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因緣
<제8편 풀꽃>
③그 여름 풀꽃-32
천복은 해가 떠오르는 줄도 모른 채 늦잠에 빠지어있었다.
“손자! 싸기 일나 아츰 들우.”
바우네의 채근에 그가 눈을 떴을 때는 방안이 한낮처럼 눈부시게 밝아있었다.
그는 눈을 비비적거리며 일어나더니, 곧바로 밥상 앞으로 다가앉아 숟갈을 들고서 밥술을 뜨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숭늉그릇을 쟁반위에 받히어들고 들어와서는 그의 옆에 앉더니만, 잠든 아기를 끌안고 젖을 물리며, 입을 여는 거였다.
“모츠름, 울 집이서 잔게 워뗘?”
“잠을 아주 맛있게 잤어요.”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였는데, 워낙 단잠을 잤을 거였다.
정숙의 관능미에 매력을 느끼던, 그는 그녀와 필요이상의 정력을 쏟은 데다 잠도 설치었으니, 새벽녘 단잠을 잤을 게 틀림없었다.
“거봐. 나넌 으레 여그서 아그랑 잔디, 영감언 안방이서 혼자자넌겨.”
평생을 짝지어 살아온 김 노인과 따로 잔다는 말에 천복은 머쓱하니,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영감님이랑 다정히 주무셔야죠. 왜, 혼자 떨어져 주무셔요.”
천복은 모르겠다는 듯이 말하였다.
“아글 킨게. 글고, 영감이 자다가니 집적거리먼, 아그가 깬당게. 고러먼, 잠도 못 잔게로. 근디 말여, 울 친구도 뒤꽁무니 호박씨 까다가니, 아그 배먼 워쩌여?”
“...?”
그녀는 갑자스레 말꼬리를 정읍댁에게 돌리면서 호박씨 까다 아기배면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이었다.
그러자 천복은 문득 숟갈질을 멈추고서 그녀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벌써부터 정읍댁이 아이를 배태하면, 어떻게 하나하는 잠재의식이 도사리고 있었는데, 그녀의 말에 문득 가슴이 덜컥 내리어앉는 느낌이 들어서이었다.
어제 정읍댁만 하더라도, 숙영의 갑작스러운 출산으로, 해산구완을 맡아하느라, 종일 동동거리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지난밤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구레나룻과 달콤한 밤을 보냈으리라고, 짐작되었다.
그네가 그토록 소원이었던, 그 하룻밤을 온전히 함께 마주하였으니, 말이었다. 두 남녀가 오죽이나 행복감에 젖은 순간이었겠는가.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냐?’
그가 어제 정숙의 체내에 수액을 쏟아 붓듯이, 구레나룻의 정액이 정읍댁의 아기집으로 팔딱팔딱 헤엄치어 들어가는 모습이 선연하게 떠오르는 거였다.
남자와 여자는 남남끼리 만나는 거였다. 그 연결된 고리가 끊어지면, 아무리 사랑을 하더라도, 무심한 세월일 수밖에 없었다. 오직 그 고리가 끊이지 아니하고, 이어지는 거는 그러한 끄나풀로부터 시작되는 거였다.
그렇지 않고서는 두 남녀가 유희의 그늘에서 끝내 공허감을 맛보게 되어있고, 허탈감과 아쉬움으로 흔적 없이 침잠되고 말 거였다.
그래서 사랑이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을 때에 비로소 영그는 법이었다.
“손자, 왜, 나럴 뚫어지게 쳐다본겨?”
그녀가 예민하게 다그치어묻자, 그제야 그는 밥술을 뜨기 시작하였다.
“암만혀도이, 나가 손자럴 본게로, 울 친구가 남자 만나러 댕기네빈디. 손자가 홀엄니럴 그냥 놔두겄어라. 잘 혔어. 손자!”
그녀는 눈치로 때려잡는다더니, 자기 나름 눈치를 채고서 정읍댁이 남자를 만나러 다닌다고, 믿는가 보았다.
“수양고모님, 울 어머닌 아직 홀몸이세요. 저도 어머니께서 남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요. 그게 맘대로 되나요.”
천복은 정녕 능글맞게 시치미를 떼고, 굳이 정읍댁이 아직 홀몸이라고 거짓 힘주어 말하는 거였다.
“나가 다 안게로, 그짓말 흐지 말어.”
그녀는 역시 눈치로 잡으면서 천복의 말을 곧이듣지 아니하였다.
“...!”
그러나 그는 그녀의 말에 더는 대꾸하지 아니하였다. 이렇듯 입을 다물면, 그녀는 정녕 그가 거짓으로 말한 걸 스스로 인정하는 거라고, 믿을 수 있었다. 그렇더라도, 그는 입을 다물고 밥그릇을 비운 뒤에 시간을 보자니까, 상오8시가 조금 지나 있었다.
아직 과수원집에 서둘러 갈 거까지는 없다고 생각한 그는 졸음이 아직도 가시지 않는지, 밥숟가락을 놓고는 숭늉 한 모금에 입을 적시더니, 그 참 옆으로 쓰러지지어 눈을 감는 거였다.
바우네는 젖을 빨던 아이가 잠이 들자, 그 자리에 뉘어놓더니, 밥상을 들고 밖으로 나아가 상을 치운 뒤에는 다시 방으로 들어오는 거였다.
“손자, 밤이 정숙이 만나고, 왔제?”
천복이 잠이 들락 말락 하는데, 그녀가 그의 코앞에 다가앉으며, 뜬금없이 묻는 거였다.
그 바람에 그는 화들짝 놀라 눈을 뜨고 말았다.
“정숙을 만나다니요?”
“시치미 떼지 말어.”
“아니, 제가 시치밀 떼다니요?”
그녀는 마치 천복이 정숙을 만나는 뒤라도, 밟아본 듯이 다조지는 거였다.
첫댓글 바우네가 수사관으로 보입니다 ㅎ
쌓고 싼 향내도 난다고 집 앞으로 다니는 것만 하더라도
짐작할 수 있겠지요. 그만큼 벌써부터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는 거겠지요.
감기와 연애는 감출 수가 없다네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