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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병자호란 중, 강화도 함락에 관하여,"
위의 그림 필자가 군포시 중앙도서관 문예창작실 초대 즉, 제1기 입실 작가로 있을 때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취재 때 기념촬영한 사진이다. 취재 기자가 필자를 가리키기를,
"수리산이 보이는 창작실에서 창작에 몰두하고 있는 소설가 김상락 씨"
라고 필자를 위로, 격려차 높여준 예우(?)였다. 군포시 중앙도서관 문예창작실은 "책읽는 군포" 의 일환으로 도서관장실을 철거하고 수리, 공사하여 오픈했다. 또한 군포시 중앙도서관 문예창작실은 대한민국 공공 도서관으로는 대한민국 최초의 작가실이다.
참고로 책읽는 군포에서는 병자호란에 관하여 한명기 교수께서 2017년 1월 군포시청 밥이 되는 인문학 강의 편에서 열과 성을 다해 90분간 강의한 적 있었다. 깔끔하게 생긴 한명기 교수의 강의는 군포시민들의 반응도 가일층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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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일본의 명치유신 정부가 조선의 군사력 시험 도발인 운양호 사건(운요효 사건)의 후폭풍인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의 문호개방(개항) 후, 봉건적 착취와 외세의 침투에 저항하는 임오군란(임오군사봉기, 임오군변, 임오봉기)과,,,,,,
조선을 청나라의 속국에서 벗어나기 위한 조선 역사상 최초의 정치적 혁명인 갑신정변을 실록 장편 역사 소설로 다루는 봉기의 화승총과 삼일천하의 저자 역사 소설가 여서(汝西) 김상락이다.
아울러 필자의 아호 여서는 충무공 이순신의 자 여해(汝諧)와 필자가 역사의 인물 중에서 가장 존경하고 조선 5대 명재상의 한 분이시며, 임진왜란 초 도체찰사(都體察使)에 중용돼 국난 극복에 헌신 공헌한 풍원부원군 류성룡의 호 서애(西厓)를 참조했다.
류성용은 영의정까지 역임했지만 평생을 청백리의 삶을 살았을 뿐만 아니라 단아한 선비이기도 하였다. 다만, 조선 5대 명재상 중, 유성룡의 수명만 제외하면 나머지 4명의 평균 명줄이 80세가 넘었다.(유성룡 66세로 졸.)
"도체찰사"는 전쟁, 비상 사태 때 삼정승 중에서 임시로 중용되는 임시직이지만, "군정, 서무" 등을 총괄한다. 특히 병서에 밝고 야전병을 지휘해본 경험이 있는 재상을 우선적으로 발탁해야 하지만, 결정적으로 백성들과 장졸들의 신망이 두터운 정승이 맡아야 난국 수습의 첩경.
또한 도체찰사가 중용되면 도체찰사부(군정 임시 지휘본부 관청, 관아)가 설치되고, 부사에 해당되는 부체찰사가 임명되어 도체찰사를 보좌한다.
그리고 별도로 종6품의 종사관이 기용돼 도체찰사를 호위, 보좌하여 군졸들을 이끌고 도체찰사부를 주야로 수직한다. 뿐만 아니라 종사관은 도체찰사와 부체찰사 등 군문의 관료들이 도체찰사부에서 군을 일사분란하게 지휘, 통제할 수 있도록 군사 업무 보조에도 진력한다.
필자는 자신있게 말한다 조선 왕조 중 최고의 도체찰사는 응당 유성룡이고,,,,,, 가장 오만방자 겸 무능한 도체찰사는 병자호란 때 영의정으로 도체찰사가 된 천하의 겁쟁이 중에 겁쟁이 김류(金瑬 1571~1648)였다고,,,,,,
다만, 김류는 임진왜란 때 입지 신립(立之 申砬 1546~1592) 장군과 함께 충주 탄금대에 몸을 던져 순절한 김여물(金汝沕-金汝岉 1548~1592)의 외아들이었다.
김여물이 문과로 출사했지만 병서에 밝고 무예도 출중하여 의주목사(외관직 정3품 당상관 요직)를 역임했다. 또한 담력도 강하고 지략, 무략도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과 군졸들이 믿고 따르는 강직한 성격의 아까운 충신이었다.
이런 김여물의 충정을 김류가 문지르는데 기틀(?)을 잡았고, 손자 김경징(金慶徵 1589~1637)이 강도검찰사(江都檢察使 강화도 수비대장, 정2품. 통상 도검찰사라고도 부르며 강화도 도검찰사, 강도도검찰사 라고도 부른다.)의 직위를 이용해(?) 조부의 숭고한 희생을 떼강도, 날강도 처럼 확실한 노략질로 힘차게 문질러버렸다.(본문에 나옴. 조선초기 체찰사제 연구 라는 양서가 2007년 출간되었다.)
도체찰사에 관해 덧붙이면 1680년 도체찰사에는 남인(탁남)의 영수 허적이, 부체찰사에는 서인 중인 김석주가 임명되고 북벌이라는 얼토당토 않는 명분으로 도체찰사부를 설치했다. 이는 정상적인 도체찰사 중용이 아니라 명백한 불법행위이다,
더 가관은 고종 특히 대한제국 시절에도 도체찰사를 임명하여 왜놈, 쪽발이 놈들을 미친개 때려잡듯 잡았다고 주장하는 위인도 있다. 푸~하~하~하~하~하. 히~히~히~히~히~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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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포시청 밥상머리 북카페"
필자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실록 장편 역사 소설로 다루는 봉기의 화승총과 삼일천하를 집필, 탈고하여 출간한 곳은 "군포시청 밥성머리 북카페" 였다. 이에 대하여는 부연이 필요한데,
군포시, 군포시청은 책읽는 군포(뒤에 책나라 군포도 포함)의 일환으로 시청 청사 출입구에 조그만한 문고가 있었는데 2011년 10월 31일 그곳을 좌,우와 미니 2층으로 확장, 수리하여 개관했다.
필자는 군포시청 밥상머리 북카페 개관 첫날 07시부터 밤 10시까지 그곳에서 봉기의 화승총과 삼일천하의 원고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당시 필자가 군포시청 밥상머리 북카페에서 원고를 쓸 때 김윤주 군포시장과 군포시청 공무원들은 천재비학한 필자가 좋은 작품을 낼 수 있도록 "성원, 격려, 애정" 등을 쏟아부었다.
특히 군포시청 책관련 부서 모 팀장은 필자가 밥상머리 북카페에서 작품 활동을 하는데 조금의 불편이라도 덜어주고자 무던히도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 뿐만 아니라 그 모 팀장은 필자가 군포시를 빛내고 나아가 대한민국을 빛낼 수 있는 역사 소설을 출간해 줄 것을 진실로 바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내에서 모든 역량을 발휘하여 필자를 위해 극진히 극진히 진력 또 진력했다.
거기에다 성균관대학교를 졸업하고 입대한 북카페 모 공익요원도 나름대로 필자에게 조금의 힘이라도 돼 주기 위해 동분서주, 좌충우돌(?)했다.
비단 군포시청 공무원 이외에도 필자가 군포시를 대표할 수 있는 역사 소설을 출간해 줄 것을 간곡히 기원하며 물심양면으로 힘써준 많은 군포시민들의 성원도 무척 뜨거웠다.
필자는 책읽는 군포 시민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가일층 진력하고 힘을 내어 만 7개월(2011년 12월 30일 어머님 장례로 하루 휴무)의 대장정 끝에 군포시청 밥상머리 북카페에서 봉기의 화승총과 삼일천하의 원고를 탈고했고 출판사에 채택돼 출간하게 되었다.
봉기의 화승총과 삼일천하의 출간은 책읽는 군포시, 책나라 군포시에서는 최초의 역사 소설이며, 대한민국 시군구 청사 북카페로도 최초로 출간된 역사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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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김진화 재일학도의용군 겸 무공수훈자 국가유공자"
필자는 픙전등화, 누란지계, 백척간두에 선 대한민국을 구원한 선친께서 짧게 살다가신 피맺힌 통한의 한을 소설로 써 드리기 위하여 1997년 안양시청 공무원을 사임한 후,
필자가 "역사 소설가" 가 돼 선친의 우국충정과 헌신, 봉직, 사명의 일대기를 실화소설로 직접 집필, 출간하여 영구히 위로, 추모코자,
18년의 세월을 07시부터 밤10까지 도서관에서 "역사와 문학, 한문학" 관련 등의 양서 18,000권을 심층, 정독, 연구했고,,, 3년의 세월을 전국 답사와, 역사 탐방, 역사 기행 등으로 우리 역사의 현장 구석구석 곳곳을 두루두루 누비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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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김진화 재일학도의용군 겸 무공수훈자 국가유공자."
본문을 부연키 전, 재일학도의용군(在日學徒義勇軍)이란? 1950년 6, 25 전쟁 때 해외 유학생 학도로는 세계 역사상 최초로 고국 전선에 자원 입대한 642명의 학도들을 가리킨다.
이들 642명의 재외 유학생들은 조국의 부름도 없었으며, 병역의 의무도 없었지만, 풍전등화, 누란지계, 백척간두에 선 고국을 구원키 위해 분연히 봉기하여 제1차에서 부터 제8차에 걸쳐 나누어 모국 전선으로 들어왔다.(1967년부터 전원 국가유공자 정규 공헌 3급 예우와 배우자까지 연금 및 혜택 승계)
필자 선친 김진화(金珍和 1932,10,19~1972,6,5)는 재일학도의용군 중에서도 최연소 나이인 17세였으나, 제1진 82명이 출전할 때 험준한 현해탄을 건너와 조국 전선에 자원 참전하여 대한민국의 자유수호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인생을 송두리째 몽땅 바쳤다.
필자는 재일학도의용군의 아들로 탄생(?)한 것이 너무나 자랑스럽고 가령 진실로 내세가 있다면 다시 아버지의 자식으로 탄신(?)하기를 간곡히 간곡히 바란다.
아버지께서는 비록 단명(1972년 필자 10살 때 운명)하여 아들을 보살펴주지를 못했지만 다음생에서는 장수하여 자식을 극진히 극진히 보살펴줄 것을 확신.(필자에게는 김진화의 아들이라는 자체가 대통령, 국무총리, 교황 보다 더 높은 벼슬이고, 세상의 가장 큰 행복과 부귀영화이다.)
재일학도의용군들의 조국 전선 자원 입대는 인류가 만들어지고 유례가 없었던 자원 참전으로, 제3차 중동전쟁(6일전쟁) 때 이스라엘 유학생들의 고국 전선에 자원 입대보다 무려 17년이나 빨랐다.
이스라엘 유학생들은 정부의 전폭적인 후원과 지원에 힘입어 고국으로 들어왔으며, 거기에다 아랍 연맹 개병신들이 개전 6일만에 이스라엘에게 항복해 버렸다.
고로, 이스라엘 유학생들이 고국 전선에 입대는 했지만 전선에 투입돼 적군들과 전투를 치른 적은 결코 없었다. 이스라엘 유학생들은 영웅호칭과 함께 모두 학교로 복귀했고 어마어마한 특혜를 누렸는데, 조선으로 한산하면 개국 1등 공신 이상의 예우였다.
그렇지만 "개뿔" 재일학도의용군들은 자원 입대 때부터 정부의 무관심과 냉대였다. 전쟁도 3년을 치렀다. 특히 재일학도의용군 642명 중, 150명은 약관의 꽃다운 나이에 피어 보지도 못한 자신의 고귀한 피를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나라에 뿌리며 홀연히 산화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재일학도의용군들의 숭고한 헌신과 희생정신을 기리기는 커녕 철저히 외면했다.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죽든, 병신이가 되든, 넝마주이가 되든, 정신이 어떻게 어디론가 사라지든 아예 안중에도 없었다.
재일학도의용군들이 1967년 국가유공자로 인정될 때까지 국회와 국회의원들의 목숨을 건 반대로 무려 14년의 세월을 비통과 눈물, 한숨으로 얼룩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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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삭동이, 칠삭둥이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한없고도 영원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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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왈, 시경에 이르기를, 부혜생아 모혜국아 애애부모 생아구로 욕보심은(욕보지덕) 호천망극"
필자는 1963년 4월 11일(음) 수려한 풍광을 자랑하고 하늘이 내린 축복의 땅으로 충과 효, 절개, 선비의 고장인, "경북 의성군 점곡면 구암리"(구암동, 구암2동, 실바, 시리바, 증암)에서 김진화, 김난이 사이의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세상이 너무너무 궁금해 어머니 뱃속에서 10개월을 채우지 않고 7개월 먼저 탄생했다. 이른바 칠삭둥이, 칠삭동이로 세상에 나왔다.
고로, 응당 영아기 때부터 너무 허약해 어머니 젖도 제대로 빨지 못했다고 한다.(뭐, 지금도 실물을 보면 무척 부실하고 상태도 엄청 않 좋다.)
생후 80일 무렵 어머니 젖을 먹다가 힘에 겨워 까무러쳤는데 그만 숨을 쉬지 못했다. 동네 할머니, 할어버지, 아주머니들이 모두 달려와 진맥을 해보고 침과 뜸을 했지만 필자는 여전히 숨을 쉬지 못했다. 모두 필자가 죽은 것으로 판명했고 결정적으로 아버지께서도 필자의 죽음을 인정했다.(참, 섭섭하네 섭섭해요 아버지 아직 덜 죽었는데,,,,,)
아버지께서는 필자를 뒷산에 묻어주기 전 막걸리를 한잔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까지 맑았던 하늘에서 시커먼 먹구름이 주마가편, 질풍노로도 몰려오고, 뇌성벽력이 요란하게 울리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전설의 고향 아님) 빗줄기는 금방 굵어졌다. 아버지께서는 할수없이 내일 필자를 묻어주기 위하여 검은 천에 둘둘 말아 건넛방에 두었다.
비는 다음날에도 그치기는 고사하고 폭우로 변해 동네는 홍수가 날 지경이었다. 아버지께서는 오늘 또 필자를 묻어주지 못했고 계속 막걸리만을 드시고 계실 뿐이다.
비는 그 다음날 새벽녘에야 그치기 시작했는데, 지금껏 탁주만 드시고 계셨던 아버지께서는 뭔가 스치는 게 있어 혼잣말로,
"여태까지 비가 내린 것은 우리 불쌍한 칠삭동이가 다시 살아나려고 계속 비가 온 게 아닐까."
라며 건넛방으로 달려와 죽은 아들을 덮어 놓은 검은 천을 확 들춰보았다. 필자는 너무나 지쳐있어 울음 소리를 내지는 못했지만 실눈을 뜨며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필자는 사력을 다해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이고, 아버지, 이 아들은 사흘을 쫄쫄 굶어 사경을 헤매는데 막걸리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던 가요. 지금 배가 고파 죽게 생겼으니 속히 엄마 젖을 주든 아버지께서 먹던 막걸리라도 좀 주시요. 숨넘어 가요, 숨넘어~가."
이제야 살아 있는 아들을 확인한 아버지께서는 다급하게 말한다.
"미안하다, 난 네가 죽은 줄 알고 막걸리만 먹었지 여하튼 다시 살아나줘서 고맙다. 긴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라며 어머님을 불러와 젖을 먹이도록 했다. 창졸간의 일에 어머님께서도 얼마나 당황했는니 젖이 나오지 않았다. 다급해진 것은 아버지였다. 숨도 넘어갈 것 같았다. 발만 동동 구르다 못한 아버지께서는 급기야 큰 방으로 가서 자신이 마시던 막걸리를 가지고 와서 필자에게 말하기를,
"아들아, 엄마 젖이 나올때까지 만이라도 우선 막걸리라도 좀 먹어 볼래."
라며 진짜 막걸리를 조그만한 숟가락에 부어 필자에게 줄 것 같은 태도였다. 보다 못한 어머니께서 말하기를,
"아이고 이, 양반아 죽었다가 사흘만에 겨우 살아난 애기에게 술을 먹여 진짜 죽이려고 하오."
"아니, 뭐, 또 죽으면 사흘안에 다시 살아날 것이 확실한데 뭔 걱정인가."
아버지의 시답잖은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어머님께서는 필자를 안고 젖을 물리자 이제 젖이 나오기 시작했다. 필자가 젖을 먹는 것을 확인한 아버지께서는 꼭두새벽인데도 불구하고 어디론가 부리나케 달려갔다.
다름 아닌 동네 이장집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장 부부의 방으로 바로 뛰어들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사태(?)에 이장 부부는 멍하게 아버지를 바라 볼 뿐이다.
아버지께서는 이장 부부의 황당함은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동네 마이크를 잡고 있는 힘을 다하여,
"우리 아들 다시 살아났다. 불쌍한 내 아들 칠삭동이 다시 살아났다. 내 아들 칠삭둥이 사흘만에 부활했다. 내 아들이 곧 예수다. 내 아들 상락아 다시 살아나줘서 너무너무 고맙다."
아버지의 어마어마하고도 무시무시한 굉음에 동네 주민들은 이른 새벽이지만 집구석에서 일어나지 않을래야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날이 밝자마자 동네 마을 큰 잔치를 3일 동안 열었다고 한다. 뭐, 3일간 잔치를 했어도 필자가 먹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되레 북새통에 어머니 젖도 잘 먹지 못해 진짜 굶느라 생고생했다. "니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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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서는 안산 지역사 연구소(지역사 연구 모임) 준회원으로 가입 인사 후, 첫 게시글을 올리는데 병자호란 때 강화도 함락을 간략하게 피력한다. 병자호란과 관련된 강화도 함락은 무궁무진하지만, 카페, 블로그는 제목의 핵심만 부연하는 게 원칙, 너무 길고 창황하면 마이너스.
"본론으로"
제목 : 병자호란 정축하성 강화도 함락 검찰사 강화유수 장신 도검찰사 김경징 김류 백마산성 도체찰사 병자호란 호란.
때는 1636년 12월 2일(음력) 후금을 건국한 누루하치의 여덟째 아들 홍타시(崇德帝 1592~1642)는 국호를 청나라로 고치고 용골대(龍骨大 1596~1648 타타라 잉굴다이)와 마부대(馬夫大 ?~?)에게 기병 7,000명을 내어주며 꽁꽁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도록 했다.
뒤이어 청국군의 대규모 병력이 압록강을 건넜지만 얼어붙은 압록강은 조선을 지켜주는데 아무런 힘이 되지 못했다. 이른바 병자호란이다. 청군 총 병력 13만 대군 조선 침범.
마부대와 용골대 등 청군 수뇌부 등은 의주 부윤 임경업(林慶業 1594~1646) 장군이 사수하고 있는 백마산성(白馬山城)을 우회하여 한양으로 쳐내려오기 시작했다. 조선의 봉수대는 유명무실했고 조선 방어군은 코배기도 보이지 않았다.
백마선성은 난공불락의 청옹성이라는 것을 청군들도 익히 알고 있는 바로, 임경업 장군이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용천검(龍泉劍)을 휘두르며 죽기를 각오하는 싸울수는 있었다. 그러나 성문을 활짝 열고 나아가 한양으로 달려가는 청군의 기병 부대 후미를 공격하기에는 전투력이 부족했다. 의주 부윤은 종2품의 외관직 관아이고 임진왜란 때까지는 한 단계 낮은 품계인 목사(牧使 정3품)가 다스렸다. (예시, 의주 목사 권율)
혹, 청군의 내침을 우려해 인조와 서인들은 고향이 낙안이며 낙당(洛黨)의 영수인 낙흥부원군 낙서 김자점(洛興府院君 洛西 金自點 1588~1651)을 도원수(都元帥 정2품 군권 총괄)로 임명하여 몇 천 군사를 내어주며 북삼도(안주)에 진을 쳐 청군의 침략을 방비토록 했다. 그러나 김자점은 청군의 매서운 공세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퇴하였지만 그래도 김자점은 청군의 침략을 봉수와 장계로 알리는 임무(?)는 완수했다.
(참고로 김자점은 고향이 원주이고 원당(原黨)의 영수인 원평부원군 원두표(原平府院君 元斗杓 1593~1664)와 당파싸움을 했는데 같은 서인(西人)으로는 "원당 낙당" 으로 가장 살벌한 당쟁을 했다.)
청국 기병부대가 평양을 지날 무렵 인조와 조정은 보고를 받았고 모두 경악했다.
다급해진 인조는 우선 조정을 전시체제로 전환하면서 영의정 김류를 도체찰사로 임명하고, 공조판서 심기원(沈器遠 ?~1644)을 유도대장(留都大將 임금이 몽진 후, 도성 수비 대장)으로 삼았으며, 신경진(申景縝 1575~1644)은 호위대장, 훈련대장, 포도대장 등 3영대장을 맡고 있었는데 인조를 주야로 호위했다.
인조는 영중추부사 윤방(領中樞府事 尹昉 1563~1640)을 묘사제조(廟社提調)로 삼고, 우의정을 지낸 김상용(金尙容 1561~1637)과 동부승지(同副承旨 공조 업무) 한흥일(韓興一 1587~1651) 등에게 신주(神主)를 맡기고,,,,
소현세자빈 강씨(昭顯世子嬪 姜氏), 봉림대군(鳳林大君 1619~1659, 훗날 효종) 등과 함께 속히 강화도로 피난가도록 조처했다. 특히 세자빈 강씨는 매서운 겨울 바다 추위에 강보에 쌓인 어린 원손 (元孫) 경선군을 안고 피신하느라 무척 힘들었다. 소현세자빈 강씨를 강빈 또는 민회빈 강씨(閔懷嬪)라고도 부른다.
여기에서 인조와 서인들은 병자호란 참패의 첫 패착을 저지르는데 한성부 판윤 김경징(金慶徵 1589~1637)을 강화도 수비대장 즉, 강화 도검찰사(都檢察使. 검찰사)로 임명하고 이조참판 이민구(李敏求 1589~1670)를 강화부검찰사로 삼아 강화도로 파견하였다.
인조는 김경징을 강화도검찰사로 기용하면서 김류에게 물어보았는데, 김류의 대답은 가관이었다.
"예, 전하, 신의 아들이라 특별히 아뢸 말씀은 없지만, 남들이 하는 만큼은 강화도를 잘 지킬것이옵나이다."
뭐, 그 임금에 그 신하가 맞는지 모르지만, 병법을 몰라도 이렇게 몰라서 되겠는가. 전쟁, 적군과 교전 중, 지휘관을 교체해서는 안되며 전선에 나가 있는 장수는 군왕의 명령이라도 여러 상황 등을 고려해서 때에 따라서는 거부해도 무방하다는 병법의 기본도 모르는가.
그사이 청군은 질풍노도로 달려와 급기야 12월 14일에는 홍제원(洪濟院)에까지 쳐들어와서 진을 쳤고 청군은 인조가 강화도로 도주하지 못하도록 양화진(楊花津)을 봉쇄했으며, 홍제원에서 대궐까지는 지척으로 한나절 걸음이다. 중신들의 목숨이 명재경각이었다. 양화진은 당시 강화도로 가는 군사적 요새지였다.(또한 홍제원은 인조와 서인들이 반정 혁명의 거병 장소였고, 반정을 성공시킨 역사적 사건으로는 선조의 손주가 보위를 계속 승계했고, 당파로는 동인의 뿌리에서 태생한 북인 중에서도 대북파를 정계에서 완전히 축출시키고 서인들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이때 이조판서 지천 최명길(崔鳴吉 1586~1647)은 임금과 조선을 구하기 위하여 혈혈단신으로 홍제원 적진에 뛰어들어 마부대, 용골대 등 청군 장수들과 술판을 벌이는 시간작전을 펼쳤다. 이 시간을 이용해 인조와 소현세자, 비빈들과 영의정 김류 등 조정 중신들은 모두 수구문(水口門)을 통하여 남한산성으로 이어했다.
이 소식을 들은 홍제원 청군 진영에서는 조선국 이조판서 최명길의 목을 베자고 강력하게 건의했으나, 용골대가 참모들에게 준엄한 목소리로,
"무슨 소리를 하는가 조선국 이조판서 합하께서는 단신으로 친구인 나를 찾아왔다. 설령, 그사이 조선 국왕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고 해도 여기에서 나와 술자리를 함께하는 대감이 어떻게 알겠는가. 또한 우리가 조선으로 온 것도 화친을 맺기 위해 왔다는 것을 망각해서 되겠는가. 이조판서 합하를 정중히 뫼셔드려라."
결국 이조판서 최명길은 대임을 완수하고 남한산성으로 합류했다. 최명길이 어찌 역적인가. 남한산성에는 13,000명의 군사와 2개월치 정도의 군량 밖에 비축되어 있지 않았다.
한편 도검찰사의 신분으로 강화도를 책임지고 있는 김경징은 강화도 수비에는 뒷전이고 허구헌날 술판을 벌이며 계집질에만 진력하고 있었고, 부검찰사 이민구는 도검찰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갖은 아양을 떨며 부검찰사의 위세를 마음껏 뽐내고 있었다.
기존 강화유수 장신(張紳 ?~1637)은 청군의 내침을 어느 정도 예견하고 강화도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는데 조정은 공연히 악수(惡水)들 두고 있었다.
뭐, 강화유수나 도검찰사 등이 모두 오랑캐를 물리치겠다는 굳은 마음이면 누가 상급자가 되든 무방하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강화도는 강화의 지휘권을 놓고 김경징과 장신이 죽기 살기로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결국 강화 유수 장신은 주사대장(舟師大將)으로 밀려났다. 멀쩡한 지휘관을 교체하고 무능한 지휘관을 임명하는 꼴이었다.(역사 기록이 도검찰사 에 관한 것은 없고 검찰사 라고만 기록돼 있다. 그렇지만 역사 소설, 역사서에는 강화도 수비대장 김경징의 직위가 "도검찰사" 로 나오고 있다.)
그럼 김경징과 장신 누구인가. 김경징은 영의정 김류의 외아들이고 김류는 임진왜란 때 충주 탄금대에서 신립(申砬 1546~1592) 장군과 함께 순절한 김여물(金汝沕 1548~1592)의 장자이다. 또한 앞에서 말한 3영대장 신경진은 신립 장군의 아들로, 김류와 신경진의 사이는 남달랐다.
장신은 인조반정 때 훈련대장을 맡고 있는 이흥립(李興립 ?~1624)의 사위로 장인이 대궐의 내응 세력이었고 장신이 반정에 가담하지 않았다면 인조반정을 성공시키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또한 장신의 형이 장유(張維 1587~1638)이며 효종의 국구(國舅 장인)이다.
참고로 도검찰사는 임시직이지만 정2품으로 할당 지역에서 전권을 행사하고, 부검찰사는 종2품으로 도검찰사를 보좌하며, 강화유수도 종2품이다.
어린 봉림대군의 눈에 보아도 강화도의 수비가 너무 허술해 보여 도검찰사 김경징에게 간청하자, 김경징의 답은 가관이었는데,
"대군 마마, 심려 놓으시옵소서. 제가 강화도를 지키고 있는데 오랑캐 놈들이 날아서 이곳으로 쳐들어오겠습니까. 또한 저의 아버님께서 주상전하를 뫼시고 남한산성을 지키고 있는데 감히 오랑캐놈 따위가 범접을 하겠습니까?"
뭐, 물론 김경징의 말대로 오랑캐놈 따위가 감히 뭘 어찌 못하면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그 사이 청국군은 뗏목을 만들어 강화해협을 건널 준비를 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청군은 김경징과 장신이 지휘권을 놓고 싸우느라 군사력이 와해된 것도 익히 알고 있었다.
드디어 청군들은 강화해협을 가로지르며 뭍으로 상륙했다. 강화도는 즉시 아비규환이 되었다. 강도(江都, 강화도의 옛말)는 하늘이 내린 천험의 요새로 조금만 방비하면 지킬 수 있지만, 강도(强盜)들에게 떼강도짓을 당해버렸다.
수군이 무너진 강화도는 무방비나 다름없었고, 청군들은 단숨에 강화산성을 무너뜨리고 봉림대군, 세자빈 강씨, 비빈과 주요 인물들을 모조리 체포했다. 그것도 모두 도륙을 당할 뻔했으나 봉림대군의 침착한 기지로 죽음을 면했다.
이때 김상용은 청군들이 물밀듯이 강화산성으로 쳐들어오자 뒤늦게 강화도로 합류한 김익겸(金益兼 1614~1637)과 손주 김수전을 껴안고 화약고에서 자폭으로 순절했다. 김상용은 척화 충신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친형이다.(참고로 이 화약고에는 청군의 침략을 염려하여 화약 4천 근을 1달 전에 강화도로 운반한 것이었다.
(또한 의병장 권순장과 윤선거도 강화 성문을 수비하고 있었는데 강화산성이 청군들에게 함락되자 권순장과 윤선거의 아내 등은 모두 자결했다. 그러나 윤선거는 성을 가까스로 빠져나와 목숨을 건졌는데, 이는 훗날 서인들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른바 회니논쟁, 회니본말, 윤선거 묘갈명, 윤선거 묘비문 등이다.)
또한 강화도의 웬만한 아녀자들은 바다로 뛰어들었는데 청군을 원망하며 죽어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모두 김경징을 원망하며 숨을 거두었다. "김경징 이놈", 김경징 이놈"
고로, 강화도는 조금만 방비하면 청나라 백만대군도 쉽게 넘볼 수 없는 곳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강화도 갯벌에는 "붉은 나문재" 즉, "경징이풀"(김경징이 풀, 김경징이풀)이 자라고 있을 정도로 당시 참혹함을 생생하게 전해 주고 있다. 또한 그때 청군의 포로가 된 사헌부 장령 정양(鄭瀁 1600~1668)의 "강화도 함락 참화 수기"에도 강화도의 아비규환의 참상을 너무나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김류의 부인 "진주유씨" 와 김경징의 처 "고령박씨" 즉 고부도 바다에 몸을 던져 자결했지만, 김경징은 강화산성이 함락되자 어머님과 부인의 죽음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배를 타고 도망쳤다. 김경징이 얼마나 빨리 도주했으면 청군들이 감탄(?)할 정도였고, 장신도 군선을 이용해 달아났다.
이 소식은 남한산성에서 청군에게 겹겹히 포위되어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는 중신들과 인조에게도 전해졌다. 1627년 정묘호란에 이어 병자호란 발발 원인과 인조대왕이 삼전도(三田渡)에서 홍타시에게 항복하게 된 사유는 여러가지 등 무척 많지만 며느리와 아들이 포로가 되었으니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
역사는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 공방전(1월 9일~1월 24일)으로 패배한 사건을 "삼전도의 굴욕, 치욕," 또는 정축하성(丁丑下城)이라고도 부르는데, 문자 그대로 정축년에 남한산성에서 59일만에 성을 나왔다 라고 한다. 실제 남한산성에 들어가 버틴 기간은 45일이다.
필자 견해 아전인수(我田引水) 식의 역사 해석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환골탈퇴의 심정으로 잘못된 부분은 솔직하게 시인하는 역사야 말로 후세의 역사를 경계하는 일침이다.
또한 애사당초 싸움이 안되는 전투였다. 청군은 무시무시한 홍이포(紅夷砲)를 보유하고 있었다. 거기에다 남한산성을 구원하러 달려온 조선의 근왕병은 전라도 병마절도사 김준룡(金俊龍 1586~1642) 장군만이 광교산 전투에서 청군 10,000명과 홍타시의 사위 양구리를 사살하고 승리했을 뿐 모두 참패했으며,,,, 김경징과 장신 처럼 지휘권을 놓고 자중지란(自中之亂)으로 군사가 모두 왜해되기도 했다.
특히 쌍령 전투에서 경상좌도병마절도사 헌완(許完 1569~1637)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군 조총 부대 40,000명은 청군 단검부대 300명에게 완전, 완전, 박살, 박살, 개박살이 났다. 허완은 참패의 책임을 지고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하였다.
전란 후, 조정과 인조는 김경징은 사사(賜死)하고, 장신은 옛 공로를 감안해 자진토록 조처했다. 이민구에게는 유배형에 쳐했는데, 무려 13년이었으며 1649년에 복직되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다음편에는 안산시와 관계가 있는 김여물 장군 묘 및 신도비에 관하여 역사 탐방으로 부연하고,,,
이후 부터는 조선의 4대사화 즉,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에 관하여 8회에 걸쳐 게시하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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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