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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호수♡마리아
◼마르코 9,2-10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자매님은 오늘 여기에 어떻게 오셨습니까?
(대답) 주님께서 불러주셨습니다.
그래요.
겉으로 보면 경기방장에게 전화하고 여러 달 전부터 가니 안가니,
오늘도 보면 신청해 놓고 못 오신 분도 있고 또 어떤 분은 대타로 오신 분도 있죠.
결국에 뭐냐?
하느님이 여러분을 선택해서 여기 오게 된 것이지 여러분이 선택한 것은 아니라 했죠.
그래서 우선 감히 여기 올 자격도 없는데 우리를 불러주신 것에 감사해야죠.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태도가 첫 번째 겸손해야 합니다.
또 주실 것이 있을 것이니 불러주셨겠죠?
불러놓고 아무 대답도 없거나 하면 이상한 사람이 돼버려요.
그분이 하실 얘기는 사제의 입을 통해서 하실 거예요.
그리고 또 주실 게 있을 겁니다.
첫 번째는 치유의 은혜를 주실 거예요.
여기에는 97분의 성인 유해가 있고, 예수님이 매달렸던 십자가 나무 조각 세 점이 있어요.
그 성인 성녀들이 예수님의 명령대로 여러분을 위해 전구하고 계실 거예요.
그리고 어둠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의 상처, 상처가 있으면 당연히 어두워져요.
내가 또렷이 기억하는 상처도 있겠지만 무의식 속에서 멀리 가야 보이는 상처도 있어요.
그 상처를 빨리 지우지 않으면 마귀는 그것으로 나를 끝까지 지배하려 해요.
그래서 예수님도 공생활 시작하실 때 첫 번째 하신 것이 마귀와 싸운 것이죠.
그다음 치유하시고.
행여라도 어둠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노력해야 해요.
어둠은 빛이 오면 물러나게 되어 있죠.
예전부터 우리 교회는 빛이 강한 쪽으로 찾아가라고 가르쳤죠.
빛이 강한 건 성지요. 또 본당 가면 성체 앞이죠.
치유와 구마는 결국 여러분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치유와 구마의 수혜자가 될 때 나도 모르게 기복자가 될 때도 있어요.
‘나 병 고침 받았다.’ 그것으로 끝나버릴 수가 있죠.
그래서 예수님은 항상 그것으로 끝나신 것이 아니라 회당에서 가르치셨어요.
회당에서 쫓겨나면 골목에서도 가르치고, 거기서도 박해받으면 배를 타고 물가에서 가르치셨죠.
끊임없이 가르치셨어요.
잘못된 신앙, 자기만의 신앙에 빠질 수 있기에 올바른 정통 하느님의 뜻을 가르쳐 주셨던 겁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이 ‘감히 여기 올 자격도 없는 나를 주님이 불러주셨다’라는 생각을 갖지 않는다면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아요.
시편 81장 10절 ‘너희들은 다만 입을 벌려라. 내가 채워주리라.’
입을 꼭 다물고 있으면 은혜가 들어올 수가 없어요.
우리 쪽에서 해야 할 일은 적어도 오픈해야 합니다. 그렇죠?
그분의 치유의 힘, 구마의 힘, 말씀의 힘이 들어오게 해야 합니다.
저기 예수님 매달려 계시죠? 원래 예수님이 매달렸던 십자가는 나무죠.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의 정의가 무엇입니까?
‘성부께 죽기까지 순종하신 메시아이신 그리스도.’
십자가를 보고 누구냐 물으면 지나가는 사람 다 알죠.
설마 부처님이라고 그런 사람 있어요? 없죠.
성당에 발도 안 디뎌본 사람도 ‘예수님이지 누구야’ 하며 다 알아요.
그렇지만 여러분들은 그렇게 대답하면 안 되죠.
교리를 배워 신자가 되고 수많은 강론을 들었던 분들이기 때문에,
신학적으로든지 신앙적으로든 100점에 가까운 답을 하셔야 해요.
‘성부’라고 하는 말이 빠져서도 안 되고,
‘죽기까지’라고 하는 말이 빠져서도 안 되고, ‘
순종’이라고 하는 말이 빠져서도 안 돼요.
‘성부께 죽기까지 순종하신 메시아이신 그리스도’
이것이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우리들이 내리는 가장 100점짜리 답이에요.
여러분들 죽음보다 더 큰 순종이 있을까요? 없죠.
성부께 죽기까지 순종하신 메시아인 그리스도,
저분이 능력이 없어 돌아가신 거 아니에요.
순종 때문에, 자기 자만감 때문이 아니라, 성부께 죽기까지 순종하신 메시아신 그리스도.
여기에 모든 그리스도교 진리가 다 함축이 되어 있는 거예요.
성부 얘기 나왔죠?
우리 신앙은 뭐냐? 죽기까지 하느님 첫째 자리에 모시는 것.
이 안에 다 포함이 돼요.
순종이라는 말이 빠지면 십자가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아멘
오늘 1독서, 2독서 복음 전체에 흐르는 말씀의 핵심은 뭐예요?
‘순종’이에요.
저도 한평생 순종에 대해 수만 번 강의했을 것이고,
여러분들도 본당에서건 어디서건 정말 순종, 순명이라는 말 참 많이 들으셨을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순명하기 쉬운가, 이것입니다. 쉽지 않죠
새 신부님들이 되면 주교님 앞에 무릎을 꿇고 세 가지 서약을 하죠.
정결 서약, 청빈 서약 또 순명 서약.
새 신부님들이 초를 들고 식장 맨 뒤에 서 있죠, 그 뒤에 신부들이 서 있죠.
서품 연도가 빠른 신부부터 새 신부들과 들어가고 원로 신부, 주교님은 제일 나중에 입장해요.
나는 뒤에 줄을 서 있는 새 신부 모습을 보면 괜히 짠해.
그래서 앞에 가서 찌르면서, ‘얘. 아직 안 늦었어. 다시 잘 생각해 봐.’ 해요.
왜냐하면 남자로 태어나서 누구라도 절대 뺏기기 싫은 세 가지를 그날 다 뺏겨, 그렇죠?
누가 순명하기 좋아해? 또 대가 끊어져, 그리고 청빈.
한 남자로 세상에 나서 그 세 가지를 갖는 것은 죄가 아니죠.
하지만 세 가지 다 뺏기고 땅바닥에 엎드려. 왜 엎드리는 거예요?
‘넌 이제 시체다’라는 뜻이야. 그리고 사제들은 한평생 검은 옷을 입죠.
아까 내가 입고 나온 옷이 수단인데 라틴어입니다.
수단은 옛날 시체를 감쌌던 옷이에요.
그래서 난 은퇴하고 난 다음에 까만 옷 잘 안 입어요.
1년 내내 빨간 옷, 반발 티셔츠만 입고 살아.
하도 그것만 입으니 저 위에 스님이 지나가다가 ‘신부님 옷이 그거밖에 없으세요? 제가 하나 사드릴까요?’
그러면 나 옷 많은데 빨간 옷이 좋다고 답합니다.
그런데 나를 뒤돌아보면 나는 검은 옷을 입을 성격이 아니야.
태생이 좀 화려한 옷 입기 좋아하고 또 잘 어울려요.
여러분들 기초덕이라는 게 있죠. 기초덕이 뭡니까?
다른 말로 대신덕, 또 다른 말로 향주 삼덕이라 합니다.
주님을 향한 세 가지의 덕, 이걸 기초덕, 아주 제일 기본적인 덕이에요.
하느님을 향하는 덕인 향주 삼덕이 없으면 한평생 교황으로 살았다고 해도 천국 못 가.
김웅열 신부가 한평생 신자들을 가르쳐서 수백만 명을 회개시켰다고 해도 내 자신이 향주삼덕이 없으면 나 천국에 못 들어가요.
그래서 모든 덕 중에 제일 기본이 향주 삼덕이에요.
뭔지는 알죠? 신덕, 망덕, 애덕.
그런데 요즘은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 없죠. 믿음, 소망, 사랑이라 해요.
100% 개신교 쪽에서 온 용어죠.
지금은 신공 들인다는 말도 안 하죠. 기도 바친다고 해요.
기도라고 하는 단어는 그냥 빈다는 뜻밖에 없어요, 이것도 개신교 용어예요.
나는 어릴 때 기도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아침에 드리는 신공을 조과라고 했고, 잠들기 전에 드리는 신공을 만과라고 그랬어요.
신공이 무슨 뜻이에요? 거룩한 공로예요.
우리 선배들은 기도를 공로로 생각했죠.
아침에 일어나 드리는 기도가 조과, 여기서 ‘과(課)’는 ‘일’이라는 뜻이죠.
아침에 일어나 눈곱 떼어내는 것이, 화장실 가는 것이 첫 번째 일이 아니죠.
눈 떠서 잡소리와 자의식이 내 머리를 지배하기 전에, 내가 내 몸에 십자가 성호로 축성하고 첫 번째 신공 드려야죠.
‘주님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를 내 생애 마지막으로 알고 살겠습니다.’
이렇게 조과 드린 그 사람이 그날 하루 동안에 죄를 지을 수 있을까요?
성인 성녀들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늘 하루를 마지막으로 알고 살았기 때문에,
그 마지막으로 산 그날이 모이고 쌓여서 성인들의 일생이 된 거죠.
그런데 우리들은 늘 미뤄요.
용서하는 것도 미루고, 화해하는 것도 미루고, 포기하는 것도 미루고, 늘 미뤄요.
그런데 내일이 나한테 안 오면 어떡할 거예요?
여러분 주변에 갑자기 이 세상 떠난 사람 중에 죽으려고 작정하고 떠난 사람 없어요.
아브라함에게 ‘네 자식 번제물로 바쳐라.’라는 청천벽력 같은 얘기, 말도 안 되는 얘기죠.
이번 구약 묵상 강의가 그거였죠?
번제물로 바치라는 것은 통구이, 바베큐 하라는 거예요.
여러분에게 그런 명령 떨어졌을 때 할 자신 있는 사람이 있으면 미친놈이죠.
말도 안 되는 얘기죠.
그런데 아브라함 할배는 했단 말이에요.
성경에 보면 단 한마디도 아브라함의 불평하는 말 없어요.
물론 아브라함도 인간인데, 그래서 나는 생략됐을 거라고 믿고 싶어요.
그래야 내가 위안을 좀 받죠, 우리랑 비슷하니까.
그 갈등을 다 겪고 난 다음 그냥 묵묵히 시키는 대로 하는 거예요.
향주 삼덕에서 신덕의 핵심이 순명, 망덕의 핵심은 기쁨, 애덕의 핵심은 용서라 했죠.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이면서 하나이듯, 신덕 망덕 애덕의 내용은 다르지만, 삼위일체를 지향하는 기초덕이에요.
그래서 이것이 없으면은 천국 못 들어가요.
어떤 사람이 ‘신부님, 저는 신덕과 망덕은 있는데 애덕이 없어요.’
거짓말.
셋 중 하나가 빠지면 두 개 다 못해요.
망덕이 없는데, 신덕이 있을 수 있고 애덕이 있을 수 있느냐? 거짓말이에요.
삼각형 세 변과 세 각에서 하나가 빠져버리는데 어떻게 삼각형이 이루어집니까?
그런데 여러분, 세상 떠나서 하느님 앞에 가면 셋 중에서 하나만 남고 두 개는 없어도 돼요.
예수님 곁 천국에 가서도 하나 있어야 하는데, 무엇일까요? (대답 못 함)
여기서 걸리는구나. 이것도 내가 얘기를 몇 번 했는데.
신덕? 신덕은 순명이라 했는데, 천국에서는 자동 순명이죠.
망덕은 기쁨이라 했는데, 예수님 곁에 가서도 짜증 나고 성질 나는 일도 많고 그럴까요?
기쁨, 그 자체죠.
마지막 남은 것이 애덕인데, 예수님 곁에 갈 정도 사람에게 용서할 사람이 남아 있을까요?
내 강론 다 들어보세요. 분명 나올 겁니다. 내 기억으로는 백번은 했어.
나만 아니까 너무 재미있어. 그래서 안 가르쳐 드려요.
그래도 여러분은 피정이니까 힌트는 드릴게요.
향주 삼덕 피정 강의에는 없고, 아마 주일 강론할 때입니다.
아마 연중 제32주 강론에 나와 있을 거예요.
여러분들 사람은 본능적으로 순명하기 좋아합니까, 싫어합니까?
싫어하죠. 왜냐면 순명은 반이성적인 개념이고, 반합리적인 개념이에요.
이성을 초월할 때가 많고 합리주의적인 경향이 부서져야만 순명의 길로 들어설 수 있어요.
아브라함한테 새끼 번제물로 바치라는 것, 그것이 이성적인 명령, 합리적인 명령이 아니죠.
늘 충돌해요.
그런데 성경은 말이죠, 결국 ‘순종과 불순종의 이야기’예요.
구약성서 몇 권이에요? 46권. 신약성서는 27권. 합치면 73권.
그래서 천국 가는 전화번호가 73-4627입니다.
73-4627로 전화 걸면 ‘여보세요. 하느님입니다.’ 그래요.
이 73권을 딱 세 마디로 정리하면, ‘창조, 타락, 재창조’.
이것이 반복돼요.
하느님이 우리를 창조하셨는데 교만을 떨면 타락해.
그러면 혼나고 벌 받고 ‘살려주세요’ 하면 하느님은 속을 줄 알면서 다시 재창조해 주시죠.
재창조를 다른 말로 ‘용서’라고 합니다.
용서받고 끝이 나야 하는데, 인간은 또 죄에 또 떨어져 타락하고, 이것이 반복돼요.
어찌 보면 하느님이 되게 어리석어 보여요.
속을 줄 알면서도 계속해서 용서해 줘요.
그렇지만 하느님이 우리에게 거는 기대는 뭐냐?
‘가라지는 죽었다 깨어나도 밀이 안 되지만, 너 사람아, 너는 지금 악인으로 살지만,
너도 나 닮은 의인이 될 가능성이 있어.’
하느님은 우리들이 어느 구렁텅이에 빠져도 절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세요.
끝까지 우리를 믿으세요.
그래서 성경은 순종과 불순종이 충돌하는 이야기예요.
오늘 일독서에 이사악의 봉헌 이야기가 나왔죠.
이사악은 ‘웃는다’라는 뜻이에요.
100살 나이에 얻었으니, 그런 아름다워 이름을 붙여줄 수밖에 없었죠. ‘웃는다’
이삭은 누굽니까? 바로 신약의 그리스도를 나타낸다고 그랬어요.
오늘 1 독서는 절마다 몇 개를 잘라 중요한 것만 나왔었죠.
그런데 결론은 뭐예요? 그 어마어마한 시험을 거치고 축복받았다는 얘기죠.
다음 주 수요일 묵상 시리즈는 ‘왜 하필이면 사흘이나 되는 그 먼 산을 하느님이 가라고 하셨을까?’
얘기부터 시작이 될 거예요.
바로 집에서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든지, 앞마당에서 바치거나 눈에 보이는 앞에서 바치라고 하지,
왜 일부러 3일이나 걷는 그 먼 거리에 있는 산에서, 산도 거기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었을 텐데, 왜 사흘씩이나 걷게 하셨을까?
아무튼 신덕의 핵심인 순명의 결과는 상상을 초월하죠.
일단 자손들에 대한 축복이 나옵니다.
밤하늘의 별보다 바다의 모래알보다 많은 백성을 약속했어요.
만일 아브라함이 자식 바치라 할 때 삿대질하며 자식 데리고 도망쳤다면 며느리 하나 봤겠죠.
그런데 하느님이 그 며느리의 태를 막아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아브라함의 후손은 누구로 끝나요? 이삭으로 끝나는 거예요.
어리석은 인간은 한 치 앞을 못 봐요.
그래서 아브라함의 믿음은 야훼이레, ‘주님이 내 앞길 선하게 예배하실 것이다.’
지난 강론에 그랬죠.
내 돌아가신 내 부친이 좋아하셨던 성서 구절 중 하나가 로마서 8장 28절.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좋고 나쁜 일이 상호작용하여 선한 결과를 맺게 해줍니다.’
내가 아버지를 옆에 지켜봤을 때 아버지는 절대로 실망하시는 것을 난 본 적이 없어요.
자식들에 대한 실망도 본 적이 없고. 당신이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배신당할 때도요.
우리 아버지 참 정말 퍼주시는 분이었어.
‘아버지 뒤통수 때리는데 왜 이렇게 도와주세요?’ 말해도, 절대 아버지는 실망 안 하셨죠.
‘나중에 저 사람도 착한 사람이 될 거야.’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좋고 나쁜 일이 상호작용하여 선한 결과를 맺게 해줍니다.
그것은 바오로 사도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신앙 고백이었죠.
아브라함은 그것을 믿었던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왜 나를 이렇게 시험하실까, 시험치고도 이건 비상식적이야.’
하지만 아브라함은 순명했기 때문에 ‘믿음의 조상’이라는 소리를 듣는 거예요.
또 순명하면, 성경에 나오는 순명의 결과는 ‘치유와 기적’입니다.
다른 말로 해방이 일어나요.
모세가 이집트 백성들 사이에서 고생하는 유대인들을 끌고 홍해 바다를 건넜죠.
해방된 거예요. 육신으로부터 해방, 상처로부터 해방.
하느님에게 순명하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은 ‘치유와 기적’이에요.
그리고 성모 마리아를 통하여 순명하는 자에게 주신 은혜는 ‘영적인 명예’를 주셨어요.
이 세상에 레지오 프레시디움 만큼 성모님에게 붙여지는 명칭이 많죠.
바다의 별, 인자하신 동정녀, 상지의 옥좌, 정말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죠.
그중에서 가장 높은 명예로운 이름이 뭐예요? 천주의 모친이에요.
성모님은 인간이에요. 그런데 인간이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셨어요.
돌에 맞아 죽을 각오를 하면서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그 말씀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며 가브리엘 천사가 전한 말에 순명하셨죠.
아담과 하와 이후에 끊어졌던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다리가 성모님의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님을 통해서 이어진 거죠.
그래서 순명의 결과는 자손들에 대한 축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 혼자 살다 죽으면 그뿐이지’가 아니에요.
내가 지금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내가 보지도 못할 100년 200년 후 내 후손들한테도 그 영향이 분명히 내려간다는 거예요.
마태오복음 1장 1절, 발음도 힘든 예수님의 족보가 거룩한 책 첫 페이지에 왜 나옵니까?
예수님을 만들기까지, 메시아가 나오기까지, 족보가 나오는 거예요.
옛날부터 집안에 사제 하나 나오려면 3대에 걸쳐 하느님께 정성 들여야 한다는 말이 있어요.
우리는 가계로부터 뼈와 살만 받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어두운 부분도 내려올 수 있고 밝은 부분도 내려올 수가 있죠.
그래서 우리는 ‘나 혼자 살다 죽으면 그만이지’가 아니라, 내가 지금 사는 거에 따라
내 자손들한테도 어마어마한 영향이 내려간다는 것 기억하고, 자손들 때문이라도 잘 살아야 해요.
그리고 우리는 아프면 치유 받기를 원해요. 영의 치유든 육의 치유든.
되돌아보면 내가 순명을 안 할 때가 순명할 때보다 많았다고 하는 것을 반성하게 돼요.
그래서 그동안 순명 못 한 것, ‘주님 이제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저 순명하겠습니다.’
하느님께 순명을 서약하면 치유가 일어날 거예요.
그리고 우리들이 순명할 때는, 나를 스스로 올리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서 나를 올려줘요.
나는 존경받을 자격도 없지만, 나를 존경해 줘요, 성모님한테 영적 명예를 가듯이,
저도 41년 사제 생활, 신학교 10년까지 하면 51년, 반백 년을 출가해 오늘 여기까지 왔어요.
뒤돌아보면 사제 생활 가운데 제일 힘들었던 것은 역시 ‘순명’이에요.
제가 학생 때와 보좌 신부 때 3번 순명하지 않은 적이 있어요.
그래서 그것을 기워 갚기 위해 기를 쓰고 순명했어요.
그게 뭐냐? 유학 가라는 것을 내가 안 갔어.
교구에서는 나를 학자로 만들고 싶었던 것 같아요.
돌아가신 정진석 추기경님이 나한테 두 번 권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당돌하게 신학교 관두겠다고 그랬어.
나는 학자 되기 싫다고, 그냥 사목하고 싶다고, 그냥 본당 신부 되고 싶다고.
그리고 보좌 신부 때 또 한 번 얘기하셨는데도, 그때도 당돌하게 싫다고 했어요.
이 순명에 NO를 해서 내가 벌을 받는다면 그냥 옷을 벗겠다고 그랬어.
나중에 그분 서울대교구장으로 가고 한 번 뵐 기회가 있어서 ‘그때 순명 못한 것에 제가 보속하고 삽니다.’ 했어요.
감곡으로 올 때도 보속하는 마음으로 왔고, 배티로 갈 때도 보속하는 마음으로 갔어요.
지금까지도 보속하는 마음으로 순명하고 살아요.
그래서 순명이 참 쉽지는 않다, 늘 부딪히기 때문에.
십자가가 뭐라고요?
여러분 대녀, 혹은 손주가 할머니 십자가가 뭐냐고 물으면 설명해 줘야죠.
그런데 참 은혜롭게도 저렇게 매달렸던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범벅이 된 그 십자가 조각 세 점이 이 집에 모셔져 있다는 거예요.
물론 97분의 성인 유해와 십자가 보목 3점이 어떻게 해서 한국에 오게 된 것이냐에 대해서는,
하루아침에 된 것이 아니고 한 점 한 점 다 사연이 있어요.
내가 앞으로 시간이 되면 집필해야 할 것 중 하나가 성인 유해가 한국에 오게 된 과정입니다.
아무튼 오늘 이 자리에 불러주신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립시다.
그리고 향주 삼덕, 그중에서도 순명의 삶은 야훼이레로 이어진다는 것을 믿으면서 하느님께 오늘 하루를 봉헌하도록 합시다.
♣2024년 사순 제2주일 (2/25)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출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첫댓글 주님! 이 고운 손길에 축복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