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KPD) 창립
이제까지 '혁명적 지도자'와 스파르타쿠스단으로 구성된 극좌파들은 일관해서 사민당과 그에 의해 조종되는 정부에 대항하여 투쟁하였다. 그들은 조직적으로 독립사민당에 소속해 있었다. 같은 정당원으로 정부에 참가하고 있던 하제 등 3명이 정부로부터 탈퇴한 후 그들의 투쟁 목표는 한층 분명해졌다. 이 두 극좌파는 의회주의를 배격하고 노동평의회의 독재를 주장하고, 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폭력혁명도 불사하겠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지녔다. 그러나 이 두 극좌파는 3명의 독립사민당의 인민위원이 정부로부터 탈퇴한 시점에서 격렬한 대립을 보이기 시작했따. 그 원인은 당시의 사정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두 그룹이 성립된 사정과 전쟁중에서의 그들의 행동 속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었다.
스파리트쿠스단의 구성원들은 전쟁 이전부터 이미 사민당의 좌파로서 유명한 존재들이었고, 또 그들은 사상가와 문필가 등이어서 일본 노동자들과는 거의 접촉이 없었다. 전쟁중에 이들은 하나의 그룹을 형성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독립사민당이 사민당에서 분열하기 훨씬 전의 일이었다. 그들도 새로운 독립사민당에 가입하기는 했지만 그룹자체는 결코 해제되지 않고 독자적 그룹으로 남아 있었다. 이에 반해 '혁명적 지도자'그룹은 노동조합 속에서 탄생하였다. 그들은 스파르타쿠스단과는 다르게 그 산하에 노동자 대중을 장악하고 있었고, 따라서 유사시에는 계획한 바에 따라 노동자들을 동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항상 비밀리에 음모적으로 행해졌다.
그러나 노동자와의 접촉이 없던 스파르타쿠스단은 그 주된 활동을 선전활동에 두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민중을 선동하여 거리로 내세워 데모를 촉발시켰고, 그것을 혁명운동으로 발전시키려 하였다. 이와 같은 스파르타쿠스단의 요란한 선전활동은 비밀리에 혁명을 계획하여 조직하려던 '혁명적 지도자' 그룹에게는 상당한 짐으로 여겨졌다. 계획이 무르익기전에 탄로나 탄압을 받을 염려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혁명적 지도자'는 스파르타쿠스단을 '폭동주의자'라고 비난했고, 반면 스파르타쿠스단은 '겁쟁이들'이라고 비난했다. 이러한 대립은 혁명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혁명 이후에 더 이상 전시중에서와 같은 탄압은 없어졌으나, 때마다 거리의 데모를 선동하려는 스파르타쿠스단과 직장에서 조직을 굳히려는 '혁명적 지도자'들은 언제나 전술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이 두집단은 앞으로 살펴볼 1월 봉기 직전에 서로 다른 두 정당으로 분열하였다. 스파르타쿠스단이 독립사민당에서 분열하여 공산당을 창립하자 '혁명적 지도자' 그룹은 여기에 가입하지 않았다.
12월 31일, 스파르타쿠스단은 그때까지 독립사민당에 가입하고 있지 않던 브레멘 좌익 그룹을 흡수하여 신당 창립대회를 열고, 신당을 '독일공산당-스파르타쿠스단'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런데 독일 공산당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는 결코 공산주의자라고 부를 수 없는 인물들이 많았다. 스파르타쿠스단은 원래부터 문필가들의 모임이었기 때문에 이론가들이 많았고, 평당원 중에는 혁명에 흥분한 젊은 노동자, 패전으로 급속히 급진화한 귀환병, 거리에 흘러넘치는 실업자 아니면 관념적 인텔리층이 많았다. 그들은 혁명적 열정에는 강했지만 정치적 경험이나 이론적 사색이 부족했다.
그리하여 신당 창립대회에서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 등 당 지도층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급진당원들은 국민의회 선거에 기권하기로 결정하였다. 혁명에 매료된 이들 급진 당원들은 아주 가까운 장래에 폭력 혁명을 일으맄 꿈을 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이 신당에 동참하도록 제안받은 '혁명적 지도자' 그룹은 의회 선거 보이콧의 철회, 폭동주의의 폐기, 평등한 입장에서의 당 강령 작성, 당명에 병기된 스파르타쿠스단이란 명칭의 삭제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러한 이들의 요구가 거부당하게 되자, 이들의 신당참여가 성사되지 못했다.
스파르타쿠스의 주일
독일 혁명의 최종적인 운명은 1919년 1월 5일부터 12일까지의 한 주일동안 베를린에서 결정되었다. 이 한주일을 보통 '스파르타쿠수의 주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주일에 일어난 일은 흔히 이야기 되듯이 사민당 정부에 대한 공산주의자의 봉기라고는 볼 수 없다. 11월 9일 베를린 혁명처럼 자발적인 노동자와 시민의 봉기가 되풀이된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1월 5일 폭동은 그 누구도 계획했거나 예견한 사람이 없는 자연발생적인 대중운동의 폭발이었다. 임시정부가 독립사민당의 각료들이 사임한 이후 프로이센 내각에서도 독립파가 탈퇴했지만, 이 프로이센 정부의 관할 밑에 있는 베를린 경찰서장 아이히호른(E.Eichhorn)은 홀로 독립파이면서도 사퇴하지 않고 있엇다. 프로이센의 샇민당 내각은 1월 4일 그를 파면했다. 이것이 봉기의 도화선이 되었다.
에밀 아이히호른은 독립사민당 베를린 지부에 지원을 요청했따. 그날 베를린의 독립사민당 간부와 '혁명적 지도자' 그룹 대표, 그리고 리프크네히트 등 2명의 공산당 대표등이 경찰서에서 회합을 갖고, 다음날 일요일에 아이히호른의 파면에 항의하는 집회 개최를 결정하였다. 이들은 일요일 오후 2시에 '지게스알레'(Siegesalle)거리에서 대중 데모를 호소했다. 그러나 그것이 20만이나 되는 데모시위로 발전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아이히호른이라는 전 경찰서장은 혁명의 상징적인 인물이 결코 아니었으며, 대중 봉기에 하나의 계기만을 제공한 인물이었을뿐이다.
(베를린에서 시가전을 벌이는 스파르타쿠스단)
이 데모 집회는 평화적이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무장하였다. 그것은 바로 전선의 행진과 같았다. 바야흐로 베를린 시민들은 혁명에 도취된 듯 보였다. "11월 9일의 감격을 다시한번!"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부의 스파이들이 도처에서 '도발자' 노릇을 하며 사람들을 모아 슬로건을 외치고, 무장집단이나 대열을 편성하여 최종적인 혁명 진압을 위한 명분 축적을 위해 혁명을 도발한 것이라는 음모설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대중이 스스로 움직이지 않았다면 스파이들만으로 그 많은 대중을 조종하기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오후가 되자 데모는 무장행동으로 바뀌었다. 그 중요 목표는 신문가 거리였다. 한 무리의 무장집단은 사민당 기관지 <전진>을 비롯한 대신문사를 모두 점거하고, 윤전기를 멈추어 세웠으며, 신문기자들을 내쫓았다. 다른 무장집단은 베를린의 중요한 역들을 점거하였다. 밤이 되어 흥분한 시위대가 점거해야 할 전략 목표, 타도할 적을 찾아 베를린 시내를 배회했지만, 적이 누구며 그들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따. 이날 밤 혁명세력이 베를린을 장악한 듯이 보였다. 그러나 이 격렬한 대중의 폭발에 누구보다 놀란 것은 이 폭발을 유도한 바로 당사자들이었따.
그 일요일 밤, 베를린 경찰서에 86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혁명적 지도자' 70명, 베를린 독립사민당의 간부 10명, 병사 대표 2명, 수병 대표 1명, 공산당 대표로 리프크네히트와 피이크(W.Pieck-후에 동독 수상이 됨.), 그리고 아이히호른이 그들이었따. 이들의 면면을 보면 거리현장에서 데모 군중을 이끌던 '혁명적 지도자'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 중 인민해병단의 지도자 하인리히 도렌바흐가 궁성 앞 크리스마스 싸움에서 승리했다는 전과를 내세워 의기양양해 있었다. 이런 인적 구성을 보아도 1월 봉기를 '스파르타쿠스의 주일'이라고 보는 '전설'은 아무래도 적절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각주-이 '전설'은 독일 군부의 공공연한 주장으로서 독일 혁명을 공산당을 비롯한 사회주의자들의 준동으로 보려는 시각을 강력하게 대변하고 있다. 이 주장은 사회주의 혁명이 패전을 자초하였으며, '승리하고 있는 전쟁을 등뒤에서 찌른 것'이라는 '등뒤의 칼'(Dolchstoss)'라는 극우 반동적 역사 해석에 기반하고 있다.)
그들은 토론 결과 '에베르트와 샤이데만 정부'를 타도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80대 6표로 '반정부 투쟁을 개시하여 정부를 타도하기까지 싸울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53명으로 굿어된 '임시혁명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독립사민당의 노정객 게오르그 레테부아(Georg Lede-bour)를 비롯해, 리프크네히트, 파울 숄체(P.Scholze)가 위원회의 중심인물이었다. 이 혁명위원회는 '정부의 업무를 잠정적으로 인계'한다고 선언하였으나, 실제로 이 위원회가 한 일은 월요일에 새로운 데모를 일으키자는 호소를 한 것밖에는 없었다.
이 호소는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 월요일 아침 많은 군중이 거리로 나섰다. 군중의 수는 전날보다 많았다. 자신에 찬 데모 군중은 볼프 통신사, 중앙인쇄국 등 여러 공공건물을 점거했다. 아무도 명령하지 않았는데도 그들은 용감히 싸우기 시작했다. 수상관저 앞에는 사민당이 소집한 수천명에 이르는 정부 지지자와 무장 시민이 관저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데모 군중들은 공복감에 지쳐 있었다. 오후에 이르러서는 데모 군중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그때에야 그들은 자신들을 지지하여 당연히 합류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베를린에 주둔한 여러 군부대가 움직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들 부대들은 영내에 머물러 토론만 벌이고 있었다. 혁명을 지지하는 병사들과 안녕과 질서를 찬성하는 병사들로 양분되어 거리로의 진출이 지체되고 있었다. 혁명에 앞장설 줄로 기대했던 인민해병대마저도 '중립'을 선언했다. 혁명위원회는 희망을 걸고 경찰서에서 수병사령부로 자리를 옮겼으나, 그곳에서마저 오후에 쫓겨나고 말았따. 그렇게 하루가 지나갔다. 그날 밤 그들은 경찰서에 모여 회의를 열었으나 분위기는 전날과는 딴판으로 변해 있었다. 이제 문제는 정부를 타도할 수 있느냐가 아니고, 어떻게 하면 이 사태로부터 무난히 빠져나갈 수 있느냐였다.
정부 쪽도 겁을 먹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베를린에 주둔해 있던 부대들은 더이상 정부편도 아니고 혁명편도 아니었다. 이들은 혁명위원회의 사기가 떨어져 있는 것을 아직 간파하지 못했다. 그러나 베를린 교외의 군 연습장에서는 정부를 지지하는 의용대(Freikorp-자유군단)가 편성되고 있었다. 지난 토요일에는 인민위원 에베르트와 노스케가 게오르그 메르커(G.Maercker) 장군 휘하의 이 의용군(자유군단)의 저격부대를 시찰한 바 있었다. 그들은 부대를 시찰하고 나서 이 의욍군을 '진짜 군인들'이라고 찬양하며 즐거워했다. 그럼에도 월요일에는 여전히 베를린의 중심가 운터 덴 린덴(Unter den Linden) 거리에는 의용군 저격부대가 아니라 무장한 혁명 데모대가 포진하고 있었다.
정부측과 혁명위원회 사이에 교섭이 시작되었다. 그 사이에서 정부로부터 탈퇴한 독립사민당의 인민위원들이 중개역을 맡고 있었다. 에베르트는 의용군이 출동 준비를 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이 교섭에 응하였다. 교섭에서 그는 혁명무장 데모대가 신문사를 떠나야 한다는 조건만을 내걸었다. 혁명위원회는 망설임 속에 결국 그 조건을 거부하였다. 그것은 에베르트가 내심 바라던 바였다. 지난번과 같은 혁명세력과의 타협을 그는 더 이상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복수가 가까이 다가왔다'고 2일 후에 발표한 정부의 호소문에서 그는 말하고 있다. 그는 혁명세력에 대한 복수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며칠 동안 혁명위원회와의 타협될 수 없는 교섭을 지연시키면서 군사적인 준비를 계속하고 있었다.
(자유군단 지원병 모집 포스터)
(구스타프 노스케)
한편 노스케는 정부를 방위하기 위한 의용군을 증강하였다. 이미 월요일에는 노스케가 포위된 수상 관저에서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 자리에서 '다른 의견이 없습니다. 누군가는 피에 굶주린 사냥개가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라고 그 자신이 말했느로 스스로 증언하고 있다. 그는 사령관이 된 후 안경을 써서 변장한 다음 포위된 수상관저를 탈출하여 베를린 교외의 달렘에 있던 루이제 여자학교에 숨어들어갔다. 그는 그곳에 의용군 총사령부를 설치하고 의용군을 편성하여 베를린 입성을 준비하였다.
결전은 1919년 1월 9일 목요일부터 11일 일요일까지 결행되었다. 의용군은 베를린의 서부 교외에서 베를린으로 잆어하였다. 베를린에 주둔하고 있었던 여러 부대들이 에베르트와 총사령관 그뢰너의 명령으로 정부쪽에 가담하였다. 이 부대들은 이전부터 보수적이었던 '프로이센 근위보병 연대', 에베르트에게 충성을 다했던 신설된 '제국의회 연대', 크리스마스 무렵에 편성된 우익 급진파의 라인하르트 연대, 그리고 크리스마스 이브에 혁명파에게 참패하여 그 후 재편된 폰 슈테파니(v.Stephani) 육군 소령 지휘하의 포츠담 대대 등이었다. 이들 부대들이 노스케의 의용군과 연대하여 시가전을 펼치면서 혁명파에 점거된 건물들을 탈환하였고, 마침내 일요일에는 경찰서까지 탈환하였다. 가장 격렬한 전투는 운터 덴린덴 거리에 있던 <전진> 신문사에서의 공방전이었다. <전진>을 점거했던 혁명 데모대는 자유로운 철퇴를 교섭하기 위해 백기를 든 6명의 전령을 정부군측에 파견하였다. 이들 중 1명은 정부군측으로부터 무조건 항복 요구를 듣고 복귀하였고, 나머지 5명은 정부군에 체포되어 학대를 받은 후 끝내 사살되었다. <전진>의 포위 공격이 있은 후, 무장혁명군 300명 가량이 포로가 되었다. 이중 7명이 수상관저의 전화 명령에 따라 사살되었다.
1월 봉기의 성격
그럼 혁명적 무장 데모대는 어떤 세력이었는가? 그 당시 정부 쪽의 입장은 대체로 이들을 스파르타쿠스단의 일원이라고 규정하였다. 그 후 역사가들도 이 승자의 명명(命名)에 따라 이들을 '스파르타키스트'라 불렀다. 그리하여 1월봉기는 '스파르타쿠스 봉기'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창당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공산당이 1월 봉기를 계획하기에는 그들의 당력이 턱없이 부족하였다. 당이 아직 정비되기도 전에 그런 대중봉기를 지도한다는 것은 그들 나름의 규칙위반이기도 했다. 1월 봉기에서 혁명위원회의 중심멤버로 참여한 리프크네히트는 1월 8일 당 간부회의에서 비난의 화살을 받아야했다. "칼(리프크네히트), 이것이 우리들의 계획이었냐?"라고 말하면서 로자 룩셈부르크가 그에게 큰소리로 대들었다고 한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혁명위원회도 1월 봉기를 사전에 계획한 일은 없었따. 이 위원회를 주도한 것은 공산주의자 리프크네히트나 피이크 두 사람보다는 70명의 '혁명적 지도자'들이었다. 이 봉기는 11월 혁명을 일으킨 바로 그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활동의 결과였따. 이 데모대 중의 대부분이 사민당이었지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따.
한편으로 혁명위원회의 무능이 폭로되고, 다른 한편으로 정부군이 시가전을 통해 혁명 데모대를 진압하고 있던 비극적인 주말에 대중집회가 열렸다. 1월 9일 독일의 대표적인 전기공업 콘체른인 독일 전기회사(A.E.G)와 슈바르츠코프(Schwarzkopf) 공장에서 몰려든 4만명의 노동자가 훔볼트 공원에 모여 '모든 당파의 노동자 통일'을 선언하고, 각 당파를 고루 참가시킨 위원회를 발족하였다. 그 후 모든 노동자를 통일시키고자 하는 운동이 베를린의 모든 공장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확산 과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경우는 슈판다우(Spandau, 노동자 8만명) 공장을 들 수 있겠다. 이 기업의 노동자들은 다음의 4개항의 요구조건을 결의하였다.
1. 인민위원회 전원의 사임.
2. 3당파를 대등하게 대표하는 위원회의 결성.
3. 노병평의회, 중앙평의회, 집행평의회 인민위원의 재선거.
4. 사회주의적인 여러 정당의 통일에 착수할 것.
그런데 이러한 결의 내용은 결코 공산주의자들의 목표는 아니었다. 이것은 지난 11월 10일 에베르트가 표방한 목표, 즉 사회주의자들의 통일과 '형제간에 싸우지 말자'라는 목표와 동일한 것이었다. 결국 베를린 노동자들은 11월 9일에 이러한 목표를 위해 싸웠으며, 그리고 다시금 그들은 이러한 목표를 위해 자발적으로 1월의 유혈 봉기를 일으킨 것이 되었다.
그들은 11월 혁명에서와 같이, 사회주의자들의 통일전선을 구축하고 새로운 노동자 국가를 창설하기 위해서 봉건적이고 부르주아적인 구국가체제를 폐지하고자 했다. 그런데 그들은 11월 혁명에서는 승리하여 과거의 왕정을 타도하였으나, 이번 혁명에서는 유혈이 낭자한 패배를 겪게 되었다.
그럼에도 1월 19일 헌법제정 국민의회 선거에서 이들 데모 군중은 거의 모두 사민당에 표를 던졌다. 그들은 여전히 독립사민당원이나 공산당원이 아니고 스스로를 사민당원이라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나름대로 에베르트, 샤이데만, 노스케를 더이상 사민당원이 아닌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 역설적인 대중 심리를 기성 정치인들이 교묘하게 정치에 이용하였던 것이다.
노스케의 혁명 진압

(에베르트와 노스케)
이제 노스케와 주둔군 장군들이 베를린을 장악하였다. 군대에 의한 내전(內戰)이 시작된 것이다. 노스케는 정부군의 선두에 서서 지배력을 행사하였다. 노스케는 키가 크고 안경을 쓴 민간인이었따. 보수계 신문 <포스트>는 1월 12일자에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의 심각한 얼굴 속에는 철의 의지가 나타났다. 그의 옆에는 반은 조소와 당혹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육군 대령이 붙어 있었다."
새로 편성된 '저격 근위 기병 사단'이 1월 15일 베를린 서부 지역을 관장하게 되었고, 호화로운 에덴 호텔에 총사령부를 설치하였다. 에덴 호텔 현관에 플래카드가 하나 내걸렸다. "저격 근위기병 사단이 베를린에 입성했다. 베를린 시민들이여! 사단은 여러분에게 약속한다. 질서가 최종적으로 회복되기까지 사단은 수도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군부는 내전을 공식적으로 선언하였다. 계엄령을 발표하지도 않은 채...
입성 당일 내에 이 사단은 그 진가를 발휘했다. 그 첫 임무로 행해진 것이 바로 공산당 간부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의 살해사건이었다. 두 공산당 간부의 살해 사건은 오늘날 독일의 혁명극 속에서 가장 큰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 되었다. 그것은 예수가 십자가에 달린 골고다 사건처럼 혁명사에서 큰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특히 구동독을 위시한 사회주의권의 역사가들과 서방의 좌익 사관 학자들은 역사 서술에서 이 사건을 독일 사회주의 혁명을 '배반한 최대의 사건'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유혈혁명 과정에서 이 범죄는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1919년 1월 15일 저녁, 저격 사단에서 파견된 몇몇 장교들이 시내에 머물고 있던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를 체포하였다. 체포된 이들은 총사령부가 있는 에덴 호텔에서 장교들에게 총대로 무참히 맞아 피가 낭자해졌다. 그리고 나서 이들은 자동차에 실려 티어가르텐으로 끌려와 무참히 살해되었다.(각주-현재에도 베를린 서부 티어가르텐 옆을 흐르는 쿠르푸르스타담 수로가에 '로자 룩셈부르크가 살해된 곳'이라는 푯말이 서 있다.)
그런데 실제로 리프크네히트는 1월 봉기 중 이렇다 할 지도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으며, 로자 룩셈부르크 역시 적극적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보수적 군부는 혁명을 상징하는 두 사람을 살해함으로써 유혈에 의한 혁명의 청산을 도모한 듯 보인다. 생존 중에 두사람은 노선 문제로 자주 대립했다. 경력도 서로 달랐고 사상이나 성격도 매우 달랐다. 다만 그들은 노스케가 '질서'를 상징하듯이 그들이 '혁명'을 상징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을 뿐이었다. 12월 초 베를린 시내 광고판에는 다음과 같은 포스터가 게시되었다. "노동자 여러분, 시민 여러분! 조국이 몰락하고 있다. 조국을 구하자! 조국은 밖으로부터가 아니라 스파르타쿠스단에 의해 위협을 당하고 있다. 그 지도자를 때려죽여라! 리프크네히트를 죽여라! 그리하면 여러분들은 평화와 노동과 빵을 손에 넣을 것이다! 한 일선장병". 이것은 당시 보수 세력의 목소리를 대표적으로 잘 대변해 주고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