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고향
권혁웅
송림원에서 구미호와 오향장육 먹는다
빙글빙글 도는 회전식탁 앞에서
오래돼서 삐걱대는 윤회전생 앞에서
회향, 계피, 산초, 정향, 진피
인생의 아니 호생(狐生)의 독한 맛을 다 안다는 표정으로
우리는 고량주를 홀짝이고
내가 이렇게 된 건 행운의 편지 때문이야
아흔아홉 명에게 편지를 보내야 했는데
편지지가 한 장 부족했어
창밖에는 죽은 자의 골분(骨粉)이 흩날리고 있었다
구미호는 춥다고
아홉 개의 꼬리를 방석 대신 깔고 앉아서
나나 너나 뭐가 달라,
너도 생간 좋아하잖아?
구미호의 눈은
접시 바닥에 깔린 오이처럼 금세 축축해지고
이 집에선 해삼주스도 파네?
무서워서 못 먹겠다
나는 플레이팅한 오향장육이 이계의 문 같다고 생각하며
그의 혀가 꼬부라져 원산지를 닮아 가는 동안
이 접시에서 튀어나올 신물들을 생각한다
계단식 논이 흉내 내는 주름을
마파두부처럼 닮아버린 연골을
세숫대야보다 반질대는 정수리를
난자완스처럼 튀겨진 조그만 삶을
변신도 변심도 너무 늦었다는 걸 깨닫고
그는 힉스 입자처럼 놀라서 점점 무거워진다
구미호는 지금 아홉수에 걸린 것이다
재작년에 세례를 받아서
이미 거듭날 찬스는 써버린 것이다
권혁웅
1997년 《문예중앙》등단
시집『황금나무 아래서』『마징가 계보학』『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