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15 부정선거, 실시되다부정선거의 치밀한 계획과 시행1958년 12월 2·4보안법 파동 이후 자유당정권은 1960년 실시예정인 제4대 대통령 · 제5대 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현 대통령과 이기붕 국회의장의 당선을 위해 치밀한 부정선거계획을 수립 · 시행 하였다. 대한뉴스 제250호정.부통령 선거일자공고(1960) 출처: 국가기록원 설명글 더보기 정부에서는 제4대 대통령과 제5대 부통령 선거를 헌법 제56조와 선거통령 제30조의 규정에 의해서 오는 3월15일에 실시할 것을 국무회의에서 결의하고 이대통령 각하의 제가를 얻어 2월3일에 이를 공고했습니다. 나라의 모든 선거중에서 정부통령 선거는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이를 적기에 시행하고저 3월15일에 택한 것인데 이에 앞서 정부에서는 연일 국무회의를 열어 각 국무위원 사이에 진지한 논의와 과학적인 검토를 거쳐 늦더라도 시기적으로 봐서 선거는 농번기를 피해서 실시함으로써 정부윤리의 역활을 묻는 농민들에게 지장이 없도록 한 것입니다. 또한 하루바삐 나라의 중대행사인 선거를 치루고 정국의 안정을 얻어 모두 힘을 모아서 새나라 건설에 매진해야 할 것 입니다. 정부에서는 이번 선거를 실시함에 앞서서 온 국민들이 국회통일과 민주주의 발전, 그리고 자립증대 확립에 3대시정 아래 우리 선거사상 가장 훌륭한 모범선거가 되게 할 것을 겸하하고 있습니다. 대한뉴스 제251호정.부통통령 선거전 개막(1960) 출처: 국가기록원 설명글 더보기 제4대 대통령과 제5대 부통령의 선거날짜가 오는 3월15일로 정해지자 자유당과 민주당의 치열한 선거전이 벌어졌습니다. 야당인 민주당에서는 2월7일 서울시내 장충관 공원에서 강연회를 열고 여당의 시책을 공박하면서 자유당과 대결했습니다. 이 날 자유당에서는 대통령에 이승만 박사, 부통령에 이기붕 선생에 출마환영 대회를 서울운동장에서 개최했는데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시민들이 참여해서 일대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자유당의 연사들은 황송철씨와 송도심씨, 그리고 부토래씨였는데 먼저 우리민족의 태양이신 이승만 박사를 다시 대통령으로 모시고 이박사의 유일한 호로빌자인 이기봉 선생을 부통령으로 선출하자는 요지의 열변을 토하자 시민들의 환호와 갈채는 성동관재를 뒤흔들었습니다. 연사들은 이어서 80평생을 오직 나라와 겨레를 위해 몸 바쳐 오신 이승만 박사의 위업을 소개하고 한국국토 통일의 대사업을 목전에 둔 현실로써는 이박사의 위대한 영도력만이 우리겨레의 목적을 달성하게 될 것이라고 연설했습니다. 오래도록 이박사의 활약을 도와온 이기붕 선생을 부통령으로 내세우는 것만이 우리겨레의 활로를 개척하는 길이라고 외치는 것이였습니다. 내무부 장관에 임명된 최인규의 본격적인 부정선거운동 돌입1959년 3월 경찰과 지방행정의 총수직인 내무부 장관에 임명된 최인규는 본격적인 부정선거운동에 돌입하였다. 전국 시 · 읍 · 면 · 동에 "공무원 친목회"를 조직하고 매주 1회씩 회합하여 득표공작을 점검토록 하였다. 대한뉴스 제255호종반전에 들어간 선거전(1960) 출처: 국가기록원 설명글 더보기 3월15일 시행될 정부통령선거를 한달여 앞두고 선거전은 바야흐로 종반전에 이르었습니다. 도시와 농촌을 가릴 것 없이 여야의 선거강연회는 대단히 호홉이 커지고 모든 유권자들은 참다운 나라의 지도자를 선출하고자 불을 뿜는 듯한 선거강연회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한편 예술인 일동도 대통령에 이승만 박사, 부통령에 이기붕 선생 출마 환영예술인 대회를 3월6일 서울운동장에서 개최했는데 이 대회에서는 여야에 보내는 메세지 낭독과 연예프로를 전개해서 시민들의 박수갈채를 받았습니다. 또한 그는 1959년 5월부터 11월까지 서울, 인천, 대전, 춘천, 대구, 광주, 부산 등지를 순회하면서 공무원들에게 차기 정부통령선거에서 자유당입후보자가 당선되도록 적극 노력할 것을 지시하였다. ※ 최인규의 부정선거 지시 : 군수 · 경찰서장 회합시"어떠한 비합법적인 비상수단을 사용하여서라도 이승만 박사와 이기붕 선생이 꼭 당선되도록 하라. - 관련 판결문 중에서 부정선거와 자유당 비밀1960년 3월초 민주당이 공개한 「3.15부정선거 지시 비밀지령」에 따르면, 자유당 정권은 '4할 사전투표, 3인조 또는 5인조 공개투표, 완장부대 활용, 야당참관일 축출' 등을 통해 모든 투표구에서 자유당 후보의 득표율 85%이상을 목표로 하였다. 3.15선거특보3.15 정부통령선거1(각 후보등록 및 선거유세활동)(1959) 출처: 국가기록원 설명글 더보기 우리나라 민주 정치 사상의 크나큰 진전이 이룩될 제 4대 대통령과 제5대 부통령 선거가 다가왔습니다. 정부에서는 현 정, 부통령의 임기가 오는 8월14일로서 만료됨으로 헌법 제 56조에 의거해서 선거를 서둘렀는데 국민의 절대다수인 농민들의 형편을 고려해서 이것을 농번기가 아닌 3월 15일에 시행할 것을 결정하고 정 부통령 선거법 제 30조에 따라서 2월 3일에 이를 공고했습니다. 선거 날짜가 공고되자 중앙선거위원회에서는 정 부통령 입후보자들의 등록이 시작되어 자유당의 대통령후보자 이승만 박사와 부통령 후보자 이기붕씨가 1차적으로 등록을 완료하고 이어서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조병옥박사가 부통령후보로 장면 씨가 그리고 부통령후보로서는 다시 통일당의 김준연씨와 대한여자국민당의 임영신여사가 등록해서 대통령에는 두 사람 부통령에는 4사람이 입후보했습니다. 입후보자의 등록이 완료되자 중앙 선거위원회에서는 각 입후보자의 기호가 추첨을 해서 결정되었으며 선거운동 포스터를 비롯해서 여러 가지 선전물이 도시와 농촌의 거리를 장식하고 가두선전의 마이크소리가 힘차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전국 각 동사무소에서는 2월 15일부터 24일까지 모든 유권자들에게 선거인명부를 연람시키고 유권자들이 선거인명부에서 누락되는 착오가 있는지 확인하게 했습니다. 선거 날짜의 공고와 입후보자의 등록 등 선거 시행에 예비적인 절차가 완료되자 우리나라 여야 2대 정당인 자유 민주 양당의 본격적인 선거전이 벌어졌습니다. 자유당에서는 2월 7일에 대통령에는 이승만 박사 부통령에는 이 기붕 선생의 출마환영대회를 서울운동장에서 개최하고 이승만 박사를 다시 대통령으로 모시고 이박사의 영원한 보필인 이기붕선생을 부통령으로 내세우는 것만이 우리민족의 활로를 개척하는 길이라고 외쳤습니다. 한편 야당인 민주당에서도 이날 장춘동공원에서 강연을 열고 당위 선정과 더불어 여당과 정부의 시책을 공방하면서 자유당과 대결했습니다. 서울에서 거행된 2월7일의 자유 민주 양당의 대 강연회를 오픈 게임으로 여야의 선거전은 전국으로 그 터전을 넓히고 불을 뿜는 듯한 정부통령 선거전은 자유대한의 찬란한 민주주의의 성장을 상징하는 듯 했습니다. 그런데 선거전이 바야흐로 종반전에 들어설 무렵인 2월 15일에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 박사가 서거해서 2월 25일에 국민장이 거행되었던 관계로 근 열흘 동안 표면적인 선거운동은 중지 되었습니다. 그러나 2월 26일부터는 전국의 도시와 농촌을 향해 자유 민주 양당의 지방유세전이 총 출동되고 전국 방방곡곡에서는 선거 강연회가 베풀어져 전 유권자들의 이목이 여기에 집중되었습니다. 그리고 정부에서는 이번 선거의 중요성에 비추어 자유분위기 보장으로 공명선거의 실현을 지향하고 이번 선거가 우리민주정치 사상 가장 모범적인 선거가 되도록 노력했습니다. 3.15선거특보3.15 정부통령선거2(선거일 투표 및 개표모습, 이승만 대통령 당선 후 경무대 모습)(1959) 출처: 국가기록원 설명글 더보기 치열한 선거운동의 막이 내리고 드디어 3월15일 역사적인 제4대 대통령과 제5대 부통령 선거의 날이 밝아왔습니다. 이날 아침 아침 7시부터 전국 8108개 투표소에서는 평온한 분위기 속에 유권자들의 투표가 진행됐으며, 이대통령 각하 내외분께서도 정식 강석소위와 함께 이른 아침 서울특별시 종로구 4동 제1 투표소에서 투표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통령에 입후보한 자유당의 이기붕씨와 민주당의 장면씨, 그리고 통일당의 김준연씨,대한여자국민당의 임영신여사, 또한 조대법원장 등, 여러저명인사를 비롯해서 전국 1119만6천90명의 총 유권자 중 1086만1519명의 유권자가 이날 투표에 참가해서 고도의 투표율을 보여주었습니다. 자유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 전국의 투표는 이날 오후5시로써 마감되고 각 투표소로부터는 밀봉된 투표함이 개표소로 모여들었으며 전국 187개의 개표구에서는 밤을 세워가며 개표가 진행됐습니다. 온 국민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가운데 전국의 개표는 3월17일 오전9시로써 완료됐습니다. 그 결과 대통령에는 자유당의 입후보자이신 이승만 박사가 963만3376 표로써 당선되고 부통령에는 자유당의 이기붕씨가 833만7059 표를 얻어서 김준연, 임영신, 장면씨 등 세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당선이 확정됐습니다. 이로써 315 정부통령 선거는 자유당의 승리로써 막을 내리고 3월18일에 열린 제35회 임시국회 1차 본회의에서는 헌법 제53조와 정부통령 선거법 제64조1항의 규정에 의해서 제4대 대통령에 이승만 박사, 제5대 부통령에 이기붕씨가 각각 당선됐음을 공표했습니다. 이 대통령각하께서 다시 제4대 대통령에 당선되시자 경무대 관저에는 많은 하객이 모여들어 각하의 당선을 축하했습니다. 조 대법원장을 비롯해서 자유당 간부와 중앙선거위원들이 뒤이었으며 우방 각국의 원수들로부터는 각하의 당선을 축하하는 축전이 연이어 들어왔습니다. 한편 부통령에 당선된 이기붕씨는 기자들과 회견하고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에 감사하면서 자유당의 선거공약 실현을 위해 전력을 다하겠다고 당선소감을 피력했으며 외국기자들과도 만나 이 대통령각하의 북진통일 방안을 전적으로 지지, 강조하면서 한국의 여당이 이번선거에서 승리한 것은 정부의 성공적인 시책에 대해서 국민의 이해가 두터워졌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는 8월15일에 정식으로 취임할 제4대 대통령과 제5대 부통령은 국정쇄신의 굳은 악수를 교환했습니다. 이러한 자유당정권의 치밀한 부정선거 결과, 이승만 대통령 후보가 85%, 이기붕 부통령 후보가 73%의 지지를 받아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선거 결과는 국민들의 광범위한 저항에 부딛혀 자유당 정권의 몰락을 초래하였다. 대한뉴스 제256호3.15 정부통령 선거(1960) 출처: 국가기록원 설명글 더보기 3월 15일 역사적인 우리나라 제4대 대통령선거와 제5대 부통령선거가 시행됐습니다. 이날 아침 일곱 시부터 전국 8,108개 투표소에서는 평온한 분위기 속에 유권자들의 투표가 진행됐으며, 이 대통령 각하 내외분께서도 영식 강석 소위와 함께 이른 아침 자하동 제1투표소에서 투표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통령에 입후보한 민의원의장 이기붕 씨를 비롯해서 전국 11,196,490명의 총 유권자 중에서 97퍼센트에 해당하는 10,861,519명의 유권자가 이날 투표에 참가해서 우리나라 민주선거 사상 가장 높은 투표율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이날 오후 다섯 시 정각에 투표는 마감되고 각 투표소로부터는 밀봉된 투표함이 개표소로 모여들어 전국 187개 개표구에서는 밤을 세워가며 개표가 진행되었습니다. 전국의 개표는 17일 오전 아홉 시로서 완료되었는데 그 결과 대통령에는 자유당의 입후보자이신 이승만 박사가 총 유권자 수의 86퍼센트인 9,633,376표로서 당선이 확정되고, 부통령에는 또한 자유당의 이기붕 씨가 총 유권자 수의 74.5퍼센트인 8,337,059표를 얻어서 당선되었습니다. 그런데 새로 당선된 정·부통령은 국회 본회의에서 그 당선이 선포된 다음 오는 8월 15일에 정식으로 취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한뉴스 제257호제 4대 대통령.부통령 당선 공표(1960) 출처: 국가기록원 설명글 더보기 국회민의원에서는 3월18일에 열린 제35회 임시국회 제1차 본회의에서 3월15일에 시행된 제4대 대통령과 제5대 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에는 이승만 박사가 부통령에는 이기붕씨가 각각 당선됐음을 헌법 제53조의 규정에 의해서 이를 공표했습니다. 제5대 부통령에 당선된 민의원 의장 이기붕씨는 대외 기자들과 회견하고 국민들의 지지에 감사하고 국민도리의 아량으로 민심수습에 힘쓰고 선거공약을 실행하는 등 이대통령 각하의 뜻을 받들어 서정쇄신에 모든 힘을 바치겠다는 요지로 당선소감을 피력했습니다. 유의사항
참고자료
|
https://blog.naver.com/open-archives/221142303140 3.15부정선거 지휘자의 말로(末路) - 최인규최인규(1919. 3. 9. ~ 1961. 12. 21.)는 1958년 민의원 선거에서 광주군에서 자유당 소속으로 당선되어, 같은 해 교통부 장관, 1959년 경찰과 지방행정을 지휘하는 내무부 장관에 기용되었다. 그는 장관 취임사를 통해 “모든 공무원은 리승만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해야 하며 차기 정․부통령선거에서는 기필코 자유당 입후보자가 당선되도록 해야 한다”고 공언하였다. 이어 그는 지방관서를 순시하며 “공무원이 집무시간이 아닌 때에 선거운동을 하는 것은 선거법 위반이나 공무원법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역설하였다. 이승만에게는 더할 나위없는 충복이었다. 최인규는 전국의 경찰인사를 단행하면서 일선 경찰서장들을 연고지 중심으로 재배치하였다. 오직 충성도만이 경찰 인사의 기준이었다. 뿐만 아니라 전국 시․읍․면․동 단위로 ‘공무원친목회’를 조직하게 하고, 이를 통해 유권자 포섭과 득표공작을 하는 등 3.15부정선거를 총지휘하였다. 1960년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5월 3일에 최인규는 구속되었다. 따라서 3.15부정선거에 내부부 소속의 공무원들이 조직적으로 개입하였고, 자유당 소속 정치폭력배들이 동원되었음이 드러났다. 이 일로 내무부의 차관급과 실국장급 간부들은 구속되었고, 최인규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1961년 5.16군사재판부에서 3.15 정·부통령 부정선거를 지휘한 혐의로 사형이 확정되어, 12월 서울교도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3.15부정선거 주모자 등 이승만 정권 핵심들의 상당수는 4.19혁명 이후 과도정부-민주당정부-군사정부의 3개정권 하에서 3개의 다른 법에 의해 3차례 재판을 받아야 했다. 첫번째 재판1960년 5월 3일, 검찰은 최인규를 정부통령선거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였다. 검찰에 체포된 최인규는 부정선거 지휘에 대한 모든 혐의를 인정하면서, 자유당 측의 "자유당을 위한 마지막 총알이 되어 달라"는 지령과 자신의 영웅심이 복합되어 부정선거를 계획하게 되었다고 진술하였다. 또한 "이승만과 이기붕을 정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만 하면 여생이 편할 줄 알았다"고 하면서 부정선거 음모계획과 실행경과를 진술하였다. 1960년 7월 5일 오전 10시 서울지방법원에서 최인규 한희석 홍진기 등 30명에 대한 첫 공판이 열렸고, 9월 26일 구형공판에서 최인규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특별재판소 재판1960년 12월 30일, 부정선거관련자 처벌법인 「특별재판소 및 특별검찰부 조직법」이 공포되어 특별재판소와 특별검찰부가 설치되었다. 1961년 2월 11일 오후, 특별검찰부는 3.15부정선거 원흉인 최인규 한희석 이성우 이강학 최병환 등 5명을 특별재판소에 기소하였다. 1961년 2월 20일 오전 10시 30분, 특별재판소 제1심판부는 최인규(당시 내무부장관), 이성우(당시 내무부차관), 이강학(당시 치안국장), 최병환(당시 내무부 지방국장) 등 4명의 피고에 대한 부정선거관련자처벌법 위반사건 첫 공판을 열었다. 1961년 4월 10일, 특별재판소는 구형공판에서 최인규에 사형, 이강학에 징역 15년, 이성우 ‧ 최병환에게는 각각 징역 10년을 구형했다. 1961년 4월 17일, 판결공판에서 최인규에 사형, 이강학에게 징역 15년, 이성우와 최병환에게 각각 징역 7년과 5년을 선고하였다.
5.16군사재판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고 1961년 6월 21일 「혁명재판소 및 혁명검찰부 조직법」이 공포되자 3.15부정선거 관련 사건들이 5.16군사재판소로 이관되었다. 7월 29일, 첫 군사재판이 시작되었다. 최인규 등 67명에 대한 심리를 개시하여, 9월 8일 최인규 이강학에 사형, 이성우 최병환에게 징역 10년을 각각 구형했다. 9월 20일, 판결공판에서 최인규 이강학 한희석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12월 6일 항소심에서 최인규, 한희석(자유당기획위원장)에게 사형이 확정되어, 1961년 12월 21일 서울형무소(서대문교도소)에서 최인규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