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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에 대하여 가르치심
눅 6:1-11
1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2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 및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4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5 또 이르시되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
6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7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니
8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서거늘
9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10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11 그들은 노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니라
예수님이 안식일에 행하신 일은 누가복음에 6번 등장합니다(4:31-39; 5:20-21; 6:1-11; 13:10-17; 14:1-6). 누가복음 6장에 나타나는 안식일 준수 논쟁은 안식일 논쟁을 소개하는 역할을 하고, 12 사도를 선택하는 배경이 됩니다.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1-2) 안식일은 유대인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했던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백성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안식일 법을 만들어 지키기 어렵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의 자격을 빼앗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안식일 논쟁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밀밭 사이로 지나가다가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 먹은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율법은 가난한 자들을 위해 밭에 이삭을 남겨 놓으라고(레 19:9-10; 23:22; 신 24:19) 말합니다. 문제는 안식일에 이 행동을 했다는 데 있습니다. 안식일에는 어떤 노동도 허용하지 않았고 많은 희생을 감수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삭을 자른 것을 수확으로, 곡식을 비비는 것을 타작으로 여겼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희생을 무력화한다고 이해했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이니라(3-5) 예수님은 사무엘상 21장 1-6절에 기록된 다윗의 모습을 인용하면서 바리새인들의 비난에 대응합니다. 물론 다윗이 보여준 모습이 안식일 법과는 상관없지만, 인간의 배고픔과 같은 기초적인 문제에서는 어느 정도의 융통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바리새인들이 만든 법이 아니라 새로운 종교적 질서를 세우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어느 것이 옳으냐(6-11) 예수님은 이미 안식일에 귀신을 내쫓았었습니다(눅 4:31-37). 이 사건에 대한 소문은 사방으로 퍼졌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안식일마다 예수님이 치유 사역을 하는지 안 하는지 알아보려 했습니다(7). 의심이 가득한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은 다시 오른손 마른 사람을 치유함으로써 바리새인들과의 관계가 매우 나빠지는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형식적으로 지키는 사람들에게 본질적인 문제를 알려주고, 진정한 자유와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안식일에 필요한 것이 무엇이고, 하나님이 안식일을 통해 우리에게 주고자 했던 선물이 무엇인지 알려 주시기를 원했습니다.
적 용 : 예수님이 안식일에 보여주신 여러 사역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실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분에 가득 찬 사람이 되겠습니까(11)? 아니면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동양의 성자였고, 인도의 태양으로 불렸던 간디도 죽기 전에 자신은 괴로운 사람이라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습니다. 부지런히 뛰어 보았지만 그것은 궁극의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 속에서 예수를 만난 사람은 창녀가 되었든지 세리가 되었든지 자기의 길을 또박또박 걸어갈 줄 압니다. 푯대가 있고 초점이 있고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루하루가 바쁘고 고된 생업 속에서 안식은 무엇일까요?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지금 이 땅에서 누리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 설 교 >
생명을 살리는 안식일
주일이 주일이라 부르지 못 하고
질문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이스라엘에 있는 한인교회는 언제 모여 주일 예배를 드릴까요? 토요일입니다. 왜 토요일입니까? 이스라엘은 대부분이 유대교인이고 그들은 토요일에 모두 회당에 가기에 나라 전체가 마비됩니다. 대중교통도 안 다니고 식당문도 안 열고 학교나 회사나 가게도 모두 닫습니다. 반면 주일에는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됩니다. 모든 가게, 회사, 학교가 주일에 시작됩니다. 이 사회에서 소수인 기독교인들은 주일에 예배를 드리면 학교도 일주일에 하루씩은 빼먹어야 하고 가게도 아무도 나오지 않는 토요일에 열고 모두가 바쁘게 한 주를 시작하는 주일에는 문을 닫아야 하고 직장인은 취업을 할 수가 없습니다. 누가 일주일에 하루씩 안 나오는 직원을 뽑겠습니까?
그럼 리비아나 이라크 같은 이슬람 국가의 한인교회는 언제 주일 예배를 드릴까요? 금요일입니다. 무슬림들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6일째를 기념하여 꼭 모스크에 모여 기도를 드리라고 코란에 나와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역시 같은 이유로 소수인 기독교인들은 금요일에 모여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그럼 이들은 주일예배를 주일이 아닌 토요일과 금요일에 드리고 있으니 주일을 범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주일에 주일예배를 드릴 수 있는 미국에 살지만 주일을 온전히 예배와 안식의 날로 지킬 수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의 일터가 주일에도 출근해야 하는 업종이면 그렇습니다. 많은 이들이 주일이 아닌 평일에 쉽니다. 직원들은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가 비지니스 오너라면 업종을 선택할 수 있으니 그리스도인이라면 아예 주일은 쉬는 업종을 택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자의든 타의든 주일에 출근해야 하고 혹은 주일에도 문을 여는 업종을 택했다면 우리는 주일을 범하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은 이런 의문에 답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답을 위해서 이렇게 반문할 수 있습니다. 주일에도 일하면서 비난을 받기보다 오히려 칭찬을 듣는 곳이 있는데 어디 일까요? 그곳은 소방서, 경찰서, 병원, 대중교통, 물과 전기공급업체 등입니다. 이들은 남들이 쉬는 안식일, 주일은 물론이고 명절과 모든 종류의 휴일에도 결코 문을 닫는 법이 없는 곳입니다. 물론 직원들은 돌아가며 쉬지만 그 임무는 계속 수행되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요. 그들은 쉬지 않는다고 비난받기는커녕 오히려 칭찬을 듣습니다. 반대로 그들은 쉬면 큰 일이 납니다. 주일이라고 경찰이 범죄를 내버려두고 불이 났는데 소방차가 오지 않고 물과 전기가 끊어진다고 생각을 해 보십시오. 얼마나 끔찍합니까? 주일에도 이들의 쉬지 않음은 왜 칭찬을 받습니까? 그들의 임무가 생명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 힌트가 있습니다. 주일에도 생명을 살리는 일은 쉬지 않습니다.
주일에 바쁜 사람들
요한복음 5장을 보면 예수님이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치시자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했다며 유대인들이 비난합니다. 그 답으로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십니다.
(요 5: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요 5:1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예수님은 하나님이 안식일에도 일하고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무슨 일을 하실까요? 우주를 운행하시고 생명을 유지하십니다. 태양이 계속 타올라 지구에 에너지를 공급하고 중력과 핵력과 전자기력이 계속 작동하도록 하여 원소들이 흩어져 우주가 사라져버리지 않도록 돌보시고 우리의 육체의 생명을 공급하는 심장과 폐와 간의 기능을 유지시켜 우리가 쓰러지지 않고 밤새 힘을 회복하여 다시 일어나도록 해주십니다. 이 외에도 숱한 생명과 세계의 유지와 회복을 위한 일을 여전히 하고 계십니다. 만약 하나님이 안식일이라고 일하심을 중단하신다면 그 순간 생명과 우주는 전기공급이 끊긴 도시, 물공급이 끊긴 주방, 병원과 경찰서와 소방서가 문을 닫은 동네가 되고야 말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하고 계시는 그 일을 당신도 하고 계신다고 답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한 마디로 무엇이라 정의할 수 있을까요?
일하시는 하나님
오늘 본문에는 안식일의 참 의미에 대해 예수님이 설명하시는 두 개의 에피소드가 등장합니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오른손이 마비된 사람을 치유하시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이고 아니고 간에 병자들을 만나면 고쳐주시는 줄 알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안식일을 범한다고 고발하려고 노리는 것을 아시고는 일부러 그들 앞에 병자를 세우시고 물으십니다.
(눅 6:9)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눅 6:10)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여기에 답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한마디로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생명을 구하는 것입니까? 바로 인간사랑입니다. 인간을 긍휼히 여기는 것이 선이고 인간의 복지를 구하는 것이 생명을 구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안식일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지나다가 배가 고파 이삭을 잘라 먹습니다. 이 일로 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비난합니다. 바리새인들의 전공은 비난하는 것이고 부업은 험담하는 것이고 취미는 불평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다윗의 예를 들어 제자들을 옹호하셨습니다.
(눅 6: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 및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눅 6:4)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성전의 규례를 다윗이 어겼지만 그것이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어서 비난받지 않았는데 내 제자들도 안식일 규정을 어겼지만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냐? 여기 배고픈 사람이 있으면 그를 긍휼히 여기는 것이 먼저지, 그가 규정을 지키느냐 마느냐가 더 중요하냐? 이 인정머리 없는 인간들아,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를 이어서 제시하십니다.
(눅 6:5) 또 이르시되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
이게 무슨 뜻일까요? 이 누가복음과 병행구절인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을 보면 더 분명하게 설명됩니다.
(마 12: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마 12:8)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제사 심지어 예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자비 즉 인간사랑이라는 말입니다. 마가복음은 더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막 2:27)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막 2: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안식일을 제정하신 이유가 인간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배고픈 자를 먹이고 병든 자를 고치고 사람을 복되게 하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안식일을 가장 잘 지키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인간 사랑을 위한 안식일
여기서 안식일의 참 목적이 드러납니다. 왜 하나님은 안식일을 예배와 안식의 날로 삼으라고 명령하셨습니까? 주일에 예배 안드리면 믿음 없다고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주일에 안식하지 않으면 주일날 돈 벌러 간다고 비난하기 위해서가 더더욱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배와 안식이 우리를 복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살리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안식일을 주신 것이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우리를 만든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안식일의 주인이고 이는 곧 그 주님이 목숨 바쳐 사랑하는 우리 인간이 그 안식일의 주인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은 해도 되고 무엇은 안 되는가, 예배를 주일에 드리는가 다른 날에 드리는가, 주일에 출근하면 되는가 안 되는가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주일을 생명을 살리는 날로 보내는가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병원과 소방서와 경찰서와 전기회가, 물회사가 주일에 일함으로 더욱 칭찬받듯이 우리는 사람을 살리는 주일을 보내야 합니다. 예배와 안식의 날로 온전히 쉬는 것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면 그렇게 보내야 합니다. 주일에 출근하는 것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면 그렇게 보내는 것이 맞습니다.
이는 반대로 주일을 생명을 죽이는 날로 보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지 못 하여 우리의 마음이 안식하지 못 하고 있다면 주일에 예배를 하든 일을 안하고 쉬든 그것은 염려 가운데 죽어가는 것입니다. 주일에도 출근하는 이유가 한 푼이라도 더 벌어서 내 힘으로 먹고 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라면 밑 빠진 독같은 우리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라면 그 날은 죽어가는 날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우리 자신과 이웃과 자연까지 착취하고 죽이는 삶을 살까봐 하나님은 안식일에 나만 쉴 것이 아니라 종들과 가축들까지 쉬게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안식일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더합니다. 그럼 주일이 생명을 살리는 날이라면 다른 6일은 생명을 살리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믿는 것이 안식일이라면 다른 날은 안 믿어도 되는 것입니까? 바로 이 질문 속에 안식일을 구별하신 이유가 등장합니다. 그 이유는 어버이날과 3.1절 기념일과 추수감사절을 정한 이유와 마찬가지입니다. 어버이날은 그 날만 어버이를 공경하고 다른 날은 무시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날을 기념함으로써 어버이를 공경하는 마음을 새로이 일깨워 일 년 내내 그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3.1절을 통해 조국사랑을 일깨워 일년 내내 조국을 사랑하고 추수감사절을 통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회복하여 일년 내내 감사의 믿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7일마다 한 번씩 우리는 챗바퀴 돌듯 정신없는 삶을 잠시 멈추고 예배와 안식 속에서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아, 바쁘게 살 때는 내 힘으로 살아가는 것 같았는데 사실 하나님의 공급과 돌보심으로 살아가는 것이지… 아, 내 직업, 내 일터는 먹고 살기 위함이 아니고 이웃과 자연을 착취하여 내 탐욕을 채우기 위함이 아니고 나와 이웃과 세상을 살리기 위함이지… 생명을 살리는 것이 내 소명이지…’ 이것을 깨닫고 주일 뿐 아니라 일주일 전체를 그 믿음과 소명을 가지고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깨달으면 안식일이 복될 뿐 아니라 일주일 전체가 복됩니다. 우리 자신이 살아나고 이웃과 세상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삶의 의미와 목적이 발견됩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안식일에 부어주시는 행복입니다.
(출 20:11)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여러분의 주일이 이렇게 복된 날이 되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