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이 공부 못하는 것은, 다 부모 탓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부모가 공부 잘했으면 어찌 자식이 공부를 못할까.
내 친구들을 봐도 그렇다.
친구놈이 지독히도 공부 못하니 자식들도 그렇다.
공부 못했던 놈이 자식에게 공부 잘하라는 짓은 다윈의 진화론을 모르는 놈이다.
내 큰 딸은 공부 빼놓고 다 잘했다.
‘공부만 잘하는 놈’보다 ‘공부 빼놓고 다 잘하는 놈’이 훨씬 훌륭하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내 딸이 공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3년이 걸렸다.
나는 공부 잘 했기 때문이다.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다윈이 거짓말 시킨 것이다.
녀석은 지독하게 나를 괴롭혔다. 공부는 안하고 영화만 지독히도 보고만 있었다..
그러더니 잘 나가는 서울 소재의 영화과에 덜컥 붙어 버렸다.
자랑하고 싶어 죽을 뻔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했다. 내 아아가 그렇게 하고 싶어 했던 영화’를 공부할 수 있게 된 것이 너무 기뻣다.
모두 축하한다며 어느 대학이냐고 물어본다.
그런데 대학 이름을 대면 다들 반응이 영 신통치 않다. 그리 대단한 대학도 아닌데 호들갑이라는 표정이다.
옛날에는 공부를 무조건 잘해야 했다.
좋은 대학을 나온 것이 인생의 행복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그때는 인생이 진짜 짧았다. 지금 학부모 세대가 대학에 다니던 1970~80년대의 한국인 평균수명은 60살을 겨우 넘긴 수준이었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은 100살을 넘겨 산다. 아주 오래 산다는 이야기다. 평균수명 60살의 20살과 평균수명 100살의 20살의 존재론은 전혀 다르다.
우리의 자녀들은 전혀 다른 세상을 살아간다는 이야기다.
굵고 짧게 사는 세상이 아니다. 길게,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 세상이다.
인생의 기회도 여러 번 온다.
좋은 대학 가는 것보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훨씬 더 행복한 세상이다.
오래오래 살아야 하는 세상에서, 젊어서 일찍 잘되는 것처럼 위험한 일은 없다.
한번 생각해 보라. 우리의 대학 시절에, 지금과 같은 세상을 꿈이나 꿀 수 있었던가?
상상도 못했던 세상 아니던가?
평균수명 60살의 사고방식으로 오래오래 살 아이들의 삶을 구속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아니, 자식 걱정 이전에 부모 자신의 삶부터 고민해야 한다.
우리도 80~90살은 너끈히 사는 세상이 되었다.
쉰 중반이면 다들 은퇴한다.
나머지 30~40년을 행복하게 살 자신은 있는가?
자신의 행복한 노후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 없으면서, 자녀가 좋은 대학을 가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그 근거 희박한 신념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가?
요즘 나는 내 아이에게 단 한 가지 조언만 한다.
결혼은 될 수 있으면 늦게 해라. 가능한 한 많은 남자를 만나, 정말 폼 나는 사랑을 다양하게 해보라.
세월은 가도 사랑은 남는다!
그리고 결혼은 45살에 30살 먹은 총각과 해라. 이혼남도 괜찮다.
그래야 손해 보지 않는 인생이다. 내가 아이와 식탁에서 이런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내 아내는 나를 아주 잡아먹을 듯 째려본다.
마지막으로 정말 솔직한 한마디 더 보태자. 나도 내 아이가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갔다면 이런 이야기 절대 안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