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고린도전서 12 : 1-10)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 예수 믿는 자들을 대적하고 교회를 무너뜨리는데 앞장섰던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예루살렘뿐 아니라 타 지역의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기 위해 대제사장들로부터 공문을 받아 다메섹까지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 그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을 직접 만나 다른 적도 없는 바울에게 사도 바울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다고 갈라디아서 2장 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에게 주신 주의 환상과 계시가 있었습니다.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갔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여러 계시 받는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사탄의 사자가 내 육체의 가시를 주었습니다. 사도바울이 받은 굉장한 계시들 때문에 교만해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내 몸에 사탄의 사신인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줄곧 사도바울을 괴롭혔습니다.
이 세상을 사는 사람은 누구나 크고 작은 가시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에게도 육체의 가시가 있습니다. 신체 장애를 가지고 살면서 마음이 아프고 힘들었던 적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기전에 불평과 짜증이 썩여 있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힘들게 한 적이 많습니다.
뭔가 잘하고 싶은데 잘 되지 않을 때 더 화가 많이 냈습니다.
사도바울이나 우리들에게 가지고 있는 육체의 가시가 어디서 왔나요?
사람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육체의 가시가 온 경우가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 같은 사람입니다.
마귀가 하나님께 허락을 받고 사람에게 주는 육체의 가시가 있습니다. 욥같은 사람입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믿음을 성장시키기 위해서 준 육체의 가시도 있습니다. 아브라함같은 사람, 바울같은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시들이 다양할 것입니다. 인생의 눈물과 풍랑과 약함이 있습니다. 부모에게 받은 상처나 남이 알지 못하는 아픔도 있습니다. 때로는 육체의 질병이나 장애, 성격적 결함이나 우울증 등 정신질환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물질의 어려움, 가족의 문제, 불신자의 가정, 타인과의 잘못되어진 관계 등 여러 종류의 가시가 존재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왜 육체의 가시를 주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마귀에게 “사람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는 것”을 허락하셨을까요?
1. 왜 육체의 가시가 있는 것일까요?
제게 육체의 가시인 왼쪽 다리의 장애로 인해 눈물과 아픔으로 원망하고 살아갔던 나의 모습인데내 다리가 하나님의 사랑이고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습니다. 내 다리가 하나님의 사랑이고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인정하고 나니 내 다리를 보면서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구나 여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구나를 받아 드리고 사니 감사하였습니다.
내다리로 인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더 깊이 생각할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다리를 불편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제가 목사로서 잘 할수 있는 요소들이 없습니다. 찬양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말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다고 사람들과 관계가 좋은 것도 아니고 감사하기보다는 불평이 많은 사람입니다.
특별히 잘하는 것이 없는 사람으로 나는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는 실수가 있는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때로는 마귀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와서 유혹하고 타락할때가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거짓말로 유혹한 것처럼, 예수님께서 금식하시고 난 후에도 마귀는 시험합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며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마귀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거짓으로 다가 옵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유혹할때도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로 떡으로 만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것이 진리인데 마귀는 예수님을 보고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가시로 인해 대적들로부터 조롱받기도 하고 스스로 감당하기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 가시를 제거해 주시기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세번이나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단순히 기도했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걸고 부르짖었습니다.
여기서 사도바울이 세 번 주께 간구하였다는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문제가 있을 때 하나님께 간구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간절함으로 간구하였습니다. 그 육체의 가시가 살면서 불편하였기에 더욱 더 간절히 간구하였습니다.
2.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렇게 사도바울의 간구에 하나님께서 응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 위에 머물러 있도록 하기 위해서 나의 약한 것들을 더욱 기쁘게 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바울에게 왜 내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하면서 육체의 가시를 그대로 두게 하셨나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은 약한 데서 온전하여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육체의 가시로 인해 약한 것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능력이 사도 바울에게 계속해서 머물게 된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가시로 인해 약한 것들을 인해 그리스도의 능력이 더 충만하게 임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게 해 달라”
십자가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며 살아 갈 수 있을까요?
부모가 자식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이 강요가 아니라 사랑이기에 힘들지만 감당합니다.
아무튼 사도 바울은 뼈아픈 ‘육체의 가시’를 그대로 지닌 체 살아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에게 말한 내 은혜가 족하다고 말하는데 있어서 은혜란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사랑가고 사도로서의 활동을 계속해서 할수 있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가시 때문에 교만해지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 갑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 은혜로 사도바울이 실족하지 않도록 지켜 주시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일을 한다면 그 사람에게 더 영광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육체의 가시를 제거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였지만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에게 “내 은혜가 족하다. 내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해진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약할 때나 모욕을 받을 때나 궁핍하게 될 때나 핍박을 받을 때나 어려움이 있을 때에 그리스도를 위해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약할 그때에 강하기 때문입니다.
내의 삶의 죽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입니다.
잠언 3장 5-6절에 “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사도바울은 자신의 가시을 제거해 달라고 간구하였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족하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의 가는 길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란 약한데서 온전하여 지는 것입니다.
내가 약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인생은 위로부터 주어지는 힘에 의해서 움직여집니다.”
위에서 힘이 와야지 내 힘 가지고는 조그만 일밖에 못해요.
큰일을 하려면 위에서 힘이 와야지요.
위에서 힘을 얻으려면 하나님을 의지해야지요.
3. 내능력이 약한대로 옵니다.
내능력이 약하기에 강한 능력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던 대로 안 된다고 실망하지 마세요.
어둠속에 빛이 비쳐라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해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셨습니다.
우리는 이 보화를 질그릇에 담고 있습니다. 그 풍성한 능력이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방에서 압박을 받아도 눌리지 않으며, 난처한 일에 빠져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핍박을 당해도 버림을 받지 아니하고 매를 맞아 넘어져도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몸에서 나타도록 하기 위해 항상 예수님의 죽으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삶은 예수님의 죽음과 생명을 짊어지고 나타내야 합니다.
십자가 없이 부활이 없습니다.
십자가 없이 면류관이 없습니다.
십자가 없이 승리가 없습니다.
내가 힘들고 어렸지만 십자가 지고 예수님의 육체의 가시를 느끼면서 살아가면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채워지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십자가를 버리지 마세요.
십자가가 지다가 힘들고 약해 지면 하나님을 찾으세요.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하나님이 함께하십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고, 오히려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존귀하게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 27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장애를 가지고 있든 없든, 모두가 소중하고 존귀한 존재임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사용하십니다.
모세는 말을 잘하지 못하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는 위대한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출애굽기 4:10-12). 바울 역시 육체의 가시를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말씀하시며 바울을 강하게 하셨습니다(고린도후서 12:9). 우리의 연약함은 결코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이사야 41장 10절에서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려움을 겪고, 세상의 편견과 장애물에 부딪힐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의 힘과 위로가 되어 주십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돕는 공동체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2절에서 "너희가 서로 짐을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입니다. 장애를 가진 분들도, 그렇지 않은 분들도 서로 사랑하며 함께 살아갈 때,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운 모습이 이 땅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고, 우리의 연약함 속에서도 함께하십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나아갈 때, 우리는 더욱 강해질 것입니다. 또한 서로 사랑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의 연약함 속에서도 함께하시고,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이 말씀을 체험하는 한주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