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방직공장에서 일을 할 때에도 , 나는 외국인이 회사를 방문하기만 하면, 어떡해서든 그에게 다가가 한마디라도 영어로 말을 건네야 직성이 풀릴정도로,영어에 대해서 대단히 관심이 많았을 뿐 아니라 다른 것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시간과 노력을 많이 들였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영어에 대한 집착은 본의 아니게 한 여성의 눈물을 보게 만들었으니, 이와 같은 경험이 어디 나 혼자 뿐이겠는가?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장정들의 집단인 군대는 그야말로 인력탱크였으며, 나는 여기서도 너무나도 좋은 동료들을 만나는 행운을 가졌고 그 중에서도 두 명의 전우와의 만남은 너무도 소중한 것이었다. 그 중의 한명은 강원도에서 태어나 성장한 윤ㅇㅇ 동기였는 데 그는 입대 전까지 산 등성이를 타고 다니며 뱀을 사냥하는 전문 땅 꾼이었고 , 또다른 전우는 나보다 1년 입대 고참인 이ㅇㅇ 였는데, 그는 입대 전, 춘천역 앞에 있는 미군부대 캠프 페이지내 레스토랑에서 미군들이 주문한 음식을 배달하는 딜리버리 맨이었다.
폐결핵 중증 3기에서 기사회생하여 군대까지 들어온 나에게 내무반 전우들은 많은 배려를 해주었고, 보초병 주특기대신, 행정병으로 근무할 수있도록 도움을 주어, 무사히 제대를 할 수있었음을 나는 고백한다. 자대로 배치되어 약 1달간의 자대 훈련을 마친뒤 우리 이등병들도 보초에 투입되기 시작하였다. 3개반으로 구성된 우리 중대는 1개반에서 2시간씩 보초를 서고 4시간씩 휴식을 취하는 3개조 근무였는 데, 내무반에서 기상을 하여 완전 복장을 하고 제무시(GMC) 트럭을 타고 자기가 맡은 초소까지 가는 데만 약 30분 가량 소비가 되는 거리였다. 따라서 다음 교대 근무자가 와서 내가 그에게 초소를 인계해주고 내무반으로 돌아오면 이미 또 다른 1시간이 어느덧 흘러가버려 이론상으론 4시간 휴식후 2시간 근무시간이 실질적으로는 3시간 근무 3시간 휴식으로 휴식시간 줄어드는 것이었다. 이제 폐결핵 중증 3기에서 회복기인 가운데 입대한 나의 몸은 다른 장정들이 견뎌내는 것을 그들처럼 견뎌내지를 못하고 있었다. 아직도 쌀쌀한 바람기가 있는 4월 어느날 새벽, 나는 다음 근무자를 태우고 나타난 그 트럭의 요란한 엔진소리도 듣지 못한 채 그만 초소에 주저앉아 졸고 만것이다. 한 마디로 영창감이었다. 내무반으로 돌아오는 그 교대병력 수송 트럭위에서 우리조 대원 전원은 이야기로 표현할 수없는 혹독한 단체 기합을 받았다. 정작 죄인인 나는 열외인체로 말이다. 중대본부로 돌아와 나의 몸에대한 자초지종을 설명들은 내무반장은 중대장에게 내용을 보고하고 ,그 다음부터 나는 보초대신 행정반에서 보다 편하게 군대생활을 할 수있었던 것이며, 그 때의 사건을 생각하면 지금도 그 대원들에게 미안한 마음 금할 길 없다.
가을이되면, 산속의 뱀들은 겨울을 나기위한 동면을 위하여, 최대한의 영양분을 몸에다 비축을 하는 데, 파견중대인 우리중대장은 땅꾼 윤ㅇㅇ로 하여금 그에게 강원도 땅꾼의 실력을 맘껏 발휘케 하여, 자신의 건강은 물론, 그 값진 뱀탕을 대대장에게 매일 전달하게 하였다. 까치독사 2마리, 꽃뱀 2마리, 그리고 잡사 1마리 총5마리로 폭 고아진 진 뱀탕의 삼분의 일은 언제나 나의 몫이었다. “야, 동기좋다는 게 뭐냐, 내가 끓이는 뱀탕을 3개월만 먹으면, 니 몸 평생 걱정하지않아도 되. 특히 폐가 나쁜 사람들은 이 뱜탕을 먹어야되지 아마 내말대로 3개월만 눈 딱 감고 먹으면 너 완전군장하고 달리기해도 아마 항상 선착일 걸.” 그는 진정으로 나의 몸을 생각하여 정성스럽게 자신이 고운 그 뱀 탕을 꼭 넥타캔에 담아서 나에게 주곤하였고 나는 땅꾼 전우가 만들어주는 정성어린 그 뱀탕을
한 방울도 남기지않고 깨끗이 비우곤 했다. 11월 산속에는 이미, 해가지면 온몸이 써늘한 추위를 느끼는 때이건만, 나는 더운물이 없는 세면장에서, 찬물로 샤워를 해도 견딜만한 체력이 되었다.
나보다 1년 고참인 이ㅇㅇ 제대가 다가온 어느날, 나는 그에게 부탁을 했다. “이병장님, 제대한 뒤에 춘천을 가고 싶은 데, 혹시 그곳에 가면 내게도 잡(JOB)을 줄 수있읍니까?” “뭣 때문에 그러는데.” “ 사실 미군 부대에 가서 영어 좀 배우고 싶어서 그렀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는 1981년 1월 군에서 제대하자마자 아무 연고없는 춘천으로 향했다. 대학에 복학하기전,영어를 확실히 배워야겠다는 일념에서.
미군수사대의 까다로운 신원조회와 이ㅇㅇ의 고모부의 신원보증으로 마침내 근무허가가 나왔다. 새벽 5시에 식당에 도착,간단한 아침식사후, 6시 기상점호와 동시에 밀려드는 미군들을 맞으며 나의 하루일과는 시작되었다. 전화주문을 받고 오더장을 주방에 넘기고, 다 준비된 음식을 주문한 병사에게 배달하고 대금을 받아서 입금을 시키는 것이 나의 잡이며, 나의 수입은 오로지 그네들이 주는 팁이 전부였다. 미국돈 다임과 니클이 왜 이리도 처음에는 헷갈리는지, 그리고 미 전역 각지에서 모인 그네들인지라, 마요네즈(메네즈)를 자신이 주문한 햄버거에 너 달라는 건지 넣지말아달라는 건지 도통 감히 잡히질 않는 영어실력인지라, 엉뚱한 음식을 배달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나는 그런 실수때마다 이렇게 얘기를 했다. “ 주문한 것과 다른 음식이라서, 정말 미안하다. 바꿔달라면 다시 만들어 갖다 주겠다. 잘못은 너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영어를 잘 알아듣지 못해서 일어나는 것이니, 앞으로 주문을 할때는 좀더 천천히 내가 알아들을 수있도록해달라, 오케이?”
그 어느 병사도, 나에게 음식을 다시 만들어 달라고 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그네들은 아주 천천히 말을 하면서 오더를 주문하였다.
“어이 미스터 트럼프, 여기 편지 가져가, 웬 아가씨가 아까부터 너 기다리다가, 이편지 부탁하고 내일 다시 들르겠다고 했어.” “ 그게 누군데요?” 라고 물으면서 받아든 편지 겉에는, “ Love, Reney.”라고 쓰여있었다. 주방 아저씨들의 진한 농을 뒤로하고 펼쳐든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만년필로 또박또박 써있었다.
“Dear Mr.Trump,
Your smile always makes me crazy, and I want be your friend. Tomorrow I come again to see you at 5 pm.
Lovely,
Amie Reney”
편지를 읽는 나의 마음은 호기심으로 꽉 차있었다. 과연 누구일까?
그 때 나는 야학교에서 동지로 만나, 연인으로 발전시키기를 희망했던 그 총무선생님으로부터 절교의 쓰라림을 어느정도 치유한 상태였기에 ,더더욱 그 편지에 마음이 끌렸던 것같다. 한달쯤 춘천 미군부대 식당 생활에 익숙해져가고 있을 때즈음 , 나에게는 여러명의 미군친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육군하사 마리오, 여군하사 린다, 여군 일병 슈잔 등이 그들이었으며 나는 그들과 함께 춘천시내 중심인 명동의 닭갈비집에 자주 들르곤 했다. 붉게 달아오른 화덕위에 붉은 양념으로 버무려진 닭갈비를 올려놓고 그들이 PX에서 준비한 포도주로 향수도 달래며, 젊음의 발산과 영어공부라는 두마리 토끼를 즐기고 있을 때였다.
자전거에 배달할 음식을 싣고, 딜리버리 맨을 상징하는 노란 모자를 쓴 나는부대내 곳곳에 삼엄하게 설정된 통제구역이라 하더라도 무사 통과할 수있는 유일한 한국인이 아니었나 싶다. 관제탑 꼭대기에 있는 스미스 하사도 햄버거와 프렌치 프라이를 먹어야 일을 할 수 있었고, 내부반안에서 팬티 차림으로 각선미를 자랑하는 여군 아가씨들도 내가 가야 배를 채울 것 아니겠는가?
다음 날 설레는 마음으로 일을하는 중에도, 주방아쩌씨들 왈, “ 어이 미스터 트럼프, 이거 특별히 만든 햄버거니까 꼭 먹구가, 그래야 이따가 힘을 쓰지, 안그래?”
“양년애들 보기보다 더 빡시다구” 입심좋은 김씨 아쩌씨의 설레발이 그렇게 싫지많은 않았다.
직감이 적중하였다. 아까부터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신문을 계속보고 있는,전형적인 아프리칸 아메리칸 아가씨가 바로 그 편지의 주인공이었다. 둥글고 큰눈, 빵빵하게 볼륨이 곽 찬 가슴과 힙, 그야말로 글래머그대로였다. 젊은 우리는 곧, 아주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처럼 가까워졌다. 동남부 죠지아 출신의 그녀는 선생님부모님과 선생님 언니가 있는 평범한 가정의 두째였고, 한국근무에 대단히 만족하고 있는 여군 상병이었다.
나에 대해서는 자기 룸메이트인 슈잔일병에게서 많이 들었고, 그렇게해서 자기도 친구가 되고싶었다는 겄이다. 우리의 발걸음은 자연스레 호반의 도시인 공지천으로 옮겨갔고, 우리 둘의 뜨거운 데이트는 매서운 그 춘천의 취위마져도 비껴가게 하였다.
복학준비가 다 되어 갈즈음, 나는 Amie에게 이별의 인사를 하기로하고 우리 둘은 공지천변에 자리잡은 한 레스토랑에 마주않았다. 시원하게 트인 공지천 연못은 레스토랑에서 발산되는 불빛으로 아주 멋있는 분위기였고, 마주 않아있는 그녀의 눈은 오늘따라 더 크고 깊게 보였다. 포도주 한잔씩 곁들인 간단한 저녁을 마치고, 나는 내일모 래 서울로 가야한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갑짜기 그녀의 숨소리가 달라지는가 하더니 그녀의 그 큰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지기시작하는 게아닌가? 한참후, 그 녀가 나에게 한 말은 이 것이었다.
“ 트럼프, 우리 결혼하자, 내일 나를 당신 부모님께 인사시켜줘. 결혼하자마자, 우리부모계시는 죠지아로 가서 살자. 거기서 나는 계속 군에 있고 당신은 학교를 다녀. 모든 학비는 내가 준비하고 처리할 테니까. 마침 언니가 학교선생을 하고 있고, 부모님도 교편생활을 하시니까 트럼프가 대학을 다니는 데 도움을 줄 수가 있을거구.” 애절하게 나의 대답을 기다리는 그녀에게 나는 다음과 같은 말로써 나의 마음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Amie 잘들어, 나도 너를 줗아하지만, 우린 결혼은 할 수 없어. 나는 집안의 장남이고 부모님께서는 외국인과의 결혼을 허락지 않아. 대신, 우리 그대로 지금처럼 좋은 친구로 지내자.” 이 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사실은 내 자신이 아직 흑인인 그녀를 아내로 맞을 마음의 자세가 안되었다는 것이 더 솔직한 답이었다. 감촉히 너무나도 보드라운 그녀의 손이 나의 두 손을 꼭 잡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다. 내가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자 그 녀의 덜 마른 눈물이 내 빰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짧지만 좋은 추억을 나에게 만들어 주었던 그녀, 그 때 젊은 시절 잠시나마 자신이 그렇게도 좋아했던 남성이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에서 그 다지 멀지않은 동네에 살고있다는 사실을 알면 어떤 모습을 할까? 영어를 제대로 배우고자 택했던 그 고생길에서조차 나는 이처럼 한 여인으로부터 사랑을 받았으니 참으로 복이 많은가 보다. “Amie, 인연이 닿으면 우리 언젠가 또 만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