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기
하록
시간을 종이에 녹여
시간이 면으로 색으로
시간을 두른 형태가 되어
손끝을 따라 흐르는
나의 춤 나의 탈출
나의 탈력 나의 멱
나의 줄 나의 탈주
나의 탈락 나의 낙
떠나는 모든 것들에 감사하라
떠나간 모든 것들을 감사하라
상실을 쌓을 수 있다는 건
한때는 기쁨을 모았다는 것
소망하세요
절망하세요
소망하세요
책임질 수 없어도
그저 달콤한 말이라도
--하록 시집, {설원과 마른 나무와 검은색에 가까운 녹색의}(근간)에서
모든 앎의 투쟁은 상상력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이고, 이 앎의 투쟁은 자기 자신의 상상력으로 어떤 미래를 구상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뭇잎같은 조각배를 타고 다니며 신대륙을 발견한 것도 상상력의 힘이고, 우주왕복선을 쏘아올린 것도 상상력의 힘이다. 컴퓨터를 통하여 이 지구촌을 실시간대로 떠돌아다니게 만든 것도 상상력의 힘이고, 인공지능(AI)을 통하여 새로운 미래의 인간형을 창출해낸 것도 상상력의 힘이다.
시인의 상상력은 문자를 통해 나타나고, 화가의 상상력은 그림을 통해 나타난다. 상상력은 시와 그림과 그 모든 예술의 운명을 결정하는 최종심급이고, 이 상상력의 힘에 따라 그의 사회적 지위와 신분 등의 계급적 서열이 결정된다. 하록은 시인이자 화가이고, 그는 그림을 그리듯 상상력을 찍어바르며 시를 쓴다. 시간을 종이 위에 녹이고, 시간을 면으로 펼쳐 색을 칠하고, 그리고 그 “시간을 두른 형태”로 그의 [그리기]를 설치한다. 그의 [그리기]는 시이고 미술이고, 또한 그의 [그리기]는 시간이고 인생이고 이 세계의 우주이다.
나의 춤은 나의 탈출이 되고, 나의 탈력은 나의 멱살을 움켜쥔다. 나의 줄은 나의 탈주가 되고, 나의 탈락은 나의 낙(즐거움)이 된다. “떠나는 모든 것들에 감사하라/ 떠나간 모든 것들을 감사하라/ 상실을 쌓을 수 있다는 건/ 한때는 기쁨을 모았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모든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고, 그 어느 것도 이 시간의 흐름을 거역할 수는 없다. 춤은 상승이지만 하강이고, 삶은 탈출이지만 재구속이다. 탄생은 죽음의 첫걸음이고, 죽음은 또다른 탄생의 시작이다. 이 자연의 이치에 따르면 천하제일의 영웅의 역할과 최하 천민의 역할 따위에 울고 웃을 필요도 없고, 모든 것이 그저 감사하고, 또 감사할 뿐이다. “소망하세요”와 “절망하세요”의 차이도 없고, 상승과 하강의 차이도 없고, 그 모든 것들은 다만 탈콤한 말일 뿐인 것이다.
하록 시인은 시간을 녹여 종이를 만들고, 이 종이 위에 색을 칠하고, 이 시간을 일으켜 세워 이 [그리기]의 우주를 창출해낸다. 시작이 끝이고, 끝이 시작인 이 우주의 성채 속에서는 모든 것이 만사형통이고, 그 어느 것도 즐겁고 기쁘지 않은 것이 없다. 소망과 절망이 어깨동무를 하고 춤을 추고 있고, 모든 것이 가고 모든 것이 되돌아 온다.
그리기, 그리기, 시간을 녹여 그림을 그리고, 이 [그리기]의 우주를 창출해내는 것----, 만일, 그렇다면 이 세상의 삶은 고작 ‘시간때우기’이며, 우리가 맡은 역할이란 고작 시간의 명령에 따른 ‘줄광대의 역할’이란 말인가?
“소망하세요”와 “절망하세요”의 사이에는 깊디 깊은 절망의 강이 흐르고, 모든 것을 자포자기해야만 하는 이 세상의 어릿광대들, 즉, 우리 젊은이들의 아픔과 슬픔이 ‘하록 하록’ 녹아 흐른다.
하록 시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