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權威)는 좋은 말이고 권위주의(權威主義)는 나쁜 말이다. 예를 들면, “채소가 몸에 좋은 먹거리이다”라는 말과 “그러므로 우리는 채소만 먹어야 한다”는 채식주의의 주장에서 느끼는 평가적 호불호와도 같다.
어느 개인이나 조직(또는 제도)가 지닌 이념이 그 사회 안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고 그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널리 인정되는 영향력을 지닐 경우, 이 영향력을 권위(權威, authority)라고 부른다. 개방된 사회, 성숙한 사회에서는 다양한 권위가 공존하며 서로 존중받는다.
그러나 권위주의(權威主義, Authoritarianism)는 어느 특정한 가치만을 권위로 인정하는 독선이다. 권위주의는 권위 그 자체에 의혹을 품거나 혹은 반발이 뒤따르기 마련인데, 이를 권위에 대한 모독이며 죄악이라고 정죄하는 사고방식 또는 행동 양식이나 심리적 태도를 지칭한다. 권위주의는 ‘장님 코끼리 논쟁’의 오류와 유사하다. 시각장애인이 코끼리의 어느 부위를 만졌는가에 따라 코끼리의 실상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런데도 한 맹인이 다른 이의 주장이 틀렸다고 우기는 상황이 권위주의가 지배하는 상황이다.
타인의 장점이나 재능을 알아보고 인정하는 사람은 성숙한 민주시민이며 인격자다. 그러나 미성숙한 인격은 타인의 장점을 오히려 깎아내리고 무시한다. 이는 자신의 열등감과 콤플렉스를 감추기 위한 허세일 뿐이다. 그래서 이러한 열등감과 콤플렉스는 개인이나 조직에서 냉소와 야료(惹鬧), 비난과 정죄 등 부정적 인간관계와 파당적 조직문화를 조성하는 불쏘시개이다.
나와 다른 전공이나 분야를 깎아내리는 사례를 보자. “영문학을 전공한 사람이 아무 영문도 모르고 살고, 법대를 나왔지만 제멋대로 살고, 상대를 나왔지만 아무도 상대하지 않고, 철학을 전공했다면서 철없이 산다.” 메시지와 메신저가 구분되지 않는 농담이지만 다른 사람을 무시, 폄훼하는 권위주의의 단면을 보여주는 우리네 모습일 수 있다.
문제는 권위주의적 발상과 태도를 지닌 사람의 지도력이다. 사회의 다양성과 시대의 변화무상함에도 불구하고 검증되지 않은 신념이나 주관적 체험을 절대화하여 힘으로 밀어붙일 때 상생하는 열린 사회는 무너지고, 하나의 가치에 굴종을 강요당하여 결국 인간의 자아실현과 행복추구가 무의미하게 되는 획일화된 사회, 전체주의의 사회로 갈 수밖에 없다.
지도력은 옳은 일을 옳은 방법으로 강력하게 추진하는 권위의 행사이다. 국가 경영에서의 지도력은 정치, 경제, 안보, 외교, 교육 등 모든 분야의 전문가들이 축적해온 경험을 기반으로 미래지향적 대안을 제시하도록 지도력을 발휘되어야 한다.
드디어 일본이 우리 먹거리의 생명줄인 반도체 산업의 핵심부품에 대한 수출규제 카드를 꺼냈다. 우리 정부가 ‘반일 프레임’을 정치화하자 일본은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이에 강력히 대응한다면서 일본제품 불매운동으로 맞설 모양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전성시대는 막을 내릴 것이다.
일제 36년의 슬픈 역사를 언제까지 감정적으로 대응해야 하나? 1876년 일본과 조선의 강화도조약 체결 후 1905년 을사늑약 체결까지 무려 30년 동안 당시의 위정자와 지식인들은 무엇을 했는가? 검증되지 않은 명분론을 두고 갑론을박하면서 국가와 그 권위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친명사대와 왕도패도(王道霸道)의 흑백논리, 숭문천무(崇文賤武)의 기풍 속에 당대 아시아 최강 일본을 왜구, 오랑캐로 무시하던 우리의 근시안적 권위주의적 발상과 태도를 반성하지 않는 한 비참하고도 슬픈 역사는 반복될 것이다.
- 철학문화연구소 <성숙의 불씨> 639호, 2019. 7.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