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산행지에 정선 노추산이란, 이름도 성씨도 생소한 산이 계획 되어 있어 호기심반 궁금반의
심사로 방부를 드리며 아마도 노쇠한 가을산 이란 의미려니 했었는데 웬걸 알고 보니 참으로 드물게도
산 이름을 유교에서, 그것도 공자의 노나라와 그의 제자 맹자의 추나라에서 한 글자씩을 각 각 따 왔다고 한다.
어렵게 살던 예전에 공부 열심히 하여 의사나 약사 면허를 딴 여인네의 남푠되는 분은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남의사나 남약사가 아닐 경우엔 십중 팔구 약국 셧터맨 노릇이나 하는 고등 놈팽이 임에 틀림 없다.
조선 시대에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한량 이라고들 했었는데 문무와 더불어 풍류를 즐기며 유유하게 살아
가는 좋은 풍모의 한량들을 사실은 나라에서 은근히 조장 하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과거에 급제하는 숫자는 극소수이고 설령 급제를 하였어도 등용 또한 어려운지라 술한잔 걸치고 한량 노릇이나
하다가 병화 같은 외적의 침공이 있을 시 미국의 주방위군이나 대한민국의 향토예비군들 처럼 최우선적으로
징집할 수 있는 양질의 군 동원병력 이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집에서 예폔네 눈치나 슬슬 보면서 밥을 얻어 먹는 사람들을 대개 공처가니 경처가니 하면서 부르는데
경기고와 서울대를 나온 수재였던 전 경기도지사 손 학규씨도 운동권에 몸을 담았던 시절 경찰에 쫒기느라
생업을 할 수가 없어 약사인 부인이 아마도 집안살림을 꾸려 나갔었던 가 보다. 이 손 지사님의
유머에 의하면 자신도 한 때는 마누라 등을 쳐 먹고 사는 등처가 였었다고 한다.
정선 구절리에서 스타트를 끊는 에이팀을 뿌린 느림보 리무진이 시동을 걸 무렵에야 의자 밑에 깊숙히
틀어 박았던 대가리를 빼꼼히 내 밀어 본다. 심장에 스텐스를 박은 사람들 처럼
한 해 두 해 나이를 먹으니 점점 더 소심해 지나 보다. 산도 산 이려니와 매몰차게 불어 대는 강원도 칼바람에
청마 유 치환님의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질러 대고 있는 깃발들의 위세에 눌렸기 때문이다.
만사 젲히고 삐이팀 최후미 돌격대장의 소임이나 충실히 수행코져 작심을 하곤 노추산 모정탑이 있는
배나드리 쪽으로 향하는 느림보 리무진에 몸을 깊숙히 담구어 본다.
노추산에는 원효 대사와 요석 공주 사이에서 태여 난 설총과 강릉땅 율곡 이이의 위패를 모신 이성대가 있다고
한다. 두 분 모두 이곳 노추산에서 공부한 인연이 있어 그러한 이름으로 불리워 지고 있는데 오늘은 이곳
노추산이 정선군 여량면과 강릉시 왕산면의 경계에 걸터 앉은 산 이므로 문선공 이이 선생님을 집중 탐색해
보도록 하겠슴다. 우선
율곡 이이 하면 떠 오르는 생각이 임진왜란을 대비한 십만양병설인데 역사학자 이 덕일님을 비롯한 여러분들의
일관된 말씀에 의하면 조선왕조실록 어디에도 율곡의 문집 어디에도 십만양병설이 나오질 않는다는 참으로
불편한 진실이 있다고 한다. 다만
같은 서인 이면서 제자 격인 우암 송 시열의 글에 이 십만양병설이 나오는데 사실은 임란의 징후는 너무나
확연하여 알만한 사람들은 다들 알고 있었던 사실이고 심지어는 왜놈들이 대마도주를 통한 공식 외교문서에
정명가도 즉 명나라를 칠려고 하니 길을 빌려 달라는 표현을 썼었다. 선전포고나 다름 없다.
우암 송 시열이 율곡 이이의 행장기를 적을려고 드니 우선 율곡의 아버지나 이미 몰락한 집안인 그 할아버지에
대해선 쓸 말이 없는 지라 과거에 아홉번이나 장원급제한 구도장원의 수재 율곡의 당위성을 부각 시키기 위해
어머님인 신사임당을 현모양처의 대표적인 인물로 만드느라 이 분의 당대 최고의 여류화가 였던 천재적인
예술성에 대해선 오히려 그늘을 지우는 우를 범한다.
고액권인 오만원권의 인물 도안으로 신사임당이 낙점되었을 때 여성단체에선 현모양처로서 가부장적 제도에
적합한 여성을 채택함은 오히려 여성상에 별반 좋은 일이 없다며 반대를 했고 또 한편에선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한 분이 아닌 현모양처를 선택함은 또한 옳은 일이 아니다며 반대를 한다. 문제는 신사임당은
사실 부부애가 돈독했던 열녀도 아니였고 명필 한 석봉이나 맹자의 어머님 처럼 자식 교육에 많은 신경을 쓴
사람은 더 더욱 아니였다고 한다. 슬하의 팔남매를 방목하며 키웠다는 것이 더 어울리는 표현이라고들 한다.
오만원권 뒷면을 보면 매화도 한폭이 실려 있는데 이 그림을 그린 이도 바로 신사임당의 따님이신 매병이라는
분 이시다.
진주 촉석루에서 왜장을 끌어 안고 산화 하신 논개 누님이나 아우내 장터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온 몸을
불살랐던 유 관순 누님이 자꾸만 생각 난다.
신사임당이 워낙 출중한지라 친정 아버님이 출가를 시키지 않고 오히려 사위를 불러 들여 율곡의 아버님을
강릉땅에서 물경 이십년이나 데릴 사위 노릇을 시키는데 율곡의 부친 덕수 이씨 이 원수는 공부엔 별 관심이
없이 한량 노릇이나 하다 오십이 넘은 나이에 음직으로 즉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쨤쨔미로 등용이 되는데
절에 들어 가서 십년 정도 열심히 공부하고 나오겠다던 율곡의 부친이 금새 돌아 오자 이럴 바엔 내가 머리
깎고 절에 들어 가서 중이 되겠다고 난리를 치는 신사임당 위세에 눌려 공부하는 흉내 정도를 냈었는 가 본데
사실 공부 잘 하고 인물 반반한 것도 모잘라서 신사임당 처럼 친정 부모님이 재산 마져 낙낙하게 갖고 있는
여자 만나면 삼시 세끼 밥 걱정 아니 한다 뿐이지 사는 재미는 그져 그럴 따름이라고 한다.
70년대 초반 엘리베이터가 드문 시절 지꿈 병석에 있는 재벌 회장님이 본사 사옥 엘리베이터 걸과 눈이 맞아
딴살림을 차리게 되자 지성적이며 다소 쌀쌀한 기운을 풍기는 재벌 사모님이 이 엘리베이터 걸을 호출하여
꿇어 앉히곤 거두절미하고 아파트 여러 채를 살 수 있는 당시로선 거액인 오천만원을 현찰로 줄 터이니
불문곡직하고 떨어 지라고 하니 눈물을 떨구며 종아리의 스타킹을 쥐어 뜯던 이 엘리베이터 걸이 살포시
고개를 들며 하는 말이 오억원을 줄 터이니 사모님이 뒷방으로 물러 서면 안돼냐는 것이다.
율곡 부친 이 원수님도 신사임당 처럼 천재성을 지닌 팔방미인과 무신 재미가 있었겠으며 이룬 남편을
지극 정성으로 잘 모실 얼 빠진 여인네는 또 어디 있냐는 것이다. 두 분의 가상대화나 함 들어 보죠 뭐.
사랑하는 어부인! 뜨락엔 뀌뚜리 울고 달님도 휘영청 밝으니 부인 배 위에 복상해서 잠시 엎드려 있다가 금새
내려 오면 안 대니껴?
공부나 열심히 하소.
대가리 속엔 온통 그시기 하는 생각 빡엔 아무 생각도 안 나니더.
벼루나 붓 같은 문방사우와 혼인 했다고 생각하면서 살면 대니더.
글을 쓸려고 벼루에 묵을 갈려고 하면 벼루는 당신 히푸짝으로 보이고 히푸짝에 물을 흥건히 붓고 묵을
가노라면 신혼초에 절구방아에 떡 치던 생각만 나는데 공부가 어예 되니껴?
이 원수님은 나이가 한참 어린 주막 작부 권씨를 만나서 간간이 재미나 보면서 살았는데 젊은 나이에 임종을
맞이 한 사임당께서 우리 둘 사이에 이미 팔남매를 보았으니 재취 즉 새장가를 가서 배 다른 자식을 놓게 되면
집안이 시끄러우니 절대로 재혼만은 하지 말라고 했지만 작부 출신인지라 술이 거하게 취하면 술 쿠세(주사)가
몹시 심한 권씨를 아내로 맞이 한다. 나이가 율곡의 형인
큰 아드님과 비슷하니 집안 꾸석 조용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노추산 자락 계곡변엔 고 차 옥순 할머니가 물경 26년에 걸쳐, 지극한 정성과 공을 들여 쌓은 3천 여기의
모정탑이 서 있다. 집안의 우환 땜에 고심을 하던 차에
현몽한 산신령의 계시를 받고 쌓았다고 하는데 진안 마이산이나 치악산 비로봉의 거탑들은 높이가 높아 돌을
쌓아 올리면서 사다리를 사용케 되는데 어머님의 마음이란 모정탑은 사람의 키높이 전후라 오히려 정겨운
느낌을 준다. 차 할머니의 지극정성의 염력을 빌리기 위해 그리고 좀 더 계곡쪽으로 내려 가서 서 있는
율곡 선생의 구도장원비 땜에 입시철이면 많은 분들이 이곳을 찾는다고 하는데 조선시대에도 과거를 보는
유생들이 급제를 위한 주술적인 의미에서 이곳 노추산을 찾아 율곡의 구도장원비에 인사를 들였다고 하는데
양반 행세 하는 이놈의 유생들이 이곳 강원도 산꼴짝에 와서 감자바우들에게 울매나 패악질을 많이 했던지
구도비 글자를 정으로 쪼아선 비 자체를 땅에 묻었다가 다시 찾고 또 유실되어 찾고 보니 빨래돌로 사용하고
있더란 것이다. 양반들의 횡포에 진저리를 쳤을 이곳 양민들을 생각하며
계곡변 주차장에 세워 둔 느림보 리무진 옆에서 비닐 쉘터를 뒤집어 쓰곤 뒷풀이를 설렁 설렁 끝내고 차 위로
올라 오니 우리 느림보 리무진 옆으로 빨간 색깔을 칠한 승용차에 빨간모자를 쓴 아마도 산불감시원 아니면
동네 자경단원 처럼 생긴 중 늙은이 한사람이 차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차유리만 빼꼼히 내리곤 호령을 한다.
남들이 버린 쓰레기를 덤태기 써서 몽창 우리차로 끌어 올리면서 노벨 문학상에 두어번이나 노미네이트
되었던 내 시 한수가 갑자기 떠 오른다.
베적삼 흠뻑 적시며 콩밭 매는 칠갑산 여인네의
가슴은 금방이라도 쏟아 내릴 듯 한데
속고쟁이 벗어 서캐(이)를 잡는 강원도 정선땅 주막집 작부 아랫도리는
산비탈 깡냉이밭만 매서 그런지 비탈(찐짜)이 졌구나.
구도장원비 보러 왔던 한량놈들 등살에 잇빨을 갈던 어느 노인네의
후손은 산불감시원이 되어 적폐 청산을 하느라 분당 글뱅이들만
개 잡듯 호령 하누나.
새삼 부처님이 말씀이 떠 오른다. 일체무상이라고 세상은 변하고
또 변하는 것이 세상인 가 보다.
탄천변에서 소심한 새가슴 돌삐 드립니다.
첨언 : 우리 느림보의 강 대장님 시댁이 포천 이신데 율곡 이이 선생님이 어린 시절 이곳 포천 율곡리에
살았기 때문에 호가 율곡이 되었고 신사임당이 친정 어머님이 홀로 계신 이곳 강릉땅 오죽헌에서
자수나 그림에 몰두할 수 있었음은 아이러니컬 하게도 한량 같은 남편을 만났기 땜에 그만큼 운신에
여유가 있었단 것이다. 그리고
신사임당이 남편과 오래도록 떨어져 지낸 것을 비롯해 현모양처와는 거리가 멀다는 불편한 진실은
돌아 오는 차 내에서 경자 언니의 입을 통해 전해 들은 것이 사실입니다.
충청도 광천땅에서 온 새우젖 촌처녀라고 장난 삼아 놀려 댔던 일 이번 일을 기화로 고개 숙여 정중히
사과 드립니다. 사람이 셋 모이면 그중에서 반드시 스승될 분이 있다던 옛 선인들의 가르침을 다시
한번 더 가슴에 새겨 봅니다. 경자 언니의 가르침의 댓가로
힘들여 까서 갖고 간 의성 육쪽마늘을 토종된장과 함께 진상해 올렸더니 마늘 다섯통 분량을 순식간에
해 치우더군요. 흐 흐
첫댓글 노추산 정상을 포기하신 돌삐님께서 이번에는 어떤 얘기꺼리를 쏟아내실까..
아마도 소재가 궁하시겠다..내심 걱정이었는데
웬걸 ..평소보다 더 긴글로 노추산 소감을 적어 놓으셨군요.
무엇 하나 예사로 보는 일이 없는 돌삐님께서
노추산 자락의 모정탑을 어떤 마음으로 보셨는지..
실로 가슴 뭉클한 감동이 전해져오는 현장이었습니다.
여자는 약하되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이 여기서도 검증되는 모정탑..
정상을 포기하셨지만 더욱 훈훈한 노추산 산행을 하셨습니다.ㅎ
돌삐님 글 뽄세가 보통이 아니십니다^^
한 한량 하신분 같소이다...ㅋ
감기로 노추산행엔 불참했는데,담주에는 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독자가 많으십니다. ㅎ
뚜벅뚜벅 걷는 폼새가 보는것 같으면서 안보고,보지 않는것 같으면서 보시는 돌삐님의 도력에 찬사보냅니다
난 긴글은 끝까지 잘 않읽는데 돌삐님글은 다 읽지요
재미있게 잘 읽고 갑니다
야,워낙 긴 글이라 읽기도 힘든데,또 첨언까지..후~~글쓰기가 원채 힘든일인데도 돌삐님은 글이나 입이나 유창유수.고 .양주동박사의 후예인가보다. 그는 입이 둘이라 내가 말을 잘할수밖에 없다고했다. 돌삐님은 입은 물론
모든게 두개씩..그래서 늘 하단부는 냄비얘기가 꼭 첨부되니까 ~~
긴 좋 은 글 잘 읽 어 습 니 다
돌삐님 글 뽄세가 보통이 아니십니다^^
한 한량 하신분 같소이다...ㅋ
감기로 노추산행엔 불참했는데,담주에는 뵙도록 하겠습니다
올해는 노벨상 꼭 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