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잔기술로 쌓아올린
전업 소설가의 맵싸한 문학적 성취
우리에게 최민석 문학의 특징은 ‘반전’과 ‘반복’ 그리고 ‘변화’다. 한 방향으로 용의주도하게 글을 몰아가다 엉뚱한 결론이 빠르고 단호하게 내려진다. 이 반전은 독자의 예상과 정확히 엇박으로 반복된다. 주제의 경계 없이 독자가 배를 (충남) 부여잡고 웃는, 부여에 가서 읽으면 더 재미있는 글을 써낸다. 그의 여행기 역시 다르지 않다. 다만 그의 여행기를 모아 보면 각 여행기가 씨줄과 날줄로 이어지며 하나의 소설집이 된다. 비슷한 상황이 어떤 에피소드에서는 비장한 느와르가 되는가 하면, 허탈한 웃음으로 기대를 박살 낸다. 멕시코 타코에 바르는 소스 종류만큼이나 각자의 에피소드가 다양한 맛을 뿜어낸다.
“거기에 산이 있으니까”라는 격언으로 시작된 한라산 등반의 목적은 폭설, 우동과 막걸리 앞에서 속절없이 묻힌다. 백록담은 보지 못했어도 산행의 이유는 알아낸다. 맥주 기행 중 최고의 스폿이었던 아이리쉬 펍 공연 도중, 저자는 가장 땀 흘려 써서 가장 빠르게 실패한 소설을 떠올린다. 하지만 공연이 끝남과 동시에 실패의 번민도 미련 없이 끝낸다. 숀 코네리를 그리며 미국 사막 한가운데를 질주하다 애매한 자동차 좌석에 앉은 탓으로 자신의 ‘남성적 상징’이 없어지길 기원하면서, 무릇 삶의 재미는 결과가 아닌 과정에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픽세이(픽션+에세이)’라는 전무후무한 장르를 만들어낸 기고문은 ‘사건명’ 시리즈로 묶었다. 여행 에피소드에 소설적 상상력을 가미했다고 하는데 그 사건들은 상상 이상으로 비범하다. 문학적 고뇌와 생산을 위해 떠난 콜롬비아에서 맥주를 사려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이 되고, 이탈리아 여행에서는 이름을 밝힐 수 없는 국내 로커와 함께 마피아의 추격을 받는다. 멕시코시티에서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생리현상과 미국 대통령으로 인해 국제적 굴욕을 겪기도 한다.
여행기의 전형적 특징인 그림 같은 광경 묘사, 아름다운 헌사와 시적 찬양은 이 책에 없다. 다만 저자는 우리가 눈을 팔기 좋은 광경 때문에 놓치는 장면들, 카메라 렌즈 바깥에 있는 날것의 문화와 생활을 글로 찍어낸다. 용감한 도전정신과 문학적 상상력으로 인해 저질렀던 ‘하지 말아야 할 일, 만나지 말아야 할 상황’에 대한 진지한 조언은 덤이다. 어떻게 보면 가장 극사실주의 문학에 가깝다.
여행이란 더 깊이 있는 글을 위한 예행연습,
더욱 극적인 다음 여행을 위한 여행연습이다
전업 소설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정기적으로 창조를 ‘생산’해야 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창조는 공산품마냥 규칙적으로 만들어지지도 않는다. 전업 소설가인 저자는 최대한의 창조를 위해 주5일제로 정기적 생산 시간을 지킨다. 그 사이사이엔 맥주와 넘치는 사랑에 빠졌고, 음악과 산책을 즐겼다. 하지만 그에게 가장 무기는 여행이다. 소설과 여행은 새로운 가상의 공간에 던져져 새로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 닮았기에.
일명 ‘구라 문학’의 창시자인 저자는 성실한 이야기꾼으로 근면히 살아가기 위해 ‘여행지 창간호’라는 약속을 내걸었다. 다만 ‘2호’가 나올 확률은 아무도 모른다. 다만 당신이 유용한 여행 정보, 숨은 맛집 소개, 아름다운 헌사와 풍경 사진보다 여행의 바깥에서 숨 쉬는 인물들의 모습을 보고 싶다면? 쓴웃음, 너털웃음, 코웃음, 비웃음 등 국어사전 속 모든 웃음을 경험할 수 있는 ‘극사실주의’ 여행 문학에 매력을 느낀다면? 2호의 가능성은 그만큼 높아질 것이다.
미국 기차는 느리기에 비싸다. 대개 기차는 느리기에 싸거나, 빠르기에 비싸다. 그렇기에 이 무슨 역설인가 싶다. ‘시간 많고, 돈 많고, 인내심 많은 사람만 타란 말인가(!)’ 싶은데, 어쩐지 이 예감은 예매를 하다 보면 맞는 것 같다. 일단, 모바일 예매를 하려면 앱스토어가 미국 계정이어야 한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하려면 회원 가입을 해야 하는데, 미국 주소만 입력할 수 있다. (…) 그래서 정직하게 미국 기차를 타려면, 우선 미국으로 이사를 해서 주소를 얻어야 하는데 집주인과의 마찰이 싫은 나 같은 사람은 집을 사서 가는 게 좋다. 하지만 집을 사봐야 영주권이 없으면, 그 집에서 살 수가 없다. 그러니, 영주권을 얻기 위해선 미국 기업에 취직해야 한다. 그래서 십 년 이상 우수 납세자가 되면 미국 기차를 탈 수 있는데, 이것보다 간단한 방법은 학생 비자를 얻어서 유학을 가는 것이다.
---「미국 기차 여행」중에서
나는 공항에서는 생맥주를 마시며, 내 여행의 마침표를 찍는다. 그럴 때면 아주 긴 장편소설을 쓰고 나서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를 찍을 때의 기분이 든다. 고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다시 들춰보겠지만, 우선은 이렇게 일단락을 짓는다. 그때의 시원섭섭하면서도, 미련 가득한 감정에 젖는다. (…) 긴 소설의 초고를 그저 마침표 하나로 끝내듯, 내게 여행의 일단락은 언제나 ‘공항의 생맥주’다. 누가 보든 말든…, 결국엔 공항 펍의 구석에 앉아 여행지에서의 모든 추억과 감정을 생맥주 한 잔에 담아 마지막으로 쭈욱 들이켠다. 꿀떡 꿀떡 꿀떡…….
---「왜 공항 생맥주가 맛있을까?」중에서
인도 남부 지방은 긍정을 표할 때, 고개를 흔든다. “만나서 반가워, 기뻐(흔들흔들).” “세 시에 볼까?” “오케이(흔들흔들).” “이거 좀 고쳐주실래요?” “오. 당연하지. 노 프라블럼(매우 흔들흔들).” 이 역설적인 긍정법이 매우 헷갈렸는데, 어느새 전염돼 나 역시 고개를 흔들었다. (…) 외국인이 한식당에 와서 “이모. 여기 청국장 추가요!”라고 외치는 느낌이랄까. 현지 직원들에게 우호적인 인상을 줘야 했기에 온종일 “노 쁘라블럼”과 “오께이”를 외치며, 고개를 좌우로 열심히 흔든 후 저녁 즈음이 되면 내 영혼마저 흔들린 기분이 들었다.
---「노 프라블럼!」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