아제르바이잔에 맡기고 살면서도
정신은 아르메니아에 기대 사는 민족
그런데 나고르노 카라바흐 지역 내의
아르메니아 계 세력이 독립을 선언하자
두 나라는 전쟁의 광기로 소용돌이쳤었다
하치카르 khachkar
아르메니아는 기독교 국가
아제르바이잔은 회교 국가
나고르노 카라바흐Nagorno-Karabakh 거주민은
믿음은 알라 대신에 아르메니아 정교에 맡겼기에
무슬림으로 둘러싸인 아제르바이잔의 영토 내에 살면서도
항시 고향을 그리워하는 정신적 유랑민들
아르메니아로 돌아갈 수도 없고
아제르바이잔의 영토 내에서
조용히 쉴 수도 없는 형국
섬기는 신이 다르고
기도하는 하늘이 다르고
혈통이 다르기에
저들의 머리 위에 드리운 카오스의 형극이
언제쯤 물러갈는지 예측할 수도 없는 상황
비극이 비극을 불러
학수고대하는 낙원의 도래는 아직도 요원하다
11세기 오스만 제국의 아나톨리아 정복 이래로
소수의 정복 세력인 이슬람이
다수의 기독교 세력인 아르메니아를 통치했기에
통치의 근간은 처음부터 불안했었다
19세기말 두 민족이 충돌한 제1차 학살에서
2만 명에 이르는 아르메니아인들이 희생의 제물이 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한 제2차 학살사건에서
터키 정부의 오랜 압제와 차별에 맞선
아르메니아인들의 봉기와 적국의 약탈에다
터키의 적대국인 러시아군에 아르메니아인들이 가담하여
결사항전을 거듭했기에
이로 인한 터키 정부의 보복으로
150만 명에 이르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죽음을 당했으니
종교의 분열이 대학살을 낳고
민족의 이질성이 폭풍 같은 증오를 불러들였기에
보복의 악순환은 그칠 줄을 몰랐었다
이민족에 대한 무도한 집단학살인가
자국의 이익과 체제에 맞서려는
불의의 세력에 대한 정당한 응징인가
민족은 저마다의 입맛에 맞게 역사를 해석하기에
보는 자의 시각에 따라 정의가 달라진다
응징과 학살은
관점을 바꾸면 그저 종이 한 장 차이
잣대를 고치면
정의로움과 불의는 순간에 뒤바뀌는 것
누가 불의이고
누가 정의인가
희생된 자는 모래알처럼 많은데
폭력을 휘두른 자는 아무도 없다는 아이러니
‘아르메니아 대학살’은 정작 눈앞에 남았는데
집단의 정당한 항전
혹은 이념의 정의만이 지배하는 모순
옳고 그름은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Armenian Genocide’는 현실인데
책임질 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인간의 슬픔은 눈앞에 있는데
역사의 아픔은 누구 때문인지 아직도 판명나지 않았다
역사는 대답하지 않는다
인간이 대답해야 한다
열강은 모른 척 대답하지 않는다
이해관계가 자기우선주의를 낳고
국가우선주의가 불의를 모호하게 만든다
죽은 자는 있는데
죄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인간의 모순이여
어느 것이 꽃이고
어느 것이 낙서인가
누가 주인이고
누가 우상인가
역사는 여기 있는데
대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국가의 경계선은 선명하지 않다
민족의 분기점은 분명하지 않다
종교의 혈통은 뚜렷하지 않다
낙원은 사방에 있으나
인간은 끝없이 분열한다
신은 어디에나 계시는데
이방의 신은 모두 우상이고
스스로 믿는 신만이 언제나 정의롭다
사랑은 하나인데
이념은 사람만큼 많기에
이념을 아무리 뒤쫓아가도
인간은 낙원에 도달할 수 없다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