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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23일 주일 [(자) 대림 제4주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 오늘은 대림 제4주일입니다. 이스라엘의 목자이신 주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보잘것없는 딸을 선택하시어 주님의 거처로 삼으셨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보여 주신 순종과 섬김을 우리도 배워 언제나 주님의 뜻을 충실히 따릅시다. 주님께서 이루신 구원을 마리아와 함께 기뻐하며 영원한 찬미의 노래를 부릅시다. 미카 예언자는,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나오리라고 한다(제1독서). 하브리서의 저자는, 그리스도께서는 두루마리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의 뜻을 이루러 오셨다고 한다(제2독서). 엘리사벳은 자신을 찾아온 마리아를 보고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하고 외친다(복음).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 미카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5,1-4ㄱ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그의 뿌리는 옛날로, 아득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2 그러므로 해산하는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 주님은 그들을 내버려 두리라. 그 뒤에 그의 형제들 가운데 남은 자들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돌아오리라. 3 그는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주 그의 하느님 이름의 위엄에 힘입어 목자로 나서리라. 그러면 그들은 안전하게 살리니 이제 그가 땅끝까지 위대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4 그리고 그 자신이 평화가 되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0,5-10 형제 여러분, 5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6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기꺼워하지 않으셨습니다. 7 그리하여 제가 아뢰었습니다. ‘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8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제물과 예물을”, 또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원하지도 기꺼워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고 말씀하시는데, 이것들은 율법에 따라 바치는 것입니다. 9 그다음에는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것을 세우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것을 치우신 것입니다. 10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9-45 39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40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42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44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45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미카 예언자는 부도덕하게 살고 가난한 이들을 억압하며 예루살렘 성전에서 형식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을 질책합니다. 그러면서, 오직 도래하시는 메시아만이 주실 수 있는 가장 귀한 선물이 평화라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인간의 능력이나 지혜를 필요로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계획에 기쁘게 순종하며 자신을 내놓는 사람들을 활용하십니다. 아주 작은 시골 마을인 베들레헴, 작은 지파인 유다, 그 가운데서 가장 작은 다윗 가문!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장소로 수도인 예루살렘보다는 오히려 베들레헴을 선택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루에 두 번, 동물이나 봉헌물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런 예배가 형식적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메시아께서 오심으로써 성전에서 바치는 그런 예배 행위는 가치와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마리아의 태중에서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서는 “영과 진리 안에서”(요한 4,24)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예배하는 데 가장 합당한 유일한 방법은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는 서둘러 사촌 엘리사벳을 방문하러 떠납니다. 교통편이 발달하지 않던 시대에 걸어가는 여정은 무척 힘들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계획에 겸손하게 열린 마음으로 순종한 마리아는 세례자 요한의 출산을 준비하는 사촌 엘리사벳을 돌봄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합니다. 마리아는 자신도 힘든 처지이지만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겸손하고 기쁘게 봉사하는 참된 ‘주님의 여종’, 이웃에 대한 배려가 가득한 여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
믿음 마리아의 생애는 우리가 상본을 통해서 보는 것처럼 처음부터 화려한 왕비의 생활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 무정하고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서 기진맥진했던 시골 처녀가 바로 마리아였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견뎌내기에 너무도 벅찼던 마리아는 아인카림에 사는 사촌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나자렛에서 도보로 사흘이나 걸리는 먼 여행이었습니다. 점점 불러오는 배를 부여잡고 힘겨웠지만 이웃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는 것보다 훨씬 나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마리아로부터 자초지종을 다 듣고 난 엘리사벳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십니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주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언약의 말씀을 들었지만 어떤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던 마리아였기에 늘 긴가민가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벳의 확증을 통해 마리아는 다시금 힘과 용기를 내게 됩니다. 엄청난 하느님의 초대에 앞뒤 따지지 않고 자신의 전 존재를 걸었던 마리아, 그저 ‘일어서라’ 하시면 일어섰고, ‘길을 떠나라’ 하시면 길을 떠났습니다. ‘믿어라’고 하시니 그저 믿었습니다. 믿는다는 것, 우리가 알다시피 얼마나 어렵고 고된 일입니까? 마리아는 예수님 잉태 사건을 통해 믿는다는 것이 일생일대를 건 하나의 투쟁이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믿음의 길이란 때로 피가 흐르는 가시밭길이라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행복하려거든 부모를 믿지 마라>
제목을 보시고 깜짝 놀라실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미리 말씀드리는 것인데, 여기서 말하는 ‘부모’란 아직 올바른 신앙을 가지지 못한 부모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행복하려면 우선 돈이 충분히 있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돈은 세 끼니만 먹을 수 있다면 행복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모든 과학적 연구의 결과입니다.
이를 위해 진화론을 믿는 ‘서은국’ 교수가 쓴 것이지만, ‘행복의 기원’이란 책의 ‘행복은 아이스크림이다’라는 소제목의 한 챕터를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진화론을 믿는다면 행복을 위해 돈을 많이 소유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써야하지만 연구들은 그것과 반대의 결과를 내어놓기 때문에 그도 어쩔 수 없이 행복은 재물의 소유와 상관이 없이 마치 아이스크림처럼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버리는 것에 불과하단 결론을 내어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 연구 결과에 의하면 인생의 여러 조건들, 이를테면 돈, 건강, 종교, 학력, 지능, 성별, 나이 등은 행복의 개인차의 10~15% 정도밖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래의 이 10%의 행복을 위해 지금 행복할 수 있음에도 그 90%의 행복을 포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일 대학 경제학자 로버트 레인(Robert Lane) 교수에 의하면 지난 50년간 미국의 평균 가계소득은 약 2배로 증가했지만, 미국인 중 ‘매우 행복하다’는 답변을 한 사람은 1957년에는 53%, 2000년에는 47%로 행복지수가 오히려 감소했다는 것입니다.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같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행복지수가 높기 때문에 소득과 비례한다고 믿겠지만 오히려 그들보다 부강한 일본의 행복도는 그 국가들에 비길 바가 못 됩니다. 그들이 행복한 이유는 보장된 자유, 타인에 대한 신뢰, 그리고 인간에 대한 존중이 바탕이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이밖에도 여러 연구 결과들을 소개하는데, 한 예로 미국 일리노이 주에서 지금의 화폐가치로 약 100억 원의 상금을 받았던 복권 당첨자들에 대한 연구입니다. 복권 당첨 1년 뒤, 21명의 당첨자들과 주변 이웃의 행복감을 비교했더니 놀랍게도 별 차이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한국 대학생들이 행복하기 위해 가장 기대하는 것이 10년 넘게 변함없이 복권당첨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복권 당첨, 새 집, 월드컵 4강의 환희 등의 행복감은 어느 정도 지속될까요? 저자가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2년 동안 추적 조사해 본 결과 그들이 일상에서 겪는 좋은 일들(새로 생긴 남자친구, 대학원 입학 등)과 나쁜 일들(결별, F학점 등)이 행복에 미치는 영향은 약 3개월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얼굴이 잘 생기고 못 생기고도 행복에 영향을 못 미치고, 이런 예는 수도 없이 많아서 일일이 다 열거할 수도 없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복권 당첨과 같은 행복을 추구하면 얻기도 어렵지만 비록 그 행복을 얻는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 짜릿함을 맛보았기 때문에,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느끼지 못해 더 불행해진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큰 차를 몰던 사람이 첫 차로 작은 차를 구입한 기쁨을 느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 ‘음식과 맛’이라는 제목으로 한 연구에서 대학생들이 초콜릿을 먹도록 하고, 한 집단에다가는 선명한 돈 사진을 한 장 은근슬쩍 보여주게 했는데, 돈을 본 학생들은 초콜릿을 먹는 둥 마는 둥 별 맛을 느끼지 못하며 먹었지만, 돈을 보지 못한 학생들은 웃고 떠들며 초콜릿 맛을 음미하며 먹었다는 결과가 있습니다. 돈을 바라면 일상의 행복을 잃습니다.
하지만 지금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어떻게 가르칩니까? 좋은 대학 가야, 돈을 많이 벌고 성공해야, 결혼을 꼭 해야, 주위에 친구가 많아야 등의 자신의 생각을 아이들에게 행복이라고 주입하지 않습니까? 아이들은 부모가 자신들을 키워준 덕분으로 부모의 말이라면 스펀지처럼 흡수하고 믿어버립니다. 이렇게 3개월의 행복을 위해 평생을 소진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 마리아는 엘리사벳에게 이런 인사를 듣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왜 성모님은 부모를 믿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을 믿으셨을까요? 부모의 말을 믿으셨다면 어떻게 되셨을까요?
“여자는 예쁘게 자라서 훌륭한 신랑감을 만나 아들 딸 잘 낳고 신앙교육 잘 시키며 사는 게 제일 행복하단다.”
이런 말을 믿었다면 진정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다는 천사의 말을 믿으실 수 있으셨을까요? 아마도 즈카르야처럼 의심하셨을 것입니다. 성모님의 믿음은 인간이 하느님처럼 행복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는 믿음이었습니다. 하느님은 복권의 행복을 추구하지 않으십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때 느꼈던 바로 그 행복을 추구합니다.
베드로 사도도 부모의 말을 믿고 인간은 물 위를 걸을 수 없다고 믿었다면 예수님이 걸으신다고 감히 자신도 걷겠다고 말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이 인간 이상의 행복을 우리가 누리기를 원한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면 당신처럼 행복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믿은 것입니다. 그래서 주저 없이 물로 뛰어내린 것입니다. 물 위를 걷는 행복, 이는 인간은 그럴 수 없다고 믿고 있었던 나머지 사도들은 느낄 수 없는 행복이었습니다. 그 행복의 시작이 교회의 시작이 되었던 것입니다.
행복은 이렇게 누군가에 의해 주입되고 그것을 믿으면 나의 행복이 됩니다. 보통은 부모가 자녀들에게 ‘너는 이만큼 행복할 수 있어!’라는 믿음을 줍니다. 돈을 벌어야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부모는 자녀에게 더 큰 행복을 추구할 수 없도록 믿음의 금을 그어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녀는 자신이 그 정도 주제밖에 되지 않는다고 믿어버리고 더 큰 행복의 기회가 와도 잡지 못합니다.
유튜브에 책을 소개하는 유명 유튜버 중 ‘김새해(잔다르크)’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녀는 스스로 초등학교 때부터 총 7차례의 성추행을 당했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예뻐 보이지 않으면 그런 상처를 입지 않을 것이라고 여겨 폭식증을 10년 넘게 앓고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여 거식증도 함께 앓았다는 것입니다. 매우 가난하여 아르바이트를 하며 남이 남겨 놓은 음식을 몰래 비닐에 싸 냉장고에 얼려놓고 그것을 녹여 먹어가며 산 세월이 길었습니다. 그때 그녀는 돈이 생의 전부였고 그 돈을 벌기 위해 발버둥 치다가 결국 신장에 문제가 생겨 죽을 위험에 놓였습니다. 병원에 1년 동안 입원해 있었다고 합니다.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계속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만 중얼거렸습니다. 그러자 삶이 바뀌었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행복할 수 있음을 믿은 것입니다. 그러자 자기 자신이 소중하게 여겨지고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도 믿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죽음의 위기에서 다시 건강을 찾게 되었고 지금은 유명 유튜버로 상당한 액수의 돈을 벌고 있습니다. 돈을 쫓는 게 아니라 자신을 찾아오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지금은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리며 살고 있고 자녀도 3명씩이나 낳아서 잘 키우고 있습니다.
자신의 행복은 자신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 결정해 놓은 대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나쁜 일이 일어나면 ‘거봐 맞잖아. 내 팔자에 뭔 행복이 있겠어!’라고 자신이 정해놓은 행복을 합리화하며 살아갑니다. 지금 우리가 불행하다면 누군가 그런 나의 행복의 수준을 믿게 한 것이고 그 믿어버린 것이 맞도록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물론 행복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너는 하느님의 자녀고 하느님이야, 하느님이 될 수 있어. 그리고 하느님이 누리는 행복을 누릴 수 있어.”라고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행복을 믿어야합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나는 끝까지 인간이라고 말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이 교만입니다.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수 있다는 천사의 말을 믿으신 성모님이 교만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될 수 없다고 믿는 것이 교만입니다. 그리고 믿는 만큼만 행복하게 돼 있습니다.
우리는 물 위를 걸을 수도 있고 그리스도께서 누린 행복을 똑같이 누리며 살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내가 더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끊임없이 되뇌고 믿읍시다. 그러면 오늘 성모님께서 들으신 그 말씀을 우리도 듣게 될 것입니다.
“행복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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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성 안토니오 갈바오(Anthony Galvao)
신분 : 신부, 설립자
활동연도 : 1739-1822년
같은이름 : 낸시, 니나, 안나, 안또니오, 안또니우스, 안소니, 안토니우스, 애나, 애나, 애니, 앤, 앤서니, 앤소니, 앤터니
성 안토니우스 갈바오(Antonius Galvao, 또는 안토니오 갈바오)는 1739년 브라질(Brazil) 상파울로(Sao Paulo) 주(洲)의 과라팅게타(Guaratingueta) 시에서 높은 사회적 지위를 지닌 열심한 가톨릭 신앙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안토니오 갈바오 데 프란카(Antonio Galvao de Franca)는 무역업에 종사하는 관대한 사람으로 작은 형제회의 재속 3회원이었고, 어머니 이자벨 레이테 데 바로스(Izabel Leite de Barros)는 1755년 38살의 나이로 일찍 사망하기 전까지 11명의 자녀를 낳았으며 남편과 마찬가지로 애덕 생활에 있어서 출중하였다. 그녀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녀 소유의 의복을 하나도 찾을 수 없었는데, 이는 이미 가난한 이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갈바오는 13살 때 아버지에 의해 벨렘(Belem)에 있는 예수회 신학교로 보내졌으나 잘 적응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후에 아버지는 갈바오에게 작은 형제회에서 성소를 찾아보도록 권유하였다. 그래서 갈바오는 1760년 4월 15일, 21살 때 리우데자네이루(Rio de Janeiro) 주의 마카쿠(Macacu)에 있는 성 보나벤투라(Bonaventura)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수련기 동안 그는 경건한 신앙심과 열정 그리고 모범적인 덕행으로 잘 알려졌다. 그는 1761년 4월 16일 종신서원을 하며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를 지지하는 작은 형제회의 서원을 했다. 그 당시 성모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 교리는 여전히 논쟁 중이었다.
다음 해에 사제품을 받은 그는 상파울로에 있는 작은 형제회 수도원으로 파견되었고, 그곳에서 신학과 철학에 대한 학업을 계속하였다. 1768년에 그는 설교자, 고해신부, 수도원의 문지기 등 중요한 직책에 임명되었다.
1769-1770년까지 그는 상파울로에서 수도 서원은 하지 않지만 공동생활을 하는 은수자들의 공동체인 ‘성녀 테레사의 은수 명상의 집’(Recollection of St. Teresa) 고해신부로 활동했다. 여기서 갈바오 신부는 깊은 신앙심을 갖고 참회 생활을 하던 성령의 헬레나 마리아(Helena Maria of the Holy Spirit) 수녀를 만났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은수자들을 위한 새로운 은수 명상의 집을 설립하라는 환시를 보았다고 주장하였다. 고해사제였던 그는 헬레나 마리아 수녀의 메시지를 연구하며, 메시지의 근거가 확실하고 초자연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들을 수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774년 2월 2일 갈바오 신부와 헬레나 마리아 수녀는 공동으로 ‘천주 섭리의 원죄 없으신 잉태의 성모 마리아 수녀회’를 설립하였다. 이 수녀회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수녀회’를 모델로 해서 설립되었다.
1775년 2월 23일 헬레나 마리아 수녀가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자 갈바오 신부는 갓 설립된 수녀회의 책임자 직무를 겸손과 신중함으로 떠맡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완고한 상파울로 당국 책임자로부터 수녀원을 폐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갈바오 신부는 신앙으로 이 결정을 수용했고 수녀들 또한 순명했지만 수녀원을 떠나지는 않았다.
결국 대중들의 압력과 주교의 노력으로 수녀원은 곧 다시 문을 열게 되었다. 그 후 계속해서 수도 성소자들이 증가하자 더 넓은 생활공간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갈바오 신부는 수십 년 동안 수녀원과 성당을 건립하는 일에 헌신하였다.
건축 사업과 수녀원 안팎의 의무들에 더해서 그는 은수 명상의 집 은수자들의 양성에 전념하였다. 그래서 그들을 위한 규칙서를 작성했는데, 이는 내적 생활과 종교적 훈련을 위한 안내서였다. 그가 설립한 수녀회는 1929년에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수녀회로 통합되었다.
상황이 어느 정도 평온해 보일 때 시 당국의 또 다른 개입은 갈바오 신부에게 더 큰 시련을 가져다주었다. 자신의 아들을 성나게 한 어느 병사에게 총사령관이 사형을 선고하자 그 병사를 변호하던 갈바오 신부는 추방의 위험에 놓였다. 하지만 다시금 대중들의 요구가 성공하여 그 명령을 철회시킬 수 있었다.
1781년 그는 마카쿠 수도원의 수련장 신부로 발령받았고, 이어서 1798년에는 상파울로의 성 프란치스코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으며 1801년에 재임되었다. 그러나 은수자들과 상파울로 주교가 작은 예수회 관구에 호소하여 갈바오 신부는 수녀회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1811년에 상파울로의 소로카바(Sorocaba)에 성녀 클라라(Clara) 수녀원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11개월 후에 상파울로의 성 프란치스코 수도원으로 되돌아갔다. 말년에 그는 주교와 수도원장으로부터 상파울로 루스(Luz)의 은수 명상의 집에서 머무를 허락을 받았고, 그곳에서 1822년 12월 23일 선종하였다. 그의 유해가 안치된 은수 명상의 집 성당은 그 후 평화와 애덕의 사람인 갈바오 신부의 전구를 통해 은사를 입은 신앙인들의 순례지가 되어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그는 1998년 바티칸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다. 그리고 2007년 5월 11일 브라질을 사목방문 중인 교황 베네딕투스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상파울루의 캄포 데 마르테(Campo de Marte) 공항에서 시성식을 갖고 고통 받는 예수 성심의 성녀 바울리나(Paulina do Coracao Agonizante de Jesus, 7월 9일)에 이어 두 번째 브라질 교회의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브라질 출신으로는 첫 번째 성인인 그의 축일은 10월 25일에 기념하기도 한다. 그는 성 안나 갈바오의 안토니우스(Anthony of Saint Anne Galvao / Santo Antonio de Sant’Ana Galvao)로도 불린다.
성 토르락 (Thorlac)
신분 : 주교
활동연도 : 1133~1193년
활동지역:아이슬란드(Lceland)
같은이름 : 또르락 또를락 토르할손, 토를락
아이슬란드 출신인 성 토르락 토르할손(Thorlac Thorhallsson) 은 15세 때에 부제 그리고 18세 때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 후 그는 해외 유학을 떠났는데 런던을 거쳐 1161년에 아이슬란드로 돌아왔다.
그는 티크비보에르(Thykkviboer)에 수도원을 세우고 원장이 되었으며, 1178년에는 아이슬란드의 두 교구 중의 하나인 스칼홀트(Skalholt)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교구를 개혁하고 성직자의 규율과 사제 독신제도를 강화하는 한편 성직매매를 추방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는 곧 주교직을 사임하고 이전의 수도원으로 돌아가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실행하지 못했다.
성 요한 칸시오(John Cantius)
성인구분 : 성인
신분 : 신부, 성서학자
활동지역 : 켕티(Kenty)
활동연도 : 1390-1473년
같은이름 :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칸시우스, 칸티오, 칸티우스, 한스, 후안
성 요한 칸티우스(Joannes Cantius, 또는 요한 칸시오)는 1390년 6월 23일 폴란드 슐레지엔(Schlesien) 지방의 켕티에서 경제적으로 비교적 넉넉한 형편인 아버지 스타니슬라우스(Stanislaus)와 어머니 안나(Anna) 사이에서 태어났다. 요한은 태어난 마을에서 초등 교육을 받았고 1413년 크라쿠프(Krakow) 대학에 입학하여 1417년에 문학 석사학위를 받고 곧바로 그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하였다. 1439년 사제 서품을 받은 후 모교에서 성서 강의를 맡았다. 1443년경에 그는 터키에서 순교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예루살렘을 순례했으며, 네 차례에 걸쳐 로마(Roma)를 걸어서 순례하였다.
그는 설교로 매우 유명했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비해 명성이 너무 높아 그만큼 시기, 질투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자신의 직책을 사임하고 올쿠스즈의 본당사제로 봉직하게 되었다. 영혼들을 돌보는 사명감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그는 재차 크라쿠프 대학의 성서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는 운명할 때까지 평생 동안 대학에서 성서학을 가르치면서 16권의 방대한 강의록을 남겼다. 또한 그는 위대한 신앙인으로 처신하였다. 그는 자신의 학문과 교수 그리고 생활의 엄격성은 물론 가난한 이들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증거하며 살았다.
켕티의 요한은 1690년 시복되었으며, 1737년에 교황 클레멘스 12세(Clemens XII)에 의해 폴란드(Poland)와 리투아니아(Lithuania)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그리고 1767년 교황 클레멘스 13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현재 그의 유해는 크라쿠프(Krakow)의 성 안나 성당에 안치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