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31
3월16일[사순 제3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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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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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15llddP6St4 (최대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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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령을 거스르고 모독한 죄는 가장 엄중한 처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유다 사상에 따르면 수많은 마귀들을 통솔하는 마귀들의 ‘보스’이자 ‘대(大)마귀’가 있는데, 그 마귀의 이름은 ‘베엘제불’이었습니다.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어둠의 통치자’ ‘악의 통치자’ ‘세상의 통치자’입니다.
그런데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대마귀와 결탁해서 다른 새끼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엄청난 신성모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성령으로 마귀들을 내쫓고 있는데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대마귀와 손을 잡고 마귀를 쫒아내고 있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사탄의 하수인으로 전락시킨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참으로 큰 죄요 신성모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너무나 어리석은 율법학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한 마디 던지십니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 사탄이 서로 갈라서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어 내겠느냐?”(루카 복음 11장 17~18절)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사탄보다 훨씬 우위에 있는 존재로, 그리고 당신은 오로지 하느님의 힘으로 사탄을 굴복시키고 있음을 명확히 인식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 당신은 하느님 힘의 소유자요 관리자임을 명백히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를 내쫓으시는 사건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나라가 인간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주는 사건입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공생활로 인해 마귀의 세력은 점점 소멸되어 갈 것이며 언젠가 당신 앞에 굴복하게 될 것임을 드러내고 있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업적을 훼손시키며 성령을 모독한 율법학자들의 미래는 참담할 것입니다.
성령을 모독하고 거스르는 죄는 단순한 죄, 일회적인 죄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아주 고집스런 영혼의 태도입니다. 끝까지 이 땅에 오신 메시아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를 수용하지 않으며, 하느님의 영예와 능력에 대항하며, 하느님의 구원행위와 맞서는 죄입니다.
이렇게 한 인간이 끝까지 완강하게 하느님과 맞서게 될 때, 하느님께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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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2e5s81WT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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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편에 섰지만, 예수님의 적이 되는 사람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솔져보이’(2019)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게 맞서 싸운 여섯 살 최연소 소련군 군인입니다. 진짜 군대에서 주는 훈장까지 받았습니다. 그는 보급지원 업무를 맡아 적의 매복을 찾아내고 편지와 보급품을 군인들에게 보급하며 사기를 끌어 올렸습니다. 왜 여섯 살 소년이 전쟁에 그렇게 진심이었을까요?
그는 엄마, 아빠를 독일군에게 죽임을 당하여 잃었습니다. 그를 구해주려던 이모도 독일군 총에 맞는 것을 보았습니다. 죽을 고비를 많이 넘기면서도 정글과 같은 숲속에서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다 자기를 발견하고 아들로 삼아준 사람이 소련군 대위였습니다. 그는 새로운 아빠를 돕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 일은 아이이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독특하지만 큰 영향을 주는 것들이었습니다.
이 아이가 전장에서 중립을 지킬 수 있을까요? 아니면 미적지근하게 도울 수 있을까요? 자신의 가족을 죽인 독일군과 자신을 아들로 맞아주고 사랑해주는 군대를 위해 어떻게 중립일 수 있을까요? 신앙도 전쟁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빛으로 오셨고 악은 어둠입니다. 그 어둠은 우리가 아는 많은 이들을 지옥으로 끌고 갔습니다. 미적지근한 신앙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그런데 군중 가운데 몇몇이 예수님께서 베엘제불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냈다고 합니다. 그러자 사탄도 서로 갈라지면 망하게 된다고 하시며 빛과 어두움은 공존할 수 없음을 말씀하십니다. 악령을 쫓아낸다면 그것은 성령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 중의 어떤 이들은 마치 악과 선이, 그리고 어둠과 빛이 섞여 있다고 믿는 이상한 혼합주의에 빠져있었습니다. 사실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옥과 악마에 대해 말하면 이상한 눈으로 쳐다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이러한 미적지근한 신앙의 방식을 이 한마디로 정리해주십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반대한 적이 없어도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으면 반대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예수님을 방해한 적이 없어도 예수님의 일에 동참하지 않으면 방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빛 안에 머물지 않으면 그것은 어둠 안에 머무는 것과 같습니다. 중립이나 미지근한 신앙은 없습니다.
제가 축구를 좀 하는 편이었고 군대 신임 병 때 나름으로 열심히 뛴다고 뛰었는데 선임에게 야단을 맞았습니다. 저에게 기대한 만큼 제가 뛰어주지 않으니 다른 선임들도 기운이 빠지는 것이었습니다. 야단을 맞고는 죽기 살기로 뛰었습니다. 칭찬을 많이 받았습니다.
전투에서 중립이나 미지근함이나 욕을 안 먹으려고만 하는 소극적인 군인은 오히려 해가 됩니다. 그래서 전진 명령이 떨어졌을 때 뛰지 않는 군인은 총살당할 수도 있습니다. 전쟁에서는 죽어라 싸우지 않으면 싸우지 않으면 적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정의와 선의 편에 섰다는 확실한 증거는 무엇일까요? 주님의 기도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주님의 양식은 영혼을 구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당신의 양식이 바로 아버지의 뜻을 따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영혼 구원에 힘쓰기 위해 은총과 진리의 양식을 청합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오늘’입니다. 매일 청한다는 말입니다. 전쟁 중에 휴가가 어디 있겠으며 휴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선교를 위한 열정으로 매일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것 자체가 이미 그리스도 밖에 있게 됨을 명심합시다.
매일 조금이라도 기도해야 하고 그 목적이 나와 이웃의 영혼 구원이어야 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신앙인은 오히려 그리스도의 힘과 교회의 의욕을 잃게 만드는 가장 큰 적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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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착각과 왜곡은 비슷한 면이 있지만 전혀 다릅니다. 착각은 의도하지 않은 실수입니다. 그래서 착각은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고, 가볍게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왜곡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타인을 희생시키는 범죄입니다. 그래서 왜곡은 큰 상처를 주기도 하고, 법의 심판을 받기도 합니다. LA로 홍보를 갔을 때입니다. 점심 먹고 산보를 가면서 바다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물었습니다. 30분이면 간다고 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한참을 가도 바다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2시간이 넘게 걸었더니 멀리서 바다가 보였습니다. 나중에 전화를 받아보니 걸어서 30분이 아니라 차로 30분 걸리는 거리였다고 합니다. 제가 제대로 듣지 않았던 실수도 있었지만, 자매님은 당연히 차로 가는 거리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 정도의 거리를 걸어가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다행히 돌아오는 길에 차로 마중 나와서 편하게 올 수 있었습니다.
왜곡 중에는 역사적인 사실도 있습니다. 독도는 지리적으로, 역사적으로 대한민국의 땅인데 일본은 자신의 땅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실효적으로 점유하고 있지만 일본은 아직도 자신의 땅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독도 주변의 지하자원을 확보하려는 일본의 욕심입니다. 임진왜란, 일본의 식민통치를 통해서 대한민국을 침략했던 일본의 야욕입니다. 왜곡 중에는 정치적인 사실도 있습니다. 무고한 시민을 간첩으로 조작했던 역사가 있습니다. 고문과 날조로 증거를 만들었고, 정권에 눈치를 보며 판결했던 부끄러운 역사가 있습니다. 언론과 검찰의 합작으로 무고한 사람을 인격적으로 파탄에 이르게 했지만 재판 결과는 무죄인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 놓고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고, 사과도 하지 않는 무도함이 있습니다. 왜곡은 주로 힘이 있는 권력과 조직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왜곡의 대상은 주로 약자이거나, 제거되어야 할 정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성서에서도 왜곡의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충직한 부하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게 하였습니다. 우리야는 아무 것도 모르고 억울하게 죽어야 했습니다. 헤로데는 메시아의 탄생을 축하하겠다고 했지만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2살 이하의 어린아이를 죽였습니다. 가야파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위험에 빠지는 것보다는 예수 한 사람이 죽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거짓된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표징’을 왜곡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표징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베엘제불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선동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을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죄목으로 죽이려고 했습니다. 왜곡과 날조는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왜곡과 날조는 악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교회 역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권력의 편에 서서 진실을 외면하고 왜곡했던 아픈 과거가 있습니다.
“내 말을 들어라.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만 온전히 걸어라. 그러면 너희가 잘될 것이다.” 사순시기는 거짓과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시간입니다. 사순시기는 왜곡과 날조를 밝혀내고 진실과 자유를 회복하는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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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1,14-23: 나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구들을 쫓아낸다.”(15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주님께서 하신 일에서 하느님의 능력을 벗겨내고, 마귀의 전능을 인정하며, 그리스도의 힘의 원천이 베엘제불이라고 우긴다. 그들은 질투의 가시에 찔려,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보이라고 그분께 요구하였다. 그들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한 것은 그분에 대해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을 말한다.
나라가 서로 갈라지면 어떻게 설 수 있겠는가? 집안도 식구들이 서로 다투지 않고 뜻과 행실이 일치할 때 선다. 아마 베엘제불도 자기와 반대되는 것을 모두 끊으면 제 나라를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내쫓는가? 마귀는 마지못해 사람에게서 떠나는 것이다. 사탄이 저 자신과 싸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자기 시종들을 해치지 않는다. 그들은 주님께서 하느님의 능력으로 사탄을 짓부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20절) 아들과 성령은 아버지의 두 손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손가락은 바로 아들과 함께 일하시는 성령이시다. 주님께서는 인간으로서 하느님의 영 안에서 마귀를 쫓아내신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인간 본성은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도달한 것이다. 인간 본성이 더러운 영들을 꾸짖음으로써 빛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와있다는 의미이다.
“힘센 자가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저택을 지키면 그의 재산은 안전하다. 그러나 더 힘센 자가 덤벼들어 그를 이기면, 그자는 그가 의지하던 무장을 빼앗고 저희끼리 전리품을 나눈다.”(21-22절) 그분께서는 이 세상의 지배자를 이기셨다. 그를 무릎 꿇리고 그의 힘을 빼앗은 다음, 당신을 따르는 이들이 마음대로 처리하도록 내주셨다. 주님께서는 그 주인보다 더 힘센 분이시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그자가 막강한 힘을 누리며 본래 하느님의 것인 양들을 멋대로 다루고 자기 외양간에 가두었다. 강도와 같은 자였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말씀이신 분이 사람이 되시어 맞서시자, 그는 전 재산을 빼앗기고 그의 재산은 전리품으로 분배되었다. 그에게 넘어가 불경과 잘못을 저지르던 사람들은 진리를 알도록 부름을 받고 믿음을 통해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다.”(23절)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마귀의 손에서 구해 내고 그에게 속아 넘어간 이들을 그의 거짓에서 건져 내러 오셨기 때문이다. 사탄은 주님께서 구원하고 모으신 이들을 흩어버리려는 자이다. 그분께 대항하고 사악한 뜻으로 그분의 목적을 훼방하려는 그자가 어떻게 주님을 도와 자신을 무너뜨릴 수 있는가? 우리는 언제나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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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과 베엘제불>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루카 11,23)
선과 악의 싸움에는 중립도 없고 중간 지대도 없습니다. 만일에 악이 선을 짓밟는 일이 생겼을 때, 그것을 방관하거나 그 일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거나, 중립을 지킨다고 하면서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모두 ‘악한 일’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사실상 ‘악의 편’에 서는 일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입니다.(루카 10,30-32)
그 두 사람은 분명히 강도들과 같은 편이 아니고, 마음속으로는 강도들을 반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강도당하고 죽어가는 사람을 보았으면서도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지나가 버린 것은 대단히 ‘악한 일’입니다. 그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안 한 것 자체가 ‘큰 죄’입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보았으면서도 살리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은 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내 편에 서지 않는 자”,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선과 사랑’을 세상에 베풀어주는 일을 하실 때, 그것을 구경만 하거나 여러 가지 이유로 비방하고 중상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악의 편에 서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하느님의 반대쪽에 있으니 사실상 악의 편에 선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는데, 마귀가 나가자 말을 못하는 이가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군중이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고 말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그분께 요구하기도 하였다.”(루카 11,14-16)
예수님께서 마귀들을 쫓아내신 일은, ‘사탄의 세력’을 쫓아내신 일이고, ‘하느님의 선’으로 ‘악’을 물리치신 일입니다. <그 일은, 선과 악의 싸움이고, 예수님께서 승리를 거두신 일이고, 종말에 이루어질 궁극적인 승리를 향해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기 싫어한 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권능으로 마귀들을 쫓아내셨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싫어서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서 한 일이라고 비방했고, 또 어떤 자들은 정말로 하느님의 권능으로 한 일이라면 표징으로 그것을 증명해 보라고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그자들은 사탄 편에 선 자들도 아니고, 마귀 들린 자들도 아니고, 분명히 사탄을 반대하는 자들이긴 한데, 예수님 편에 서지 않음으로써,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사탄 편에 서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것이 사탄이 바라는 것입니다.
마귀들은 인간들이 사탄의 말을 듣지 않더라도, 또는 사탄의 지배 아래 속하지 않더라도, 예수님의 반대쪽에 서기를 바랍니다. 아니면 최소한 예수님과 사탄의 싸움에 끼어들지 않고 구경만 하는 방관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인간들이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것, 바로 그것을 마귀들이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마귀들이 바라는 대로 된다면, 인간들은 결국 사탄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의 인간 세상을 보면, 옛날에 종교 박해를 하던 때보다 더 심각하게 사탄의 영향력이 작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종교 박해는 종교와 종교의 충돌, 신념과 신념의 충돌이었고, 관심이 지나쳐서 증오와 박해가 된 일이었습니다. 지금의 세상은 무관심으로 가득 차 있고, 그 무관심은 사탄이 바라는 방향으로 가는 모습입니다. 남의 종교에 대한 무관심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구원 문제에 대한 무관심이 문제입니다.
누구든지 한 번쯤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생각은 하겠지만, 영혼의 구원에 대해서는, 또 영원한 생명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고, 하느님의 심판에 대해서도, 내세에 관해서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사는 동안 잘 먹고 잘사는 일에 관해서만 관심을 쏟을 뿐이고, 그 일에만 전력을 다할 뿐입니다.
사탄이 특별히 어떤 일을 하지 않아도, 인간들은 점점 더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있고, 하느님 없이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상 사탄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는 일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너무 지나친 말이다. 나는 하느님 편에 서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탄의 편에 서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라고 말할 사람들이 있을 텐데, 앞에서 이미 말했지만, 사탄은 인간들이 바로 그렇게 생각하고, 주장하기를 바랍니다.
<어쩌면 인간들이 사탄이나 마귀들을 아예 잊어버리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예 잊어버리거나 생각하지 않으면 인간들 속에 침투하기가 훨씬 더 쉬운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힘센 자가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저택을 지키면 그의 재산은 안전하다. 그러나 더 힘센 자가 덤벼들어 그를 이기면, 그자는 그가 의지하던 무장을 빼앗고 저희끼리 전리품을 나눈다.”(루카 11,21-22)
어쩌면 사탄의 세력은 인터넷 속에 숨어서, 또는 스마트폰 뒤에 숨어서, 자기들이 인간들을 장악하고 있고, 지배하고 있다고 좋아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인터넷에서 사탄의 세력과 악의 세력이 마음껏 활개를 치는 모습을 봅니다. 그 세력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힘센 자들의 세력’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것들보다 더 힘센 분’의 도움과 보호, 즉 예수님의 도움과 보호입니다. 그 도움과 보호를 받으려면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야 하고, 더 간절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이 싸움에서 이기는 방법은 ‘끊임없는 기도’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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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예수님의 행위를 비판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신 기적에 관한 것이지만, 그에 대한 반응은 마귀와 사탄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집니다. 기적에 관한 간략한 소개와는 다르게 예수님에 대한 여러 사람의 다양한 생각을 보여 주면서 신약 성경에서 말하는 하느님을 거스르는 세력을 언급합니다.
베엘제불은 구약 성경에서 ‘바알 즈붑’이라고도 불립니다.(2열왕 1,2 참조) 두 이름은 발음에서 다를 뿐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열왕기 하권에서 바알 즈붑은 ‘에크론의 신’으로 표현됩니다. 우상과 관련된 베엘제불은 사탄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악의 세력의 우두머리를 일컬을 때 가장 자주 쓰이는 표현인 사탄은 하느님의 적대자나 반대자를 의미합니다. 그는 하느님의 뜻에 반하여 행동합니다. 복음서에 많이 언급되는 마귀는 사탄 아래 있는 세력입니다. 그러므로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것은 예수님 말씀처럼 논리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악의 세력에 반대되는 표현은 ‘하느님의 손가락’입니다. 하느님의 손가락은 이집트에 내린 하느님의 재앙을 말할 때 묘사되고(탈출 8,15 참조), 하느님의 업적을 상징합니다. 하느님의 업적은 사탄과 마귀들의 일과 비교될 수 없습니다. 사탄의 힘은 우리에게 강해 보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그 힘에 휘둘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업적은 그것보다 더 강합니다. 이제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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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 마음에 묻습니다. 복을 바라는지 저주를 바라는지.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카 복음 11장 20절)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유 기적에 대해 몇 사람이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이라고 수군거리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선을 악이라 부르는 이들에 대해 안타까워하시는 목소리지요.
말을 못 하던 이가 말을 하게 된 것은 분명 좋은 일이지요. 한 사람이 평생 얽매여 있던 억압과 부자유에서 풀려나는 행복한 순간입니다. 이는 한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에도 희망과 위로가 됩니다.
사람은 마음에 품은 것을 누리기 마련입니다. 형제의 치유를 감사의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자신도 하느님의 현존 안에 있는 것이고, 의혹과 왜곡의 마음으로 비틀어 보면 자신이 믿는 대로, 마귀 베엘제불의 힘을 선택한 것이지요.
제1독서에서 주님은 이런 사람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아시는 말씀을 들려 주십니다. "네가 그들에게 이 모든 말씀을 전하더라도 그들은 네 말을 듣지 않을 것이고, 그들을 부르더라도 응답하지 않을 것이다."(예레미야 예언서 7장 27절)
이스라엘 백성과 하느님이 엮어 온 관계성의 역사는 슬프게도 거부와 불순종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신부로 선택하신 백성에게서 신랑이신 하느님은 늘 내쳐지고 외면당하셨지요. '백성의 불륜과 배반, 하느님의 분노, 백성의 회개, 하느님의 용서'가 그들의 역사에서 계속 반복되어 왔습니다.
이는 이스라엘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도 안고 가는 문제입니다. 우리 역시 자신의 계획과 주님의 뜻이 상충할 때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해서 주님의 뜻을 그분에게서 온 것이 아닌 것으로 외면해 버리기도 하니까요. 대놓고 베엘제불까지 언급하지 않아도 자신에 대한 주님의 선의를 왜곡하고 의심하며 결국 자기 뜻을 선택합니다. 이런 사람의 모습을 알면서도 주님께서 보내시면 순종해 그분의 목소리가 되어야 하는 예언자의 심정을 느껴 봅니다.
무수한 참 예언자가 하느님처럼 배척받고 무시당하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렀지요. 예수님 역시 이를 모르시지 않으면서도 사람들 한가운데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고 계십니다.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한 이들의 마음의 문을 끊임없이 두르리며 진심의 사랑을 알아들어 달라고 호소하십니다. 갓난 아기가 그 조그만 손으로 아빠나 엄마의 손가락을 꼭 쥐고 있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무한한 신뢰와 사랑의 에너지가 흐르는 장면이지요.
우리가 주님의 선의와 호의, 진실을 의심치 않고 순히 받아들일 때, 우리는 창조하고 살리시고 되살리는 하느님의 손가락에 의지해 살아가는 겁니다.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느냐, 베엘제불과 함께 살아가느냐는 우리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의 말씀은 지금 우리의 삶이 우리에 대한 주님의 최선인지 의심하며 그분을 시험하고 떠보는 일을 그만 멈추라고 호소하십니다. 사랑이신 그분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어느새 주님 현존 안에 있습니다.
주님께 기대어 나아갈지, 베엘에불의 힘을 힐끗거리며 나아갈지, 답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녹록치 않은 삶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손가락 꼭 잡고 그분 현존 안에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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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카 복음 11장 14절-23절 참조)
오늘 <말씀 전례>는 우리의 완고한 마음에 경종을 울립니다.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목을 뻣뻣이 세우고 고약하게 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전해주며,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신적 권능에, 오히려 적대하며 악담을 퍼붓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전해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두 개의 중심이 되는 동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 말을 들어라”라고 할 때 “들어라”라는 동사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을 온전히 걸어라”라고 할 때 “걸어라” 라는 동사입니다.
이 두 동사의 표본, 곧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걷는 것의 표본은 오늘 <화답송>에 나오는 “양 떼”입니다. 곧 양은 목자의 말을 알아듣고 그의 말을 따라 걷는 이의 표상입니다.
한편, 그 반대의 표상에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벙어리 마귀”가 있습니다. 벙어리 마귀는 말씀을 듣지 못하게 방해하여, 말하지 못하게 하는 마귀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말씀을 따라 걷지 못하게 하고, 말씀의 실현을 훼방하는 방해꾼입니다.
이 방해꾼은 <제1독서>에서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고집스러운 마음, 목을 뻣뻣이 세우는 고약한 마음, 그리고 <화답송>에서의 “무딘 마음”의 표상입니다. 곧 이들은 ‘주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말, 곧 자기 생각이라는 우상을 따라 걷는 이들의 표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심으로써,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셨습니다. 곧 말씀의 권능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반응은 놀라워하면서도 받아들이기보다, 오히려 예수님께,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루카 복음 11장 15절)고 악담으로 대적하면서 표징을 요구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모순을 반박하시면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카 복음 11장 20절)
이는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낸 사실이 단지 하나의 기적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손가락, 곧 하느님 권능의 임재임을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 나라”의 임재를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그 뜻이 이루어지는 하늘나라의 실현을 뜻합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는 말씀이신 예수님과 더불어 우리 안에서 실현되는 나라입니다.
그러니, 만약 우리가 아직 “하느님 나라”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 안에 말씀을 듣고도 따라 걷지 못하게 하는 완고한 무딘 마음이 있지 않은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 안에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고집스러운 마음, 목을 뻣뻣이 세우는 고약한 마음이 있어 주님의 말씀이 아닌, 자신의 말이나 생각을 듣고 따라 걷고 있지 않은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는 자기 자신의 말이 아니라 이미 주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을 따라 걸어가는 “양 떼”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화답송>에서 시편 작가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는 그분 목장의 백성, 그분 손이 이끄시는 양 떼이로세.”(시편 95장 7절)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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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카 복음 11장 20절)
주님! 제 안에는 당신 형상의 빈자리가 있습니다.
오로지 임자이신 당신만이 채울 수 있는 자리입니다.
당신께서 제 안에 계시오니, 당신의 나라를 드러내소서!
제 영혼이 당신의 성전이오니, 당신의 거룩함을 드러내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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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신앙의 어중간은 없다>
‘두 개의 깃발’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깃발이고, 하나는 마귀두목 베엘제불의 깃발입니다. 둘 중에 선택하라면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예수님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선택하면 부귀영화나 명예, 매혹적이고 달콤한 삶과는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현실적인 가난, 업신여김과 모욕, 때로는 박해와 순교까지도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도 예수님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우리의 삶은 매순간 선택의 삶입니다. 둘 중의 하나입니다. 양다리 걸치기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어중간은 없습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면 세상에서 안전한 처세술이 될 수 있지만, 하느님의 자녀로서 자세는 아닙니다.
묵시록을 보면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묵시3,15-16).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결단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마귀를 선택해야 하는가? 아니면 주님을 선택해야 하는가? 너무도 당연한 답이지만 삶의 모습은 여전히 이해타산에 휘둘릴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 편에 서는, 그리고 모아들이는 노력을 하는 하루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루카11,17). 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가정도, 공동체도 어떤 모임도 한마음 한뜻이 될 수 있도록 정성을 모아야 합니다.
나쁜 습관이 있다면 고쳐야 하고 내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상대의 입장을 헤아리는 열린 마음의 눈을 떠야 하고, 시기와 질투의 마음이 있다면 만족할 수 있는 마음의 넉넉함과 포용할 수 있는 큰 품을 키워야 합니다. 말 한마디라도 위로가 되고 기쁨과 희망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마땅히 해야 할 일에 실천이 없다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작은 것 하나라도 실천함으로써 열매를 맺고 주님의 편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고집 때문에 사실을 바꾸고, 때로는 거짓된 소문을 퍼뜨리고, 진실에 눈을 감아버립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을 마귀의 패거리로 몰아붙이던 사람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목이 뻣뻣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완고함이 쌓이면 마음속에 생명력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거짓 속에 묻힌 마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어느 신부님께서 마음을 고쳐먹은 얘기를 해 주셨습니다. 장상께서 하시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나름대로 혼자서 열심히 지냈답니다. 장상의 사목지침에 구애받지 않고 이런저런 사람의 말을 들을 필요도 없이 독불 장군식으로 지내다가 성경 말씀이 가슴 깊이 다가왔는데 루카복음 7장32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신부님은 어느 것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아이의 모습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마음을 바꾸었으며 비로소 자유와 해방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러니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십시오,’(시편 95,1-2)
가끔 세상의 정치적 이야기를 꺼내면 사람들이 말합니다. “신부님께서는 여당이십니까? 야당이십니까?” 그러면 말합니다. 저는 ‘천주당’입니다. 하느님 앞에 서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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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재미있는 실험 결과를 본 적이 있습니다. 우선 이 실험의 참가자는 모두 여성이었습니다. 먼저 이들에게 독해력 테스트를 가장한 읽기 지문을 나누어 준 뒤에 수학 문제를 풀게 했습니다. 첫 번째 집단에는 ‘남성과 여성이 수학 시험에서 동등하게 우수한 성적을 냈다’라는 내용의 지문을 읽게 했고, 두 번째 집단에는 ‘Y 염색체에서 발견되는 일부 유전자 때문에 남성이 여성보다 5% 포인트 더 높은 점수를 기록했다’라는 내용의 지문을 읽게 했습니다. 이제 수학 문제 테스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잠깐 지문을 읽었을 뿐인데도 두 번째 그룹의 성적이 첫 번째 그룹보다 25%나 더 낮았습니다.
여기에 세 번째 실험 집단도 있습니다. 이 집단도 두 번째 집단과 마찬가지로 남성이 여성보다 수학 시험에서 더 좋은 결과를 냈다는 지문을 읽게 했습니다. 다만 이 지문의 끝에는 ‘학창 시절 초기부터 이어진 교사들의 편향된 기대 때문’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제 테스트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두 번째 그룹보다 월등히 좋았고, 첫째 그룹과는 성적이 비슷했습니다.
나쁜 결과를 가져온 것은 유전적 원인 때문이 아님을 보여주는 실험이었습니다. 자신이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고, 반대로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이의 말과 행동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성장을 가져올 수 있는 생각으로 무장하는 지혜가 필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또 한 가지는 우리는 함께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자기만의 성장이 아닌 우리의 성장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성장을 위해 내 이웃에게 어떤 말과 행동을 하고 있었을까요? 성장할 수 있는 말과 행동, 즉 칭찬과 응원 그리고 지지 등의 긍정적인 모습으로 최고의 결과를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 그런데 몇몇 사람이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의 기적을 폄하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통한 구원의 길에 들어설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잘못된 생각에서 나오는 말을 통해서 남들도 주님 곁에 나아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참 하느님이신 주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많은 이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는 돈을 넣으면 물건이 나오는 자판기처럼 주님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불평불만을 하면서 주님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으며, 이런 잘못된 생각으로 다른 이들도 주님과 함께 못하게 합니다.
주님 편에 서지 않는 자는 주님을 반대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 뜻을 마음에 담으면서 철저하게 따르는 사람만이 주님과 함께하며, 이웃들도 주님과 함께할 수 있도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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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가운데는 없습니다>
루카 11,14-23 (예수님과 베엘제불)
그때에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는데, 마귀가 나가자 말을 못하는 이가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군중이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고 말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그분께 요구하기도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 사탄도 서로 갈라서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어 내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내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한다. 내가 만일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말이냐? 그러니 바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힘센 자가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저택을 지키면 그의 재산은 안전하다. 그러나 더 힘센 자가 덤벼들어 그를 이기면, 그자는 그가 의지하던 무장을 빼앗고 저희끼리 전리품을 나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가운데는 없습니다>
모아들이지 않으면
흩어버리는 것입니다
다가가지 않으면
멀리하는 것입니다
함께하지 않으면
갈라서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미워하는 것입니다
보듬지 않으면
내치는 것입니다
나누지 않으면
빼앗는 것입니다
일으키지 않으면
짓누르는 것입니다
풀어주지 않으면
얽어매는 것입니다
낫게 하지 않으면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섬기지 않으면
군림하는 것입니다
살리지 않으면
죽이는 것입니다
예수님 편에 서지 않으면
예수님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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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네 앞에는 무엇이?>
“그들은 순종하지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제멋대로 사악한 마음을 따라 고집스럽게 걸었다. 그들은 앞이 아니라 뒤를 향하였다.”
오늘 예레미야서의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앞이 아니라 뒤를 향하였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앞이 아니라 뒤를 향하였다는 것이 무슨 뜻이고, 앞은 어디고 뒤는 어딥니까?
시간적으로 보면 앞은 미래고 뒤는 과거로 명확하지요. 그래서 시간적으로 앞을 향할 때 그것은 미래지향적이라고 말하고, 뒤를 향하면 과거지향적이라고 말하는데 그 뜻이 명확합니다.
그런데 오늘 예레미야서가 뜻하는 앞과 뒤가 이것이겠습니까? 시간적인 앞과 뒤를 뜻하는 것이겠습니까?
제 생각에 미래지향, 과거지향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가 무엇을 지향하고 목표하느냐, 그것에 따라서 목표하는 것은 앞이고 목표와 반대되는 것은 뒤입니다.
지금 이 정부는 일본 미국과의 동맹을 목표로 하면서 북한 중국과는 등을 지기로 명확히 하였고, 그 이유는 국익 때문이라고 명확히 했는데, 진짜 국익인지 모르지만, 이익을 위해 통일이라는 가치를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민족 통일을 목표로 보면 앞이 아니라 뒤를 향하는 것이지요 통일 앞으로 갈 것인가, 통일을 등지고 갈 것인가? 통일로 갈 것인가, 반통일로 갈 것인가? 이 문제에서 명확하게 뒤와 반통일을 선택한 것입니다.
다른 관점에서 보겠습니다. 우리의 목표가 행복이어야 한다는 관점입니다.
우리는 모두 행복 앞으로 가야 합니다. 행복이 우리 인생의 궁극 목적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행복이 목적이라고 하면서 어떤 때 보면 돈을 쫓습니다. 돈이 행복을 준다고 믿기 때문인데 실제로는 행복 앞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등지고 가는 겁니다.
사랑 관점에서도 보겠습니다. 우리는 행복을 위해 사랑 앞으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실제를 보면 사랑하겠다면서 ‘사랑 앞으로’가 아니라 ‘사랑 등지기’가 비일비재합니다.
거짓 사랑에 속거나 자기 사랑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관점에서 보겠습니다. 하느님께선 인간이 행복하려면 당신을 사랑해야 하고, 사랑한다면 당신의 명령에 순명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사실 하느님의 명령은 살라는 명령이고 행복하라는 명령인데 우리는 명령이 싫어서 명령에 등집니다. 자유를 더 사랑하여 불순명하는 겁니다.
사랑과 자유가 대립하지 않고 조화를 이뤄야 하는데 우리의 사랑이 미성숙하고 자유는 더 미성숙하여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자유를 더 사랑하고 맙니다.
어쨌거나 오늘 예레미야서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 네 앞에는 무엇이 있느냐? 너는 하느님 앞에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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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기준의 문제로다!>
“그들은 순종하지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제멋대로 사악한 마음을 따라 고집스럽게 걸었다. 그들은 앞이 아니라 뒤를 향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앞을 향하여 있습니다. 내가 동쪽을 향하여 서 있으면 동쪽이 내 앞이고, 내가 서쪽을 향하여 서 있으면 서쪽이 내 앞이며, 앞으로 향하여 있다가 뒤로 돌아서면 이젠 뒤가 내 앞입니다.
마찬가지로 내 앞에 있던 사람이 내가 뒤로 돌아서면 내 뒤에 있는 것이고, 반대로 내 뒤에 있던 사람도 내가 돌아서면 내 앞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인데 오늘 독서에서 앞이 아니라 뒤를 향하였다고 하니 이것이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나를 기준으로 하면 내 앞이 앞이지 다른 무엇이 앞이 아니고, 무엇이 내 앞에 있거나 옆에 있거나 에 있는 것이지 내가 앞을 향하여 있거나 뒤를 향하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늘 독서에서 앞뒤의 기준은 내가 아니라 분명 하느님일 거라 생각이 되어 다른 성경 번역들을 찾아보니 영어 성서는 “turned their backs, not their faces, to me.”라고, 공동번역 성서는 “나에게 등을 돌리고 나를 외면하였다.”라고, 개신교 성서는 “그 등을 내게로 돌리고 그 얼굴을 향하지 아니 하였다.”라고 각기 번역을 하였으며 그 공통점은 하느님께는 등을 돌리고 하느님 아닌 다른 쪽으로 그들은 향하여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앞과 뒤의 기준이 내가 아니라 하느님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자기중심일 때 내가 기준이 되고, 반대로 누군가를 사랑할 때는 사랑하는 그가 기준이나 중심이 되어 그 앞에 내가 있고 내 앞에 그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사랑할 때는 늘 그를 향하여 있습니다.
처음에는 관심이나 시선이 그를 향하여 있고, 더 사랑하면 관심과 시선이 그에게 가 있으며, 더 사랑하면 존재가 그를 향하여 있고, 더 사랑하면 존재가 그 앞에 가 있게 됩니다.
전에도 얘기한 적이 있는데 이런 경우 저는 엄마와 아기의 관계를 흐뭇하게 떠올립니다. 이제 갓 걸음을 뗀 아기가 아장아장 또는 데똥데똥 걷는데 그의 시선은 온통 엄마에게 꽂히고 얼굴은 환하고 빨리 달려가 안기려고 두 팔을 벌리고 다가가서는 덥석 안깁니다.
엄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순간은 누구도 아기와 엄마 사이에 있을 수 없고 온전히 아기만 있습니다. 이것처럼 온전히 사랑을 하면 다른 무엇이 끼일 수 없게 하느님 앞에 내가 있고 내 앞에 하느님이 있습니다.
등을 돌리고 등을 보이는 것은 정말 할 짓이 못됩니다. 그에게 못할 짓이기도 하지만 나에게도 못할 짓입니다. 그에게서 나의 사랑을 거두는 것 같지만실은 내 안에서 사랑이 떠나가는 것이고, 그가 내 앞에 없는 것 같지만 내게 사랑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하느님일 때 더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이신 분이고,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모든 사랑이기에 하느님께 등을 돌리는 것은 모든 사랑을 잃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배반한다면 하느님을 배반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배반하는 것이며 느님이 내 앞에 없다면 하느님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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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삶>
- “경청과 겸손, 순종의 삶” -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마라.”(시편95,7ㄹ과 8ㄴ)
지난 주일과 똑같은 화답송 후렴이 오늘 말씀을 요약합니다. 무지의 병에 귀기울여 잘 듣는 것보다 더 좋은 처방은 없습니다. 역시 경청의 훈련입니다. 저절로 잘 듣는 것이 아니라 부단한 경청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어제 어느 자매의 뜻밖의 전화에 대한 제 답변에 만족했습니다.
“성인들은 고통을 청하라 했다는데 고통을 청해도 됩니까?”
“천만에요. 절대 고통을 청하지 마세요. 지금 현재의 고통도 감당하기 벅찰텐데 왜 고통을 청합니까? 그냥 현재 주어진 어려움을 잘 감당만하셔도 충분합니다.”
이 또한 무지의 소치입니다. 지금 주어진 고통만 잘 감당해도 충분합니다. 무지의 병이요 무지의 죄입니다. 이어 제가 보내준 “파스카의 꽃”이라는 말마디에 은혜 받았다 하기에 그 자매와 주고 받은 메시지를 확인해 봤습니다.
“봄꽃같이 겸손한 사랑이 답입니다. 봄꽃처럼 파스카의 꽃으로 사세요!”
“겸손한 사랑, 파스카의 꽃 너무 감사드립니다. 축복 많이 받으세요!”
파스카의 꽃, 참 멋진 말마디입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은 하느님 중심의 삶에 죽을 때까지 날마다 부단히 새롭게 폈다지는 주님의 파스카의 꽃으로 삽니다. 예전 써놓은 시도 생각났습니다.
“사람은 꽃이다
주님 파스카의 꽃이다
끊임없이
그만의 색깔, 향기, 크기, 모양으로
평생
세상 떠날 그날까지
날마다
새롭게 폈다 지는
사람은
꽃이다
사랑의 꽃
주님 파스카의 꽃이다”-2022.6.9
무지의 악, 무지의 죄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 주님 파스카의 꽃으로 사는 일입니다. 날마다 새롭게 폈다지는 주님 파스카의 꽃으로 사는 것입니다. 또 한 형제와 주고 받은 전화도 생각납니다.
“신부님, 괜찮습니까? 지난 밤 신부님이 꿈에 나타나서 궁금해 전화 걸었습니다.”
“좋습니다. 제가 매일 강론 올리면 건강하다, 문제없다 생각하셔요.”
그렇습니다. 웬만한 꿈은 지나쳐 버리는 것이 지혜입니다. 참으로 깨어 있는 영혼들은 꿈에 매이지 않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언제나 오늘 지금 여기 깨어 환상이나 거품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삽니다. 오늘 제1독서 예레미야 예언자의 말씀은 그대로 우리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무지를 일깨우는 죽비같은 말씀입니다.
“내 말을 들어라.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만 온전히 걸어라. 그러면 너희가 잘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순종하지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제멋대로 사악한 마음을 따라 고집스럽게 걸었다. 나는 내 모든 종들, 곧 예언자들을 날마다 끊임없이 보냈다. 그런데도 그들은 나에게 순종하거나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목을 뻣뻣이 세우고 자기네 조상들보다 더 고약하게 굴었다.”
아, 그대로 오늘 무지한 사람들의 실상을 보는 듯 합니다. ‘그들이’ 지칭하는 바 무지한 우리들입니다. 참으로 무디어진 마음에 뻣뻣한 목, 그대로 무지한 사람들의 상징적 모습입니다. 특히 제1독서 마지막 구절, "그들의 입술에서 진실이 사라지고 끊겼다'라는 말씀은 현대인들을 지칭하는듯 가슴이 철렁하는 느낌입니다. 참 무지가 얼마나 심각한 병이요 죄인지, 그리하여 경청의 겸손이 얼마나 중요한 수행인지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구마이적에 시비를 걸고 나오는 이들 역시 무지한 이들의 전형입니다. 복음 서두 말씀이 평범한 진술같으나 은혜롭습니다.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는데, 마귀가 나가자 말을 못하는 이가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군중이 놀라워 하였다.’
주님이 계셔야 할 중심 자리에 있던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이 자리 잡으니 비로소 온전한 삶의 회복입니다. 이에 대한 반응이 구구각색입니다. 무지에 눈이 가리니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냈다 말하기도 하고 하늘에서 내려 오는 표징을 보여달라고 합니다. 주님 자체가 하늘에서 내려온 표징인데 표징을 보여달라니 어이가 없습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 사탄도 서로 갈라서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어 내겠느냐?”
사탄이 얼마나 영악한테 스스로 분열하여 망하는 길을 택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어 주님만이 사탄에 대한 유일한 대책임을 말해줍니다. 유비무환입니다.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경청하며 순종하며 사는 길이 유일한 처방임을 말해 줍니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참으로 힘센 분, 모든 마귀들을 제압할 수 있는 분, 주님을 모시고 하느님 중심의 삶을, 하느님의 나라를 살라는 것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하느님의 나라를, 하느님 중심의 삶을, 경청과 겸손, 순종의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날마다 새롭게 폈다지는 주님 파스카의 꽃으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미에서 주님은 다시 당신을 선택할 것을 촉구합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이다.”
주님과 함께 할 때 일치입니다. 주님을 떠날 때 분열입니다. 주님이 하시는 일이 일치라면 악마가 하는 일은 분열입니다. 주님을 선택하여 주님 편에 서서 주님과 함께 모아들이는 일치의 삶을, 하느님 중심의 경청과 겸손, 순종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의 도움을 청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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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다."(루카11,23)
'어느 편에 서 있는가?'
오늘 복음(루카11,14-23)은 '예수님과 베엘제불'에 대한 말씀입니다. 해도 해도 너무 합니다.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시고, 그래서 말 못하는 이가 말을 하게 되었는데도,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악담을 퍼붓습니다.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루카11,15) 또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마귀로, 마귀의 우두머리인 베엘제불이라고 하니... 하느님의 손가락(힘)으로 마귀들을 쫓아내시는데도,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하니...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예수님의 마음 안에 머물러 봅니다. 그리고 삶의 자리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아픔도 바라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대해 악담을 해대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다."(루카11,23)
'나는 어느 편에 서 있는가?'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어느 편에 서 있는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고, 죽음 저 너머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믿고 희망하면서 살아가겠다고 굳게 약속 해놓고서는 예수님 편에 서 있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당 안에서는 "아멘!" 하고, 성체를 잘 받아 모시면서도, 성당 밖에서는 예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늘 화답송에서 시편 저자는 말합니다.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후렴) 그리고 오늘 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런 주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만 온전히 걸어라. 그러면 너희가 잘될 것이다."(예레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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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mQBExjMekn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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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다."(루카 11, 23)
사실
사람도 나라도
갈라서면 망하고
무너집니다.
일치를 향한
저항이
매우 거셉니다.
닦아주고
씻겨주어야 할
신앙의 정직한
관계입니다.
어둠을 먼저
보아야 빛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무너진 곳에서
다시 시작하시는
하느님 구원의
방식입니다.
하느님이
중심이
되지 않고서는
어떤 공동체도
선량한 공동체가
될 수 없습니다.
신앙의 대 전환점이
필요한 시간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통하여 우리의
삶을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너무 많은 것을
욕심내어서는
예수님의 편에
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모아들이는
사람입니다.
먼저 우리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아는 것이
그 어떤 지식보다
참으로 중요합니다.
미움과 판단의
매듭을 끊고
십자가와 함께
예수님의 편에
서서 기도하는
뜨거운 사순의
마음이길
기도드립니다.
빛은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나고
봄은 꽃샘추위에서
더욱 빛납니다.
우리는
어둠이 아니고
하느님을 닮은
빛입니다.
빛은 일치를
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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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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