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행
밀양에 오래 전부터 교분이 있는 지인이 있다. 지인은 읍사무소 서기로 공직에 입문해 초년에 교육행정직으로 갈아탔다. 젊은 날 야간대학 영문과를 다녀 영어교사 자격을 갖추기도 했다. 이후 공무원의 꽃이라는 5급 사무관에 도전해 보았으나 시운이 맞지 않아 이제는 마음을 접고 6급 주사로 정년을 맞아야할 형편이다. 지인은 몇 해 고향 밀양으로 복귀해 은둔하다시피 지낸다.
지인은 그의 고향 마을인 예림서원 곁에 텃밭을 장만해 농막을 지어 놓고 여가시간을 보낸다. 나는 그간 몇 차례 그 농막을 찾아갔다. 그때마다 아주 특이한 동선으로 다녔다. 한 번은 초동 성만마을에서 덕대산과 종남산을 넘어갔다. 또 다른 경우는 대산 모산마을에서 수산다리를 건너 명례와 오산을 거쳐 밀양강 강둑을 따라 거슬러 올라갔다. 두 번 다 하루를 걸어 간 셈이다.
나는 방학이라 여유로운 시간이고 초등학교 행정실장인 지인은 계속 출근해 근무하고 있다. 지인과 안부전화를 나누다보면 사람이 그리운지 한 번 다녀갔으면 하는 눈치였다. 내가 그리 바쁘지 않으면서도 날짜를 하루 빼는 데도 그리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일월 중순 어느 날 지인을 찾아 무작정 길을 나섰다. 열차나 버스로 밀양으로 바로 달려가지 않고 좀 색 다른 길을 택했다.
도시락을 챙겨 아침 일찍 창원중앙역으로 갔다. 그곳에서 삼랑진을 거쳐 부전역을 돌아가는 무궁화호를 탔다. 내가 내린 곳은 삼랑진역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검세마을 강가로 나가 자전거길을 따라 뒷기미를 향해 걸었다. 생림으로 건너는 강폭에는 대구부산간고속도로와 경전선고속철도 교각이 강심을 가로질렀다. 예전에 운치 있던 강변역인 '낙동역‘이라는 간이역은 사라져버렸다.
예전 삼랑진에서 생림으로 건너는 교량이 두 개였는데 근래 세 개 더 생겨 다섯 개로 늘어났다. 좁은 국도 교량이 확장되었고 대구부산간고속도로 교각도 우뚝했다. 거기다가 경전선 KTX교량까지 강폭이 긴 강심을 가로질렀다. 밀양강이 낙동강으로 합류하는 뒷기미는 낙동강 파수꾼인 요산 김정한의 작품 배경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뒷기미나루에는 민물횟집이 두 곳 있었다.
낙동강 자전거길은 뒷기미 벼랑을 지나 거족마을 앞 밀양강 강둑을 따라 우회하였다. 밀양강이 낙동강에 합수하는 지점에는 민물가마우지가 떼를 지어 헤엄쳐 다녔다. 아마 늦은 아침식사거리를 찾고 있는 모양이었다. 거족마을 앞들엔 비닐하우스단지였다. 강둑 바깥 둔치에는 겨울을 나는 사료작물이 파릇하게 자랐다. 건너편 강둑 너머 들판 멀리는 산기슭으로 마을이 있었다.
거족마을 앞에서 잠수교에 이르는 강둑의 길고 긴 자전거길은 소실점이 나타날 정도로 곧은 일직선이었다. 평일이라 그런지 자전거를 타고 지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평촌으로 건너는 잠수교를 지나 강둑 볕바른 자리에서 도시락을 비웠다. 그제야 밀양 지인에게 삼랑진역에서 밀양으로 걸어 올라가는 즈음이라고 소식을 전했다. 지인은 가까이 오면 다시 연락 주십사고 했다.
상남 들녘으로는 대구부산간고속도로가 지났다. 들녘 가장자리 대흥동마을엔 국립종자원이 있었다. 농업의 근간이 씨앗을 연구 개발하는 시험장이었다. 내가 걷는 밀양강 강둑엔 지방자치단체에서 자전거길을 포장해 차선을 그어 놓았다. 전에 걸었을 때는 흙바닥 자갈길이었는데 이제는 포장이 되어 걷기에 아주 편했다. 강 건너는 임천으로 청학마을엔 부산대학 밀양 캠퍼스였다.
예림다리를 건너 지인과 접선해 예림서원 곁의 텃밭을 찾아갔다. 지인은 닭장에서 계란을 몇 알 꺼내 방문 기념으로 건네주었다. 얼지 않은 파릇한 배추도 두어 포기 캐서 배낭에 담았다. 우리는 시내로 들어 파전 안주로 막걸리 잔을 몇 잔 비웠다. 가족이 건강하고 마음 편히 지내자고 소박하게 바랐다. 그냥 일어나기 아쉬워 차수를 변경해 한 자리 더 하고 창원행 열차를 탔다. 14.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