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고맙지. 할 만큼 다 했어. 가족이 걱정이지.”
20세기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노래인 ‘아침이슬’의 작사·작곡자이자 가수이며 서울 대학로 소극장 ‘학전’을 30여 년간 이끈 연출가 김민기는 21일 이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유족은 24일 오전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서 김민기의 발인식을 엄수한 뒤 아르코꿈밭극장으로 향했다고 합니다. 아르코꿈밭극장은 고인이 생전 33년간 작품을 올리고 신인 배우들을 발굴한 소극장 학전이 있던 곳입니다.
생전 그에게 ‘빚졌다’고 했던 수많은 추모객이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눈물로 배웅했습니다. 배우 장현성과 설경구, 황정민, 배성우, 최덕문, 방은진, 가수 박학기, 박승화, 이적, 정병국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 등을 비롯한 약 70여 명의 추모객들이 함께 했다고 합니다. 화단에는 고인을 기리며 시민들이 놓고 간 꽃과 막걸리, 맥주, 소주 등으로 빼곡했습니다.
유족들은 학전 담벼락에 고인의 영정 사진을 세워두고 묵념을 한 뒤 지하에 있는 학전블루소극장으로 내려가 비공개로 추모의 시간을 가졌고, 유족들이 극장에서 나오자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유족들은 취재진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다시 운구차에 탑승했습니다.
누군가 떠나는 차를 향해 “선생님 사랑합니다!”라고 외쳤습니다.
사실 부끄럽지만 저는 고인이 되신 김민기 님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저 그 유명한 「아침 이슬」과 「상록수」노래를 만든 분이라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21일 세상을 떠난 김민기 전 학전 대표는 '뒷것'처럼 무덤덤하게 삶을 마무리했다.
조의금이나 조화를 받지 않았고 연명의료를 멀리했다. 김민기의 조카이자 학전 총무팀장 김성민씨는 22일 기자회견에서 조의금을 받지 않는 이유를 설명했다.
김 팀장은 "학전이 폐관하면서 많은 분이 알게 모르게 저희 선생님 응원하시느라고 십시일반 도와주셨다. 충분히 가시는 노잣돈 마련하지 않으셨을까 생각한다. 선생님이 늘 얘기하시던 따뜻한 밥 한 끼 나눠 먹고 차를 마시면서 선생님을 떠올리지 않을까 한다”고 말했다. 김민기는 '가수·배우 뒤에 선 뒷것'으로 스스로 평가했듯이 조의금에도 뒤로 물러섰다.
김민기는 지난해 가을 위암 4기 진단을 받고 서울대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왔다. 4기이다 보니 수술이나 방사선 치료는 못 하고 항암제를 쓸 수 있는 정도였다. 4기 위암에 쓰는 일반적인 항암제를 투여했다. 약이 잘 듣지 않자 항암치료를 중단했다.
그는 얼마 전 위기상황이 닥쳐 서울대병원에 입원했다. 일반적으로 말기 암은 통증이 극심하다. 진통제가 투여됐고 폐렴 치료를 받았다. 다행히 위기를 넘겼다. 그때 소위 연명의료계획서라는 낯선 서류에 서명했다.
연명의료계획서는 의료진이 환자에게 연명의료의 고통과 무의미함을 설명한 후 의사와 환자가 함께 서명한다. 연명의료행위는 심폐소생술·혈액투석·수혈·체외생명유지술(ECLS), 항암제·혈압상승제 투여, 인공호흡기 착용 등을 말한다. 김민기는 의료진의 설명을 듣고 고민 후 서명했고, 그대로 하고 떠났다. 건강할 때 작성하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작성한 적이 없다고 한다.
김민기는 위기상황을 넘기자 "집에서 시간을 오래 보내고 싶다"며 퇴원했다. 이에 맞춰 의료진은 가정호스피스 서비스를 받길 추천했다. 의사·간호사·사회복지사 등이 집으로 가서 편안한 임종을 돕는 서비스이다. 이런 걸 제공하는 의료기관이 전국에 38곳(2023년 4월 기준)에 불과하다. 항상 대기자가 넘친다. 김민기도 기다리던 중이었다. 그는 응급실에서 하루 보냈지만 말기의 대부분을 집에서 보냈다.
김민기는 한창 전 의료진의 사전돌봄계획서 작성 요청에 응했다. 완화의료·호스피스를 비롯한 품위 있는 마무리 계획을 짜는 것이다. 그는 평소 스타일대로 "알겠다"며 덤덤하게 응했다. 생애 말기를 어떻게 보낼지 미리 뚜렷한 계획을 세워놓진 않았지만, 상황에 맞게 따라갔다. 순리대로 하자는 뉘앙스를 비췄다고 한다.
김민기는 21일 오후 눈을 감기 전 가족과 만났다. 김 팀장은 기자회견에서 "가족과 작별인사를 나눴다. 보고 싶은 가족들 기다리셨다가 다 만나고 가셨다"고 했다. 가족에게 "그저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는 임종 3~4개월 전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고 한다.
김민기는 지난해 가을 암을 발견했을 때 4기였다. 간 등으로 전이된 상태였다. 위암은 감소 추세인 데다 치료 성적도 쑥쑥 올라간다. 2021년 암 발생의 10.6%를 차지한다. 한때 부동의 1위였으나 지금은 갑상샘-대장-폐에 이어 4위로 떨어졌다. 치료 기술이 발전하고 조기 발견이 늘면서 5년 상대 생존율도 크게 향상됐다. 1995년 5년 생존율이 43.9%였고, 2021년에는 77.9%로 올랐다. 남자는 78.6%에 이른다.
그러나 김민기처럼 전이되면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국가암정보센터에 따르면 암세포가 위를 벗어나지 않은 '국한' 상태일 때 5년 생존율은 97.4%나 된다. 그러나 주위 장기나 림프샘으로 '국소 진행' 상태이면 61.4%로 떨어지고, 멀리 떨어진 장기까지 퍼진 '원격 전이' 상태가 되면 6.6%로 급락한다.
국한 상태에서 발견된 위암 환자가 65%, 국소 진행이 19.3%, 원격 전이가 10.9%(나머지는 모름)이다. 김민기는 원격 전이 상태였다. 좀 더 일찍 발견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조기 검진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순리-. 김민기의 마지막 키워드이다. 항암치료를 했지만 듣지 않자 중단했다. 인위적으로 목숨을 연장하는 연명의료도 거부했다. 서울대병원 완화의료·임상윤리센터유신혜 교수는 "고인은 할 수 있는 데까지 항상 최선을 다해 보고 싶어 했지만 그걸 넘는 것은 순리에 맞지 않는다고 여겼다"고 말한다. 주변 사람들의 평소 호의를 조의금으로 대신했다. 조화나 그것을 보낸 사람의 이름을 쓴 리본으로 빈소를 장식하지 않았다.
품위 있는 마무리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게 있다. 마지막 대화이다. 가족이나 가까이 지내는 주변 사람과 풀고 가야 한다. 많고 적음의 차이이지 이런 게 없는 사람은 없다. 암은 진행 과정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급사는 거의 없다. "고맙다" "사랑한다" 또는 "미안하다" "용서해다오"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하다. 연명의료를 하거나 요양병원 등에 입원해 있으면 대화가 거의 불가능하다.
김민기는 병원 대신 재택 임종을 선택하면서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주변 지인에게도 감사의 말을 전했다. 순수하고 맑은 웃음을 가진 사람답게 순리대로 마지막을 보냈다. 유신혜 교수는 "연명의료 같은 거 하지 않고 의미 있게 보내고 떠났다"고 말했다.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자신의 대표곡 '아침이슬'의 노랫말처럼 떠났다.>중앙일보. 신성식 복지전문기자
출처 : 중앙일보. 오피니언, 조의금도, 연명의료도 거부…'아침이슬'처럼 덤덤히 떠난 김민기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65632
사람은 누구나 죽은 뒤에 그 생전에 대한 평가를 받습니다. 높은 권좌에 앉았던 사람도, 모든 영예를 다 누린 사람도 죽은 뒤에 받는 평가가 바를 겁니다.
이제 영면하신 김민기 님에 대한 여러 얘기는 그가 살아 온 과정에 대한 것들입니다. 상업적으로 성공을 이루었는지는 제가 모르지만 운영하던 “학전”이 문을 닫은 것으로 보면 경제적으로 만만치 않았던 삶 같습니다.
“가족이 걱정이지”라는 말씀으로 보면 가족에게는 넉넉지 못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아침이슬」의 김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고인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다 고인의 명복을 빌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지금 권세 명예를 누리면서 세상을 우습게 보는 많은 사람들은 고인(故人)을 어떻게 생각할지 제가 알 수 없지만 정말 훌륭한 삶을 사신 분이 하늘로 갔습니다.
삼가 명복을 빕니다. 가족분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올립니다. 고인처럼 훌륭한 사람 몇 없는 것이 우리 대한민국입니다.
時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