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양 朴瑞陽(1887 ~ 1940)】 「1921년 대한국민회 군사령부 군의관.」
나는 백정이다,
하지만 내 신분보다 기술을 보라.
내 속에 있는 500년 묵은 백정의 피를 보지 말고
과학의 피를 보고 배우라."
한국 최초로 외과의사가 되어 신분 차별 철폐의 상징이 되신 분이다,
의사였고 교육자였지만 국권이 피탈되자 홀연히 조선땅에서 사라져
묵묵히 독립운동의 길을 걸었던 의인임은 까맣게 잊혀지고
그가 백정의 아들이었다는 사실만 기억되는 슬픈 현실,
그 누구보다 훌륭한 인격자였지만
백정 출신에 대한 무시와 냉대, 조롱으로
오래도록 괴로와하시진 않았을까 문득 마음이 서늘해진다.
1887년 9월 30일 서울 종로(鐘路) 낙원동樂(園洞)에서 박성춘(朴成春)과 조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다른 기록에는 1885년 9월 30일에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어려서 무어 선교사가 세운 곤당골교회의 매일학교(예수교학당)를 다녔다. 1908년 제1회로 제중원의학교(濟衆院醫學校, 현 세브란스의과대학)를 졸업하고, 동기생 6명과 함께 최초의 의술개업인허장을 대한제국으로부터 받았다.
졸업 전인 1906년 황성기독청년회(YMCA)에서 학생 계몽운동을 담당하였고, 같은 해에 황성기독청년회 학생교육 부문 부학감(副學監)을 역임하였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1909년 2월에는 승동학교(勝洞學校)에 음악과를 설치, 운영하였다.
졸업 후 세브란스연합의학교 교사로 근무 중 일본어로 교습하라는 지시를 거부하고, 1917년 간도로 이주하였다. 1917년 중국 지린성(吉林省) 옌지현(延吉縣) 용지향(勇智鄕) 국자가(局子街)에서 구세병원(救世病院)을 개업하였으며, 그 해 6월 30일 국자가 하시장(下市場)에 기독교 장로교 계통의 숭신학교(崇信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하였다. 이 학교에서는 간도에서 거주하던 하인 자녀들 가운데 8~13세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산술, 한문, 한글과 일본어 등을 가르쳤다. 개교 당시 교사는 5명, 학생은 28명이었는데, 동생 박헌양(朴憲陽)이 체육부장을 맡기도 하였다. 숭신학교에서 당당한 한인으로 성장하는데 필요한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국내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수십 명의 학생들이 거리 행진과 시위를 전개하여 지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1920년 6월경에는 적십자회 소속 의사로 활동하였으며, 1921년 6월경에는 대한국민회 군사령부의 군의(軍醫)에 임명되었다. 1923년 8월 21일에는 숭신학교에서 간도 지역의 한인 학교 운영자 등 600여 명의 발기인들과 함께 간도교육협회(間島敎育協會)를 조직하고, 간도지역 각 소학교 학제와 교과서 통일, 교원 양성, 중학교 이상의 교육기관 설치 등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집행위원장 김영학(金永學)과 29명의 집행위원을 선출하였는데, 이때 집행위원이 되었다. 또한 단체 운영을 위해 서무부·교육부·도서부·지방부·사교부·회계부 등을 두기로 하였다.
1924년 2월 이후에는 동아일보 간도지국 총무 겸 기자로 활동하였고, 국자가에 교회설립을 주도하고 장로로 봉사하였다. 또한 사회단체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1925년 12월 남만청년총동맹 총회에서 강연부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36년 귀국하여 황해도 연백군(延白郡) 연안읍(延安邑)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의료 활동을 이어나갔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