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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사무엘상 16:4-13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성령강림 후 제4주일이다. 성령강림주일이 계속된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들이다. 언제나 하나님의 거룩한 영에 이끌림을 받기 바란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감동과 위로가 내 삶을 좌우하고, 내 앞길을 인도하시길 간구해야 한다.
구약성경에서 그런 대표적 인물로 다윗을 꼽는다. 요즘 우리가 읽는 톨레레게 시편의 주인공이다. 오죽하면 메시야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는가?
이번에 박희산 장로님이 <하나님이 사용하신 열 가지 도구> 독후감 현상공모에서 대상을 받았다. 이 책은 심광섭 목사님을 비롯해 5명의 교수가 쓴 책이다. 내가 요청을 받고 박 장로님을 추천하였는데, 박 장로님의 성품대로 순순히 응하였다.
이 책은 성경에서 도구 이야기 10편을 다루었는데, 다윗은 두 가지나 된다. ‘다윗의 물맷돌, 다윗의 비파와 시와 춤’이다. 박 장로님은 독후감에서 어린 시절 배운 찬양을 끌어왔다. 이제 지인 이름도 선뜻 잘 기억해 내지 못하는 나이에 어린 시절 배운 찬양 가사를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정확히 기억하는 자신에게 놀랐다고 하였다.
“삼갈의 막대기/ 다윗의 물매/ 도르가의 바늘/ 라합의 밧줄/ 삼손 나귀 턱뼈/ 소년 도시락/ 시시해도 바치니/ 하나님 쓰셨네!”
다윗이 훌륭한 점은 그가 도구를 잘 사용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다윗의 인생을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셨다는 점이다. 그는 모든 신앙인의 모범과 같다. 참람한 실수에도 불구하고, 참회를 보신 하나님은 다윗을 내내 사랑하셨다.
1)
하나님은 다윗의 어떤 모습을 눈여겨 보셨을까? 다윗을 무대 위로 불러낸 인물은 당시 선지자 사무엘이다. 사무엘은 사울의 뒤를 이을 새로운 인물을 찾기 위해 베들레헴으로 갔다.
사무엘 선지자가 온다는 소문에 베들레헴은 발칵 뒤집혔다. 사무엘 선지자가 얼마 전 사울 왕과 등을 돌렸기 때문에, 그 화가 베들레헴까지 미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였다. 성읍의 장로들이 두려워 선지자에게 물었다.
“사무엘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하여 베들레헴에 이르매 성읍 장로들이 떨며 그를 영접하여 이르되 평강을 위하여 오시나이까”(4).
사무엘이 베들레헴을 찾아온 목적은 오직 하나였다.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울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을 찾으려고 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새의 아들 8형제 중 다윗이 선택 받았다. 처음부터 다윗이 선택받을 그런 존재는 아니었다. 실은 다윗은 부모와 형제 모두에게 무시당한 어린 사람이었다. 그런데 사무엘의 선택 기준은 사람의 시선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었다. 그 중심은 무엇일까?
오늘 주인공은 다윗이다. 결론적으로 보면 다윗의 삶은 평생 하나님으로 젖어 있었다. 다윗은 평화로울 때뿐 아니라, 위기의 순간 항상 하나님을 찾았다. 의로울 때만이 아니라 죄인인 그때에도 하나님을 의지하였다.
다윗이 평생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것은 선한 행실 때문이 아니라, 남보다 큰 공로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진실한 ‘속 삶’ 곧 중심 때문이다. 그가 한 모든 일은 다윗이 한 노력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다윗의 노력 반, 하나님 은혜 반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삶이었다.
다윗의 유언을 보자. 사람은 마지막 순간에 가장 진실하다. 유언에 따르면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같지 아니하냐”(삼하 23:5)는 자부심으로 가득하다. 유언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진지한 말이다. 지금 죽어가는 사람이 말하므로 결코 흘려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두 번 다시 기회 없기 때문이다.
다윗의 유언을 보면 자부심으로 가득하다. 그 자부심은 오만함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겸손과 감사로 채워져 있다. 다윗이 평생 의지해온 믿음의 중심을 느낄 수 있다.
흔히 사람들이 스스로 내세우는 ‘자존심’은 얼마나 그 근거가 허약한가? 적어도 ‘자존감’을 느끼며 사는 사람은 평소 당당하려고 몸부림친다. 그것은 인간적이다. 그러나 진정한 ‘자부심’은 자신에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다.
초대 교회 교부 이레니우스는 이렇게 말하였다. “충만하게 살아있는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성경에 따르면 다윗은 평생 하나님의 공의를 지키려고 애썼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살고자 몸부림쳤다.
다윗에게 범죄와 불의가 없었다는 말이 아니다. 그는 세상이 다 아는 죄를 지은 당사자다. 다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려했던 그의 ‘속 삶’, 곧 중심의 모습은 한결같았다.
2)
본문은 사무엘 선지자가 다윗을 선택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자. 사무엘은 사울 왕에게 이미 정치적 사망선고를 내렸다. 본래 사울 왕의 최대 후견자요, 사울 정권에서 가장 큰 정치적 지분을 가진 선지자 사무엘이 이제 왕을 비판하고, 책망하기에 이르렀다. 사울은 하나님 앞에서 불순종한 사울 임금에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15:22)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속의 중심이 겉의 행실보다 낫다는 의미다.
지금 사무엘은 베들레헴을 방문하여 여전히 살아있는 권력을 대체할 만한 사람을 찾아 그에게 기름을 부어, 장차 왕으로 삼기 위해서 찾아왔다. 선지자는 한 가정을 특별히 초청하였는데, 바로 하나님이 일러 주신대로 이새와 그의 아들들이었다.
아버지 이새는 자기 아들들을 사무엘 앞에 차례로 나오도록 하였다. 사무엘은 이새의 아들들 중에서 누가 하나님이 눈길에 든 사람인지 골라내려고 차례로 면접시험을 치룬다.
맏아들은 엘리압이었다. 사무엘은 장남을 보자마자 마음에 들었다. 그는 준수한 용모의 엘리압을 보고 생각하길, 하나님의 뜻이 여기에 계셨구나 짐작하였다.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6).
사무엘의 면접에서 기준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무엘 자신의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이었다. 심사는 사무엘이 보지만 결정은 하나님이 하신다.
나라마다 취업 시험을 치룰 때 면접 기준이 제각각이라고 한다.
미국에서는 ‘뭘 잘할 줄 아느냐’고 묻는다고 한다.
독일에서는 ‘얼마나 이 일을 했느냐’고(숙련되었느냐고) 묻는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어느 학교를 나왔느냐’고 묻는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아버지가 무얼 하시는 분이냐’고 묻는다고 한다.
사무엘의 기준과 달리, 하나님의 기준은 무엇일까? 사람의 잣대와 하나님의 잣대는 다르다. 성경은 말한다.
“...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7).
사무엘은 큰아들 엘리압, 둘째 아비나답, 셋째 삼마 등 차례차례 일곱 형제를 다 면접하였다. 그러나 누구도 선택받지 못하였다. 하나님이 그들을 택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사무엘은 뭔가 잘못 알았던가 싶었다. 하나님은 분명히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1)고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사무엘은 아버지 이새를 다그친다.
“또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11).
이새의 막내 아들은 누구인가? 지금 그의 이름은 온 세상이 다 아는 이름이지만, 처음에 등장할 때는 무명의 소년이었다. 그의 아버지 이새는 ‘막내’, ‘말째’ 라고만 불렀다.
히브리어로 막내, 말째를 뜻하는 ‘하카톤’이란 단어는 ‘하찮고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란 뉘앙스가 깔린 말이다. 그는 중요한 자리에는 끼지 못하고 빠져야 할 막내였다. 그렇고 그런 집안의 꼬마였을 뿐이다.
예전에 할머니들 이름 중에 ‘아지’란 이름이 있었다. 김아지 할머니, 박아지 할머니 등 시골 교회에 가면 아지라는 이름이 흔히 있었다. 아지는 아기란 뜻이다. 강아지, 송아지, 망아지 하듯, 이름은 있지만 그 이름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딸을 낳은 아버지는 서운한 마음에 그 딸에게 변변한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도 그냥 아지, 곧 아기였다.
막내는 바로 그런 취급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그는 아버지의 아들들 중에서 열외 된 아들이었다. 아버지조차 배제한 말째 아들이었다. 사람들 눈에 보기에도 다윗은 어려서 그리 주목을 끌지 못했을 것이다.
양을 치는 일은 남다른 능력이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다윗은 날마다 들에 머물러 있었고, 집안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아버지 이새와 일곱 형들이 막내를 얕잡아 본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택은 놀랍다. 무명의 존재를 찾아내시는 하나님의 눈길은 공정하다. 성경은 말한다. ‘보라! 비록 어리고, 들에서 양이나 치는 무명의 소년이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선택하신다.’
3)
선지자 사무엘도 그 선택을 인정한다. 다윗은 얼굴이 붉은 아직 어린 소년티를 벗지 못하였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12).
다윗은 아직 사춘기를 벗지 못하여 소녀 태처럼 곱상하였다. 그런데 바로 그런 다윗이 선택된 것이다. 물론 이 모든 일은 여전히 비밀로 감추어져 있고, 단지 이새 가정에서만 아는 일이다.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했던 목동 다윗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 아버지와 형제들에게 둘러싸여 기름부음을 받았다. 형제들의 표정은 어땠을까? 구체적으로 사무엘의 의도를 알 리 없지만, 마침내 막내가 뽑힘을 받은 것이다.
아마 형제들 중 누구도 말째 다윗이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 이새는 물론, 선지자 사무엘 자신에게도 뜻밖의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장차 왕이 되는 이야기는, 또 메시야의 조상으로 불림 받는 이야기는 이 세상에서 존재가치를 모른 채 살아가는 모든 평범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준다. 아버지의 눈에도 들지 않은 아들이 하나님의 눈길에 들었다니, 대단한 반전이 아닌가!
하나님의 눈길에 드는 것은 투표로 결정되지 않고, 외모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니며, 입증된 능력이나 학벌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의 선택은 은혜였다. 무명의 그를 다윗으로 세운 것은 하나님의 선택 때문에 가능하였다.
다윗이야말로 그냥 목동이었다. 다윗의 시작은 그야말로 아주 작은 것에서, 평범한 자리에서 출발한 것이다. 흔히 말하듯 밤마다 피자 배달하는 오토바이 소년에게 보잉 747 비행기를 맡긴 것과 같이 엄청난 일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로, 여호와의 영에 감동된 자가 되었다. 다윗의 삶은 이제 도전의 연속이었다. 그는 역사의 무대에 데뷔하면서 숱한 시련을 겪을 것이다. 사실 아버지의 집에서, 무명으로 지냈다면 그런 도전과 모험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의 집에서 계속 말째로 살면 속은 편했을 것이다.
헬렌 켈러의 말이다. “인생에 과감한 도전이 없다면 그 인생은 아무 것도 아니다. 인생에서 안전에 집착하는 것은 미신에 집착하는 것과 다름없다. 안전이라는 것은 자연 상태에선 존재하지 않는다.”
다윗의 이야기는 일상의 생활, 평범한 삶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무명의 자리에서 나오라, 말째의 안전에서 나오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상의 삶을 잉크 삼아 구원의 이야기를 써나가신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라. 하나님의 눈길을 의식하라.
이제 다윗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의 지위나, 역할에 대한 언급이 아닌 바로 ‘그 이름’이다. 무시당하고 초대받지 못했던 무명의 목동 소년이 드디어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 이름은 이제 구약에서만 848절에서, 신약에서만도 55절이나 기록되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눈길을 의식하며 살아라. 내 고집과 내 이익만을 위해 살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고 인자하신 뜻을 물으면서 살아라. 당장 나 자신의 무명과 무력감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의 눈길 안에 사는 일을 기뻐하라. 하나님께서 나를 무명의 자리에서 그 부르심의 자리로 이끌고 계심을 믿으라.
주님, 나를 붙드소서. 내게 하나님의 영으로 새롭게 하소서!
하나님의 눈길이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 그윽한 은총으로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