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루아는 1811년 파리 남쪽의 소도시 부르라렌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유년시절을 보냈던 당시는 프랑스혁명기였고 갈루아는
프랑스 혁명기의 수학자들 중 가장 짧고 비극적인 생애 를 지냈습니다.
갈루아는 이른 나이에 대수방정식에 관한 논문을 썼으며
유명한 수학자들의 논문 탐독은 물론 2년은 공부해야 이해하는
르장드르의 기하학 책을 이틀 만에 독파한 천재 중 천재였습니다.
라그랑주와 아벨의 논문을 탐독할 정도로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갈루아는 그의 천재적인 수학적 재능과 반대로
성격이 과격하며 넘치는 자신감으로 타인을 설득할 인내심이 부족했습니다.
때문에 갈루아는 넘치는 수학적 재능에도 불과하고 그의 인성 때문에
고등 교육 기관인 에콜 폴리테크니크 입학시험에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갈루아는 에콜노르말에 다닐 때 당대 뛰어난 수학자들에게 논문을 보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1829년에 보낸 첫 논문은 코시가 제대로 보지 않은 채 폐기하였으며
1830년에 제출한 두 번째 논문은 푸리에가 심사 중에 죽어 그의 논문은 분실되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논문은 푸아송이 이해하기 힘들다며 심사를 거절하였습니다.
그의 논문은 5차 방정식의 해법에 관한 연구가 있었으며
프랑스혁명에 가담했던 갈루아는 옥살이로 고초를 겪기도 했습니다.
갈루아가 요절했던 이유는 권총 결투 때문이었습니다.
애정 문제로 권총 결투를 하게 된 갈루아는 권총 결투를 마지막으로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권총 결투 전날, 그는 자신이 죽을 운명인 것을 직감이라도 한 듯
친구인 슈발리에게 급히 편지를 썼습니다.
편지의 양은 31장으로 유언장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몇 편의 논문을 거절당해서인지, 갈루아는 자신의 논문을
독일의 야코비나 가우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내용도 편지에 담았습니다.
자신의 논문을 거절한 프랑스 수학자들에 대한 불신이 담겨있으며
편지 곳곳에는 이제 시간이 없다는 아쉬움이 담겨있었다고 합니다.
권투대결로 갈루아는 요절했으며 그의 유언대로 그의 마지막 편지를
포함한 다른 논문들은 당대 최고의 수학자들에게 보내졌습니다.
그가 남긴 논문은 5차 방정식에 대한 해법, 적분에 관련한 논문으로
현대 군론이라는 학문에 기초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