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32
3월17일[사순 제3주간 금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1TYrk_4TQ1o (최강 스테파노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언젠가 이 긴 고통이 끝나면 우리는 그분 정원의 나리꽃처럼 활짝 피어날 것입니다!>
호세아 예언자는 우리가 그릇된 길을 접고 주님께로 되돌아설 때, 주님께서 건네시는 은총과 축복이 얼마나 풍요롭고 황홀한 것인지에 대해서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 이스라엘을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레바논처럼 뿌리를 뻗으리라. 이스라엘의 싹들이 돋아나, 그 아름다움은 올리브 나무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으리라.”(호세아 예언서 14장 6~7절)
생각만 해도 든든하고 감사의 정이 솟구치는 표현입니다.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 모든 지역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스라엘의 많은 지역이 강수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부족한 강수량을 보완해주는 장치가 있습니다. 바로 새벽녘에 내리는 풍부한 이슬입니다. 지역에 따른 편차가 있기는 하지만, 많게는 연중 250가량 이슬이 내리기도 합니다.
이슬 그거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그 이슬로 말미암아 나리꽃도 살고, 올리브 나무도 살고, 무화과 나무도 살아갑니다.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 메마르고 척박한 우리네 인생길이지만, 마냥 죽어라 죽어라 하지 않습니다. 생각만 해도 든든한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의 버팀목이 되어 주십니다. 기묘한 방법으로 어떻게든 견뎌내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주시고, 환경을 만들어 주십니다.
언제나 이 쌩고생이 끝나려나... 힘겨워하시는 분들 많으십니다. 견뎌내야 할 이유와 가치조차 찾기 힘든 고통을 직면하느라 휘청휘청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너무 상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길고도 고통스런 현실을 눈여겨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잘 파악하지 못하지만, 주님 당신 특유의 묘한 방법으로 우리를 돕고 계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언젠가 이 긴 고통이 끝나면 우리는 그분 정원의 나리꽃처럼 활짝 피어나고, 한 그루 싱싱하고 푸르른 올리브 나무처럼 서게 될 것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
<스승과 신랑>
어떤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많은 축하객이 있었기 때문에 신랑과 신부는 참으로 행복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축하객 중의 한 부부가 데리고 온 꼬마 아이가 그 모습들을 지켜보고 있다가 불쑥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결혼이 뭐지?"
그 엄마는 어린아이가 결혼에 관해서 묻는 것이 조금은 의외였지만 웃는 얼굴로 대답했습니다. "결혼이라는 것은 여자와 남자가 서로 사랑을 하게 되어서 하는 거란다. 결혼해서 부부가 되면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의 잘못에 대해 감싸주고, 또 모든 힘든 일을 나누어서 도와주게 되지."
그러자 꼬마는 잠시 고개를 갸우뚱해 보였다. 그리고 엄마 아빠를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그러면 엄마 아빠는 결혼한 것이 아니구나!"
혼인은 하나의 “계약”입니다. 둘은 죽기까지 서로 신의를 지키고 존경하고 사랑할 것을 서약합니다. 어쩌면 이런 서약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위 꼬마의 말대로 겉만 부부생활을 하고 있지 실제로는 참 부부가 아닐 수도 있는 것입니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기 위해 얼마나 강한 의지를 갖췄는지 알기 위해서는, 결혼할 때 배우자에게 했던 맹세를 현재 어느 정도 열심히 그리고 진지하게 지키고 있는지 먼저 그 수준을 알아야 합니다.
결혼 상담가들과 심리학자들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대부분 부부는 결혼식에서 했던 서약을 거의 잊고 있으며, 또 기억한다 하더라도 시간이 갈수록 그것이 결혼 생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 같지는 않다고 말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결혼하는 부부들 대부분이 별 의미를 두지 않고 형식적으로 서약하기 때문입니다. 결혼식장에서 그들은 흥분과 긴장 속에서 아무 생각 없이 결혼 서약문을 한 번 따라 읽을 뿐입니다.
저의 지도 신부님이 어렸을 때, 아씨시에서 미사가 있어 복사를 서기위해 갔는데 한 성당에서 스무 명이 넘는 사제가 벽에 붙어있는 각자의 제단에서 동시에 미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성변화 하는 시간이라 이쪽에서 성변화 때 종을 땡 치면 그 쪽을 향해 인사하고 저 쪽에서 종을 치면 그 쪽을 향해 인사하고 그렇게 스물 몇 번을 제 자리에서 방향만 바꾸며 인사하면 미사를 스물 몇 대를 드린 것으로 간주되었답니다.
만약 이렇게 미사를 드리는 대수가 중요했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더 많은 공로를 주시기 위해 미사를 더 일찍 제정하셨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 때 단 한 번의 미사만을 하셨습니다.
구약의 전통에서도 하느님께 제물을 얼마나 바치고 얼마나 예식에 잘 참례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거룩함이 평가받았습니다. 그래서 사제들이나 율법학자, 바리사이들이 가장 거룩하게 여겨졌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반 서민들은 일을 해야 하므로 예루살렘에 일 년에 세 번씩 비싼 여행비용을 대고 올라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율법 학자 한 사람이 가장 중요하게 지켜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예수님께 묻습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전례의 참여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 하시지 않고 다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우리가 들으면 아주 당연한 말처럼 들리지만 당시 사람들의 시선으로는 놀라운 말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만약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면 돈이 없어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오지 못하는 사람들도 사제들이나 율법학자, 바리사이들보다 더 거룩해질 수 있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율법학자도 이것을 이해하고 이렇게 대답합니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보다 낫습니다.”
이 율법 학자도 전례에만 열심히 참여하며 스스로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이런 것들이 싫었는지 그렇게 대답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미사에 수천 번 참례한다고 그만큼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단 한 번이라도 예수님과 한 몸이 되고 그 사랑으로 이웃을 더 사랑하게 된다면 그것이 가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증가시키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비록 거룩한 전례일지라도 교만만 증가시키는 안 좋은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과의 관계는 얼마나 자주 전례에 참석하느냐에 있지 않고 그 분과 맺은 계약을 얼마나 잘 실천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그 계약이란 바로 “내가 너희에게 새로운 계명을 준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입니다.
부부가 참으로 부부가 되기 위해서는 혼인 서약을 잘 기억하고 지켜나가려고 해야 하듯이, 우리도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 분과 맺은 계약을 잘 지켜나가야 합니다.
내가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분과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분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배워야합니다. 그 분이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배워야 우리도 어떻게 사랑할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신랑인 동시에 ‘스승님’인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부활하신 주님께 “랍뿌니”, 즉 스승님이라 부른 것은 그저 스승이란 뜻이 아니라 “사랑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 분을 아는 것이 곧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몸만 신자인 사람들이 되지 않기 위해서 영성체 때 우리 몸과 한 몸이 되시는 그분을 사랑하기 위해서 그분이 사신 모습 그대로 살아갈 결심을 합시다. 왜냐하면 그분 삶 자체가 바로 우리가 지켜야 할 혼인 계약이기 때문입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LA 신문홍보 마지막 날은 ‘재의 수요일’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 한인성당으로 미사를 갔습니다. 프란치스코 성당은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신부님이 사목하는 성당입니다. 미사 전에 신부님은 수녀님과 함께 성무일도를 하였습니다. 교우 분들도 함께 하였습니다. 운율에 맞추어서 성무일도를 하는데 마치 천상의 소리 같았습니다. 신부님과 수녀님이 성무일도를 하는데 교우 분들이 자발적으로 함께 하였다고 합니다. 고급 음식점에서 본 음식을 먹기 전에 전식을 먹듯이 미사 전에 성무일도를 하니 미사의 분위기가 더 그윽하게 느껴졌습니다. 미사 전에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교우들이 함께 성무일도를 한다면 신앙생활의 멋과 맛이 더욱 깊어질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은 왜 이 거친 광야로 왔느냐? 화려한 것들은 궁궐에 있지 않느냐?”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교회의 위기는 거친 광야를 포기하고 화려한 궁궐에 머물 때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저는 미사 전에 하는 성무일도에서 ‘광야’를 보았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호세아 예언자는 “아시리아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지 못한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아시리아는 무엇을 상징할까요? 그것은 부, 권력, 명예를 상징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양다리를 걸칠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지만 나의 희생과 나의 봉사는 원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거룩해지기 보다는 행복해지기를 먼저 원하곤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택하여야 하는 것을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어머니는 아이가 밤새 울어도 짜증을 내지 않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아파서 병원엘 가야 할 때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서 먼 길 바래다주면서 기분나빠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몇 시간씩 공항 대합실에서 출장 갔다 오는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는 비행기가 연착되었다고 해서 지루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다림은 설렘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냅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이 가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예전에 즐겨 들었던 노래가 있습니다. 제목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오늘은 그 노래를 함께 묵상하고 싶습니다.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태초부터 시작된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만남을 통해 열매를 맺고/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당신은 사랑 받기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은 ‘온 마음과 온 정성과 마음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율법서와 예언서가 전해 주는 가장 큰 가르침입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12,28-34: 우리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니 그분을 사랑하라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28절) 예수님께서는 모든 율법서와 예언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두 계명에 달려있다고 하신다. 이 사랑의 계명은 어떻게든 선을 행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랑이 없이는 선을 행할 수 없다. 모든 계명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말하고 있는데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이러한 질문을 한 것이다.
예수님은 신명 6,4를 인용하면서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29절) 라고 대답해 주신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주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이다. 이 하느님은 살아있는 자들의 하느님이시며 인간을 지배하는 분이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30절) 하신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31절)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과 연결되어 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를 모른 체하지 않고, 돈을 자기 몸보다 더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만물의 주님께서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해 자비롭게 행한 것을 바로 당신께 해드린 것으로 여기심을 알고 있다. 그리고는 열심히 그 선행을 실천한다.
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함께 하는 것이 아니면 완전하게 표현될 수 없다. 이웃을 떠나서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고, 하느님을 떠나서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온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확증은 바로 우리 가운데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꾸준히 일하고 그들을 끊임없이 돌보아 주는 일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고 당신 계명을 지키는 것 외에 아무것도 우리에게 요구하시지 않는다고 하신다.
한 분이신 하느님에 대한 친밀한 사랑을 알고 이웃 사랑이 자기 사랑처럼 진실해야 한다고 고백하며,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다고 말한 율법학자의 대답은 주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우리도 자비를 가로막는 판단은 하지도 말고 듣지도 않아야 한다. 자비는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기 때문이다. 사순절의 모든 삶은 바로 이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어야 한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34절) 이 말씀은 율법학자가 하느님의 나라에서 아직도 떨어져 있음을 암시하는 말씀이다. 율법학자는 성경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 말씀을, 그 자비를 구체적으로 실행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아직 멀리 있는 것이다. 인간은 사랑하면서 상대를 닮아간다고 한다. 부부의 모습이 닮은 것도 서로의 사랑이 그렇게 만드는 것일 것이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갈 것이다. 이것이 사순시기의 삶이다.
=====================
[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가장 큰 계명>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29-31)
이 말씀은, “신앙생활과 계명 실천의 근본정신은 사랑이다.”라는 가르침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섬기는 일은 ‘사랑으로’ 해야 하는 일이고, 이웃과의 관계도 항상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 하느님의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신앙생활과 계명 실천의 근본정신이고, “사랑해야 한다.”라는 말씀은 ‘계명’입니다.> ‘계명’은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실천해야 하는 ‘하느님의 명령’입니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것이 명령한다고 해서 이루어질까?”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계명이니까(하느님의 명령이니까) 실천하긴 하는데, 하기 싫은 마음을 감추거나 누르고, 의무감 때문에 억지로 실천한다면,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명령’과 ‘사랑’은 서로 모순되는 말이 아닌가? 사실 어떤 일을 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쉬운 일이고, 그 명령에 복종하게 하는 것도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적당한 권위와 힘만 있다면…….
그러나 ‘진심으로’ 사랑하게 만드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마음으로부터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사랑해야 한다.”라는 계명 때문에 많은 사람이 본의 아니게 위선자가 되는지도 모릅니다. 사랑하기 싫어도 사랑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가르쳐야 하는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랑해야 한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지만, 그 계명을 실천해야 하는 우리로서는 우선 먼저 사랑에 관한 생각과 마음을 바꾸는 일부터 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을 향해서든 이웃을 향해서든 간에, 사랑하기 싫다는 마음은 왜, 어떤 경우에 생길까? 그것은 대부분 자신이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를 모르거나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때 생기는 일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적 없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의 사랑을 받은 적 없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가서, “아니다. 너는 하느님의 큰 사랑을 받고 있고, 이웃들로부터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라고 설득하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고, 그래서 본인이 스스로 깨닫고, 믿을 때까지기다릴 수밖에 없을 때가 많습니다.
어떤 일을 계기로,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깨닫고 믿는 순간, 인생 전체가 변화되고, 그 사람 자체가 변화되는 일은, 옛날이야기에만 있는 일이 아니고, 오늘날에도 흔히 있는 일입니다. 그러면 그 깨달음은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라는 말씀은, 겉으로 보이는 표현만 보면 “해야 한다.”라는 말만 보이지만, 사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그렇게 너를 사랑하시니” 가 뜻 속에 포함된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해서 나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랑을 받고 있고, 그 사랑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1요한 4,9-11)
<하느님과 예수님은 하나이기 때문에(요한 10,30),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든 것을 내주신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라는 말은,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기도 전에”, 또는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사랑을 말하기 전에 먼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믿음’과 ‘희망’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다.”라는 믿음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과 생명을 받기를 바라는 ‘희망’이 있어야,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고, 믿을 수 있고,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도 없고, 구원과 생명에 대한 희망도 없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아예 관심도 없습니다. 믿음과 희망이 없으면 사랑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라는 말은, “이웃 사랑 실천은 자신이 받는 하느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방법이다.”라는 가르침입니다.
두 사랑은 따로 떼어서 구분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을 통해서 나에게 옵니다. 내가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일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 실천을 통해서 실현되고, 이웃 사랑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만일에 하느님도 믿고 예수님도 믿고 구원과 생명을 희망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사랑 실천을 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면? 그런 종교나 종파를, 또는 개인을 우리는 ‘사이비’라고 부릅니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가장 큰 계명은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계명의 요약이면서 기본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계명을 통하여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시나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으시고, 모세를 통하여 전해진 십계명은 결국 이 두 가지 사랑으로 함축될 수 있습니다.
열 개의 계명에서 첫 세 계명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방법입니다. 첫째 계명은 성경에서 줄곧 강조하는 한 분이신 하느님에 대한 고백입니다. 둘째 계명은 주님의 이름으로 묘사되는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표현입니다. 하느님의 업적은 그분의 이름을 통하여 우리의 삶 안에서 실현됩니다. 세 번째 계명인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것은 주일의 의무를 채우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거룩하게 지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날마다 새로운 시간을 선물로 주시고 우리는 그 시간을 하느님과 함께 충실하게 지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다음의 일곱 계명은 인간 사이의 수평적인 차원에서 필요한 가르침입니다. 부모에 대한 계명은 ‘효(孝)’의 의미를 넘어 가정의 모든 구성원 사이의 존중을 말합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것 또한 남의 목숨을 빼앗는 행동에 대한 금지만이 아니라 생명을 존중하고 보호하며 촉진하라는 말씀입니다. 간음에 대한 가르침도 성(性)에 대한 넓은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는 것은 서로 일치하고 협력하라는 뜻입니다. 그 밖의 계명도 모두 글자 그대로의 의미보다 다른 이들의 권리와 명예, 가정과 재산을 존중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포괄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따라서 계명이 지니는 그 의미들을 되새기며 실천해야 합니다.
=====================
[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사랑이 무엇일까요?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일까요? 이 질문처럼 정답을 알 수 없는 질문도 없을 것입니다. 또한 이 질문처럼 모든 대답이 정답인 질문도 없을 것입니다. 각자 가진 사랑에 대한 정의와 방법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사랑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사랑법은 목숨을 다하는 사랑법입니다. 희생하는 사랑법입니다. 자신을 희생하면서도 모든 것을 내어놓고 싶은 사랑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온전히 모든 것을 내어놓을 수 없습니다. 때로는 어려움과 걱정 때문에, 지켜야 하고 함께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그렇게 모든 것을 다 내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내어놓고 희생하는 사랑법이란 맡기고 수용하는 사랑법일 것입니다. 없음의 두려움을, 빼앗김의 아픔을 바라보지 않고 하느님께 내어놓은 것을 다시 희망과 믿음으로 채워 나가는 사랑법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사랑법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 자신을 어떻게 사랑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면서도 왜곡된 방식으로 사랑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랑법만 옳다며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사랑법만을 요구할 수가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너를 사랑하는데 그 사랑을 몰라준다며 서운해하기도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려면 먼저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그 방법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사랑법이 옳은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방법만이 옳다는 교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사랑하려면 상대의 사랑법을 알고 그 사랑법으로 표현하며 다가가야 합니다. 더 많이 사랑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
[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가 선명히 드러납니다.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코 복음 12장 29절-31절)
첫째 가는 계명을 묻는 율법 학자에게 예수님께서 답하십니다. 이는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고 골자입니다. 사람에게 주어진 이 모든 의무는 그분이 한 분이신 하느님이심에서 출발합니다. 누구도 그분과 관계성에서 벗어나서는 생겨날 수도 존재할 수도 없지요.
이 세상과 사람을 창조하신 분, 양육하시고 돌보시는 분, 행복하라고 가르치시고 축복하시는 분, 그분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고 목적이십니다. 그런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 우리가 끌어모아야 하는 것들, 즉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은 한 존재의 전부를 가리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생명을 덜어내어 사람을 지으셨고, 사람은 온 존재의 힘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이끌립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의 모상이 영혼 깊이 새겨져 있으니, 하느님처럼 사람도 사랑하는 일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배반한 이스라엘과 주님 사이에 다시 화해의 분위기가 흐릅니다.
"저희 손으로 만든 것을 보고, 다시는 '우리 하느님!'이라 말하지 않으렵니다."(호세아 예언서 14장 4절) 이야말로 주님께서 바라시는 고백입니다. 하느님을 뒤로하고 다른 우상을 기웃거리며 유일신 야훼 신앙을 훼손했던 이들이 주님 앞에 돌아와 다시는 헛된 것에 한눈팔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그들의 마음을 고쳐 주고, 기꺼이 그들을 사랑해 주리라."(호세아 예언서 14장 5절) 주님은 그동안의 상처 입고 분노한 마음을 잊고, 속없이 백성을 반기십니다. 그분은 백성이 언제라도 돌아오기만 하면 그것으로 족하십니다. 그분 본성이 자비이시고, 그분 존재가 곧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내 백성이 내 말을 듣기만 한다면, 이스라엘이 내 길을 걷기만 한다면, 내 백성에게 나는 기름진 참밀을 먹이고, 바위틈의 석청으로 배부르게 하리라."(화답송)
우리가 당신과의 관계 안에 다시 들어가기만 한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양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기름진 참밀"은 주님의 몸인 지극히 거룩한 성체를 가리키고, "바위틈의 석청"은 바위이신 주님께서 머금고 계신, 꿀보다도 더 달콤한 생명의 말씀입니다.
말씀과 성체. 이 둘은 새 하늘 새 땅이 이루어지고,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모든 이가 천상 예수살렘에서 혼인잔치 음식으로 배부를 때까지 이 지상의 광야 순례길에서 우리를 지탱해 줄 소중한 양식이 될 것입니다.
"나는 네 사랑으로 족하다."고 주님께서 속삭이십니다. 나중에 성공해서 교회와 사회에 기여하겠다고, 이담에 부자 되면 많이 봉헌하겠다고 주님을 마냥 문 밖에 서서 기다리게 하면서 우상에게서 눈을 못 떼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속내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존재의 온 힘을 다 끌어모아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사랑은 우리를 하느님과 닮게 하고, 이웃과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는 영약입니다. 사랑이신 분 안에서 사랑이 되어 가고 있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선물로 드립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마르코 복음 12장 34절)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기본이 되는 것은 믿는 사람은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계명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그 계명에 근거하여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계명? 하면 십계명을 떠올립니다. 좀 더 요약하면, 사랑의 계명으로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3,34-3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한 14,15) 과연 나에게 첫째가는 계명은 사랑인가요? 내가 무엇을 판단하고, 행할 때 하느님의 계명이 기준이 되고 있느냐에 따라 나의 신앙의 현주소가 드러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적대자들에게 지혜롭게 대답하시는 것을 보고 율법학자 한 사람이 와서 예수님께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질문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0)는 것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는 이중계명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의도적으로 시험하였던 여러 부류의 종교지도자들과는 다르게 악의가 전혀 없이 열린 마음으로 질문하고 그 계명에 대하여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보다 낫습니다”(마르 12,32-33). 하며 동의를 표하는 율법학자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마르 12,34) 하고 이르셨습니다. 예수님의 적대자들 중에는 이렇게 마음이 열린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고 하였지 아직 들어간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경기에서 골인한 것과 골인할 뻔한 것은 분명 다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자캐오 이야기(루카19,1-10)를 기억하시지요? 예수님께서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고 하셨습니다. 율법학자에게 말씀하신 것과 다른 점이 무엇일까요? 율법학자는 학자답게 이론으로 알고 있었고, ‘훌륭하십니다. 과연 옳은 말씀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끝났지만, 자캐오는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하며 즉시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그야말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7)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에 충실하여 하느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열매 맺는 삶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실천함으로써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이 이중계명의 사랑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십계명의 핵심정신이고, 동시에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의 핵심 정신이기도 합니다. 사실 예수님의 전 생애는 하느님 아버지와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이웃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헌신으로 요약됩니다.(손희송)
사랑은 사랑을 낳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한 그 사랑으로 사랑하여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더 많아진다면, 그리하여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만날 수 있다면 그것이 열매 맺는 삶입니다.
특별히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세례성사에로 인도되어 구원을 선물로 얻는다면 그보다 더 큰 열매가 어디 있겠습니까? 나의 구원이 소중한 만큼 이웃의 구원에도 열려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분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1요한 5,3)
그러므로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많이 사랑합시다.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1요한 3,18) 합시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1요한 4,12) 그러므로 실행함으로써 열매 맺는 사랑에 목말라 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머리로 알고 있는 것과 그 ‘앎’이 온몸 세포 하나하나에 배어 있는 것과는 분명, 다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곤도 마리에의 ‘정리의 힘’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곤도 마리에는 세계 최고의 정리 컨설턴트로 유명한데, 정리하지 못함을 ‘버리기’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솔직히 옷장, 책상 서랍, 책꽂이에 있는 것들을 과감하게 버리기란 쉽지 않습니다. ‘살을 조금만 빼면 이 옷을 입을 수 있을 텐데….’라는 마음으로 옷장에 고이 모셔둔 옷 중에는 20년도 더 넘은 것도 있었습니다(다행히 성김대건성당으로 오면서 드디어 버렸습니다). 책도 그렇습니다. ‘언젠가는 읽을 거야.’라는 마음으로 책꽂이 안에서 먼지가 쌓은 채 있기도 하지 않습니까?
곤도 마리에는 옷걸이에 걸린 옷, 서랍 안에 들어 있는 것, 신발장에 놓은 신발 등 모든 물건을 꺼내서 바닥에 쏟아버리라고 합니다. 산더미처럼 쌓인 물건을 바라보면 그렇게 귀하게 보이지 않게 되고, 내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내게 필요한 것을 찾으라고 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옷을 사지 않듯이 사이즈가 맞지 않는 옷 등은 과감하게 선택에서 제외하고, 책 역시 지금 사지 않을 것 같은 책을 선택에서 제외하라는 것입니다.
머리가 복잡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하고…. ‘언젠가는 해야 하는데….’라면서 계속 후회할 일이 늘어날 뿐이었습니다. 생각을 정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때로는 생각을 한군데에 쌓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차마 버리지 못한 생각, 내가 선택하지 않을 생각을 버려야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가 분명해집니다. 죽어도 해결될 수 없다고 생각되는 문제를 선택하지 않겠지요. 순간의 만족만을 위해 큰 비용을 치러야 하는 것도 선택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질적인 선택보다 영적인 선택의 중요성도 알게 됩니다.
주님께서도 당시 사람들의 이런 복잡한 상태를 잘 아셨던 것 같습니다. 수많은 계명의 홍수 속에서 어떤 것을 우선순위에 두어야 하는지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주 명확하게 그리고 아주 간단하게 정리해주셨습니다. 그것도 딱 두 개로 말입니다. 즉,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사랑을 먼저 생각하면,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가 분명해집니다. 그리고 사랑의 계명에 충실한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잡한 마음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 마음을 주님 앞에 모두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그 마음 중에서 사랑의 실천에 해당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마음의 평화와 함께, 하느님 나라를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랑>
마르코 12,28ㄱㄷ-34 (가장 큰 계명)
그때에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사랑>
온 누리에
단 하나뿐인
하느님과
온 누리에
단 하나뿐인
당신과
온 누리에
단 하나뿐인
나를
누구나
대신할 수 있는
여럿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오직 하나로
품는 것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분심의 사랑>
오늘 율법 학자가 주님께 첫째가는 계명에 대해 여쭙니다. 이에 주님께서는“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라고 답합니다.
그래서 내게는 무엇이 첫째가는지 돌아봤는데 어제 미사 드리면서 들었던 느낌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어제 그제 저는 미사를 봉헌하면서 미사의 신비에 깊이 잠길 수 있었고 그만큼 많은 은총을 받았는데 어제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기를 바라기보다 내 이름이 빛나기를 바라고, 아버지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시는 것보다 내가 받길 원한다는 반성을 했습니다.
이것은 요즘 제가 온라인 영성 학교에서 프란치스코의 권고를 강의하는데 그 강의를 준비하면서 권고 내용이 저에게 영향을 미친 덕분입니다.
어쨌거나 어제 아버지보다 제가 사람들의 사랑을 받길 원한다는 성찰에 이어 오늘은 하느님 사랑보다 사람의 사랑을 제가 받길 원한다는 성찰을 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보다 제가 사람의 사랑을 더 원하지는 않지요.
그런데도 제가 그런 성찰을 한 것을 보면 이유가 있을 텐데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사람을 하느님보다 더 사랑한 것은 아니지만 하느님을 사랑한다면서 사람의 사랑도 제가 원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은 한 분이시라는 말씀을 우리는 다각도로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 외에 다른 신이 없다는 뜻이 그 첫째 의미이고, 삼위시지만 한 분이시라는 것이 두 번째 의미지만 한 분이시기에 하느님만 사랑하라는 것도 우리가 새겨야 할 의미입니다.
물론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이 하느님만 사랑하라는 것은 하느님 사랑으로만 만족하라는 뜻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니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지요. 베푸는 사랑은 하느님보다 이웃에게 더 하고, 받는 사랑은 인간보다 하느님에게 더 하라는 뜻이며 거듭 얘기하지만, 하느님 사랑 외에 다른 사랑으로 만족치 말라는 뜻이지요.
그러므로 ‘마음을 다하여’의 뜻도 이런 것일 겁니다. 마음의 한 부분을 다른 사랑을 위해 남겨두지 말고 온 마음으로 사랑하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기도할 때 분심分心이 든다고 하지요. 하느님께 향하는 마음과 다른 것으로 향하는 마음으로 마음이 나뉘는 것인데 하느님 사랑도 이렇게 분심이 되어서는 안 되고 온 마음으로 사랑해야겠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사랑이 하느님 사랑보다 더 만족을 주기에 인간의 사랑을 더 사랑하는 우리가 되지 말아야 함은 물론 하느님을 더 사랑하는 정도로도 안 되고 하느님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분심의 사랑은 애초에 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받는 오늘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사랑이 참 어렵고 그래서 우리는 천국 직행이 아니라 사랑의 정화를 위해 연옥을 거쳐야 하나 봅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개의 은총, 회개의 축복, 회개의 여정>
- 경천애인(敬天愛人) -
파스카의 계절, 회개의 계절, 사순시기 봄입니다. 인동초(忍冬草)처럼 겨울 추위를 이겨낸 파스카의 봄꽃들이라 저리도 청초한가 봅니다. 일찍 피는 파스카의 봄꽃들은 유난히도 희망을 상징하는 노란색이 많습니다. 민들레, 꽃다지, 개나리, 수선화, 의사리, 산수유 등 모두가 노란색입니다.
엊그제 맨처음 발견한, 때되어 늘 거기 그 자리에서 피어난 꼭 1년만에 피어난 샛노란 민들레꽃이 참 반가웠습니다. 민들레꽃하면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생각나는 두편의 시입니다. 당시 써놓고 크게 위로를 받았던 민들레꽃에 관한 시입니다.
“민들레꽃
외롭지 않다
아무리
작고 낮아도
샛노란 마음
활짝 열어
온통
하늘을 담고 있다.”-2000.4.24.
흡사 회개의 표징처럼 보이는 하늘을 가득 담고 있는듯한 청초한 샛노란 민들레꽃입니다. 아마 하늘을 가득 담고 있는 회개한 영혼보다 아름다운, 행복한 영혼은 없을 것입니다. 역시 오래전 신축하기전 옛 숙소 뒤뜰 마당 가득 피어난 민들레꽃들을 보며 감동에 젖어 썼던 시의 추억도 생생합니다.
“어!
땅도 하늘이네
구원은 바로 앞에 있네
뒤뜰 마당
가득 떠오른 샛노란 별무리
민들레꽃들!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 수 있겠네”-2001.4.16.
저절로 회개의 축복으로 이끄는 회개의 표징같은 파스카의 봄꽃 민들레꽃입니다. 제 주변에는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아가는 꽃같이 아름다운 회개한 영혼들이 참 많습니다. 엊그제 받은 감미로운, 강렬한 회개의 표징처럼 느껴지는 카톡 편지에 감동했습니다. 내용이 봄꽃처럼 향기롭고 아름다워 거의 전문을 인용합니다.
“주옥같은 신부님의 말씀으로 하루를 엽니다. 감사합니다. 실시간으로 신부님의 말씀을 받아 읽으니 말씀이 살아계신 듯 하루종일 제 마음속에 살아 움직임을 느낍니다. 맨처음 신부님과 면담 때가 생각나네요. 온몸이 귀가 되신 듯, 저의 말을 경청해주시는 신부님의 모습 그자체로 놀랐고, 저의 힘든 마음에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얼마전 피정갔을 때도 생각이 나네요. 짙은 안개가 낀날 아침, 신문을 가지고 걸어오시며, 노래를 부르시는 신부님 얼굴과 모습에서 풍겨나오는 기쁨이, 마주쳤던 저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어요. 한폭의 그림처럼 기억이 되요. 신부님 감사합니다.”
정말 파스카의 봄꽃처럼 아름답고 감동적인 진솔한 편지입니다. 아름다움이 우리를 감동케하고 회개에로 이끌어 아름다움 자체이신 하느님을 만나게 합니다. 오늘 제1독서 호세아 예언서에 나오는 회개한 영혼과 회개의 축복은 얼마나 아름답고 감동적인지요! 호세아서의 마무리가 해핀엔드로 끝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 너희는 죄악으로 비틀거리고 있다. 너희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주님께 돌아와 아뢰어라. ‘죄악은 모두 없애주시고, 좋은 것만 받아 주십시오. 이제 저희는 황소가 아니라, 저희 입술을 바치렵니다. 아시리라는 저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
회개에 응답해 하느님께 돌아온 영혼들에게 쏟아지는 다음 하느님의 축복이 참 놀랍고 감미롭습니다. 호세아 예언자는 하느님 사랑에 정통한 사랑의 신비가이자 사랑의 시인입니다. 회개한 영혼들이 바로 그러합니다. 말그대로 회개의 축복입니다.
“그들에게 품었던 나의 분노가 풀렸으니, 이제 내가 반역만 꾀하는 그들의 마음을 고쳐 주고, 기꺼이 그들을 사랑해 주리라.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 이스라엘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레바논처럼 뿌리를 뻗으리라. 이스라엘의 싹들이 돋아나, 그 아름다움은 올리브 나무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으리라.”
바로 회개한 영혼들의 아름다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예언자의 글이 참 감동적입니다. 그대로 회개한 영혼들에게 쏟아지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참으로 회개한 영혼들에게 선사되는 회개의 축복이 분별의 지혜임을 다음 결론같은 말씀이 알려 줍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리리라.”
지혜로운 사람, 분별있는 사람이 바로 의인입니다. 의인들은 주님의 길, 올곧은 길을 따라 걸어갑니다. 바로 사랑의 길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사랑의 이중계명입니다. 참으로 회개한 영혼들에게 뚜렷이 부각되는 사랑의 이중계명, 경천애인의 진리입니다. 주님 친히 말씀하십니다. 첫째가는 계명을 물었는데 하나가 아닌 둘을 제시합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습니다. 정말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본질적으로 추구할 일은 회개와 더불어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실천일 뿐입니다. 회개와 경천애인하기에도 턱없이 짧은 세월인데 우리는 얼마나 많이 헛된 것들에 시간을 탕진하며 삶의 길을 잃고, 삶의 중심을 잃고, 삶의 의미를 잃고, 삶의 목표를 잃고, 삶의 방향을 잃고, 자기를 잃고, 바로 하느님을 잃고 무지와 허무속에 뿌리없이 방황하고 표류하며 살아가는 지요!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정말 불행이자 비극은 하느님과 자기를 잃고 지내는 무지와 허무의 헛된 삶입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은회개를 통해 사랑의 하느님을 만나는 길뿐입니다. 하루하루 '참으로 사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바로 부단한 회개를 통해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아는 겸손과 지혜의 삶이겠습니다. 회개와 더불어 온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는 것이겠습니다.
파스카의 봄철, 은총의 사순시기요,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발견되는 회개하여 당신께 돌아오라는 회개의 표징들입니다. 회개의 은총, 회개의 축복, 회개의 여정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경천애인의 실천으로 입증되는 회개의 진정성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한결같이 회개의 여정, 사랑의 여정에 충실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 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마르 12,28-34)
<누가 내 이웃인가?>
오늘 복음(마르12,28-34)은 '가장 큰 계명'에 관한 말씀입니다. 어떤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12,29.30)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31)
율법 학자는 첫째가는 계명 하나를 물은 것 같은데, 예수님께서는 '두 개의 계명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계명'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는 예수님의 다음 말씀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눈에 보이는 나의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해 말씀하시자, 그 율법 학자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마르 12,32.3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마르 12,34)
'지금 머물러 있는 나의 삶의 자리가 하느님의 나라인가?' '우리나라가, 우리 가정이, 우리 공동체가 하느님의 나라(천국)인가?'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rp-sSR4XJXo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첫째는 이것이다."(마르 12, 29)
온몸을 던져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또한
한 분이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계명 중에
가장 첫째가는
계명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상관없는 사랑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랑이
누구의
것인지를
확실히
알게 됩니다.
단 한 번도
하느님을
사랑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사랑을 알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할 때
체험하게 되는
참된 자유이며
참된 행복입니다.
사람은 사랑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를
만나게 됩니다.
하나밖에 없는 것이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사랑으로
돌아가는 사순입니다.
우리의 길이란
하느님과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랑의 길입니다.
사랑의 길은
지금 여기에서
시작하는
뜨거운
길입니다.
첫째가는
가장 좋으신
하느님 사랑이
우리 안에 있기에
사랑을 기쁘게
실천합니다.
하느님 사랑이
오늘도 우리를
살게 합니다.
사랑은
사랑할 때만
알게 되는
사랑의 힘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
부족한 우리의
사랑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
(2)
“첫째는 이것이다”. (마르코 복음 12장 29절) 사랑이 있다. 첫째는 사랑이다. 있는 그대로의 하느님을 만나는 사랑의 새 아침이다. 온 마음을 다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이다. 우리의 본분이란 첫째도 마지막도 온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는 것이 참된 회개이며 사랑이다. 회개와 사랑은 끊어질 수 없다. 하느님을 위해 살아가는 삶이 사랑의 참된 길이다. 사랑의 최종 목적지는 언제나 하느님이시다. 이 사랑의 관계가 사랑의 삶으로 이어진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일깨워주신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사는 삶이다. 하느님 체험은 사람이 되어오신 예수님을 우리가 체험하는 것이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를 치유한다. 하느님 사랑 안에 이웃 사랑이 있다.
사랑은 나눔이다. 나누지 않고서는 풍요로울 수없다. 하느님 사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사랑의 자녀들이다. 모든 것 중의 첫째는 하느님을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다. 사람의 역사는 사랑의 역사이다.
사순 시기는 우선적으로 우리의 사랑을 회개하는 것이다. 사랑이 하느님을 향할 때 사랑은 기쁨이 되고 기도가 된다. 사랑의 원천으로 이끄는 십자가에서 다시 사랑을 배우는 은총의시 간이다. 더 사랑한 주님이시다. 사랑이 스승이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