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한 해 동안 [장재언 칼럼]을 애독해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큰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고충을 말씀 드립니다 만 글 쓰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일년 내내 아니 [비전통신]이 시작된 이후 7년 동안 제가 이 칼럼을 써올 수 있었던 것은 애독자 여러분들께서 기대하고 기다리신다는 사랑의 독촉이 있어왔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올해의 마지막 칼럼도 그렇습니다. 무슨 글을 써야 되나 많이 고심했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인데.....
결국 힐튼 호텔의 설립자인 콘라드 힐튼(Conrad Nicholson Hilton 1887~1979)에 관한 글로 2009년 마지막 칼럼을 장식하기로 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 분은 기도를 많이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이 분은 큰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이 분은 큰 꿈을 지닌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몇 일 전은 성탄절이었습니다만 이 날은 예수님이 나신 날일 뿐 아니라 평생 기도하며 큰 부를 이룬 콘라드 힐튼이 태어난 날이기도 합니다.
1887년 성탄절에 미국 뉴멕시코 주 샌안토니오의 허름한 오두막집에서 미래의 거부가 태어났습니다. 이 분이 요즘 온갖 기행으로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패리스 힐튼의 증조부이십니다.
콘라드 힐튼은 노르웨이 출신 이민자인 아버지와 독일 계통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여러 가지 장사에 손을 댔지만 재미를 보지 못했습니다. 콘라드는 행상, 은행원, 호텔 벨보이 등을 전전했습니다. 그는 수중에 언제나 현금이 있는 장사인 은행가를 꿈꿨습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뒤 ‘석유 천국’ 텍사스로 가지만 은행 대신 호텔에 취직합니다. 벨보이가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다른 벨보이에게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꿈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방에 당시 가장 큰 호텔의 사진을 붙여놓고 그 호텔의 주인이 된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룹니다. 콘라드는 모블리 호텔을 인수해서 호텔 숙박시간에 맞춰 요금제를 정하고 선물가게를 열었습니다. 종업원에게 서비스 교육을 시키고 매일 시트와 베개를 세탁했습니다. 지금은 당연한 호텔의 모습이지만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서비스였습니다.
그는 1920년대 대공황 탓에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위기가 한풀 꺾이자 주변의 호텔을 인수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뉴욕까지 진출해서 그야말로 미국 호텔업계 최정상의 자리에 오릅니다. 2차 세계대전 후에는 미국 밖으로 진출해서 ‘호텔 왕’의 별명을 얻게 됩니다.
그는 나중에 사람들이 성공비결을 물을 때 이렇게 대답하곤 했습니다.
첫댓글 감동먹고 갑니다.
김장로님 새해에 하나님의 무궁한 은총과 축복이 넘치는 새해를 맞이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