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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타너스 / 김현승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을 모르나
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에 오를 제
홀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이제, 너의 뿌리 깊이
나의 영혼을 불어넣고 가도 좋으련만
플라타너스
나는 너와 함께 신(神)이 아니다!
수고로운 우리의 길이 다하는 어느 날
플라타너스
너를 맞아 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이 있느냐?
나는 오직 너를 지켜 네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이다.
- [문예](1953.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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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꿈을 알아?"
"너는 나를 시원하게 해주는 그늘을 가겼구나.
"너와 나는 함께 외로운 삶의 길을 가는 동반자야.'
"너도 나와 같은 영혼이 있을까?"
"나도 네 이웃이 되고 싶어. 너와 함께 창을 통해 아름다운 별들을 보고 싶어.
플라타너스'의 상징성
플라타너스'는 매우 높게 자라는 특성이 있으므로, 꿈 을 가진 존재로 상징된다. 또한, 빨리 자라 사람들에 게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기 때문에 헌신적 존재를 상징하기도 한다. 하지만 플라타너스도 피조물이므 로 인간과 마찬가지로 유한한 삶을 살아야 한다. 이처 럼 이 시에서 '플라타너스'는 자연의 표상임과 동시에 인간의 동반자로 형상화된 객관적 상관물이라 할 수 있다.
【해설】
일제 식민지하에서 강인한 의지와 민족적 낭만주의 경향의 시들을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은 바 있는 김현승은, 일제 말기에는 타협을 거부하여 붓을 꺾고 10년의 세월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해방 이후에야 비로소 다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는 종래의 생경한 수사(修辭) 취미가 사라진 대신, 완숙한 경지의 서정성과 사물의 본질을 깊이 보려는 경향으로 씌어진 김현승 문학의 제2기의 작품이다. 플라타너스라는 가로수를 '너'라는 단수 개념으로 의인화시켜 인생의 반려(伴侶)로 삼아 생에 대한 고독과 우수, 그리고 꿈을 간직한 사랑의 영원성을 노래하고 있다. 또한 간결한 시어의 구사로 시상을 압축, 리듬감 있는 운율로 시적 감각을 최대로 살리고 있다.
플라타너스 나무를 의인화하여 꿈과 덕성을 지닌 존재로 예찬하고, 그러한 자세로 삶의 길을 함께 가고자 하는 뜻을 노래한 시이다.
이 시는 자연을 소재로 하여 감정 이입의 기법으로 정서를 표출해 온 우리 시가의 전통을 계승했다. 플라타너스를 단순한 식물로서 바라보지 않고, 인간과 같은 생의 반려로 형상화하였다.
【개관】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성격 : 서정적, 명상적, 감각적
▶어조 : 고독하면서도 친근하고 맑은 어조
▶심상 : 서술적, 감각적 심상
▶표현 : 의인법, 감정 이입법
▶제재 : 플라타너스의 자태
▶주제 :
- 고독한 영혼의 반려를 염원함
- 생의 반려(伴侶)로서의 플라타너스
【기교】
이 시에는 ‘플라타너스’란 단어가 다섯 번 되풀이되고 있다. 더구나 이 다섯 번이 매 연마다 일정하게 한 행으로 처리되고 있다. 이와 같은 반복은 좀 특이하다. 플라타너스를 강조하는 한편, 음악적인 효과를 돕고 있다. 이 매 연마다 반복되는 ‘플라타너스’와 매 연 끝의 ‘ㅏ’음 각운이, 차분한 이 시의 호흡에 맑고 싱그러운 생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다.
【구성】
▶제1연 : 꿈을 가진 플라타너스 - 현재의 삶을 넘어서는 그리움
▶제2연 : 플라타너스의 넉넉한 사랑 - 깊은 사모의 자세를 보이는 나무
▶제3연 : 나의 반려자인 플라타너스 - 외롭고 먼 길을 걷는 시인의 유일한 동반자
▶제4연 : 플라타너스에게 영혼을 불어넣어 주고 싶은 심정 - 소망을 실현 못하는 아쉬움
▶제5연 : 영원한 반려자가 되기를 염원함 - 영원히 함께 하고픈 마음
【시어 풀이】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 '파아란 하늘'은 '꿈', 혹은 '이상'을 상징한다. '꿈을 아느냐'는 인간의 질문에 무언의 답을 제시하고 있는 플라타너스의 모습을 말한 구절이다. 즉 하늘을 향해 가지를 펼치고 있는 플라타너스의 모습이 '꿈'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철학자의 이미지를 닮았다는 뜻이다.
<사모할 줄을 모르나> : 드러내 놓고 사랑과 그리움의 감정을 표현하거나 생색을 내지 않으면서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 넉넉한 그림자를 드리워 줌으로써 남에게 유식과 안정을 주는 플라타너스의 겸허하고 넉넉한 모습을 나타낸다.
<먼 길에 올 제/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 멀고 험한 인생의 길을 홀로 고독하게 걸어올 때. 시인의 실존적 자의식을 표현한 구절이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 플라타너스가 멀고 험한 자신의 인생의 길을 함께 걸어온 동반자라는 자각이다. '인생=길, 동반자=가로수'라는 이중의 비유임.
<수고로운 우리의 길이 다하는 어느 날> : 지상에서의 삶이 다하는 날
<너를 맞아 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 있느냐?> : '검은 흙'은 죽어서 돌아가야 할 대지.
【내용 풀이】
▶제1연 : 사람은 꿈을 가진 존재이다. 화자는 플라타너스에게 너도 꿈을 아느냐고 물어 본다. 플라타너스는 벌써 그의 머리를 파아란 하늘에 두고 있다고 말 없는 말을 하는 듯하다. 플라타너스 역시 푸른 꿈을 가진 존재인 것이다.
▶제2연 : 사람은 사모할 줄을 안다. 플라타너스는 사람이 아닌지라 누군가를 사모할 줄 모르지만 제 스스로 그늘을 만들어 누구든 쉬게 해 준다. 이것이야말로 특정한 대상을 향한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일 터이다.
▶제3연 : 플라타너스는 외롭게 먼 길을 걷는 화자에게 유일한 반려자요, 벗이다. 고독을 위로하며 그 외로운 길을 동행하여 준다.
▶제4연 : 화자는 이 고마운 벗에게 영혼을 불어넣어 주고 싶으나, 나무와 사람은 신과 같은 전지전능한 능력을 지니지 못했으므로 그러한 소망을 실현할 수는 없다.
▶제5연 : 시인과 플라타너스는 지상의 삶이 다하는 날까지 함께 이웃하며 지켜보는 영원한 반려자가 되고자 한다.
【감상】
이 시는 가로수로 흔히 볼 수 있는 플라타너스를 소재로 하여 자신의 고독한 삶의 행로를 함께 걸어갈 동반자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작품이다. 이 시에서 시적 자아는 머 리 위에 푸른 하늘을 이고 서 있는 플라타너스를 자기 삶의 동반자로 격상시키고 있다. 그것은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하찮은 사물이 아니라 시적 자아와 꿈을 나누면서 고독한 삶의 행로를 함께 걸어 왔고 앞으로도 길이 함께 하고 싶은 이웃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 시에 등장하는'플라타너스'는 자신과 함께 살아갈 삶의 반려자가 갖추어야 할 어떤 품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단 시적 자아의 진술을 가감 없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여도 괜찮을 것이다. 요란하게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내가 걸어가는 삶의 길을 항상 같은 자리에 같은 모습으로 지켜 보아주는 동반자를 가진다는 것이 더 없는 삶의 기쁨이라는 절에서 동의한다면, 대지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친 채 항상 같은 자리에 같은 모습으로 서 있는 플라타너스야말로 가장 적합한 삶의 동반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자기가 걸어온 길 옆의 대지에 깊이 뿌리박고 서 있는 플라타너스의 넉넉한 자태에서 그와 같은 동반자의 모습을 발견해 내고 있는 것이다.
김현승의 시는 대체로 딱딱한 한자어나 단단한 물체를 가리키는 말들이 많은 생경(生硬)한 수사(修辭) 취미가 있고, 그것은 논리적인 지적 스타일을 띠고 있다 하겠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그것들이 모두 자취를 감추고 서정적이며, 사물의 본질을 깊이 보려는 경향을 보인다. 즉 이시는 플라타너스라는 가로수를 시인의 반려로 하여 생에 대한 고독과 우수(憂愁), 꿈을 가진 자의 영원을 노래하고 있다.
흔히 인생을 고독한 나그네라 하고, 생의 본질을 비극적으로 보기가 일쑤다. 이 시에서도 시인의 인생관은 고독한 여정(旅程)으로 뒷받침되어 있고, 그렇기 때문에 한 그루 플라타너스에서 유정有情)한 시적 의미를 획득하는 것인데, 이것이 이 시의 탁월한 점이라 하겠다.
인간에게는 반려가 필요하다. 현실적인 반려가 없으면 정신적인 반려라도 필요하다. 그것이 애인이건, 친구이건, 동지이건, 또는 일정한 이상이건, 하다못해 자기 자신의 고독이건, 자기를 이해하고, 격려하고, 도와주고, 알아주는 반려가 필요하다. 이 시는 플라타너스를 소재로 하여 작가의 고독한, 그러나 꿈을 가진 삶의 반려를 노래하고 있다.
가로수 플라타너스는 반려의 소재로 사용되기 매우 적절하다. 그 모습과 그 풍치와 그 품위 있는 무늬는 인간으로 친다면, 우아한 귀족풍에 알맞다.
사람은 혼자여서만 외로운 것은 아니다. 연인이 있고, 처자(妻子)가 있고, 부모 형제가 있고, 벗이 있어도 외로울 때가 있다. 또 많은 군중 속에 있을수록 더욱 고독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군중 속의 고독’이란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인간적인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속성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신을 찾는다. 이 신을 찾아가는 과정이 자연 사물에 대한 애정이요, 인식이요, 이해다. 작가는 플라타너스의 싱그러운 모습, 푸른 하늘을 향해 치솟은 그 의젓한 자세와, 짙은 그늘에 감동하고, 애정을 느끼며, 그 인간과는 다른 생명에서 위안을 받고, 고독을 잊는다.
이러한 심리적 현상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생애를 통해 아주 고정 관념화된다. 일종의 신앙 같은 것이다. 플라타너스만 보면, 작가는 마음의 괴로움을 잊고, 새로운 꿈과 생활을 향해 출발할 수 있다. 또 이러한 꿈과 생활이 있는 곳에는 늘 플라타너스가 함께 있어서 항상 인생의 일부이기를 바라고 있다.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을 인간 이상의 차원에서, 즉 자연 사물을 통해 해결하고 있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 시인은 ‘고독의 시인’이라고 일컬어질 만큼 고독을 많이 주제로 다루고 있으나, 그 고독은 항상 근원적인 고독이다.
- 권웅 : <한국의 명시해설>(보성출판사1990) -
이 시는 플라타너스를 의인화하여 꿈과 덕성을 지닌 존재로 예찬하고 그러한 자세로 삶의 길을 함께 가고자 하는 뜻을 노래한 시다. 나무와 사람은 신처럼 완벽한 존재가 아니지만, 지상의 삶 속에서 서로의 고독한 영혼을 달래며 겸허하게 살아가자는 주제가 담겨 있다.
1연은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는 플라타너스의 모습을 통하여 인간과 마찬가지로 꿈을 가진 존재로서의 플라타너스를 보여 주는 부분이다.
2연은 자연의 예지를 드러내고 있는 부분으로, 사람처럼 사모할 줄은 모르지만, 자신의 몸으로써 그늘을 만들어 남을 쉬게 해 주는 플라타너스의 희생과 헌신적 사랑을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자연이 침묵으로써 인간에게 가르쳐 주는 사랑의 참뜻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자연의 참뜻은 인간에게 주는 예지나 교훈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원한 동반자로서의 역할을 말없이 수행한다는 데에 있다.
그리하여 3․4연에서 인생이라는 고단한 길을 걷는 화자가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그늘을 늘여 주는 플라타너스의 모습이야말로 인간과 함께 하는 삶의 반려자로서의 자연의 역할을 잘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러한 플라타너스에게 화자는 '뿌리 깊이 / 영혼을 불어넣어' 줌으로써 자연과의 교감 내지 일치하고 싶어하지만, 결국 이 같은 소망이 실현될 수 없음을 깨닫는다. '나는 너와 함께 신이 아니다!'라는 것은, 인간이 유한적 존재, 피조물로서의 한계를 지닌 존재임을 드러내는 것이자, 고독할 수밖에 없는 실존적 존재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마지막 연에서는 인간의 한계 의식 또는 운명 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의 길이 다하는 어느 날'이란 일생의 종말을 맞이하는 죽음의 시간이며, '검은 흙'은 '수고하고 짐진 자'로서의 인간이 마지막으로 도달하는 곳으로 죽음의 세계이다. 그 같은 죽음의 시간을 맞이할 때 갖게 되는 고독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이며, 죽음이라는 것도 유한적 존재인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숙명임을 깨닫게 된 화자는, 마침내 '너를 지켜 네 이웃이 되어' '별과 창이 열린' 세계로 영원하기를 기원한다. 이렇게 이 시는 '자연ㆍ인간ㆍ신'의 상관관계 속에서 삶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꿈과 의지를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