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성곽-푸른 숲이 품은 고즈넉함… “친숙한 동네감성에 매료”
[메트로 스트리트] 중구 성곽예술문화거리
1.4km 남짓한 성곽예술문화거리는 대부분 오르막길이다. 시간을 내 천천히 걸으면서 성곽길과 주변 풍경을 눈에 담고, 동네 주민처럼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면서 정취를 즐길 수 있다. 도서관이나 팔각정 인근에서 보는 서울 야경은 이곳의 또 다른 매력이다. 강승현 기자
처음 가는 동네임에도 한 번쯤 와본 느낌이 드는 곳이 있다. 바닥에 무심하게 놓인 작은 돌 하나까지 익숙하고 친근한 그런 곳. 눈길을 확 끄는 명소가 있는 것도 아니고 유명 맛집도 찾기 힘들지만 계속 걷고 싶은 편안함을 주는, 서울 중구 ‘성곽예술문화거리’는 그런 길이다. 주민 대부분이 20, 30년 이상 동네를 지켜온 터줏대감이라는 이 거리의 빛바랜 성곽을 14일 잠시나마 ‘동네 주민’이 된 기분으로 천천히 따라가 봤다.
○ 고즈넉한 성곽길 여행
3호선 동대입구역 5번 출구에서 장충체육관을 지나 노란색 카페가 있는 사잇길로 빠지면 성곽예술문화거리가 나온다. 전체 길이는 약 1.4km. 숲길을 따라 성곽길을 걷는 방법도 있지만 이날은 성곽을 오른편에 둔 채 동네 곳곳을 들여다봤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세월의 흔적이 짙게 담긴 ‘한양도성 성곽’이다. 한양도성은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외부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성이다. 평균 높이 5∼8m, 전체 길이 18.6km에 이르는데 현존하는 전 세계 도성 중 가장 오래 도성 기능을 수행했다고 한다. 완전히 검게 변한 성벽은 거쳐 온 세월을 짐작하게 해 주는데 성벽 사이사이 새로 갈아 끼운 깔끔한 돌을 찾는 재미도 있다.
성곽예술문화거리는 이름난 다른 길처럼 카페나 펍 등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지 않다. 드문드문 카페가 있는 정도다. 그 대신 주민들이 오랜 시간 거주해 온 낡고 오래된 집을 더 많이 만날 수 있다.
문화거리답게 갤러리나 공방들이 눈에 띄었다. 2016년 중구 공모사업을 통해 공방을 시작한 aa세라믹스튜디오 주인 김명지 씨(30)는 고즈넉한 분위기와 주변 풍경에 빠져 이곳에 정착했다. 공방에선 도자기 만들기 체험 수업도 한다. 김 씨는 “풍경도 좋고 주민들도 따뜻하게 대해주셔서 계속 공방을 이어가고 있다”며 “예전보다 찾는 사람도 크게 늘었다”고 했다. 김 씨는 “벚꽃이 활짝 피는 봄에 경치가 가장 좋다”고 귀띔했다.
○ 곳곳에 숨은 주민 쉼터
성곽길을 따라 경사진 길을 한참 오르다 보면 ‘숲속 도서관’을 만난다. 지난해 5월 문을 연 다산성곽도서관은 도서관보다는 주민 쉼터에 가깝다. 밖에는 영화와 공연을 즐길 수 있는 공간과 함께 공유 텃밭이 있다. 도서관 관계자는 “공유 텃밭은 10대부터 8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참여한다”며 “독서뿐 아니라 다양한 주민 활동이 이곳에서 이뤄진다”고 했다.
안에는 책과 함께 지역 예술고 학생들의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얼마 전까지 공중화장실로 쓰이던 곳은 주민 의견에 따라 작은 카페로 변신했다. 천천히 도서관을 둘러보다 보면 매일 창문 밖 성곽길과 푸른 산을 보며 독서를 즐기는 주민들이 부러워진다.
동대입구역에 있는 말베르크 전시관과 50년 가까이 장충동을 지키고 있는 유명 베이커리 태극당도 함께 들러볼 만한 곳이다.
이미 지역에선 잘 알려진 말베르크 전시관은 얼핏 보통 카페와 비슷해 보이지만 가게 안으로 들어서면 깜짝 놀랄 광경을 마주한다. 커피콩을 잘게 가는 커피그라인더 850여 개가 전시돼 있는 것. 1700년대 유럽에서 사용하던 것을 시작으로 그라인더의 발전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이승재 관장은 “독일에 20년 살면서 1600점가량의 그라인더를 모았다”며 “그라인더에 새겨진 글씨나 모양의 변화를 보면 시대상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원래는 투어 프로그램을 운영했지만 현재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영향으로 일반 관람만 가능하다.
강승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