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문각지(見聞覺知)
보고 듣고 깨달아 앎을 뜻하고, 견(見)은 안식(眼識), 문(聞)은 이식(耳識), 각(覺)은 삼식(三識)이고 지(知)는 의식(意識)으로 육식 작용을 가리킨다.
見 :볼 견
聞 :들을 문
覺 :깨달을 각
知 :알 지
견문각지(見聞覺知)는 불교 용어로 눈으로 빛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보고, 몸으로 촉감을 알고, 뜻으로 법을 아는 것을 말한다. 육근(六根)의 작용 곧 객관세계에 접촉하는 모든 작용을 총칭하는 말이다.
통상 선가(禪家)에서 성품의 작용을 지칭하는 구절로 사용된다. 벽암록(碧巖錄) 25에는 ‘네가 밖으로 산하대지가 있는 것을 보고, 안으로 견문각지 함이 있는 것을 보라.’는 내용이 나온다.
你外見有山河大地, 內見有見聞覺知.
니외견유산하대지, 내견유견문각지.
견문각지(見聞覺知)는 보고(見), 듣고(聞), 느끼고(覺), 안다(知)는 말이다.
여기서의 각(覺)은 깨달음이나 지혜를 뜻하는게 아니다. 그래서 각지(覺知)를 단순하게 깨달아 안다라고 표현 되어지면 안된다. 물론 느낌을 깨달아 라고 표현한다면 맞다.
또한 각지(覺知)는 깨달아서 안다는 하나의 연결된 의미가 아니다. 즉 따로 따로이다. 그러므로 견(見), 문(聞), 각지(覺知)가 아니고 견(見), 문(聞), 각(覺), 지(知) 네 종류이다.
이 견문각지(見聞覺知)는 반야경(般若經)과 대지도론(大智度論)을 보면, 생각과 업의 발생을 일으키는 것으로써 설명 되어지고 있다.
아래는 반야경에 나오는 사리불(舍利弗)과 수보리(須菩提) 존자(尊者) 사이에서의 대화이다.
사리불이 말했다. “인연이 없으면 업(業)은 생기지 않고 인연이 없으면 생각[思]도 생기지 않습니다. 인연이 있어야 업이 생기고 인연이 있어야 생각도 생깁니다.”
수보리가 말했다. “사리불이여, 참으로 그렇습니다. 인연이 없으면 업은 생기지 않고 인연이 없으면 생각도 생기지 않거니와 인연이 있어야 업도 생기고 인연이 있어야 생각도 생깁니다. 보고[見], 듣고[聞], 느끼고[覺], 아는[知] 법 가운데서 마음이 생기며, 보고 듣고 느끼고 알지 못하는 법 가운데서는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이런 마음에는 깨끗한[淨] 것도 있고 더러운[垢] 것도 있으니, 그러므로 사리불이여, 인연이 있기 때문에 업이 생기고 인연이 없는 데서는 생기지 않으며 인연이 있기 때문에 생각[思]이 생기고 인연이 없는 데서는 생기지 않습니다.”
위에서의 말씀처럼 견문각지는 생각을 일으키는 인연이라는 것이다. 보고, 듣고, 느끼고, 알지 못한다면 생각을 일으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견문각지에서의 각(覺)은 깨달음이나 지혜라는 뜻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생각을 일으키는 인연이 되는게 바로 견문각지이다.
아래는 대지도론(大智度論)에 나오는 용수보살(龍樹菩薩)의 설명이다.
업은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이며, 생각은 의업(意業)만을 말한다. 생각이야말로 진실한 업이고, 신업, 구업은 생각 때문에 업이라 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업은 네 가지의 법으로 인한 것이니,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見聞覺知]이다.
이 네 가지로 인하여 곧 마음이 생기며 이 마음은 인연에 따라 생기되, 혹은 깨끗하기도 하고 혹은 깨끗하지 않기[不淨]도 하다. 깨끗하지 않은 것은 죄업(罪業)이요, 깨끗한 것은 복업(福業)이다.
마음이 생긴걸 생각이라고 한다. 견문각지의 인연으로 마음이 생긴 것, 그것이 곧 생각이다. 마음이 외부와의 접촉으로 인해 움직여 동한 것이 생각이다. 그런 생각을 일으켜서 좋은 생각을 할 때는 선업을 짓고, 나쁜 생각을 할 때는 악업을 짓는다. 생각과 업(선업과 악업)과의 관계를 밝혀 놓으셨다.
견문각지(見聞覺知)에서 각(覺)이란 무엇인가?
위의 반야경과 대지도론에서의 내용처럼 견문각지는 생각을 일으키는 요소이므로 각(覺)을 생각으로 풀이하면 틀린 것이다. 또한 당연히 지혜나 깨달음을 뜻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고, 오히려 업력을 일으키게 하는 생각을 일으키는 주범인 것이다.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에서는 육근(六根) 가운데 비근(鼻根), 설근(舌根), 신근(身根)의 3가지 근 즉 코, 혀, 몸으로 대상의 냄새, 맛, 촉감을 지각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바로 각(覺)이라고 설명 되어진다. 그러므로 각(覺)을 느낀다 라고 해석하는게 가장 옳다고 여겨진다.
견문각지(見聞覺知), 보고, 듣고, 지각하여 즉 느끼고, 안다. 생각을 일으키는 가장 큰 요소는 보는 것과 듣는 것, 그리고 느끼는 것과 알아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여지고, 들려지고, 느껴지고, 알아질 때 생각, 즉 분별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해탈하려면, 좋다 싫다하는 생각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좋다는 생각을 일으키면 탐욕이 생기고, 싫다는 생각을 일으키면 분노가 일어난다. 본질이 공하므로 그것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기에 좋다 싫다는 분별을 일으키지 말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또한 인연화합으로 인해 보여지는 현상만 있을 뿐, 보는 자는 없고, 들려지는 현상만이 있을 뿐 듣는 자는 없고, 느낌만 있을 뿐 느끼는 자는 없으며, 앎만 있을 뿐 아는 자는 없다. 보는 자, 듣는 자, 느끼는 자, 아는 자가 있다고 여기는게 무명이다.
그런 주체로써의 자아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 치심이다. 어리석음. 무명이 곧 치심이다.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이 생각과 업의 발생이다.
일반적인 해석
일반적으로 널리 쓰이는 해석에 따르면, 견(見), 문(聞), 각(覺), 지(知)의 각각은 다음을 뜻한다. 이 해석은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주요 논서 가운데 하나인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 제121권에 나타난 견해와 일치한다.
견(見)은 6근 가운데 안근 즉 눈으로 대상의 색깔과 모양을 보는 것을 뜻한다.
문(聞)은 6근 가운데 이근 즉 귀로 대상의 소리를 듣는 것을 뜻한다.
각(覺)은 깨달음 즉 구경각 또는 지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6근 가운데 비근, 설근, 신근의 3가지 근 즉 코, 혀, 몸으로 대상의 냄새, 맛, 촉감을 지각하는 것을 뜻한다.
지(知)는 6근 가운데 의근으로 법, 즉 대상의 정신적 측면을 요별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견(見), 문(聞), 각(覺), 지(知) 가운데 견(見), 문(聞), 각(覺)은 전5식과 관련된 마음작용을 말하고, 지(知)는 제6의식 또는 그 보다 더 심층의 제7말나식 또는 제8아뢰야식과 관련된 의식작용을 말한다.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견문각지(見聞覺知)는 마음[心] 즉 6식 또는 8식이 외경(外境) 즉 객관세계를 접촉하는 것을 총칭한다.
잡집론의 해석
대승불교(大乘佛敎)의 유식유가행파의 주요 논서 가운데 하나인 안혜(安慧)의 잡집론에 따르면 견문각지의 해석은 일반적인 해석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잡집론에 따르면 견(見), 문(聞), 각(覺), 지(知)의 각각은 다음을 뜻한다.
먼저, 견문각지(見聞覺知)하여 파악한 의미[義]라는 낱말이 사용되는데, 잡집론에 따르면, 이것은 견의(見義), 문의(聞義), 각의(覺義), 지의(知義)를 통칭하는 낱말이다.
견의(見義)는 보아서 파악한 의미라는 뜻으로, 안근 즉 눈으로 보고 받아들인 것[眼所受]을 말한다.
문의(聞義)는 들어서 파악한 의미라는 뜻으로, 이근 즉 귀로 들어서 받아들인 것[耳所受]을 말한다.
각의(覺義)는 각(覺) 즉 심(尋)으로 파악한 의미라는 뜻으로, 견의와 문의에 응하여 자연히 저절로 생각[思]이 구성[搆]되어 파악한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심(尋)의 마음작용이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사(思)와 상응하여 저절로 대강 그린[搆] 것을 말한다.
지의(知義)는 지(知) 즉 사(伺)로 파악한 의미라는 뜻으로, 자신의 내부에서 받아들인 것[自內所受]을 말한다. 예를 들어, 사(伺)의 마음작용이 보고 듣고 저절로 대강 그려진 것을 사(思) 또는 혜(慧)와 상응하여 내적으로 의식적으로 세밀하게 살펴서 파악한 것 또는 그린 것을 말한다.
▶ 見(견)은 회의문자로 见(견)은 간자(簡字)이다. 안석궤(几; 책상)部는 사람을, 目(목)은 눈을 뜻한다. 見(견)은 눈의 기능으로, 보는 일을 말하는데, 이쪽으로 부터 보는 것을 視(시), 저쪽으로 부터 나타나 보이는 것을 見(견)으로 나누어 썼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나타날 현(現), 볼 시(視), 뵐 근(覲), 볼 관(觀), 뵐 알(謁), 나타날 현(顯),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숨을 은(隱)이다. 용례로는 보고서 깨달아 앎을 견해(見解), 듣거나 보거나 하여 깨달아 얻은 지식을 견문(見聞), 남에게 거절을 당함을 견각(見却), 실지로 보고 학식을 넓힘을 견학(見學), 남의 일을 보고 배워서 실지로 연습하는 것을 견습(見習), 사물을 관찰하는 입장을 견지(見地), 남에게 미움을 받음을 견오(見忤), 얼른 스쳐 봄을 별견(瞥見), 분실이나 유실을 당함을 견실(見失), 책망을 당함을 견책(見責),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한다는 견금여석(見金如石), 눈앞에 이익을 보거든 먼저 그것을 취함이 의리에 합당한 지를 생각하라는 견리사의(見利思義), 모기를 보고 칼을 뺀다는 견문발검(見蚊拔劍), 위험을 보면 목숨을 바친다는 견위수명(見危授命), 항상 잊지 않음을 이르는 견요어장(見堯於墻), 물건을 보면 욕심이 생긴다는 견물생심(見物生心), 나라의 위급함을 보고 몸을 바친다는 견위치명(見危致命) 등에 쓰인다.
▶ 聞(문)은 형성문자로 闻(문)은 간자(簡字), 䎹(문), 䎽(문)은 고자(古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귀 이(耳; 귀)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門(문; 입구)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聞(문)은 소리가 귀로 들어가다라는 말로 듣다, 들리다를 뜻한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들을 령/영(聆), 들을 청(聽)이다. 용례로는 듣고 보는 것으로 깨달아 얻은 지식을 문견(聞見), 도를 들음 또는 도를 듣고 깨달음을 문도(聞道), 들어서 얻음을 문득(聞得), 이름이 널리 알려져 숭앙되는 일을 문망(聞望), 부고를 들음을 문부(聞訃), 소문으로 전하여 들음을 문소문(聞所聞), 들어서 손해 봄을 문손(聞損),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람을 문인(聞人), 들어서 앎을 문지(聞知), 들어서 배움을 문학(聞學), 뜬 소문을 들음을 문풍(聞風), 향내를 맡음을 문향(聞香), 이름이 세상에 드러남을 문달(聞達), 들어서 앎 또는 듣고 앎을 문이지지(聞而知之), 한 가지를 들으면 열 가지를 미루어 안다는 문일지십(聞一知十) 등에 쓰인다.
▶ 覺(각)은 형성문자로 覚(각)의 본자(本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볼 견(見; 보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學(학)의 생략형인 𦥯(학, 각)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學(학; 배우다)과 見(견; 나타나다, 명확해지다)의 합자(合字)로 배운 것이 확실해지다, 깨닫다, 눈이 뜨이다의 뜻으로 쓰인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잠 깰 오(寤), 깨달을 오(悟), 깨달을 성(惺), 깨달을 경(憬), 느낄 감(感), 깨우칠 경(警)이다. 용례로는 벼슬아치가 잘못을 했을 때 들키기 전에 스스로 깨닫고 자수함을 각거(覺擧), 큰 덕을 깨달음을 각덕(覺德), 깨달아 얻음을 각득(覺得), 깨달음을 각래(覺來), 어떤 일을 이행할 약속으로 상대편에게 건네는 문서를 각서(覺書), 눈을 떠서 정신을 차림을 각성(覺性), 꿈에서 깸을 각오(覺寤), 도리를 깨달음을 각오(覺悟), 일의 기미 따위를 눈치 챔을 각찰(覺察), 잠에서 눈을 뜸을 각침(覺寢), 겉으로 드러남을 각로(覺露), 잘못이나 허물을 깨달음을 각비(覺非), 깨달아 앎을 각지(覺知), 아픔을 느낌을 각통(覺痛) 등에 쓰인다.
▶ 知(지)는 회의문자로 口(구; 말)와 矢(시; 화살)의 합자(合字)로, 화살이 활에서 나가듯이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는 뜻이다. 많이 알고 있으면 화살(矢)처럼 말(口)이 빨리 나간다는 뜻을 합(合)하여 '알다'를 뜻한다. 또 화살이 꿰뚫듯이 마음속에 확실히 결정한 일, 또는 말은 마음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알다, 알리다, 지식'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알 인(認), 살펴 알 량/양(諒), 알 식(識)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다닐 행(行)이다. 용례로는 도지사의 준말로 지사(知事), 아는 사람을 지인(知人), 알아서 깨달음을 지각(知覺), 이치를 알아 깨달음을 지료(知了), 자기의 분수나 본분을 앎을 지분(知分), 절에서 오고가는 손님을 안내하는 일을 지객(知客), 지식의 힘을 지력(智力), 미각으로 맛을 잘 앎을 지미(知味), 명령을 내려 알리어 줌을 지위(知委), 지식과 도덕을 지덕(知德), 깨달아 얻음을 지득(知得), 지혜로운 성품을 지성(知性), 마음이 서로 통하여 잘 앎을 지심(知心), 현명한 분별을 지려(知慮), 새로운 것을 앎을 지신(知新), 자세히 앎 또는 죄다 앎을 지실(知悉), 사물의 도리나 선악 따위를 잘 분별하는 마음의 작용을 지혜(知慧), 서로 마음을 아는 친한 벗을 지우(知友), 자기를 가장 잘 알아주는 친한 친구를 지기지우(知己之友),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한다는 지피지기(知彼知己),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사람을 지명인사(知名人士), 천명을 알 나이라는 지명지년(知命之年),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지부작족(知斧斫足), 사리에 밝은 사람은 지식을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함부로 지껄이지 아니한다는 지자불언(知者不言)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