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 없이 걷고 싶다”… 맨해튼 한인 여성 피살에 뉴요커들 충격
차이나타운 피살현장 가보니
14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 맨해튼 차이나타운의 한 공원에서 전날 발생한 30대 한국계 여성 피살 사건을 규탄하는 집회가 열렸다. 아시아계 등 뉴욕 시민 100여 명이 모여 증오 범죄에 대한 철저한 수사와 예방 대책을 촉구했다(오른쪽 사진). 살인 사건이 벌어진 피해자의 아파트 앞에 폴리스라인이 설치된 가운데 경찰차가 주차돼 있다. 뉴욕=유재동 특파원
14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 맨해튼 차이나타운의 한 6층 아파트 앞 나무 밑에는 노란 장미 등 꽃다발 10여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아파트 입구에 ‘범죄 현장(crime scene)’이라고 적힌 테이프가 둘러져 있었고 경찰차도 여러 대 있었다. 전날 새벽 이 아파트에서 30대 한국계 여성이 살해됐다. 노숙인 아사마드 내시(25)는 귀가하던 크리스티나 유나 리(35)의 뒤를 쫓다가 집으로 따라 들어가 일면식도 없던 그를 잔인하게 살해했다.
○ 아시아계 “안전하게 지낼 권리” 호소
이 아파트 내부 복도는 두 사람이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비좁고 어두웠다. 건물 주변에 간판들이 부서진 채 방치돼 있었고, 곳곳에 그라피티가 어지럽게 그려져 있었다. 얼룩투성이인 외벽엔 녹슬 대로 녹슨 화재 대피용 비상계단이 보였다. 이 동네는 맨해튼 내에서도 주거 환경과 치안이 좋지 않고 부랑자가 많기로 유명한 곳이다.
이곳에서 만난 30대 여성 필링 주닉 씨는 이미 많이 울어서 눈가가 벌게져 있었다. 브루클린에 산다는 그는 “피해자와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같은 여성인 데다 나이도 비슷해서 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이제는 어린 아들과 외출하는 것도 무섭고 거리를 걷다 보면 누가 자꾸 따라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아시아계로 보이는 그는 ‘나는 두려움 없이 거리를 걷고 싶다’는 손팻말을 들고 인근 공원에서 열린 증오범죄 규탄 집회에 참석했다.
대만계 미국인인 벤저민 웨이 씨는 “얼마 전 친한 친구가 흉기에 찔린 것을 계기로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며 “애틀랜타 총격 사건에서도 그랬지만 (일부 미국인들이) 아시아계 사람들에게 팬데믹의 책임을 지우고 있다”고 토로했다.
증오범죄 집회에서 발언을 한 중국계 정치인 수전 리는 “당국에 간곡히 호소한다. 우리는 도시에서, 집에서 안전하게 지낼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기자에게 자신도 지난해 2월 맨해튼 지하철역에서 증오범죄를 당한 적이 있다고 했다. 참석자들은 “참을 만큼 참았다”, “증오범죄의 주된 가해자인 노숙인과 정신이상자에 대한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 다시 기승부리는 아시아계 대상 범죄
뉴욕 경찰은 전날 용의자 내시를 체포해 살인 및 강도 혐의로 조사 중이다. 이번 범행이 아시아계를 노린 증오범죄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캐시 호컬 뉴욕 주지사와 에릭 애덤스 뉴욕시장은 이번 사건의 피해자가 아시아계임을 강조하면서 연대 의지를 밝혔다.
피해 여성이 수석 프로듀서로 일했던 디지털 음악 플랫폼 회사 스플라이스는 이날 성명을 내고 “크리스티나는 아름다운 작품을 만드는 데 항상 헌신해 왔다. 가슴이 미어진다”고 애도했다. 크리스티나는 뉴저지주 럿거스대를 졸업한 뒤 음악과 미술, 패션 등 분야에서 경력을 쌓아왔다. 사건이 난 아파트에 입주한 지는 1년이 채 안 된 것으로 알려졌다.
아시아계 대상 범죄는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다. 지난달에는 맨해튼 타임스스퀘어 지하철역 승강장에서 노숙인이 40대 중국계 여성을 선로로 떠밀어 숨지게 했다. 브루클린에서 식료품점을 운영하던 60대 한인은 가게에 난입한 남성에게 폭행을 당했고, 지난주에는 뉴욕 주재 50대 한국 외교관이 거리에서 주먹으로 얼굴을 맞아 코뼈가 부러졌다. 외교관을 때린 범인은 아직도 잡히지 않았다.
뉴욕 한인회는 맨해튼에서 증오범죄 규탄 집회를 연다고 15일 밝혔다.
뉴욕=유재동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