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견마지치(犬馬之齒)
개나 말의 나이라는 뜻으로, 견마가 부질없이 나이만 더하듯이 아무 하는 일 없이 나이를 먹는 일을 의미하거나, 자기의 연령을 겸손하게 표현하는 말이다.
犬 : 개 견
馬 : 말 마
之 : 갈 지
齒 : 이 치
(동의어)
견마지년(犬馬之年)
견마지령(犬馬之齡)
견마지치(犬馬之齒)는 하는 것도 없이 나이나 먹거나, 자기 나이를 공손하게 표현할 때 쓴다. 여기서 치(齒)는 이빨을 뜻하는 게 아니라 나이를 뜻한다. 연령(年齡)할 때 齡(나이 령)에 이 치(齒)가 부수인 것도 이 이유다.
스무 살을 약관(弱冠) 또는 약년(弱年)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아직 약한 편이지만 다 자랐으므로 어른으로서 갓을 쓰게 한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열 살은 어리다고 부르는데 이 때부터 공부를 시작하게 된다. 스무 살은 아직 약한 편이지만 다 자랐으므로 어른으로서 갓을 쓰게 한다. 서른 살은 완전히 여물대로 여문 장정이 된 나이이므로 이때는 아내를 맞아 집을 가지고 자식을 낳게 한다.
마흔 살은 뜻이 굳세어지는 나이로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으므로 벼슬을 하게 된다. 쉰 살은 쑥처럼 머리가 희끗해지는 반백의 노인이 되는 시기이인데 이때는 많은 경험과 함께 마음이 가라앉는 시기이므로 나라의 큰 일을 맡게 된다. 예순 살은 늙은이의 문턱에 들어서는 나이이므로 자기가 할 일을 앉아서 시켜도 된다.
공자는 “나는 나이 열 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에 이루었으며, 마흔에 생각이 헛갈리지 않았다. 쉰에 천명을 알았고, 예순에 귀로 들으면 그 뜻을 알았으며, 일흔에 이르러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 하여도 틀을 벗어나지 않았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지학(志學), 이립(而立), 불혹(不惑), 지천명(知天命), 이순(耳順)이라는 말이 나왔다.
자기의 나이를 스스로 낮추어 일컬을 때 견마년(犬馬年) 또는 견마지치(犬馬之齒)라고 하는데 이는 개나 말처럼 보람 없이 헛되게 먹은 나이라는 의미이다.
미국의 명사 뉴컴 차리 라는 사람은 생전에 자기 나이를 숨겨왔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관에 명찰을 붙여야 했는데 명찰에 써 넣어야 할 그의 나이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친구들 역시 "아마 79세일거야", "아마 그보다 아래일거야"라고 해서 결론이 나지 않았다. 듣고 있던 장의사가 "저승길에 거짓말을 하면 안됩니다. 정확한 나이를 모르면 '상당한 노인'이라고 쓰겠습니다"고 했다.
우리말 나이를 말하는 한자 연령(年齡)의 年은 늦가을 벼가 익어 고개를 숙인 모습에서 따온 글자다. 따라서 年의 본래 뜻은 '곡식이 익다'이다. 한자가 여러 단계를 거쳐 변했기 때문에 선뜻 이해가 안된다. 한자가 지금의 형태, 즉 해서체로 정착된 것은 갑골문 이후 1천5백년이 훨씬 지나서 였으니 지금의 글자는 공자도 못 읽을 것이다.
농경사회에서 벼는 일년에 한번씩 수확했기에 年은 일년을 뜻하기도 했다. 그 결과 年이 시간이란 뜻으로도 쓰이기도 했다. 본래 일년을 세(歲) 또는 재(載), 사(祀)라고 했으나 이후 연세(年歲)는 일년으로 나이를 뜻하게 됐다.
연령이라고 할때 령(齡)자는 '이'를 뜻하는 치(齒)와 령(令)의 합성어로 '치'는 특히 앞니를 뜻한다. 그렇다면 왜 앞니를 가지고 나이를 삼았을까. 시골에서 자란 사람들은 기억할 것이다.
소나 말은 태어난 다음에는 일년에 앞니가 하나씩 난다. 그러다 나이가 들면 이번에는 하나씩 빠진다. 따라서 앞니의 수를 계산해 보면 나이를 알수가 있다. 그렇다면 나이는 어금니와는 관계가 없고 앞니와 관계가 있다는 얘기가 된다.
한편 령(令)은 명령(命令)이란 말도 되지만 월령(月令), 시령(時令)이라는 말이 있듯 '때'라는 뜻도 있다. 따라서 령(令)은 앞니를 가지고 때(令)를 판단하는 것으로 '나이'를 뜻하게 됐다. 결국 年(년)은 곡식의 나이, 령(齡)은 동물의 나이 이니 사람은 식물과 동물의 나이를 본떴을 뿐이다.
옛 어른들은 자기 나이를 낮춰 말할 때 견마지치(犬馬之齒)라고 했다. '개나 말처럼 보람없이 헛되게 나이를 먹었다'는 얘기다. 내년 이맘때 견마지치(犬馬之齒)가 되지 않으려면 올 한해를 보람없이 헛되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
종심(從心)을 바라보며
어찌 나이 먹는 것을 자랑하고 세월만 탓했을까마는 종심(從心)을 바라보며 지난 날 돌이켜 보니 부질없이 보낸 지난 날이 부끄럽고 후회스럽기 그지없다.
옛말에 뿌리가 튼튼해야만 가지가 무성하고 꽃과 열매가 풍성해진다는 근심엽무(根深葉茂)요 근고지다(根固枝多)라고 했는데 그야말로 나는 나이만 먹었다.
일찍 공자(孔子)는 스스로의 입장이 뚜렷해져야 하는 30대를 삼십이립(三十而立), 무슨 일에도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는 40대를 사십불혹(四十不惑), 하늘의 뜻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는 50대를 오십이지천명(五十而知天命), 60대를 이순(耳順)이라 하여 귀를 듣고 판단한다고 하여 그렇게 불렀고 마음을 연다는 70대를 종심(從心)이라 불렀다.
다소 멋을 부릴 나이에 대한 호칭 그러면 80대를 모혹은 미수(米壽), 90대를 기(期)혹은 백수(百壽)라 불렀으니 정말 이때가 인생살이의 백수(?)가 아닌가.
B.B 라즈니시는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과거는 점점 더 늘어나고 미래는 점점 더 줄어든다고 했는데 나 역시 이 말을 공감하면서 차츰차츰 주변 정리를 한다.
내 어릴 적 우리 부모는 어떻게 우리 가족들을 건사했을까. 지금 나의 처지를 가만히 되내어 보니 자식들에게 항시 모자람이 앞을 가린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반드시 노쇠나 인간적인 기능의 약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과는 반대로 우리들의 내면에서 감추어졌던 눈을 뜨게 하는 일이며, 눈이 어두워지는 일이 아니라 밝아지는 일이다.
젊은 날에 내가 가졌던 그 밝다고 생각했던 눈을 따지고 보면, 주관적인 자기 중심적인 그것에 불과하며 사람을 사람으로, 나를 나무로 볼 수 있는 눈은 나이를 먹음으로써 비로소 열리게 되는 것이라고 시인 박목월의 문장이 생각났다.
그렇다. 나이는 연륜이자 사회에 대한 경험자요, 선배다. 그러므로 노인을 봉양한다는 것은 당연하게 받아 들여져야 한다. 나는 아직 못 다한 일이 너무나 많다. 그래도 어찌 하겠는가.
나이만 먹었으니까 하는 말이다. 어느 사람을 불구하고 절대 견마지치(犬馬之齒; 개나 말처럼 보람 없이 헛되게 먹은 나이) 하지 않았는지 자기를 반성하고 되돌아 보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
진정 종심의 나이를 바라보며 그동안 발자취를 다시금 더듬어 보니 얼굴 붉힌 일도 있고 늘 부족함이 더 많이 있으니 너무 죄송스럽다.
그렇다고 매냥 나이만 들고 있으면 되겠는가. 정리할 것이 있으면 과감히 정리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세로 마지막을 잘 회향(廻向) 해야 할 시간이다.
일본 속담에 늙은 말은 길을 잃지 않는다고 했는데 맞는 말이다. 그것은 앞서 밝혔지만 경륜과 연륜이 있기에 아마 이런 말이 나온 것 같다. 그래 종심이면 어떻고 모기(耄期)면 어떠한가. 지금도 현직에서 젊은이들과 함께 뛰고 있으니, 나이가 어디 있는가.
그래서 나는 항시 나이를 20살 정도 젊게 산다. 그것이 생활의 지혜이자 나이 먹지 않는 비결이다. 나이 먹어감에 따라 급한 것부터 먼저하라는 옛 속담에 진리가 담겨 있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것을 따르면 인간의 가장 복잡한 제반 문제는 능히 다룰 수 있을 만큼 간소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저 유명한 아이젠하워의 말이다. 종심의 나이는 그저 나이일 뿐이다.
이 치(齒)에 대하여
고재종은 농사를 지으며 시를 써온 전남 담양 출신의 시인입니다. 그의 빼어난 작품 중에서 ‘한바탕 잘 끓인 추어탕으로’부터 먼저 읽어보겠습니다. 길지만 전문을 인용합니다.
우리 동네 성만씨네 산다랑치 논에, 그 귀퉁이의 둠벙에, 그 옆 두엄 자리의 쇠지랑물 흘러든 둠벙에, 세상에, 원 세상에, 통통통 살 밴 누런 미꾸라지들이, 어른 손가락만 한 미꾸라지들이 득시글벅시글 거리더라니, 그걸 본 가슴팍 벌떡거린 몇몇이, 요것이 뭣이당가, 요것이 뭣이당가, 농약물 안 흘러든 자리라서 그런가 벼, 너도 나도 술렁대며 첨벙첨벙 뛰어들어, 반나절 요량을 건지니, 양동이 양동이로 두 양동이였겄다!
그 소식을 듣곤, 동네 아낙들이 성만씨네로 달려오는데, 누군 풋배추 고사리를 삶아 오고, 누군 시래기 토란대를 가져오고, 누군 들깨즙을 내오고 태양초물을 갈아 오고, 육쪽마늘을 찧어 오고 다홍고추를 썰어 오고, 산초가루에 참기름에 사골에, 넣을 것은 다 넣게 가져와선, 세상에, 원 세상에, 한 가마솥 가득 붓곤 칙칙폭폭 칙칙폭폭, 미꾸라지 뼈 형체도 없이 호와지게 끓여 내니
그 벌건, 그 걸쭉한, 그 땀벅벅 나는, 그 입에 쩍쩍 붙는 추어탕으로 상치(尙齒)마당이 열렸는데, 세상에, 원 세상에, 그 허리가 평생 엎드렸던 논두렁으로 휜 샛터집 영감도, 그 무릎이 자갈밭에 삽날 부딪는 소리를 내는 대추나무집 할매도, 그 눈빛이 한번 빠지면 도리 없던 수렁 논빛을 띤 영대 씨와, 그 기침이 마르고 마른 논에 먼지같이 밭은 보성댁도 내남없이, 한 그릇 두 양품씩을 거침없이 비워 내니
봉두난발에, 젓국 냄새에, 너시에, 반편이로 삭은 사람들이, 세상에, 원 세상에, 그 어깨가 눈 비 오고 바람 치는 날을 닮아 버린 그 어깨가 풀리고, 그 핏줄이 평생 울분과 폭폭증으로 막혀 버린 그 핏줄이 풀리고, 그 온몸이 이젠 쓰러지고 떠나 버린 폐가로 흔들리는 그 온몸이 풀리는지, 모두들 얼굴이 발그작작, 거기에 소주도 몇 잔 걸치니 더더욱 발그작작해서는, 마당가의 아직 못 따 낸 홍시알들로 밝았는데,
때마침 안방 전축에선, 쿵짝 쿵짝 쿵짜자 쿵짝 네 박자 속에 사랑도 있고 눈물도 있고 이별도 있다고 하며, 한번 놀아 보장께. 기필코 놀아 보장께, 누군가 추어대곤, 박수 치고 보릿대춤 추고 노래 부르고 또 소주 마시니, 세상에, 원 세상에, 늦가을 노루 꼬루만 한 해 넘어가는 줄도 모르고 한바탕 잘 노니, 아 글쎄, 청천하늘의 수만 별들도 퉁방울만 한 눈물 뗄 글썽이며, 아 글쎄, 구경 한번 잘 하더라니!
절로 흥이 나고 즐거운 이 시의 세 번째 연에 상치(尙齒)마당이 나옵니다. 상치는 이를 받들어 모시는 것이니 나이든 노인들을 위해 베푼 잔치마당을 말합니다. 가을철 미꾸라지 보양식으로 한데 얼려 흥겹게 한때를 보내는 마을공동체의 존노상치(尊老尙齒) 전통이 핍진하고 약여합니다.
예로부터 '조정에서는 작위만한 것이 없고 마을에서는 나이만한 것이 없으며 세상을 돕고 백성들의 어른 노릇함에는 덕망만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朝廷莫如爵 鄕黨莫如齒 輔世長民莫如德.
조정막여작 향당막여치 보세장민막여덕.
신라 3대 유리왕부터 16대 흘해왕 때까지 썼던 왕호 이사금(尼師今)은 이가 많은 사람, 즉 연장자는 성스럽고 지혜로운 사람(聖智人)이라고 한 데서 유래된 치리(齒理)라는 말입니다. 유리왕과 탈해왕이 서로 왕위를 양보하다가 이가 더 많은 유리왕이 먼저 즉위한 다음부터 왕을 이사금으로 불렀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흥겨운 상치(尙齒) 모임이라도 이가 없으면 저작(詛嚼)을 할 수 없습니다. 못된 사람을 일러 불치인류(不齒人類), 사람 축에 들지 못한다는 말도 하지만 이가 없으면 사람 축에도 끼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 없는 입으로 한없이 오물오물하며 식사를 하던 시골 할머니들 생각이 납니다. 그런 분들의 고통과 불편을 스스로 낙치(落齒)의 나이가 돼서야 알았으니 이가 나는 것도, 이가 빠지는 것도 다 인간이 철드는 일 중 하나인가 봅니다.
견마지치(犬馬之齒)란 개나 말처럼 헛나이를 먹었다고 겸손하게 하는 말인데, 지금 이 나이가 견마지치가 아니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의술이 발달해 치아를 때우고 새로 해 넣고 교정하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예전엔 이가 빠지면 그저 잇몸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去年落牙一(거년낙아일)
今年落一齒(금년낙일치)
俄然落六七(아연낙육칠)
落勢殊未已(낙세수미이)
지난해 어금니 한 개 빠지더니,
올해는 앞니 한 개가 빠졌다.
어느새 6, 7개가 빠졌는데,
그 기세가 줄어들지 않는구나.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중 한 명인 한유(韓愈)의 시 낙치(落齒) 36행 중 처음 4행이다. 마지막 4행은 이렇다.
人言齒之落(인언치지락)
壽命理難恃(수명이난시)
我言生有涯(아언생유애)
長短俱死爾(장단구사이)
어떤 사람은 말하네 이가 빠지는 건
수명이 다한 거라고
나는 말한다 인생은 유한한 것
장수하든 단명하든 죽는 건 마찬가지.
한유(韓愈)는 진학해(進學解)라는 글에서도 학생들의 입을 빌려 이가 빠진 이야기를 한다.
冬暖而兒號寒(동난이아호한)
年登而妻啼飢(연등이처제기)
頭童齒豁(두동치활)
竟死何裨(경사하비)
不知慮此(불지려차)
而反敎人爲(이반교인위)
겨울이 따뜻해도 아이들은 춥다 울고
풍년에도 사모님은 배고파 우셨고
머리가 벗겨지고 이가 빠지셨으니
마침내 죽으면 무슨 소용 있나요?
이런 생각도 할 줄 모르시면서
누구를 가르친다는 건가요?
여기에서 두동치활(頭童齒豁), 아이처럼 민둥머리에 이 사이가 벌어졌다는 성어가 생겼다. 한유(韓愈)가 진학해(進學解)를 쓴 것은 43세 때인데, 38세 때 쓴 오잠(五箴)에서도 시력과 청력이 약해지고 치아가 빠졌으며 머리가 세어졌다고 탄식했다.
여섯 수로 이루어진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시 노인일쾌사(老人一快事)에도 머리와 치아 이야기가 나온다.
첫 번째 시의 앞부분 2행이다.
老人一快事(노인일쾌사)
髮鬜良獨喜(발간양독희)
늙은이 한 가지 유쾌한 일은
민둥머리가 참으로 유독 좋아라.
이어 두 번째 시의 앞부분이다.
老人一快事(노인일쾌사)
齒豁抑其次(치활억기차)
늙은이 한 가지 유쾌한 일은
치아 없는 게 또한 그 다음이라.
다산(茶山)은 마지막에
快哉醫書中(쾌재의서중)
句去齒痛字(구거치통자)
유쾌하도다 의서 가운데에서
치통이란 글자는 빼버려야겠네.
라고 한다. 이가 다 빠졌으니 이제 아플 일도 없다는 말이다.
이 빠지는 게 유쾌할 리 없지만, 이렇게 달관과 해학적인 태도로 세상을 살아가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이는 건강과 노화, 두 가지를 알려주는 인체 측정장치입니다. 노(老)를 쇠퇴나 쇠약이 아니라 노숙과 노련으로 해석하려 해도 빠진 이가 새로 날 수 없고 만든 이가 온전히 내 이와 같을 리 없습니다.
한국인들은 참 악착같이 살아왔습니다. 악착도 이와 관련된 말입니다. 작은이 악(齷)과 이 마주 붙을 착(齪)이 합쳐진 악착의 본뜻은 작은이가 꽉 맞물린 상태나 앙다물어 이가 맞부딪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이를 앙다물고 악물고 살아온 게 아닐까요?
그러나 이제 나이 들고 여유가 좀 생겼으면 달라져야 합니다. 재미있는 시를 많이 쓴 오탁번 시인은 문학청춘 올해 여름호에 발표한 '늙은이애'에서 이렇게 말했더군요.
애늙은이라는 말은 있는데
늙은이애라는 말은
왜 없을까
콩팔칠팔
흘리고 까먹고
천방지방 하동하동
나는 나는
늙은이애!
늙은이애라는 말을
국어사전에 등재는 하지 않고
국립국어원은
낮잠 주무시나?
이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늙은이애 처럼 살아가는 게 보기 좋을 것입니다. 각자무치(角者無齒), 즉 뿔이 있는 건(동물) 이가 없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가 없는 분들은 뿔이 있다고 생각하고 각자 자기 분야에서 두각(頭角)을 나타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너무 서두르거나 다투지는 말고!
▶ 犬(견)은 상형문자로 犭(견)은 동자(同字)이다. 犬(견)은 개의 옆모양을 본뜬 글자이다. 한자는 그것의 제일 두드러진 곳을 강조한 것이다. 소와 양은 뿔을, 말은 갈기를 개는 짖는 입을 각각 특징으로 본 뜬 자형(字形)이다. 犬(견)은 다른 글자의 변이 되면 개사슴록변(犭=犬; 개)部로 쓴다. 용례로는 개와 말을 견마(犬馬), 송곳니를 견치(犬齒), 개가죽을 견피(犬皮), 개와 고양이를 견묘(犬猫), 개와 원숭이를 견원(犬猿), 개가 짖음을 견폐(犬吠), 개와 원숭이의 사이처럼 매우 사이가 나쁜 관계를 견원지간(犬猿之間), 개나 말의 하찮은 힘이라는 견마지로(犬馬之勞), 개와 토끼의 다툼이라는 견토지쟁(犬兔之爭), 개나 말이 주인을 위하는 마음이라는 견마지심(犬馬之心), 자기 나이를 낮추어 하는 말을 견마지년(犬馬之年), 개나 말의 정성이라는 견마지성(犬馬之誠), 개나 말이 하는 일없이 나이만 더하듯이 아무 하는 일없이 나이만 먹는 일을 견마지치(犬馬之齒), 개나 말의 봉양이라는 견마지양(犬馬之養), 개와 토끼의 다툼이라는 견토지쟁(犬兎之爭) 등에 쓰인다.
▶ 馬(마)는 상형문자로 말의 모양으로 머리와 갈기와 꼬리와 네 다리를 본떴다. 개는 무는 것을, 소는 뿔을 강조한 자형(字形)이지만 말의 경우에는 갈기를 강조하고 있다. 부수로 쓰일 때 말과 관계가 있음을 나타낸다. 용례로는 마구간을 마사(馬舍), 말의 똥을 마분(馬糞), 말을 타는 재주를 마술(馬術), 말이 끄는 수레를 마차(馬車), 말을 부리는 사람을 마부(馬夫), 말을 타고 떼를 지어 다니는 도둑을 마적(馬賊), 말의 몇 마리를 마필(馬匹), 말의 다리를 마각(馬脚), 말을 매어 두거나 놓아 기르는 곳을 마장(馬場), 경마할 때에 파는 투표권을 마권(馬券), 말의 귀에 동풍이라는 마이동풍(馬耳東風), 말의 다리가 드러난다는 마각노출(馬脚露出), 말의 가죽으로 자기 시체를 싼다는 마혁과시(馬革裹屍), 말이나 소에 의복을 입혔다는 마우금거(馬牛襟裾), 달리는 말은 말굽을 멈추지 않는다는 마부정제(馬不停蹄), 말도 갈아타는 것이 좋다는 마호체승(馬好替乘) 등에 쓰인다.
▶ 之(지)는 상형문자로 대지에서 풀이 자라는 모양이 전(轉)하여 간다는 뜻이 되었다. 음(音)을 빌어 대명사나 어조사로 차용한다. 용례로는 이 아이라는 지자(之子), 之자 모양으로 꼬불꼬불한 치받잇길을 지자로(之字路), 다음이나 버금을 지차(之次), 딸이 시집가는 일을 지자우귀(之子于歸), 남쪽으로도 가고 북쪽으로도 간다 즉, 어떤 일에 주견(主見)이 없이 갈팡질팡함을 이르는 지남지북(之南之北), 변방에 사는 노인의 말이라는 새옹지마(塞翁之馬), 옛날 중국의 관중과 포숙처럼 친구 사이가 다정함을 이르는 관포지교(管鮑之交), 주머니 속에 있는 송곳이라는 낭중지추(囊中之錐), 나라를 기울일 만한 여자라는 경국지색(傾國之色), 일을 맺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는 결자해지(結者解之) 등에 쓰인다.
▶ 齒(치)는 형성문자로 歯(치)의 본자(本字)이다. 음(音)을 나타내는 止(지, 치)와 이를 물고 있거나 잘 움직여 씹거나 함을 나타내는 나머지 글자의 합자(合字)로 이를 뜻한다. 이는 생장(生長)과 깊은 관계가 있으므로 나이의 뜻도 나타낸다. 용례로는 나이가 많고 덕행이 높음을 치덕(齒德), 나이의 차례를 치서(齒序), 이의 점잖은 일컬음을 치아(齒牙), 이가 박혀 있는 상하 턱뼈의 구멍을 치조(齒槽), 齒根 치근이의 치조 속에 있는 부분을 치근(齒根), 이의 속에 있는 빈 곳을 치강(齒腔), 이촉을 싸고 있는 살을 치경(齒莖), 이를 전문으로 치료하고 연구하는 의학의 한 분과를 치과(齒科), 잇몸이 튼튼하지 못하여 잘 붓고 피가 모이는 증세를 치담(齒痰), 이의 표면 특히 이의 안쪽 밑동 부분에 침에서 분비된 석회분이 부착해 굳어진 물질을 치석(齒石), 이를 닦는 데 쓰는 약을 치약(齒藥), 잇몸이 부어서 곪는 병을 치옹(齒癰), 이뿌리를 둘러싸고 있는 살을 치육(齒肉), 이가 쑤시거나 몹시 아픈 증상을 치통(齒痛), 이는 빠져도 혀는 남아 있다라는 치망설존(齒亡舌存),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는 치망순역지(齒亡脣亦支), 배냇니를 다 갈지 못하고 머리는 다박머리라는 아직 나이가 어림을 뜻하는 치발부장(齒髮不長)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