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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3. 묵상글 ( 연중 제17주간 목요일. - 흡족할 때 부족하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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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3. 연중 제17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흡족할 때 부족하다.
“모세는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다 하였다.
마침내 둘째 해 첫째 달 초하룻날에 성막이 세워졌다.”
전에 저의 형제들이 무전 순례라고 해야 할 것을 무전여행이라고 말하곤 해서
제가 듣기에 불편했고 경우에 따라 제가 바꿔 써야 한다고 잔소리하곤 했지요.
그렇다면 여행과 순례의 차이점이 무엇이겠습니까?
쉽게 구분하면 여행이 자기가 가고 싶은 곳에 놀러 가는 것이라면,
순례는 거룩한 곳을 찾아다니는 것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는 곳, 곧 목적지가
자기가 가고 싶은 곳이냐, 아니면 하느님이 계신 곳이냐,
그것이 여행과 순례를 가르는 기준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아니 계신 곳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아니 계신다고 생각하는 곳에도 실은 하느님이 계시지요.
그러므로 여기에 하느님이 계신다고 믿고
거기서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성당을 순례하고 성지를 순례해도
하느님 현존의식이 없다면 말짱 꽝이지요.
왜 이런 얘기를 길게 했느냐 하면
저의 이번 포르치운쿨라 행진을 오늘 탈출기에 비추어 반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겉의 형식은 다 잘 갖췄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의 발자취와 우리 신앙 선조들의 교우촌을 방문했습니다.
매일 출발하면서 그날의 독서와 복음을 읽고 묵상하며 걸었습니다.
걷는 동안 제가 맨 뒤에 가며 고백성사나 영적 대화를 나눴습니다.
문제는 의식의 문제입니다.
오늘 탈출기를 보면 구름 기둥과 성막이 나오는데
저희는 구름 기둥을 따르고 성막을 정성껏 세우려는 의식이 부족했습니다.
구름 기둥을 따르려고 하기보다 스마트폰의 길 안내에 더 의존했습니다.
그러다가 잘 알려지지 않은 ‘한실 성지’라는 곳을
스마트폰의 길 안내를 받아 가다가 아주 혼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 혼자 속으로 이 점을 반성하였지요.
구름 기둥의 인도를 받지 않았던 점 말입니다.
다음으로 저희는 내 천막만 신경 썼지,
성막을 치는 것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먹고 마시고 내 육신 편히 쉴 공간이 마련된 것에 흡족하여
하느님 계실 곳을 우리 가운데 마련하려는 의식이 부족했습니다.
여기서 반성이 되는 것이,
흡족할 때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세상 것에 흡족할 때 우리는 천상 것에 부족하게 됩니다.
이것을 어제 마지막 나눔 때 반성하였지만 오늘 또 반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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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3. 연중 제17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하늘나라는 바다에 그물을 쳐서 온갖 것을 끌어올리는 것에 비길 수 있다.”(마태 13,47)
우리는 <마태오복음> 13장에 나오는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에서, 마지막 일곱 번째인 “그물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이 비유는 지금까지의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들에 대한 결론에 해당한다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있을 “심판”을 강조하시면서, 하늘나라의 비유를 마무리 지으십니다.
“하늘나라는 바다에 그물을 쳐서
온갖 것을 끌어올리는 것에 비길 수 있다.”(마태 13,47)
사실, 그물 속에는 “온갖 것”이 한데 섞여 있습니다. 마치 밀밭에는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듯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물이 가득 차면, 어부들이 그물을 해변에 끌어올려
좋은 것은 추려 그릇에 담고 나쁜 것은 내 버린다.”(마태 13,48)
“세상의 끝날”이 오면, 하느님의 천사들이 밀밭에서 가라지를 따로 뽑아 묶어서 불에 태워버리고 밀은 하느님의 곳간에 거두어들이듯이, 하느님의 사명을 받은 어부들이 바다에서 그물을 끌어 올려 쓸모없는 나쁜 고기를 추려내어 해변에 죽게 내버리고, 좋은 고기는 “하늘나라”라는 그릇에 담는다는 말씀입니다.
결국, 이 “그물의 비유”는 의인과 악인의 종국적인 결말이 준엄함을 말해줍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바다에 생명의 물을 부으시어 우리를 살게 하시고, 그 물속에서 생명을 모아들이십니다. 곧 우리를 살리려고 당신 생명의 그물에 몰아넣으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이미 당신의 그물 속에 들게 하셨습니다.
이는 욥을 찾아와 충고했던 친구(빌닷)의 말을 떠올려줍니다.
“모르겠는가? 나를 이렇게 억누르는 이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나를 덮어씌운 것이 그분의 그물이라는 것을!”(욥 19,6)
시편 작가도 이렇게 노래합니다.
“실족하여 죽을세라 염려하여 주시며 우리의 목숨을 되살려 주셨다.
~우리를 그물에 몰아 넣으셨으며 짐을 등에 지우셨다.”(시 66,10-11)
이처럼, ‘그분의 그물에 든 물고기’인 우리는 동시에, 하느님께서 “바다에 처져 있는 그물”, 곧 이 세상에 쳐놓은 그물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의 바다에 처져서 온갖 것을 끌어올리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의 비유 일곱 가지를 마치신 다음, 제자들에게 그 사명을 상기시켜주십니다.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 하늘나라의 교육을 받은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마태 13,51-52)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의 교육을 받은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러니, “하늘나라”의 의미를 깨닫고, 또한 가르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먼저’ 우리의 곳간에 ‘하늘나라의 복음’이 채워져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하늘나라는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마태 13,47)
주님!
하늘나라의 그물에 저를 몰아넣으소서.
당신 말씀의 그물로 덮어씌워 당신 뜻 안에 가두소서.
세상의 바다에 저를 던지시어, 당신의 그물이 되게 하소서.
온갖 고기를 모아들일 뿐, 제 입맛에 맞게 고르지 않게 하소서.
제가 그물일 뿐, 주인이 아니듯 고기의 주인도 아님을 잊지 않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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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3. 연중 제17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빈 콩깍지
저는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성모동산이 있는 아름다운 성당을 기억합니다. 지금은 아주 작게 느껴져도 그 멋스러움은 여전합니다. 지금은 주차장이 되어 있지만 텃밭에는 콩이 자라고 있었고, 들깨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밭모퉁이에는 가로등이 밤새 켜있었습니다. 가로등 가까이에 있는 콩과 들깨는 다른 것보다 훨씬 더 키가 크고 잎도 넓었습니다. 그러나 가을 추수 때에 보면 열매가 없었습니다. 겉은 화려했지만 정작 속은 빈 껍데기였습니다. 낮에는 햇빛을 견디고 밤에는 어둠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탓입니다. 결국 곳간에 채워진 것들은 겉보기에는 초라했던 콩이고 들깨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마태16,27).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겉모양으로 갚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행한 대로 갚아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인생 여정 안에서 겪을 것을 다 겪으면서 견디고 받아들인 삶의 모양을 헤아려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삶 속에 감춰져 있는 악이 나타나지 않고 그 사람이 존경받는다 하더라도 혹은 외적으로는 아무런 흠이 없고 유능한 사람으로 드러날지라도 그 사람의 참된 모습은 ‘마지막 날’ 추수 때, 개인적으로는 죽음 앞에 밝히 드러나므로 지금 누리는 것들이 헛된 기쁨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 처한 어려움들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 과정이라고 받아들이기를 희망합니다. 시편저자는 노래합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 126,5-6).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을 끌어올려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마태13,48). 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결국 마지막 날에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아주실 것입니다”(로마2,6). 사실 하늘의 그물은 빠져나갈 수가 없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삶의 여정이 이미 좋은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는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과거에 매이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이 세상의 삶은 실패도 없고 성공도 없습니다. 실패가 없다는 것은 지금 정신을 차려 알곡의 삶을 살면 된다는 의미요, 성공이 없다는 것은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우리 마음이 하느님 안에 평안히 쉴 때까지는 그 어디에서도 평안치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추수라는 심판의 두려움에 주눅 들지 말고, 새것도 꺼내고 낡은 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이 과거를 발판 삼아 오늘을 새롭게 하고 그리하여 복된 내일을 희망해야 하겠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가까운 사이라 해도 그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얼굴을 맞대고 서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마음은 천 개의 산이 있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뱃속까지 환희 들여다 보십니다(예레17,9). 사람이 하는 일이 제 눈에는 옳게 보일지라도 하느님께서는 그 마음을 헤아리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늘 마음속을 보시는 하느님 앞에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분 마음에 드는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맺는 모든 열매가 주님 그릇에 담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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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3. 연중 제17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년 동안 열심히 나오던 형제님께서 2달 정도 성당에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모두들 걱정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형제님은 기타 반에서 활동하였고, 본당 행사에 기타연주 봉사를 하였습니다. 사진에도 조예가 있어서 본당 행사에 사진을 많이 찍어 주었습니다. 저를 위해서도 사진을 찍어 주었고, 가끔은 액자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형제님이 성당에 나오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추측들도 있었습니다. 신자들이 보내는 문자를 확인하지만 답변은 없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단톡 방에서도 나갔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걱정이 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고 그래서 문자를 보냈습니다. 형제님의 답변은 교우들의 추측과는 달랐습니다. 5월부터 몸이 안 좋아서 병원에 갔지만 별 이상은 없다고 하는데 몸은 계속 안 좋아서 치료를 받는다고 합니다. 건강이 좋아지면 다시 나오겠다는 답장을 보냈습니다. ‘사는 맛과 사는 멋’이 있다면 그런 것 같습니다. 걱정하고, 공감하고, 이해하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용기를 줄 수 있다면 그것이 사는 맛과 멋입니다. 저의 문자에 답장을 보내준 형제님이 건강을 회복하여 밝은 모습으로 공동체와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안식년 중인 후배 사제가 신문사에서 머물고 있습니다. 냉장고에 보니 과일이 가득 있어서 물어보았습니다. ‘웬 과일이야?’ 후배 신부님에게 과일의 사연을 들었습니다. 작년에 사랑하는 딸을 먼저 세상에 보낸 부부가 있었습니다. 사목회장으로 봉사하였고, 매일 아침미사에 참례하였는데 딸을 먼저 하느님 품으로 보낸 후에는 상심이 크셨는지 한동안 두문불출하였습니다. 후배신부님은 어찌 그 이야기를 듣고 그 부부의 집을 방문하였다고 합니다. 부부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조카 이야기도 해 주었다고 합니다. 조카는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몸의 반이 마비가 와서 재활치료 중이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동병상련이라는 말처럼 신부님은 부부의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부부는 신부님의 방문에 큰 위로를 얻었다고 합니다. 저는 그 부부를 알았지만 제가 미사를 도와주는 성당의 교우분도 아니고, 직접 찾아가서 위로할 수 있는 성격도 못 되었기에 걱정의 마음으로 기도하였습니다. 후배 신부님은 안식년 중임에도, 전혀 연고가 없음에도 이웃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공감하였고, 직접 찾아가서 위로해 주었습니다. ‘사는 맛과 사는 멋’이 있다면 그런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이 지나가는 나그네를 극진히 대접했는데 그분들이 하느님이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100세가 되어서 아들을 얻었습니다. 후배 신부님은 이웃을 위로하고 과일을 받았습니다. 선한 일은 아주 작은 것이라도 행하고, 악한 것은 아주 작은 것이라도 행하지 말라는 말이 제 마음에 죽비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4)” 우리는 세례를 받아 신앙인이 되지만 그 신앙은 교회의 것이지 아직 나의 것이 되지 못합니다. 많은 분들이 성당에 가서 미사에 참례할 때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며 신자로서 거룩한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지만, 막상 성당 문을 나서면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는 신앙이 ‘교회의 것’으로 머물러 아직 나를 변화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성직자와 수도자도 예외가 아닙니다. 교회의 신앙을 자신의 것으로 한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를 믿거나 미사 참례와 기도의 의무 등을 준수하는 것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가족으로서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이며, 공동체가 공유하는 삶의 비전과 가치관에 동의하는 것이고, 공동체가 제시하는 윤리적인 삶을 자기 것으로 드러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앙이란 과거의 삶과의 결별을, 과거에 쫓았던 이념과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떠날 것을 요구합니다. 냉담을 접고 다시금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주일 미사에 다시 참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겠다는 다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은 새로운 삶이며, 과거와 결별하는 고통을 동반하는 삶이기도 합니다. 오늘 나의 신앙은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천사들에 의해서 의로운 삶을 인정받아 하느님의 대전으로 초대되는 삶인지, 쭉정이 삶이 되어서 마지막 날에 버려지는 신앙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당신 뜨락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천 날보다 더 좋사옵니다. 하느님의 집 문간에 서 있기가, 악인의 천막 안에 살기보다 더 좋사옵니다.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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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3. 연중 제17주간 목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가라지의 비유와 밭의 보물에 비유 그리고 오늘은 그물에 걸린 고기의 비유로 주님께서는 하늘나라를 우리에게 들려주십니다.
그물로 물고기 잡는 것 보셨나요? 저는 다행해 어릴 적 그물로 물고기를 잡는 모습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주님의 그물 안에는 수많은 물고기가 있습니다. 작은 고기도 있고 큰 고기도 있습니다. 못생긴 고기도 있을 것이고, 예쁜 색으로 치장한 고기도 있을 것입니다. 세상의 이치로 보면 큰 고기를 선호합니다. 또한 맛있는 고기가 더 높은 상품 가치를 가집니다.
그런데 이런 고기들을 분류하는 기준을 주님께서는 좋고 나쁨으로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즉 좋은 고기는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에 던져버린다고 말씀하십니다. 크다고 해서 좋은 고기라 볼 수 없고 작다고 해서 나쁜 고기라 볼 수 없습니다.
좋은 고기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만한 사람들이고 그릇은 하늘나라입니다. 나쁜 것들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고기란 어떤 고기일까요? 이런 질문에 대해서는 늘 같은 대답을 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좋은 고기란 바로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입니다. 이 말은 수백 번 수천 번을 해도 변하지 않는 말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아니고 큰사람도 작은 사람도 아니며 못생긴 사람도 예쁜 사람도 아닙니다. 그저 단 한마디를 지킨 사람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실행한 사람.
이러한 사람이 하늘나라라는 그릇에 담길 것입니다.
평가의 기준이 필요하다면….
사람은 누구나 실수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
삶이라는 시간을 처음 살기 때문입니다.
모두 초행길이기에 가끔은 길을 잘못 들어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실수는 사람의 평가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다만 실수 후에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그 사람의 평가 기준이 될것입니다.
진정한 신뢰는 제대로 된 반성에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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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3. 연중 제17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아시아 최고의 갑부이자 홍콩 재벌인 이가성 회장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회장은 30년 동안 자기 차를 운전해 준 운전사를 치하하고자 퇴직할 때 200만 위안, 우리나라 돈으로 약 3억 6천만 원의 수표를 건넸습니다. 그러자 운전사는 “필요 없습니다.”라며 그 큰돈을 사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실 회장님 덕에 이천만 위안(약 36억) 정도는 모아놓았습니다.”
회장은 깜짝 놀라면서 “자네 월급이 그리 많지 않을 텐데 어떻게 그런 거액을 모을 수가 있었지?”라고 물었고, 운전사는 대답했습니다.
“회장님께서 제 뒷자리에서 전화하시는 걸 듣고, 회장님이 땅 사실 때 저도 조금씩 사고, 주식 살 때 저도 조금씩 샀더니 어느새 그렇게 되었습니다.”
누구를 만나고 또 누구를 따르느냐의 중요함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이가성 회장보다 더 훌륭하고 더 힘센 주님을 만나고 또 따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잘 실천하고 있었을까요? 앞선 이야기의 운전사는 회장의 말을 듣고 따랐기에 부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야만 하느님 나라 안에서 진짜 부유하게 살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나에게 특별한 이익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이익보다, 또 순간의 만족보다 더 중요한 것을 쫓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하느님께서 직접 이 세상에 강림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쫓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이가성 회장의 운전사는 지금의 만족이 아닌, 은퇴 후의 만족을 쫓았습니다. 그 지혜로움을 우리도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주님께서는 군중에게,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처음부터 좋은 고기, 나쁜 고기를 고르지 않지요.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은 밖으로 던져 버린다고 하십니다. 이와 같은 모습이 세상 종말에 이루어진다고 하십니다.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떤 고기로 평가될까요? 그릇에 담길 좋은 고기일까요? 밖으로 던져 버릴 나쁜 고기일까요? 좋은 고기로 평가받는 모습은 주님의 뜻을 듣고, 주님의 뜻을 철저하게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그 순간에는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것을 쫓는 사람이 더 많은 이익을 얻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마지막 최후 심판 때에 우리 자리가 결정됩니다. 과연 어디로 가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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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타인의 시선에서 자신의 상을 찾는다. 처음에는 부모, 그다음엔 친구들의 시선에서, 그러다가 자신의 참모습을 비춰줄 하나뿐인 거물을 찾아 나선다. 사랑을 찾기 시작하는 것이다(베르나르 베르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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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3. 연중 제17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귀향(歸鄕)의 여정
-늘 새로운 시작-
제가 산책중 가장 많이 자주 카톡 사진에 담는 장면은 세 곳입니다. 하늘길, 십자로 중앙의 예수성심상, 불암산을 배경하고 정원을 앞에둔 제 집무실이 포함된 수도원 성전입니다. 어제 해질 무렵의 성전 풍경이 참 평화롭고 아름다워 여러분에게 선물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매님! 수도원 성전의 위로와 치유, 평화의 축복인사 받으시고 힘내세요!”
3월초 입원하여 5개월간 입원했다 7월말 퇴원한 참 고마운 자매에게 보낸 메시지이고 받은 답신입니다. 1998년부터 2022년까지 무려 25년간 제 시집과 강론집을 제본해다 준 참 한결같은 성녀(聖女)같은 분입니다.
“감사하옵니다. 신부님! 하루를 지내며 힘들었나이다.”
대부분 폭염에 생활고에 병고에 때로는 희망을 잃고 힘겹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자주 만나는 분들에게 드리는 권고입니다.
“성인이 되십시오.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하느님을 꿈꾸면서! 오늘 지금 여기서 부터가 중요합니다. 힘내십시오. 우리에게는 늘 새로운 시작이 있을뿐입니다.”
제가 경탄하는 두분입니다. 참으로 젊은이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겸손하고 지혜롭고 쾌활한 아랫집 87세의 노수녀님입니다. 병고로 힘들어도 매일미사에는 1등으로 성전에 입장하고 자세도 반듯하게 하루하루 온힘을 다해 한결같이 견뎌내고 버텨내는 수녀님입니다.
또 한분은 88세 노령의, 그러나 영혼은 영원한 청춘인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세계 젊은이날 행사에 참석차 42차 해외 순방길에 오른 교황님이 포르투칼 리스본에 도착하여 하신 연설중 한 대목입니다.
“나는 유럽을 꿈꿉니다. 서구의 심장인 하나의 유럽을! 갈등을 종식시키고 희망의 등불에 불을 붙이기 위해 그 엄청난 은사를 발휘하는 유럽을 꿈꿉니다. 직접적인 필요를 넘어 온전한 위대함을 바라보듯, 나는 청춘의 심장을 회복할 수 있는 유럽을 꿈꾸며 바라봅니다.”
“나는 유럽을 꿈꿉니다(I dream of a Europe)!”, 마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로 시작한 미국의 비폭력주의 흑인 민권 운동가이자 개신교 침례회 목사 마르틴 루터 킹의 연설이 연상될 정도로 참으로 멋진 영원한 청춘의 교황입니다.
바로 이 꿈을 지니고 자비하고 너그러운 영원한 청춘의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귀향의 여정에 올라야 합니다. 탈출기의 장면이 그대로 귀향의 여정을 상징합니다. 여정에 앞서 성막을 준비하는 위대한 지도자 모세의 모습이 감동적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오늘날 희망의 표징이듯 탈출기의 모세가 희망의 표징이 됩니다.
‘모세는 주님께서 명령한 대로 다 하였다’, 똑같은 말마디가 3차례나 반복됩니다. 주님의 충실한 종, 순종의 지도자 모세입니다. 하느님께서 친히 이스라엘 자손들의 여정에 함께 하시는 다음 묘사도 우리에겐 힘과 위로가 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 모든 여정중에, 구름이 성막에서 올라갈 때마다 길을 떠났다. 그러나 구름이 올라가지 않으면, 그 구름이 올라가는 날까지 떠나지 않았다. 그 모든 여정중에 이스라엘의 온 집안이 보는 앞에서, 낮에는 주님의 구름이 성막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귀향길의 순례 여정중 친히 성막의 이정표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심을 봅니다. 성막의 이정표와 같이 하루하루 순례 여정중의 이정표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전례요 똑같은 하느님께서 모세가 아닌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을 통해 친히 귀향의 여정중인 우리의 인도자가 되어 주십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그물의 하늘나라 비유가 참 적절합니다. 귀향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를 분발케 합니다.
“하늘 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그물이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을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세상 종말에도 그러할 것이다. 천사들이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가라지의 비유와 흡사한 종말 심판의 하늘 나라 비유입니다. 주님은 충격 요법의 표현을 통해 회개를 촉구합니다. 괴물이나 폐인이 아닌 성인의 삶을, 악인이 아닌 의인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비유를 읽을 때마다 “천망회회 소이불실(天網恢恢 疎而不失)”이란 노자에 나오는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바로 ‘천지자연의 법칙은 광대하여 엉성한 듯 보이지만, 악인에게 벌을 주는 일을 빠뜨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아무도 하느님의 최후심판을, 하느님의 그물망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며 우리가 죽는 날은 그대로 그물을 걷어 올리는 시간이겠습니다.
과연 나는 어디에 속할까요? 이래서 사막교부들을 비롯해 베네딕도 성인은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삶은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향의 여정입니다. 귀향의 여정을 일일일생 하루로 압축하면, 일년사계로 압축하면 어느 시점에 와 있는지 한 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 안남은 생애, 하루하루 환상이나 허영, 탐욕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물의 비유로 일곱 개의 하늘 나라 비유를 마치신 후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우리에게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묻습니다. 제자들처럼 “예!”하고 대답할 수 있을런지요? 평생 깨달음의 화두로 삼아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되어 하늘 나라를 살라는 비유들입니다.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참 좋은 분별력을 지닌 자유자재의 지혜로운 현자가 되어 살라는 것입니다. 또 “늘 옛스럽고 늘 새로운(Ever Old, Ever New)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바로 날마다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진인사대천명의 삶을, 분별력의 현자의 삶을 살게 해 줄 것입니다. 또 다음대로 살면 내일은 내일대로 잘 될 것이니 최후심판의 두려움은 저절로 해소될 것입니다. 늘 고백해도 늘 새로운 제 좌우명 고백기도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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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3. 연중 제17주간 목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의 품>
그분의 품 안에
내가 있으니
참 좋으나
그분의 품 안에
네가 있어서
안 좋다면
그분의 품 안에
네가 있으니
참 좋으나
그분의 품 안에
내가 있어서
안 좋다면
나의 품도 아니요
너의 품도 아니라
그분의 품 안에
나 있듯 너 있음을
너 있듯 나 있음을
헤아리는 거지
그분의 품 안에
지금처럼 영원히
함께 머물 수 있도록
나의 품도 너의 품도
그분의 품처럼
가꾸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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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3. 연중 제17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 두고서는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마태 13,44)
온갖 종류의 고기
이 그물은 바다의 파도 속으로 던져졌습니다. 파도는 세상 모든 곳에서 삶의 괴로운 일들 안에서 헤엄치는 사람들을 이리저리 뒤흔듭니다. 우리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는 이 그물이 가득 차지 않았습니다. 율법과 예언서가 기대했던 그물은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고 말씀하시는 분께서 완성하셔야 했습니다. 그물의 짜임새는 복음서와 사도들을 통해 전해진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늘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설명을 좀 더 덧붙이자면,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이라는 표현은 모든 민족이 부름 받은 사실, 곧 다른 민족의 부르심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리게네스-
✝️ 성인 / 영적 글 묵상✝️
50가지 예수 모습 / 안셀름 그륀
49. 번번이 눈에서 사라지는 예수
예수께서 매번 내 눈에서 사라지기 때문에 나는 늘 활기를 띤다. 내가 이 책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많이 소개했지만 예수님의 실제 모습을 모르는 것은 여러분이나 나나 마찬가지다. 예수님은 내가 소개한 여러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그런데 그분은 이런 모습으로만 보여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분은 이런 모습의 저편에 계시다. 하느님처럼 예수님도 어느 한 가지 모습으로만 이해할 수 없다.(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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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제5주간 영적 성찰 주간✝️
금주간 성서읽기 요한 1서 전체
금주간 생태 행동
<생태 성찰 주간>
생태 실천 성찰
개인 혹은 공동체 차원에서 먼저 하루를 정해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 목요일 성모님의 날✝️
당신은 하루에 얼마나 자기 자신이나 남에게 진실합니까?
진실은 진리와 같다. 진실은 하느님의 축복이다. 진실한 사람은 언제나 모든 걱정과 근심으로부터 자유롭다. 진실한 사람은 힘이 있다. 그러므로 진실을 말하라. 속이지 말라. 만일 진실을 말해서 어떤 사람이 피해를 입게 되는 경우가 있다면 차라리 침묵하라. 자신에게 솔직하라. 자신에게 솔직하고, 솔직하게 타인에게 표현하라. 물론 표현하는 방법은 배우고 훈련해야 한다. 물론 사람에게는 어떤 당황스런 상황을 면하기 위해 합리화하는 자아 방어 수단이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진정으로 자신에 대하여 깨어 있고, 솔직함의 훈련을 쌓아왔다면 그런 사람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환대를 받게 된다. 성인의 특징 중의 하나는 단순성 즉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진실성이라는 것을 잊지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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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소 평화 관상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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