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ything That s Part Of You(낙엽따라 가버린 사랑)
/ elvis Presley<엘비스 프레슬리)
20세기 둘어서 세계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미국 가수로 하나의 문화 아이콘으로
주로 "엘비스"로 알려져있다.
엘비스의 음악은 온 누리를 선풍적 인기로 열광 식혔으며 "Rok'n Roll(로큰롤)의 제왕"
또는 "왕"으로 불리게 햇다.
엘비스는 미국 미시시피 주 투펄로에서 쌍둥이(한명은 즉시 사망)로 태어나 13살때
테네시주 멤피스로 이사를 가 아프리카계 미국인 음악 사운드를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고
싶었던 선 레코드의 사장 샘 필립스의 협력에 의해 1954년부터 음악 경력을 쌓았다.
엘비스는 초기 기타리스트 스코티 무어와 베이시스트 빌 블랙과 함께 음악을 했고
RCA 빅터로 레이블을 옮겨 커널 톰 파커가 20년동안 매니저를 했다.
1956년 엘비스는 RCA에서 발매한 첫 싱글 "Heartbreaek Hotel"을 발표했고 빌보드
싱글 차트 1위를 하며 히트를 쳤다,
엘비스는 텔레비젼 출연과 차트르 휩쓸며 인기를 얻었고 로큰롤을 새로운 인기있는
장르로 유행시켯다.
1956년에는 "러브 미 텐더"에 출연하며 영화 데뷔도 했다.
프레슬리는 20세기 대중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사람으로 꼽혔는데
다양한 목소리와 컨트리 팝 발라드 가스펠 블루스 등의 장르를 포괄하며 이례적인
상업적 성과를 거뒀다.
엘비스는 팝 역사상 두번째로 많은 음반 판매고를 올린 솔로 가수이다.
또한 14번의 그래미 후보로 지명받았고 3번의 수상을 했으며 36살에는 그래미 평생
공로상을 수상했다.
그는 1956년 나이 222세 영화 "러브 미 텐더" 에 데뷔하였고 1956년 징집 영장을 받고
1958년에 독일연방공화국 내에 소재하는 제1기갑사단 소속 미군기지에 소총병으로
복무하였다.
그는 흑인음악과 백인음악을 주 장르로 불렀으며 로큰롤, 가스펠, 록, 펑크, 발라드,
팝 등의 장르에서 모두 정상급에 올랐으며 세계에서 비틀즈와 함께 가장 많은 앨범을
판 아티스트로 기록되었다.
현재 약 10억장 이상 넘는 판매고를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딸인 리사마리 프레슬리는 마이클 잭슨의 첫 배우자였으므로 엘비스 프레슬리는
마이클 잭슨의 장인이기도 하다.
1977년 엘비스 프레슬리는 미국 테네시 주의 멤피스 자택의 욕조에서 쓰러진 채로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향년 42세의 나이에 약물중독과 만성변비로 사망했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세상을 뒤바꿔 놓는 역사를 썼다.
이전에는 일렉트릭 기타와 드럼으로 울리는 스탠다드 팝 음악이었으나 격렬한 리듬의
로큰롤로 선회 하여 젊은이들을 열광케 했다.
엘비스가 높이 평가받는 이유는
이러한 청춘의 음악적 독립을 이뤘다는 공로 때문이다.
Bobby Solo - nything That's Part Of You
Bobby Solo-Anything That's Part Of You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
Bobby Solo의 본명은 Roberto Satti로써 1945년 로마에서 태어났다.
이탈리아의 "엘비스 프레슬리"라고 불려질 정도로 록큰롤의 제왕으로
엘비스 프레슬리의 음악 스타일을 이탈리아 음악과 잘 어우러지게 한 아티스트이다.
Anything That's Part Of You(낙엽따라 가버린 사랑) / 차중락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 / 차중락
차중락(車重樂, 1942년~1968년)
차중락은 1942년 경성부에서 8남 3녀 중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은 경성 보성전문학교 마라톤 선수이자 큰 인쇄소를 경영하여 집안이 매우
부유하였고 모친은 경성여자고등상업학교 단거리 선수였다.
그는 경복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는데 학교를 다닐 때 육상선수로 활약하였고 대학생
시절에는 보디빌딩을 하여 대학교 1학년에때에는 미스터코리아 2위에 입상하기도 했다.
차중락은 원래 장래 희망이 영화감독으로 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고 초등학생 시절부터
포스터 그림을 잘 그렸다.
그는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를 다녔는데 어머니 친구의 아들 후랭키 손이 차중락이
부르는 노래를 듣고 "일본에 가면 대성공을 거둘 것이다."라는 말을 하여 차중락은
일본행을 결심했다.
그러나 그는 밀항에 실패하였고 서울로 돌아와 그의 사촌형 차도균의 권유로 1963년
"키 보이스"그룹에 합류하여 노래를 불렀다.
그는 주로 미8군 무대에에서 활약하며 큰 인기를 끌었는데 시민회관 공연 때는 검은
고무장화로 치장 하여 모습까지 흉내내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로 각인되는 계기가 됐다.
차중락의 애인은 "에바 가드너"와 비교될 만한 미인이었고 이화여자대학교 메이퀸이었다.
그러나 둘의사랑은 오래 가지 않았고 가을 어느 날 애인은 미국으로 떠나 버렸다.
그 해 11월 엘비스 프레슬리의 “Anything that's part of you”를 번안 된 차중락의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이 전국에서 크게 히트하였다.
1968년 11월 10일 차중락은 서울의 어느 공연장에서 노래를 부르던 중 뇌막염으로
쓰러져 사망하였다.
그의 묘비에는 당시의 유명 배우들과 가수들의 이름을 색여 그를 기렸는데 다음 해부터
차중락을 회상하며 “낙엽상”을 제정하고 뛰어난 후배 신인들에게 이 상을 주기로 했다.
낙엽상 제정 첫해 수상자는 나훈아와 이영숙이 수상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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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버님 안녕하세요?
영산 입니다.
오랫만에 들어오니 제가 좋하하는 올드 팝이 있어서 감상 했습니다.
학창시절 삼삼 오오 짝을지어 언덕위 작은 카페에서 통키타를
치며 뮤직박스 DJ 에게 단골 메뉴로 신청해서 들었던 곡 입니다.
언제 들어도 지루하지 않고 은은한 선율은 가을을 기다려 지게
만드는 곡 인것 같습니다.
좋은노래 감상 잘 했습니다.