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송미술관....관람및 유감....
2009년 5월 17일 일요일 관람
간송 전형필과 간송미술관의 탄생 배경
일제강점기 이 땅의 문화유산이 일제에 의해 유린되던 시절,
개인의 몸으로 이를 지킨 사람이 있었다.
간송 전형필(全鎣弼:1906∼1962)은 14점의 국보와 12종의 보물을 포함한 5000여점의
문화유산을 수집하여 하마터면 영원히 사라질 뻔한 우리의 자존심을 지켜 냈다.
서울 종로4가의 99칸 대가의 집 자손이었던 전형필은 식민지시대 조선의 현실을 고민하였다.
청소년시절부터 도서 수집에 열정적이던 전형필은 독립투사이자 서예가였던
오세창을 만나면서 삶에 큰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이라는 우리나라 역대 서화가들의 총서를 집필하고 있던
스승의 모습에 전형필은 큰 감동을 받았다.
전형필은 오세창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본능적으로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온 재산을 털어서라도 일제가 빼앗으려는 문화유산을 조선 땅에서 지켜내는 것이었다.
1932년 27세의 전형필은
한남서림(翰南書林)을 인수하여 우리의 고서들을 본격적으로 수집했다.
‘동국정운(東國正韻)’(국보 71호),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東萊先生校正北史祥節)’
(국보 149호) 등 소중한 자료들이 이곳에 모아졌다.
1943년 ‘훈민정음’을 입수한 것은 특히나 극적이었다.
1943년 6월 ‘훈민정음’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전형필은 당시 집 열 채 값에
해당하는 1만원을 지불하고 입수했다.
당시 한글 탄압을 일삼던 일제가 알면 문제가 될 것을 염려하여 비밀리에 보관하다가
1945년 광복 후에 이를 공개했다.
우리 역사상 최고의 발명품이자 그 창제 동기가 분명히 밝혀진 ‘훈민정음’이
세상에 빛을 본 것에는 전형필의 숨은 노력이 컸다.
전형필은 일본에까지 가서 우리의 문화유산을 찾아오기도 하였다.
지금도 조선시대 풍속화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신윤복의 그림이 담겨 있는
‘혜원전신첩’(국보 135호)은 전형필이 일본에서 찾아온 작품이다.
이외에도 고려청자, 조선백자, 김홍도와 정선의 그림, 김정희의 서화 등
최고의 문화재들이 전형필의 손을 거쳐 현재는 간송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전형필은 1929년부터 수집한 고전적과 사화, 불상, 자기 등을 수집하기 시작하여
1936년 현재의 미술관 건물인 보화각(保華閣)을 지었다.
전형필이 사망한 후 그의 유업은 아들인 전성우와 전영우에 이어졌고,
1966년에는 전형필의 소장품을 정리, 연구하기 위하여 한국민족미술연구소와
간송미술관이 발족되었다.
현재 간송미술관에서는 1년에 두 차례 봄과 가을에 정기적으로 특별전시회를
개최하여 우리 문화재의 최걸작품들을 소개하고 있다.
신병주의 역사에서 길을 찾다]<39> 간송미술관서 만나는 겸재의 예술혼
건국대 사학과 교수 shinby7@konkuk.ac.kr 님께서 세계일보 기고문중에서 일부 발췌한글
(일반인들에게 간송미술관이란 어떤곳인가 기본적인 이해를 돕기위해 퍼온글임)
간송 미술관이 가능했던 이유와 숨은 얘기
(남산육사 카페 조문현님 올린글에서 발췌)
"아무리 저것들이 소중하다해도 어떻게 공주 전답을 죄다 처분할 수 있단 말이냐?
남들이 뭐라고 하는 줄 아느냐?
문전옥답 팔아 사금파리 사는 미친 사람이라고 한다."
1937년 어느날, 간송 전형필이 고려청자 몇점 산다고 공주의 5,000석 전답을 팔았을 때
보다 못한 어머니가 간송에게 불호령을 내렸다.
당시 간송은 영국인 변호사 갯스비가 수십년 동안 모은 고려청자를 처분하자
토오쿄로 날아가 이를 인수했다.
간송의 이런 처사는 조선인에게는 "금싸라기 땅을 팔아 사금파리를 사는 바보" 로,
일본인에게는 "나라도 없는 주제에 골동품을 모으는 미친놈"으로 손가락질을 받았다.
간송은 일본으로 흘러들어가는 문화재를 지키기위해 전 재산을 쏟아 부었다.
첫째 - 재산이 있었다.
당시 부자 인촌 김성수의 재산이 3만석이었다.
간송은 큰아버지 댁으로 양재로 입적해 자랐는데 본가에서 아들을 낳지 못하여
25세에 양가의 전재산을 상속 받았으니 그 규모기 10만석이었다.
둘째 - 춘곡 고희동과 위창 오세창 같은 훌륭한 은사가 있었다.
와세다 법대를 졸업하고 망국의 한을 씹고 있을 때 휘문고보 미술은사인 고희동 선생님이
" 이 암흙시대를 밝힐수 있는 길은 민족문화재를 수호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셋째 - 간송의 배포와 사욕을 초월한 민족문화재 애호정신이 있었다.
당시 집한채 값이 1,000원이었다. "훈민정음 원본"이 1,000원에 나오자
두말 않고 1만원을 주고 사면서 1,000원을 수고비로 건넸다.
그리하여 "훈민정음 해례(국보 제70호)" 까지 저절로 전형필에게 굴러 들어왔다.
간송미술관 관람
일 년에 두 차례, 5월과 10월 딱 두 번만 일반인에게 개방하는 미술관이 있다.
바로 서울 성북구에 자리 잡은 간송미술관이다.
미술관의 규모도 작고 관람체계가 불편하지만 전시회가 열리는 날에는 많은 사람이
줄을 지어 이곳에 들른다. 무엇보다 정선, 김홍도, 신윤복, 김정희 등
조선 최고 예술인들의 진품이 소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5월 17일부터 31일까지 보름간 간송미술관은 문을 열었다.
이번 특별전의 주제는 ‘겸재 서거 250주년 기념 겸재 정선 화파’이다.
(참고: 작년 10월에 신윤복 전시회때는 바람의 화원 연속극(드라마)의 영향으로
무려 20만명이 줄서서 다녀갔다고 한다)
초입
1층 전시장
2층 전시장
(전시된 작품 사진촬영금지)
숲이 있는 정원...미술관
주요소장품
간송미술관에는 국보로 지정된 『훈민정음』(70호), 『동국정운』권1,6(71호),
<금동계미명삼 존불>(72호), <금동삼존불감>(73호), <청자압형수적>(74호),
<청자기린유개향로>(65호), < 청자상감포류수금문정병>(66호),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149호), 혜원 신윤복의 <쌍검대무 >(135호) 등의 9점과
보물로 지정된 <백자박산향로>(238호), <청화백자철사진사국화문병 >(376호), <금보>(283호),
<금동여래입상>(284호), <금동보살입상>(285호), <청자상감포도 동자문매병>((286호),
<분청박지화문병>(287호), <분청사기모란문반합>(348호), <청자상감 모자합>(349호),
<청화백자철사진사국화문병>(241호), <괴산 외사리 석조부조>(579호), (전 문경오층석탑>(580호) 등
12점이 있다.
그리고 서울특별시에서 1974년 5월12일에 지방 유형문화재로 지정한 <삼층석탑>(28호),
< 석조팔각부도>(29호), <석조미륵불입상>(30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31호) 등 4점이
정원 에 각각 세워져 있다.
숲길 산책
작은 여백이지만 소탈하게 그늘아래서 쉼을 .....
간송미술관....다녀 왔습지요.
겸재선생님의 귀한 작품을 가까이서 진품으로 보는 그 느흣함을 가져보았습니다.
그리고 간송 선생님의 숭고한 그 고집스런 업적에 숙연해 하였습니다.
有 感 (유감)
다만....
다만....좀 속상하네요.....어느분의 지적처럼.....
(퍼온글)
이렇듯 봄, 가을 일년에 두차례만 문을 열지말고
낡을대로 낡은 미술관을 증축보수하고
상설전시장으로 변모시켰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5월인데도 뜻밖의 더위로 전시장안은 찜통이었고
습도조절 시설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는데
오래된 작품에는 독이될텐데 걱정이 앞섰다.
박물관의 기능은 세 가지다.
첫째는 수집과 보존, 둘째는 연구, 셋째는 전시인데
간송미술관측은 보존과 연구에 힘을 쏟는다고 한다.
전시도 중요하지만 학술적 연구가 핵심이란다.
그렇다면 간송 전형필선생이 안간힘을 써가며
문화재를 모은 것은 미술사학자들의 연구를 위해서였을까?
후손과 함께 감상하기 위한 것은 뒷전이었고?
보존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보존과 연구를 위해서는 소장품을 꽁꽁 감춰둬야만 하는 것일까?
이제 그만 구태의연한 자세에서 벗어나
시민들의 그리움의 갈증을 해소시켜 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한가지 덧붙인다면.....(감히 제 개인적 소견입니다만)
간송선생님의 업적과 숨은 공노를 작은 공간(야외라도)에라도 전시 ( 유품, 사진, 업적,
작품수집에대한 숨은 일화, 간송선생님의 애국적 인간성등등....) 되어졌으면 합니다.
그분에 대한 예우이자 흠모라 여겨집니다.
(솔직히 화가 무지 났습니다....너무 소홀하였습니다. 제가 한 80살만 되었어도
관리자나 원장, 후손들에게 지팡이로 홰홰 내저으며 혼냈을것 같습니다....위 내용을
정리하는데 서너시간을 인터넷에서 겨우 헤매듯 찾았으니까요....)
無 言
지금도 이 해태(호랑이)는 오솔길 내리막을 굽어보면서
금방이라도 간송선생님의 그 동글하고 통통하신 걸음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는듯 싶습니다.
2009. 5.30. 일
까망가방하양필통입니다
참고자료
(남산육사 카페 조문현님 올린글에서 발췌)
<국보 68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 <유네스코에 등록된 훈민정음>
<청화백자철사진사국화문병> <혜원 신윤복의 연소답청>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백제-국보 제72호)
청화원숭이형 연적(12세기전,국보 제270호)
풍악내산총람
겸재 정선의 '독서여가'
(국보 제135호-혜원전신첩)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국보 제135호-혜원전신첩)
|
첫댓글 까방님 덕분에 현장에서 미처보지 못했던 구석구석까지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사재를 털어 문화사업을 하는 분들의 의지에 의해 기록과 유물이 보존되어지는 현실이니 이러한 용기와 재력.. 마음을 내신 분들께 후손들은 감사하게 되는군요.. 까방님 덕분에 여러가지를 공부합니다.
까망님 덕분에 저런 귀한 문화재들을 보는군요. 우리는 있는 것조차 제대로 간직할 줄을 모르니 안타깝습니다.
잘보았슴다.......흰수염에.....도포자락 날리면서......이곳저곳 지팡이를 들이대며 호령하실..........까망"옹"의 활보를 기대하며~~짝짝짝!!! ...................(근데....80까지 되실라묜....얼만큼 더있어야되는거지?....중얼중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