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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리앗과 한판 승부
사무엘상 17:41-49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시길 빈다.
성령강림 후 제5주일이다. 며칠 전에 하지(6.21)를 지냈다. 예로부터 그리스도교 문화 속에 사는 사람들은 두 요한이 일 년을 나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낮의 길이가 가장 긴 하지의 성인은 세례 요한이, 밤의 길이가 가장 긴 동지의 성인은 사도 요한이 시간의 경계선에 자리 잡았다. 하지는 낮이 점점 짧아지고 밤이 점점 길어지는 분기점이다. 세례 요한이 이날의 주인공인 까닭은 그가 그리스도를 가리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고 말했기 때문이다.
시간과 달력, 역사와 시대는 얼마나 중요한가? 우리는 눈앞에 있는 달력에는 관심이 있지만, 과거든 미래든 멀리 내다보려는 마음을 갖기는 쉽지 않다.
이번 주간은 우리 민족에게 가장 커다란 비극인 6.25 전쟁이 일어난 기억을 품고 있다. 어느새 74년이다. 노랫말에도 있지만, 어찌 그 비극을 잊을 수 있을까? 우리 민족은 그 비극과 비참을 기억해야 한다. 오늘 대한민국이 자랑스러운 것은 그 폐허를 딛고 선진국이 된 오늘 때문이고, 여전히 기억해야 하는 까닭은 그 갈등과 분쟁, 위기와 분단이 여전히 계속되고, 그 역사적 트라우마 속에 살기 때문이다.
지금 포스트 모던 AI시대에도 구식전쟁을 치루는 중이다. 눈 앞에서 대북전단과 오물풍선이 오간다. 모든 재난은 불씨에서부터 시작된다. 남북은 불장난을 그쳐야 한다. 정신 차리고 외쳐야 한다. “그래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를 지배하려는 모든 파괴와 분열과 맞서서 화해와 평화를 지켜야 한다.
1)
오늘 다윗의 ‘골리앗과 한판 승부’ 사건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전쟁이야기이다. 가장 흥미진진한 전쟁 이야기가 된 이유가 있다. 작은 다윗이 거대한 골리앗을 이겼기 때문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만약 골리앗이 다윗을 이겼다면 전혀 흥미롭지 않았을 것이다. 얘기 꺼리조차 되지 못한다.
다윗의 흥미진진한 승리는 골리앗이란 거인 앞에서 가위눌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을 준다. 지금 내 앞의 골리앗은 무엇인가? 나를 불안하게 하고, 밤잠을 뒤척이게 하고, 패배감에 사로잡히게 하는 골리앗은 무엇인가?
우리는 자주 골리앗 앞에 선다. 어떤 사람에게는 시험이고, 뜻밖의 질병이고, 누군가와 갈등이고, 경제적 어려움이고, 불안전한 미래이고, 또 홀로 해결하기 어려운 모모한 문제일 수 있다.
만약 문제나 시험 혹은 악에 의해 우리의 상상력이 지배당하고, 물질에 의해 우리의 사고방식이 좌우되면 우리는 선한 것과 참된 것과, 정의로운 것과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없게 된다.
우리 사회는 골리앗 세계관이 지배한다. 지나치게 ‘강함’을 숭배하고, 힘의 우상을 섬긴다. 힘의 크기를 비교하고 주눅이 든다. 사람들의 의식은 권력에 맹종하고, 물질을 우상화한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소외시킨다.
골리앗이란 두려움은 사람들의 의식구조 속에 팽배하다. 어쩌면 우리 사회의 구조는 마치 골리앗과 다윗처럼 불공평하다. 철저하게 골리앗 문화권, 골리앗 세계관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사람들의 생각에 따르면 다윗은 결코 골리앗을 이길 수 없다. 경제 논리에 따르면 쥐꼬리만 한 다윗은 결코 코끼리 같은 골리앗의 위세를 꺾을 수 없다. 나이든 사람이라면 자기 경험이라면서 ‘나 때’를 말할 것이다. ‘세상에 그런 일은 다반사이니 적당히 포기해라, 그냥 순응하라.’
골리앗으로 대표되는 현실의 무게는 사람들의 의식구조 속에 팽배하다. 우리가 골리앗이란 현실을 영원히 깨뜨릴 수 없는 신화로 여긴다면 누구도 자신의 아픔, 두려움, 현실의 압박을 이겨낼 수 없다.
다윗이 ‘골리앗과 한판 승부’에서 물리친 것은 이런 골리앗 세계관이었다. 다윗은 세상의 상식과 다르게 말한다. 그런 골리앗과 같은 거인의 신화를 버려라. 내 앞의 골리앗을 장기판의 졸(卒)로 보라고 한다.
자세히 살펴 보자. 다윗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전쟁터인 엘라 골짜기에 찾아갔다. 그곳에 세 명의 형들이 블레셋과 전쟁에 동원되어 참전 중이었다. 늙은 아버지는 다윗에게 치즈 열 덩이를 들려 보내어 형들의 지휘관인 천부장에게 뇌물로 주게 하였다. 아들이 군대에 가 있으면 별별 생각이 다들지 않겠는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편하게 군대 생활하게 하고픈 것이 부모의 마음일 것이다.
다윗이 전쟁터에 와 보니 단연 화제는 거인 골리앗이었다. 블레셋 군대의 맨 앞에 선 골리앗은 싸움을 돋우는 자였다. 괴물 같은 블레셋의 장수는 40일 동안 아침저녁으로 어김없이 등장해 누구든 배짱이 있다면 앞으로 나와서 자기와 한판 붙어보자고 을러댔다. 이스라엘 군대는 왕으로부터 병졸에 이르기까지 모두 두려워 떨었다. 골리앗 앞에서 기가 죽었다. 그는 사람이 힘으로는 결코 쓰러뜨릴 수 없는 거인이었다.
소년 다윗은 형들의 충고도, 꿈쩍 못하는 이스라엘 군대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하나님의 군대라면서, 이교도인 블레셋 거인 앞에 웅크리고 있는가?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면서 왜 잔뜩 겁을 먹고, 싸움은커녕 기죽어 있는가? 스스로 말하기를 사울 왕의 군대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군대가 아닌가?
2)
다윗은 생각했다. 다윗 자신은 어려서부터 목동으로 살면서 여러 차례 위험을 겪었다. 그는 평소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이었다. 다윗이 위험에 처한 양을 건져내었듯이, 하나님은 번번이 죽을 뻔한 고비마다 다윗을 건져주셨다.
다윗은 양을 칠 때 두려움과 외로움 속에서 들판에서 홀로 살았다. 막막한 들판에서 어리고 약한 그가 의지할 데라고는 하나님밖에 없었다. 다윗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실재하신 분이었다. 그분은 이론적으로 배운 하나님이 아니었다. 이러한 경험은 다윗에게 용기를 주었고, 결코 쓰러뜨릴 수 없어 보이는 골리앗과 맞설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평소 제힘으로만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은혜는 없다. 그러나 매 순간 하나님의 손길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늘 하나님께 감사한다.
자기가 믿음의 주체가 되는 것은 한낱 자족적인 종교일 뿐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그렇지 않다. 믿음의 주체는 내가 아니다. 하나님이 나를 알아주시는 것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줄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이 나섰다. 아무도 골리앗의 대거리에 맞서서 나서지 않으니 참다못해 소년 다윗이 자청한 것이다. 사울 왕은 다윗이 골리앗과 일대일 싸움에 나가도록 허락하면서 자기 갑옷을 입혀주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 몸에 걸친 화려한 갑옷이 제 몸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무거운 갑옷은 목동인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전쟁은 갑옷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다윗은 왕의 갑옷을 벗어버렸다. 생각해보라. 적을 흉내 내서는 적을 이길 수 없다. 다윗에게 필요했던 것은 새로운 패러다임이었다. 다윗이 이기려면 자기 몸에 맞는 무기가 필요하였다.
그는 평소 양을 보호하기 위해 막대기로 자신만의 병기를 다듬고, 멀리서 다가오는 짐승을 쫓아내기 위해 돌을 던지면서 자신을 연단하였다. 다윗에게 가장 자신 있는 방법이었다. 이제 다윗만의 물맷돌 기술을 사용할 때가 왔다. 다윗은 맹수와 맞서던 막대기를 들었다. 그리고 다섯 개의 매끄러운 돌을 손에 쥐었다. 다윗은 자신을 깔보고, 조롱하는 골리앗을 향해 외쳤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45).
다윗은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큰 목소리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 다윗이 외친 하나님 이름에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명예가 걸려 있다. 골리앗도 그 신들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것은 자신의 승리를 간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윗을 저주하기 위해서였다. 골리앗 자신은 그 신들의 도움이 없어도 충분히 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윗은 여호와의 이름과 보이지 않는 힘에 의지하여, 자신을 맡겼다. 다윗의 승리는 온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실하게 할 것이다.
3)
마침내 ‘골리앗과 한판 승부’가 벌어졌다. 다윗이 전쟁에 참여해 골리앗과 맞서려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46)다는 것이다.
드디어 다윗은 자신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는 골리앗을 향해 나섰다. 모두의 두려움의 대상인 골리앗이란 거인을 향해 빠르게 달려 나갔다. 다윗의 외침을 들어보라!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47).
다윗이 던진 돌은, 단 한방으로 육중한 거인의 몸, 그것도 이마 한가운데 정수리에 정확하게 박혔다. 거인의 얼굴은 대야나 쟁반만 하지 않았을까? 그는 물맷돌 던지는 일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들판에서 날마다 연습하던 일이었다. 유일한 보호 수단이었다. 그 야무진 돌맹이 하나가 거인을 쓰러뜨렸다.
다윗의 전술은 성공하였다. 사실 골리앗은 사람들의 한계 이상, 상상력 이상의 실체였다. 골리앗의 키는 3m나 되었고, 청동 갑옷의 무게는 약 60kg에 달했으며, 쇠 창날 만 7kg이었다.
다윗 등장 이전에 이스라엘 군대는 이런 골리앗을 상대하려면 골리앗보다 큰 초인적인 힘이 필요하다고 계산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골리앗의 실체를 본 후 지레 포기해 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다윗의 계산법은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다윗은 골리앗이란 힘의 논리에 사로잡히지 않고, 하나님께 사로잡힌 믿음을 가지고 나아갔다. 다윗의 도전은 무모한 것이 아니다. 정확하게 현실을 봤던 것이다. 거인의 약점을 보았고, 자신의 강점을 순간적으로 살렸다. 그리고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향하여 빨리 달리며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가지고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의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48-49).
만약 우리가 골리앗이란 현실을 영원히 깨뜨릴 수 없는 신화로 여긴다면 누구도 다윗이 될 수 없다. 다윗이 남다른 점이다.
우리 시대에도 골리앗들은 하나님을 모욕하고, 약자를 괴롭힌다. 그러나 내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있다면, 다윗의 믿음과 용기를 품을 수 있다. 골리앗과 같은 거인과도 한판 승부를 벌일 수 있는 것이다.
다윗은 오늘 내게 묻는다. 너는 네 손에 무엇이 있느냐? 누구나 손가락이 다섯 개이듯, 매끄러운 돌 다섯 개를 지닐 수 있다. 나는 비장의 무기, 내 앞의 거인을 한방에 물리칠 무기를 준비하는가?
브라질의 대주교 돔 헬더 까마라는 다윗이 손에 쥔 물맷돌 다섯 개에 이름을 붙였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 진리에 대한 확신, 정의에 대한 확신, 선에 대한 확신 그리고 사랑에 대한 확신’이다.
지그 지글러는 ‘시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책에서 우리는 다섯 가지의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고 한다. 첫째는 ‘자부심’이고, 둘째는 ‘사랑’이고, 셋째는 ‘믿음’이고, 넷째는 ‘소망’이고, 다섯째는 ‘용서’이다. 마치 다윗이 지닌 매끄러운 돌 다섯과 같다.
누구든 자기 인생에서 문제를 이기고, 시련을 극복하려면 이 ‘매끄러운 돌 다섯’을 마련해야 한다. 내 손을 들여다보라. 그 다섯 개 돌을 쥐고 힘을 내라.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라.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2006년에 감리교 부산전도행사에서 가수 인순이를 초대한 일이 있다. 기획모임에서 어떤 연예인을 부를까 의논한 끝에 결국 인순이가 가장 적절하다며 최우선순위로 선정되었다, 그는 부산 아시아드경기장에서 ‘거위의 꿈’을 불렀다.
“늘 걱정하듯 말하죠 헛된 꿈은 독이라고/ 세상은 끝이 정해진 책처럼/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라고/ 그래요 난 난 꿈이 있어요/ 그 꿈을 믿어요 나를 지켜봐요/ 저 차갑게 서 있는 운명이란 벽 앞에/ 당당히 마주칠 수 있어요/ 언젠가 난 그 벽을 넘고서/ 저 하늘을 높이 날을 수 있어요/ 이 무거운 세상도 나를 묶을 순 없죠/ 내 삶의 끝에서/ 나 웃을 그 날을.. 함께해요...”
인순이는 혼혈 가수다. 1960년대에 우리 사회는 혼혈, 특히 흑인 혼혈에 대해 편견이 심했다. 게다가 아버지가 없는 미혼모의 딸은 세상 살기가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1970년대 희자매로 활동할 때 흑인 혼혈 특유의 곱슬머리를 가리기 위해 방송에 나올 때에 머리에 천을 둘러야 했다고 한다.
차별과 편견은 가수로 성공한 후에도 따라다녔다. 평생 인순이의 인생에 큰 상처로 남게 되었다. 그런데 가수 인순이는 자신과 같은 다른 혼혈 자녀들이 더 이상 편견과 차별 속에 살지 않도록 애쓰고 있다. 그는 강원도 홍천군에 다문화 대안학교인 해밀학교를 세웠다.
우리 시대에도 골리앗들은 하나님을 모욕하고, 약자를 괴롭힌다. 차별과 편견은 독버섯과 같이 우리 공동체를 분열시킨다. 그러나 당연히 여겨서는 안된다. 그런 파괴적인 골리앗 문화를 이기기 위해 다윗의 믿음과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도 순간순간 두려움과 마주한다. 자주 흔들리고, 주눅든다. 그러나 다윗과 같은 믿음과 용기,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마음은 골리앗과 같은 거인과도 한판 승부를 벌일 수 있다.
하나님은 세상의 미련함으로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신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를 낼 수 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연약함에 주눅 들지 말고 그 연약함조차 자랑하라.
하나님의 은혜가 날마다 골리앗과 맞서는 여러분과 함께 하시어 그를 쓰러뜨릴 믿음과 용기를 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